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제1화 이제 시작이다 (1)
인턴 첫날이다.
하필이면 인턴 근무 중 가장 힘들다는 응급실이 첫 텀에 걸렸다. 앞으로 3주간의 지옥이 열리는 것이다.
첫날 첫 듀티(duty)인 김지훈이 복장을 갖췄다.
넥타이를 매고 새로 지급받은 가운을 걸쳤다.
청진기와 펜라이트를 챙기고 윗주머니에 볼펜을 꽂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김지훈을 바라보던 손일석이 벌러덩 누웠다.
“안 나가?”
“3주 동안 뺑이 칠 텐데, 뭐가 좋다고 벌써 나가냐? 웬만하면 부르지 마라. 나, 지금 되게 속상하다. 솔직히 환자 볼 생각 하니까 겁도 나고. 우리, 어떡하지?”
“어떡하긴, 선배들이라고 처음부터 잘했겠냐? 그리고 첫 텀은 듀티, 백듀티 구분 없다는 말 기억 안 나?”
“하나도 안 나.”
사실 김지훈도 겁이 나긴 마찬가지였다.
환자를 본 경험이라고는 PK(Poly Clinic:임상 실습) 때뿐이었다. 그나마도 선배 의사들의 진료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다였다. 6년을 공부해 딴 의사 자격증은 단순한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방법이 뭐가 있겠어. 열심히 하는 수밖에.’
길게 숨을 내쉬며 긴장을 푼 김지훈이 힐끗 손일석을 보며 혼자 당직실을 나섰다.
오전 7시.
이른 아침부터 간호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밤새 환자들과 치른 전쟁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환자를 맞을 준비가 한창이었다.
누군가 생글거리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앳된 얼굴의 간호사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인수인계한 그대로네.’
초롱초롱한 신참 간호사의 뒤로 최고참 간호사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아마도 수간호사일 것이다.
다들 인턴이 빠릿빠릿하기만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어쩌면 탈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눈빛일지도 몰랐다.
“김 선생님, 잘 부탁해요.”
가볍게 고개만 숙이는 모습에서 약간의 거만이 묻어났다.
노련한 간호사가 웬만한 인턴보다 낫다는 선배의 말이 뇌리에 스쳤다. 다른 어떤 직종보다 경험이 중요한 곳이니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말이 있었다.
‘간호사들에게 한 번 눌리면 계속 눌린다. 초턴(초반부의 인턴)이라고 어리어리하게 굴지 말고 확실하게 대해. 환자 처치는 미숙할지 몰라도, 결국 진단을 하고 치료하는 사람은 의사라는 사실을 명심해. 알았지?’
‘그럼요. 간호사에게 눌릴 김지훈이 아닙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담담하게 답한 김지훈이 지난밤 응급실을 거쳐 간 환자들의 차트를 집었다. 수북하게 쌓인 차트에 꼼꼼하게 기록된 환자들의 상태와 처치에서 선배들의 공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동안 차트를 읽던 김지훈이 한숨을 푹 쉬었다.
환자 기록을 읽는 것과 진료는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이론과 실전의 차이라고나 할까?
‘난 언제 이렇게 되나.’
정말 갈 길이 멀었다.
뜻밖에도 한 시간 반 동안 환자가 없었다.
곧 외래 진료가 시작되면 환자는 더 없을 것이다.
간호사들이 좋아 죽었다.
“호호호! 오늘 월요일인데 환자가 이렇게 없고, 웬일이니.”
“그러게요, 선생님. 응급실이 편할 때도 다 있네요.”
“그게 다 김 선생님 덕분일지도 몰라.”
“왜요?”
“초턴이잖아. 환자들도 아나 보지. 그래도 우리가 있어서 괜찮은데 말이야.”
숨죽인 목소리였지만 똑똑하게 들렸다.
어쩌면 일부러 그랬을지도 몰랐다.
인턴의 기를 죽이면 가장 편해지는 사람은 간호사였다.
사실 인턴들 중 일부는 왕왕 자신의 실력이 부족한 탓을 간호사에게 돌렸다. 그러나 목소리가 커지면 결국 불리한 사람은 간호사였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자연스럽게 얻은 처세일 것이다.
‘처음부터 왜들 이래. 잘해 봅시다.’
김지훈이 다시 차트에 몰두했다.
하나라도 더 알아야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수다를 떨던 간호사들이 잠잠해질 무렵, 벌컥 응급실 문이 열렸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돼 있었다.
“우리 애가 열이 심하게 나요. 기침도 심하고요.”
