제1화 이제 시작이다 (2)
방사선과 판독실이 응급실 바로 옆에 있었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전 병동에서 내려온 온갖 필름들을 판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순 X-ray 필름과 시티(CT), 그리고 엠알아이(MRI)가 밝은 뷰 박스를 가려 어두침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섣불리 아무 선생님에게나 판독을 요청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때 누군가 반색하며 몰래 손을 흔들었다.
학교 다닐 때 무척이나 친했던 방사선과 인턴 김경우였다.
“지훈아, 무슨 일이야?”
“판독 좀 받으려고.”
“너, 응급실 아냐?”
“맞아.”
“그런데 무슨 판독을 받아?”
“그럴 사정이 있어. 누구에게 부탁하면 돼?”
“나도 오늘 첫날인데, 그걸 어떻게 알아?”
귓속말이었지만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방사선과 스태프였다.
“무슨 일이야?”
김경우가 눈짓을 했다.
“예, 응급실 인턴 김지훈입니다. 판독을 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응급실 인턴? 줘 봐.”
간혹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X-ray 필름 봉투에 달랑 흉부 사진 한 장만 들어있자 스태프의 표정이 변했다.
“고작 이거 하나 받자고 왔어? 입원 후에 넘겨도 충분하잖아. 도대체 어느 놈이 시킨 거야? 소아과 누구야?”
화가 잔뜩 났다. 서비스 파트라지만, 방사선과의 업무량은 대단히 많았다. 하루에 판독해야 하는 필름 수를 세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판국에 응급실 환자가 끼어든 것도 모자라, 전공의라면 웬만큼 판독할 수 있는 단순 사진이니 화가 날 법도 했다.
당황한 김지훈이 서둘러 자초지종을 말했다.
“사실은 소아과 당직 선생님은 내려오시지도 못했습니다.”
“왜?”
“중환자실의 환자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 감기치고는 증상이 심하고, 혹시 입원할 케이스면 환자에 대한 처리가 빨라지지 않을까 해서요.”
“그러니까 중환이면 소아과에서 빨리 내려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판독을 부탁하러 왔다는 거야? 소아과 오더는 분명히 없었고.”
“예.”
“일단 사진부터 보자.”
방사선과 스태프가 필름을 확인하다 말고 유심히 김지훈을 쳐다보았다. 목소리가 은근히 부드러워졌다.
“이름이 뭐라고?”
“4세 된 남아 환자로 이름은 이성훈입니다.”
“환자 이름 말고, 네 이름.”
“김지훈입니다.”
“김지훈? 알았어. 이 아이, 폐렴이다. 꽤 심하네. 양쪽을 다 먹었다. 소아과에 연락해서 빨리 입원시키라고 해. 잘못하면 애 잡겠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부터 판독을 요청할 때는 노티 할 때와 똑같이 해. 환자의 증상과 병력을 알면 더 정확하게 판독할 수 있다. 가 봐.”
어느새 판독을 마친 스태프가 리딩(reading) 지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서둘러 나가자 스태프가 김경우에게 물었다.
“인턴 선생, 김지훈 선생 잘 알아? 어때?”
친한 친구였다.
도리어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친한 친군데요.”
실없는 대답에 스태프가 웃었다.
“내가 병원에 근무한 지 10년 만에 처음 보는 인턴이야. 하하하! 응급실 인턴이 환자를 위해 판독을 받으러 와? 인턴 선생, 김지훈 선생의 저런 점은 배워야 한다.”
“예.”
‘왜 난 인턴 선생이고, 지훈이 저 새낀 김지훈 선생이야.’
김경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른 자리로 옮겨 간 스태프가 김지훈의 얘기로 꽃을 피웠다.
김지훈이 응급실로 돌아오자 손일석이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한가했던 응급실이 환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다가온 손일석이 으르렁거렸다.
“듀티, 어디 갔다 오세요.”
“미안해. 소아과 환자 빨리 처리하고 내가 볼게.”
“빨리해. 이씨!”
“알았어.”
마침 환자들을 맞느라 수간호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소아과 구선미 선생님 연결해 주세요.”
수간호사가 삐삐 번호를 치며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판독실.”
“거긴 왜요?”
“판독실에 판독 받으러 가지, 다른 일이 있겠어요? 폐렴이 심하다네.”
