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0화
"누나랑 너희가 여긴 어떻게 있는 거야?"
이서형뿐만 아니라 그동안 안면을 익힌 재벌가 여성들도 다수 있었다.
"쿡쿡. 많이 놀랐어?"
"당연히 놀랐죠. 내가 진짜……"
사사로이 누나, 동생 하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진호를 호출할 수 있었다.
"에휴. 말을 해서 뭐해."
진호가 여기까지 오면서 한 생각을 짐작한 여성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쪽은 이설아 씨. 다들 알죠?"
주목을 받게 된 이설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서형이 눈을 빛냈다.
"오랜만에 덕통사고 일으킨 장본인인데 모를 리가 있나. 그 차지혜라는 사람이 보내 준 자료 잘 봤어. 나 이 드라마 찬성이다!"
"컥!"
"켈록!"
자리에 앉아 물을 마시던 진호와 설아는 뿜었고, 여성들은 모두 찬성을 외쳤다.
"쿨룩! 쿨룩! 설아 씨, 인사해요. 이쪽은 SJ그룹 전략기획실 이영재실장님의 비서이자, 삼정가 차녀이서형 씨. 이쪽은 국내 7위 기업……."
순간 딱딱하게 굳은 이설아의 낯빛이 파랗게 죽었다.
진호가 소개한 이들 말고도 스스로를 소개한 이들 마저도 가로수길 건물주나 은행장 딸 등 엄청난 사람들뿐이었다.
"이, 이설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서형이 포근히 웃었다.
"편히 있어요. 안 잡아먹으니까."
"네, 네! 딸꾹!"
'어머나?'
여성들은 너무도 순진한 설아의 반응에 눈을 빛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듯한 암사자 떼의 모습에 진호는 얼른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진짜 둘이 무슨……"
"그보다 진짜 누나들이랑 너희들이 팬클럽 최고 간부였다고?"
말이 끊겨 불퉁해진 이서형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창조신화 2 기 회장이 나야."
"난 HUT 2 기 회장."
"난 GTD였어!"
진호와 이설아는 입을 떡 벌렸다.
"허. 이 양반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빠직!
과거를 떠올린 그녀들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래도 할 건 다하고 놀았어, 왜 이래? 네가 백점짜리 시험지 한 장도 없으면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여중생의 심정을 알아?"
"그래! 한창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여중생이 집안에 억류돼서 우리 오빠들 못 보는 그 피눈물 흘리는 심정을 네가 알아!"
"아니, 딱히 알고 싶진 않은데……"
"뭬야?"
"죄송합니다!"
"오냐! 받았다!"
"까르르! "
'……아, 기 빨려.'
진호는 공감한다는 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이설아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었다.
이서형이 그런 진호를 보며 눈을 빛냈다.
"너 이번에 엄청난 일을 했더라?"
"응? 뭐?"
"악플러 고소."
총 25876명. 진호는 닉네임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서 구역질 날 정도로 처참한 악플을 단 26000여명을 모두 고소해 버렸고, 이는 현재 대한민국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악플을 떠올린 이설아는 순간 낯빛이 어두워졌고, 진호의 눈빛은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남을 상하게 할 거면 그 자신도 다칠 각오를 했어야지."
"역풍이 어마어마하잖아."
"지금은 없어."
있었는데 없어졌다.
선처도 없는 잔인한 행보에 온갖 유언비어와 악플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마저도 죄다 고소해 버리니 곧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게 되었다.
"하긴. 언론, 정치, 방송 모두 네 눈치를 보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겠구나."
진호는 재밌다는 듯 웃는 서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떠보기는 하지 맙시다. 어디 이게 나 혼자만의 힘이야? 다 누나들이랑 형들이 함께해 줘서 만들어진 힘이지."
"……들켰어?"
"들켰어."
"에헤헤. 매출은 좀 어때?"
"……연일 고공 행진이지."
"오오. 다행이네. 그래서 진짜 둘이 무슨 관계인데?"
흠칫!
진호와 설아는 몸을 굳혔다.
"……들켰어?"
"진짜야?"
깜짝 놀란 그녀들은 정말이냐며 눈을 빛냈고, 진호는 설아의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이들에게까지 비밀로 할 순 없었다.
당황했던 설아는 모이는 시선에 발개진 얼굴을 숨기고자 고개를 푹 숙였다.
"어머, 어머, 어머머!"
"이 드라마 진짜 재밌네! 다음 화 가져와!"
"얼마면 돼? 완결까지 보는 데 얼마면 돼!"