다급한 목소리였지만, 간호사들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보호자분이 한 분이신가요?”
“네, 저뿐이에요.”
“그럼 아이는 침대에 눕히시고, 어머니는 원무과에서 접수를 해 주세요.”
“원무과가 어디죠?”
“옆으로 돌아가시면 바로 보입니다.”
침대에 내려놓자마자 아이가 울어 댔다.
그에 엄마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간호사들이 애를 달래며 재촉을 했다.
“접수가 안 되면 진료를 못 하니까 서두르세요. 아이는 우리한테 맡기시고요. 최 선생, 체중 재고 열 체크하세요.”
최고참 간호사가 여유 있게 엄마를 대하는 동안 신참이 아이의 몸무게와 열을 쟀다.
“어머! 수 선생님, 열이 40도가 넘어요.”
수 선생님?
최고참 간호사는 수간호사였고, 서로를 부를 때는 성이나 직급 뒤에 반드시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환아에 대한 기본 사항을 기록한 최 간호사가 차트를 내밀었다. 드디어 첫 환자를 진찰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수간호사가 묘한 눈빛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마치 어디 잘하나 보자, 그러는 것 같았다.
차트를 받아 든 김지훈이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기록을 살폈다. 좀처럼 긴장이 가시질 않았다.
‘환자에게 집중하자, 집중!’
몸무게는 18킬로그램이었고, 열은 40.9도, 고열이었다. 접수를 마친 엄마가 아이를 안을 때까지도 기침을 심하게 했다. 아이의 상태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고열과 심한 기침. 이런 증상을 가진 질환이 뭐가 있지?’
유알아이(URI:Upper Respiratory Infection:쉽게 감기다).
브롱카이티스(brhonchitis:기관지염).
뉴모니아(pneumonia:폐렴).
온갖 질환이 김지훈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진찰의 기본은 병명을 먼저 잡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살짝 고개를 흔든 김지훈이 침착하게 물었다.
“기침과 열 이외의 다른 증상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언제부터 아팠죠?”
“사흘 전부터 기침을 해서, 동네 병원에서 약을 먹였는데 점점 열이 심해지고, 기침도 멈추지 않아요.”
엄마의 목소리 톤이 점점 높아졌다.
“다른 질환이 있거나, 감기약 말고 현재 복용하고 있는 약이 있나요?”
“없어요.”
“알겠습니다.”
원칙대로 하면 가족력에 과거력까지 모두 물어보아야 하지만 여긴 응급실이었다. 필수적인 문진을 마친 김지훈이 이학 검사를 시행했다.
첫 환자라는 부담에 가슴이 떨리는지 김지훈이 연거푸 깊게 숨을 내쉬었다.
“성훈아, 아~”
엄마 품에서 조금은 안정이 된 아이가 입을 벌렸다.
편도선에 부종은 없고, 인후부의 발적도 심하지 않았다.
다음은 뭘 해야 하지?
간호사가 습관적으로 환아의 상의를 올렸다.
그래, 청진을 해야지.
‘죽겠네. 어떻게 청진할 생각도 못 할 수 있지? 여긴 내 직장이고, 환자들은 날 믿고 있다. 정신 바짝 차리자.’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환아의 가슴에 청진기를 댔다.
울음의 끝이었지만, 찡얼대는 소리까지 겹쳐 청진이 쉽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귀를 기울였지만, 숨소리가 상당히 거칠다는 것 이외에는 알 수 있는 사항이 없었다.
응급실 인턴이 해야 하는 진찰이 모두 끝났다. 솔직히 초턴인 김지훈이 할 수 있는 진찰 과정이 끝났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말이었다.
남은 일은 소아과 당직 전공의에게 노티(notify)를 하는 것이었다.
김지훈을 본 수간호사가 전화기를 내밀었다. 이미 당직 전공의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응급실 인턴 김지훈입니다.”
(지훈이구나. 나, 선미야. 무슨 환자니?)
마침 소아과 주간 당직 전공의가 서클 선배인 구선미였다. 게다가 2년차이니 1년차들처럼 시간이 없어 쩔쩔 매지도 않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반가움에 누나라고 할 뻔한 김지훈이 머리를 톡톡 치며 노티를 시작했다.
“4세 된 남자 환아입니다. 사흘 전부터 시작된 기침과 고열을 주소로 내원했습니다. 현재 피버(fever)는 40.9도고, 청진상 양측 폐에서 코스드 브레싱 사운드(Coarsed Brething Sound)가 들립니다.”