“폐렴이요?”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마침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응급실 인턴 김지훈입니다. 노티 드렸던 환자가 폐렴이랍니다. 꽤 심하다고 하시는데요.”
(무슨 소리야?)
“시간이 없으신 것 같아 방사선과에서 판독을 받았습니다. 미리 노티 못 드려 죄송합니다.”
(그래? 리딩 지 좀 읽어 봐.)
판독 내용을 전해 들은 구선미가 누군가를 찾았다.
(1년차 선생 내려 보낼게. 너, 정말 제법이다.)
구선미의 목소리에서 즐거움이 묻어났다.
잠시 후, 소아과 1년차가 내려와 환아를 입원시켰다.
환자를 진찰하며 척척 오더를 내는 모습에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부럽다. 난 언제나 저렇게 오더를 내 보나.’
김지훈이 그렇게 첫 환자를 보았다.
배가 아픈 환자.
타박상을 입은 환자.
감기 환자.
응급실이 점점 바빠졌다. 대부분 응급실에서 볼 정도로 중증의 환자는 아니었지만, 김지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한 명이라도 환자를 더 보아야 할 때였다. 미숙했기에 미안한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의사다운 의사가 될 수 없었다.
공포의 밤이 왔다.
응급실이 전쟁터로 변했다.
듀티와 백듀티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2명의 초턴들이 감당하기에는 환자가 많기도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숫자가 아니었다.
대학 병원의 2월과 3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노티만 가능한 인턴과 이제 막 전공 수련에 들어간 전공의 1년차가 야간에 오는 모든 환자를 맡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증세가 심각하면 능력 부족을 절감하며 2년차 이상의 전공의들에게 또다시 노티를 해야 한다.
그나마 빨리 내려와 주면 다행이었다.
1년차 시절의 긴장이 풀린 탓인지 이삼십 분 정도 늦는 것은 예사였다. 그 탓에 진료가 늦어져 보호자와 환자들의 불만과 아우성이 더욱 심해지기 일쑤였다.
선배 의사들과 환자 사이에 낀 인턴들에게 가장 고약한 시간이기도 했다.
수화기를 목과 어깨 사이에 낀 채 노티를 하며 다른 환자에 대한 차팅을 하던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왔어?)
내과 1년차 전공의의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실려 있었다. 응급실에서 올라간 지 5분 만에 콜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게 인턴 탓인가?
“예, 45세 남자 환자입니다. 하루 전에 시작된 복통을 주소로 내원했습니다.”
(알았어, 내려갈게.)
전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욕설이 들려왔다.
전화상으로 기본 오더라도 낼 수 있으면 훨씬 효율적이지만, 이삼 월은 그조차 금지였다. 1년차들도 반드시 환자를 직접 본 후에야 오더를 낼 수 있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전화 오더도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만약 이를 어기면 전공의나, 인턴이나 그냥 죽었다고 복창하는 편이 나았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에겐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련 방법이었다. 직접 보지도 않고 모든 환자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면 의사가 아니라 신일 것이다.
환자들은 응급실 당직이 초짜인지, 노련한 의사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오직 빠르고 정확하게 자신의 고통을 해소해 주기를 바란다.
잠시도 쉴 틈이 없었지만,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과 진료를 재촉하는 보호자들의 불평과 불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새로운 환자가 온 지 채 10분도 안 돼 응급실 문이 열렸다.
비틀거리며 들어선 남자의 얼굴이 피투성이였다.
‘교통사곤가?’
아니었다. 횡설수설하며 아무에게나 욕을 내뱉은 폼이 딱 술 먹고 싸운 사람이었다. 선배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일 지랄 같은 환자가 걸린 것이다.
외상 환자는 일단 처치실로 옮겨 상처부터 확인한다.
불과 10걸음이면 되는 곳을 5분이나 실랑이를 벌인 끝에야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스트레치 카(이동이 가능한 침대)에 눕힐 수 있었다.
“어디가 아프세요?”
“넌 뭐야?”
대뜸 반말이다.
까딱하면 욕까지 날아올 기세였다.
선배 왈, 이럴 땐 무대응이 최선이라고 했다.
‘뭐긴 응급실 인턴이지.’
그래도 환자다.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어디가 아프세요? 여기, 환자 얼굴 좀 닦읍시다.”