"……아나, 이 아줌마들 진짜."
"뭐? 아줌마? 죽을래!"
"취소해, 짜사!"
떨떠름 항복을 한 진호는 다시 표정을 고쳤다.
"아무튼 이런 관계야. 누나랑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야?"
팬클럽 운영을 맡을 것인지, 말것인지.
여성들은 입을 다물었다.
"……정말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마음껏 숙청해. 반동분자들 명단 보내 주면 이쪽에서 고소할게."
취미생활에 굳이 심력을 쓰고 싶지 않아 무시했던 극성들.
그러나 너무도 거슬려서 결국 가수마저 싫어하게 만든 극성들.
'명단만 넘기면 진호가 칼춤을 쳐준다고?'
그러면 너무도 즐겁게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그녀들의 표정이 좋아지자 빈 찻잔을 내려놓은 진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니 누나랑 너희, 그리고 여러분들도 우리 둘 드라마의 등장인물 겸 조력자가 되어 봐."
이 말이 결정타가 되었다.
움찔!
"……오호?"
자신의 여자를 성공시키기 위해 모든 수를 다 쓴 진호와 신데렐라, 잔다르크 성공 스토리의 이설아가 써 가는 드라마의 등장인물.
로맨스를 애정하는 사람으로서 확 입맛이 돌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녀들은 테이블 위에 올려 깍지 낀 손을 꼼지락거리는 둘의 모습에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굿즈는 어떻게 할 거야?"
"업계 최고랑 하이패션 브랜드 디자이너들에게 의뢰해야지. 누나랑 너희들 회사에도! 지금은 '내 가수 덕질 할 거리가 필요한데 덕질 할게 없다, 일해라 HU'라는 작전을 중이거든!"
이 말은 즉 굿즈를 패션 브랜드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이설아를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점은 그녀들 모두 각 기업에서 맡은 분야의 일 중에 패션이나 유통, 백화점 등이 있다는 것이다.
"하, 진짜!"
거부할 수 없는 그 제안에 그녀들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고, 서형은 옆 여성을 보았다.
"연말 가요축제까지 한 달 정도 남았지?"
"그렇죠."
고개를 끄덕인 서형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삼정의 이서형입니다, 사장님. 올 연말 가요축제, 예전처럼 시상식으로 가시죠? ……흐응. 사장님, 뭔가 착가하시는 것 같은데 전 지금 부탁을 하는 게 아니에요. ……네, 그래요.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두 번의 전화를 더 한 서형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는 진호와 경악하는 설아를 보며 히죽 웃었다.
"내 가수 예쁜 트로피 줘야지."
서형은 진호의 손을 쳐 내고는 설아의 손을 꼭 잡았다.
"아앗! 언니만 치사하게!"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이설아의 손을 잡았다.
"아, 아니 저……"
"쉿!"
"……."
입을 다문 채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모습에 서형과 여성들은 정말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설아, 꽃길만 걸을 준비됐니?"
"그 꽃길 우리가 예쁘게 깔아 줄게. 그러니 드라마 예쁘게 잘 찍으렴."
그렇게 인맥이 세계 전체에 뻗어진 세계 최강의 팬클럽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진호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 * *
지상파 3사 대증가요 시상식 부활!
이설아 지상파 3사 7주연속 1위!
HU컴퍼니. 악플러 3만여 명에게 휘두른 철퇴! 그 결과는?
최소 벌금 500만 원! 현재까지 최대 6억 및 3년 형!
명예 훼손뿐만 아니라 언어 폭행, 유언비어 등에 의한 손액 배상까지 청구!
연예인 악플러 처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
믿고 즐기는 이설아 팬클럽 50만 명 돌파!
클린한 팬 문화를 지향한다! 찬성하는 대중들!
크리스마스 이설아 굿즈 판매!
디올, SJ물산 등과 콜라보레이션!
이설아의 공식 팬클럽이 결성되고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가요계가 시끄러워지는 만큼 이설아도 덩달아 바빠졌고, 그렇다보니 어느덧 연말 시상식 날이 밝았다.
"어, 어때요?"
고대 여신이 이렸을까.
마치 웨딩드레스처럼 순백의 하얀 드레스에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그녀. 불그스름한 눈 화장까지 너무 눈이 부셔서 절로 심장이 멎어 버린다.
"……."
"……안 예뻐요?"
시무룩해지는 모습에 번쩍 정신을 차린 진호는 그녀의 목을 감싸며 그 말랑 한 입술에 입을 가져갔다.
찌리릿!