(그래? 첫날치고는 제법이네. 내가 지금 내려가야 하는데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보고 있어. 그러니까 일단 혈액하고 소변 검사 내보내고 체스트(Chest PA:기본적인 흉부 촬영) 찍어. 보호자 컨트롤 잘하고.)
“예.”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지훈이 지시받은 오더(order)를 냈다.
주삿바늘을 본 아이가 악을 쓰며 울어 댔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능숙하게 채혈을 했고, 아이는 곧 흉부 촬영을 위해 방사선 실로 옮겨졌다.
그제야 김지훈이 자리에 앉았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등짝이 축축했다.
‘일석이 이 새끼는 백듀티라고 내다보지도 않네.’
공연히 손일석에게 화풀이를 한 김지훈이 자신의 손으로 처음 작성한 차트를 보았다. 비록 문진까지만 스스로 작성했지만 뿌듯했다.
문득 정말 의사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아이가 돌아오고 X-ray 필름이 도착했다.
김지훈이 뷰 박스(view box)에 흉부 X-ray 필름을 걸었다. 성인과 소아 환자의 방사선 소견은 다르다. 이제 인턴이 된 김지훈의 눈은 아직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양쪽이 다 뿌옇네. 분명 정상 소견은 아닌데, 뭐지?’
X-ray를 보며 고민하는 김지훈을 본 아이 엄마가 다가왔다.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잔뜩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알아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위치가 인턴이었다.
오진의 위험도 크고, 만에 하나 전공의와 다른 소리를 했다가는 뒷감당을 할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곧 소아과 선생님이 내려오실 겁니다. 혈액 검사도 나와야 하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어느 과 환자인지 정확하게 교통정리를 한 후 빠른 노티.
이것이 바로 응급실 초턴의 역할이다.
사실상 김지훈이 할 일은 노티를 한 순간 끝난 것이다.
엄마의 눈에 실망과 분노가 스쳤다.
김지훈이 인턴이라는 것은 모르겠지만, 풋내기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럼 열이라도 내려 줘야 할 거 아니에요? 이마가 펄펄 끓잖아요.”
구원자가 필요했다.
노련한 수간호사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도리어 두 번째 서열의 간호사가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선생님, 열이 안 떨어지네요. 어떻게 할까요?”
당황스러운 사태였다.
선배는 분명 간호사들이 웬만한 기본 처치는 알아서 한다고 했다. 게다가 전공의들이 가장 빡세게 근무하는 처음 두세 달 동안 인턴이 자의적으로 오더를 내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지금의 경우는 예외적인 상황도 아니었다.
스테이션으로 돌아온 김지훈이 속삭였다.
“구선미 선생님께 연락해요.”
“중환자실에 계셔서 그런지 연락이 안 되네요.”
수간호사의 대답에 김지훈의 얼굴이 뻘게졌다.
엄마와 간호사들의 재촉이 귓가에 난무했다.
‘이렇게 난리가 나는데, 보호자를 어떻게 컨트롤하라는 거야? 일단 열은 잡아야 하는데, 어쩌지?’
응급으로 해열제를 먹이거나 주사를 놓는 것은 보았다. 그러나 기본 오더도 못 내는 인턴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해열제의 이름이나 주사명도 몰랐다.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임상 실습 때 본 장면이 기억난 것이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최 간호사, 테피드 워터(tepid water) 해 줘요. 일단 미지근한 물로 팔다리만.”
수간호사의 표정이 묘해졌다.
인턴 첫날에 오더를 내는 것도 처음 보았지만, 적절한 처치라는 사실이 꽤나 놀라운 모양이었다. 조금만 경험이 있으면 특별할 것도 없는 처치였지만, 초턴들은 대개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간호사와 엄마가 아이의 몸을 닦고 있는 동안 김지훈이 수차례 구선미와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급박한 목소리에 포기해야 했다.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았다.
‘큰일 났네. 이러다 애 엄마 폭발하는 거 아냐?’
다른 소아과 전공의라도 내려오면 좋으련만, 모든 과가 손이 달렸다. 스태프들은 진료 중이고, 전공의들은 입원 환자를 돌보느라 당직이 아니면 응급실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김지훈이 애꿎은 시계만 바라보았다.
이미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보호자의 인내력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엄마의 입장에서 이 정도 참은 것만 해도 다행인 일이었다.
열은 조금 잡혔지만, 아이는 여전히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무엇이든 해야 했다.
‘단순 감기라면 모르지만, 혹시 폐렴이나 기관지염이면 다른 선생님이라도 내려오지 않을까?’
그에 생각이 미친 김지훈이 X-ray 필름을 들고 응급실을 나왔다. 간호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