간호사들이 달라붙어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닦았다. 그에 차갑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정말 지랄 같은 환자가 맞았다. 하지만 술에 취했다고만 단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김지훈이 펜라이트를 꺼내 동공 반사를 확인했다.
“환자분, 눈 좀 떠 봐요.”
“눈부신데 어떻게 떠. 그런데 넌 뭐야?”
정말 응급실인지 모르는 걸까?
제 발로 왔으니 그럴 일은 없었다.
정상적인 동공 반사를 확인한 김지훈이 치미는 화를 꾹 참으며 얼굴 이외의 다른 부위에 외상이 있는지 살폈다. 몸을 만질 때마다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깨끗했다.
얼굴을 집중적으로 맞아 찢어진 것이 다였다.
단순 열상이니 더 이상의 검사는 필요 없었다.
김지훈이 성형외과에 노티를 하기 위해 처치실을 나왔다.
그때 등 뒤에서 욕설이 들렸다.
“야, 이 새끼야, 아파 죽겠는데 어디 가? 빨리 치료 안 해? 씨팔 놈, 확 죽여 버릴까 보다.”
덩치도 있고, 나름 성격도 있는 김지훈이었다. 그러나 의사와 환자 사이였다. 잠시 환자를 째려보던 그는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저런 건 더 맞아야 하는데. 개… 으이구! 참자.’
간신히 욕을 참고 성형외과에 노티를 했다.
“응급실 인턴 김지훈입니다. 알코올 드렁큰(alcohol drunken) 환자로 안면부 열상을 주소로 내원했습니다.”
(얼마나 찢어졌어?)
“4센티미터 정도 됩니다.”
(깊이는?)
깊이? 아차 싶었다. 얼마나 깊게 찢어졌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성형외과 1년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것도 확인을 안 하고 노티를 하냐? 확실하게 해라. 다음엔 안 봐준다.)
상처 부위를 만지지도 못하게 한 환자 탓이 아니었다. 의사인 자신의 명백한 실수였다.
“예, 죄송합니다.”
(일단 스컬 에이피 라테랄(skull AP & Lat)하고, 워터스 뷰(waters' view) 찍어.”
‘그냥 전화 오더를 내다니 성형외과는 100일 당직이 없었나? 나야 편하지만, 괜히 걱정되네.’
의외였지만, 인턴이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성형외과 1년차가 낸 오더는 안면부 골절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X-ray 검사였다. 그냥 봉합했으면 했지만, 만에 하나 골절을 놓치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안면부 열상이 있는 환자에게 어떤 검사가 필요한지 머리에 새긴 김지훈이 밀린 환자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환자를 몇 명 보았다고 차팅이 조금씩 수월해지고 있었다.
X-ray를 찍으러 가는 환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X-ray는 왜 찍는 거야? 야! 너 내 말 안 들려?”
나?
문진을 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오후 11시였다. 16시간째 이어지는 근무에 피곤이 몰려오는데 환자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성질 같아서는 한 대 패고 싶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간호사, 저런 환자 어떻게 처리해요?”
3교대라지만, 야간 근무는 간호사들에게도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완력이 필요한 일이 수시로 벌어지는 곳이 응급실이었다.
“청원 경찰 아저씨가 계시긴 하지만, 연세가 많으셔서 이 정도는 선생님이 해결하셔야 해요. 아주 심하면 경찰에 연락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환자 처리가 끝난 후 도착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난동을 부린다고 해도 결국 환자잖아요. 파출소에 데려갔다가 환자에게 문제라도 생기면 감당할 방법이 없다네요. 실제로 그런 일도 있었고요.”
“죽기라도 했나?”
“네.”
어라, 정말 죽었단 말인가?
정말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김지훈에게는 단순한 답이 아니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환자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문득 불안해진 김지훈이 잠시 틈을 내 X-ray를 찍고 있을 술 취한 환자를 찾았다. 아직도 입을 열면 욕이 붙었지만, 멀쩡해 보였다.
‘에이! 괜히 왔네.’
손일석이 그새를 못 참고 또 고개를 내밀었다.
“듀티, 어디 갔다 오세요.”
“환자 보러.”
“널리고 널린 게 환잡니다. 듀티는 백듀티에게 일을 넘기지 마시고, 응급실을 사수하세요.”
얄미운 놈, 그래도 든든한 놈.
손일석의 가운에 점점이 피가 묻어 있었다.
김지훈의 가운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