참 수 많은 말이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하나였다. 온몸과 마음이 충족되어 이 말만 떠올랐다.
진호는 나른히 웃으며 행복해하는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저도 사랑해요."
"자, 염장은 여기까지."
"꺅?"
"여기서 더 하시면 설아 다시 화장해야 합니다, 대표님."
아쉬움이 강하게 몰려왔지만, 진호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시상식장으로 출발해야 될 시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에서 서서 돌아다닐 수 있는 커다란 밴, 방탄으로 제작된 밴을 타고 시상식장으로 향했다.
부우웅!
어느새 어두워진 서울의 밤하늘.
눈가를 스쳐 지나가는 화려한 불빛들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설아는 여신이 입었을 듯한 드레스와 목걸이를 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행복해.'
앨범이 3백만 장 가까이 팔린 것도 행복하고, 어딜 갈 때마다 알아봐 주고 환호해 주는 것도 행복하고, 여신 드레스를 입고 시상식장에 가는 것도 행복하고, 엄마에게 건물을 사 드린 것도 행복하고, 자신의 작은 손을 감싼 진호의 두툼한 손의 온기도 행복하다.
'만약 대표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도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수밖에 없다.
아니다.
혹여 '말랑말랑'이란 곡이 나왔더라도 진호가 아니었다면 이런 성공의 만분의 1조차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알바에 지친 몸을 이끈 채집에 돌아와 TV를 보며 부러워하고 있있겠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걱정스레 쳐다보는 진호의 두 눈에 이설아는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요."
"뜬금없이?"
"뜬금없이."
"뭐예요, 그게."
"헤헤."
진호는 참 궁금했지만, 팔뚝을 감싸는 그녀의 온기에 잊어버리기로 했다. 애정을 표현하기엔 정구호 이사나 차지혜 부장 등의 눈빛이 험악했다.
진호는 슬그미니 눈을 돌려 다시 그녀의 여신 드레스를 살폈다.
'디올이라……'
세계 최고의 패션 그룹 LVMH 산하 브랜드 중 하나인 디올.
'꽤 비싸긴 했지. 흠, 디자인 관련 스킬이나 얻을까?'
경쟁 기업에 디자인을 팔아 주고 여러 가지 장치와 함정을 펼쳐 내외적으로 흔들면 사 버릴 수도 있을 듯했다.
톡!
"응? 코를 왜 때려요?"
"안돼요. 지금은."
"대체 뭐가……"
진호는 귓가로 다가온 그녀의 얼굴에 살짝 굳었다.
"뒤풀이 끝나고는…… 돼요."
……불끈!
'아, 진짜 돌겠네.'
연애도 잘 모르는 여자가 왜 갑자기 도발을 하는 건지.
남자 무서운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자가 얼마나 무서운 지 알려 줘야겠지!'
"도, 도착했습니다. 대표님! 설아씨!"
흠칫!
선팅이 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수 많은 인파들을 발견한 설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호는 갑자기 차가워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안에서 봐요."
"……네. 안에서."
진호는 보조석에 앉은 가드 매니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재빨리 차에서 내린 그가 문을 열었다.
스르르!
"꺄아아아아아아!"
촤라라라라라!
쏟아지는 함성과 카메라 플래시.
가슴을 가리며 조신하게 레드 카펫 위에 선 설아는 이내 당당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둥근 테이블이 아니네……. 하긴, 멤버가 많은 가수도 있으니까.'
객석에 앉아 다리를 꼰 진호는 온몸에 꽂히는 시선에 주위를 느릿하게 둘러보았다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각 기획사의 대표들이 이쪽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이 된 것 같습니다, 대표님."
정구호가 넥타이를 슬그미니 풀며 말하자 진호는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우리에겐 닿지 못할 칼들입니다. 신경 끄세요."
톱아이돌을 보유했다 하더라도 결국 갑은 방송사다.
그리고 진호는 저들 기획사가 보유한, 그리고 앞으로 보유할 아이돌 모두 묻어 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닌 그 방송사를 쥐고 있었다.
저들이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한들 진호에겐 손끝조차 닿을 수 없었다.
"후우우."
진호는 옆에서 심호흡을 하는 설아의 손등을 두드리다 눈을 빛냈다.
"진정해요."
"저…… 상 탈 수 있겠죠?"
"못 타는 게 더 이상 하지 않을까요?"
그건 그랬다.
설아는 애써 호흡을 고르며 무대를 응시했다.
"아, 시작하네요."
"후우웁!"
드디어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 * *
-신인상! 이설아!
-네티즌이 뽑은 라이징 스타상! 이설아!
신인상, 라이징 스타상.
가수가 된 지 5년 만에 처음 받는 트로피.
차갑고 단단한 크리스털 트로피는 마치 심장으로 받은 듯 가슴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나 상 탔구나. 나 그동안 잘 했구나…….'
축하한다며 따뜻하게 안아 줬던 진호의 온기도, 팬들의 함성 소리도 마치 그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예상을 해서일까.
입 밖으로 나오는 수상 소감은 참 담담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말이다.
그래서 재미없다는 생각이 일순 들기도 했다.
앞으로 계속 깔릴 꽃길을 생각하니 조금 시시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참 어이없고 멍청한 생각이었다.
-2019 가요축제 영애의 대상-! 축하드립니다! 이설아 씨!
"……아."
"축하해요, 설아 씨."
"……대표님. 저 대상이래요."
"그래요. 저도 들었어요. 얼른 나가야죠."
"네? 어딜요?"
-하하! 너무 놀라신 것 같은데요? 설아 씨, 얼른 나오셔야 저희도 집에 갑니다!
하하하하하하!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본 이설아는 그제야 다시 무대로 나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악!"
재빨리 일어난 이설아는 후다닥 무대로 달려가 허리를 깊게 굽히며 트로피를 받았다.
묵직!
'아.'
왜인지 방금 전보다 훨씬 무겁다.
훨씬 차갑고 뜨거웠다.
다리가 풀려버릴 만큼 말이다.
"수상 소감 말씀하셔야죠."
"네……"
다시 마이크 앞에 선 설아는 객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아니 표현을 할 수 있을까.
'5년. 5년이야!'
5년이란 긴 여행의 종착지.
5년 동안 차라리 지옥이 나을 것 같았던 인내의 보상.
옆에라도 함께 서면 영광이라 생각했던 저 대단한 가수들, 아이돌들을 제치고 오롯이 홀로 이 무대, 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
표현 못한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있다.
신인상에서도, 라이징 스타상에서도 계속 아껴 두었던 말.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한데, 앞서 수상에 소감을 다 말해버려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어쩌죠?"
하하하하하!
"아, 있다! 아직 감사의 뜻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이 한 분 계세요!"
이설아는 객석에 있는 진호를 보았다.
"절 위해 많이 애써 주신 우리 잘 생긴 이진호 대표님-!"
눈이 마주친다.
짓궂은 야유 소리가 귀에서 멀어지고, 이 거대한 시상식 공간에 오직 둘만이 남는다.
너무 떨어져 목소리가 닿지 않지만, 눈으로 수 많은 이야기를 나눈설아는 환하게 웃으며 머리 위로 크게 하트를 그렸다.
"사랑해요-!"
'그래요. 나도 사랑해요. 우리 꽃길만 걸어요.'
진호도 머리 위로 크게 하트를 그리며 환하게 웃었다.
* * *
울렁!
'응?'
주위를 둘러본 진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두운 스튜디오와 무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뭐지? 내가 왜 여기 음악 방송에……. 난 분명 어젯밤……'
기분 좋게 취한 설아와 결국 어른의 계단을 오른 후 잔 걸 마지막으로 기억이 없다.
참 수줍었던 그녀의 모습에 짐승이 되었던 걸 마지막으로 기억이 없다.
'어헉! 나 왜 벗고 있어?'
화들짝 놀란 진호는 재빨리 몸을 가렸다가 이내 이상한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도 날 안 보고 있어……'
이렇게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데도 말이다.
순간 드는 생각이 있어 볼을 꼬집어 본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꿈이구나.'
자각몽, 루시드 드림이라는 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 설아 씨다. 그런데 저 사람 설아의 옆에 모르는 남자가 있다.
"잘 했어, 설아야! 오늘도 목소리 좋다!"
"충식 오빠."
'오빠? 오빠아?'
"오빠, 나 핸드폰 좀."
"……뭐하게? 너 또 그 이진호 모델에게 연락하게?"
"……."
'이진호? 나? 모델?'
"설아야, 대표님이 말했잖아. 넌 이제 떴으니까 스캔들을 조심해야 된다고!"
"그런다고 은인한테 연락도 못하냐!"
"그냥 은인으로 여기지 않으니까 이러는 거지! 너 그 사람 좋아하잖아!"
"……진짜 오빠도 이러는 거 아니야! 우리가 힘들 때 가장 힘이 되어 줬던 게 누구야! 날 이렇게 띄워 준 게 누구냐고! 다 진호 씨 덕분이잖아! 진호 씨가 내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줘서 내가 뜬 거잖아!"
"……그래서?"
"충식 오빠?"
"그래서 그깟 모델 때문에 네 성공을, 대표님과 내 노력을 똥통에 처 박겠다고?"
"오빠-!"
"……후. 미안. 말이 심했다. 하지만 생각해. 어떤 선택이 네 인생에 도움이 될지!"
"……."
그렇게 매니저 보이는 이는 대기실을 나갔고, 남겨진 설아는 어두운 얼굴을 양 손바닥으로 가렸다.
심하게 갈등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흐음……'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런 설아를 바라보던 진호는 다시 일렁이기 시작한 공간에 살짝 놀랐다.
'아, 변한다.'
마치 테이프 빠르게 감기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풍경들과 인물들.
속도가 다시 올바르게 돌아오며 발견한 건 어둔 방, TV 앞에 앉아 있는 설아였다.
'흐음. 방이 좀 작네.'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한 장면 속에서 어렵사리 캐치했던 1위 가수이설아라는 타이틀. 1위 가수치고는 방이 굉장히 작았다.
-1 위! 이진호-!
'응? 나 아닌데? ……아, 나 맞구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저TV 속 욕도 나오지 않을 만큼 잘 생긴 사람은 진호 본인이라고 말이다.
"진호 씨……"
지이잉!
진호와 설아의 시선이 동시에 불켜진 핸드폰으로 향했다.
개새끼2라는 이름이었다.
설아는 이를 갈며 핸드폰을 뒤집었다.
"어떻게 진짜……"
왜인지 설움과 분노가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
그 순간이었다.
쿵쿵쿵!
-설아야! 문 좀 열어 봐, 설아야!
'이 목소리는…… 충식?'
뿌드득!
이를 갈며 무시하던 이설아는 계속 된 재촉에 결국 현관문을 향해 다가갔다.
띠리리! 활짝!
"왜! 뭔데!"
"하하. 왜 이렇게 어둡게 하고 있……."
"닥치고 꺼져. 네가 아직도 내 매니저 같아?"
'오우.'
"당연히 매니저지. 너 아직 계약 조금 남았다?"
"그래서! 그래서 뭐! 그만큼 벌어다 줬으면 됐지, 또 뭐-!"
"알면서 그래. 당연히 이진호 씨한테 연락해서……"
짜아악!
뺨을 맞은 충식도, 뺨을 때린 설아도, 지켜보던 진호도 그대로 멈춰 버렸다.
"아……"
결국 무너진 설아는 충식의 멱살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오빠, 진짜 왜 이래. 왜 이렇게까지 타락한 거야……. 예전엔 안 이랬잖아. 우리 옛날엔 안 이랬잖아-! 나 그냥 실력으로만 성공시켜 준다면서-!"
너무도 처절하고 처절한 외침이 복도를 울리자 충식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 두 눈도 풍랑을 맞은 듯 흔들렸다.
"……그러게. 나 정말 왜 이렇게 된 거냐……. 빌어먹을."
설아의 팔을 떼어 낸 충식은 복잡한 눈으로 설아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동안 미안했다. 앞으로 안 괴롭힐 테니까 너도 우리 잊고 살아."
"오, 오빠?"
"원랜 대표님도 미안하다고…… 그때 잘못 생각해서 미안하다고…… 지금이라도 잘 될 수 있으면 잘 되길 빈다는 그 말을 전하러 온 건데……"
"대표님이?"
"그래. ……진짜 그동안 뭐가 씌어도 단단히 썩었나 보다. 그동안 미안했고, 앞으로는 네가 원하는 인생 살아. 좋은 하루 이후 연달아 두 번 망하긴 했어도, 네 실력이라면 데려갈 곳 많을 거야. 에이, 빌어먹을 이진호. 왜 만날 우리가 앨범 내려고만 하면 먼저 앨범 내고 지랄이야?"
"……그러게. 진호 씨 참 나쁘다. 그치?"
"……간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닫은 충식은 몸을 돌렸고, 설아는 그 문이 마치 충식인 양 쳐다보다 주저앉았다.
"……나 진짜 힘들어요, 진호 씨. 하지만 당신한테 말할 수 없는 게 더 힘들어요. 내가 먼저 버렸으니까. 내가 먼저 외면했으니까. 내가 -! ……흐윽."
'설아 씨……'
키리릭!
다시 주위 환경이 빠르게 감아진다.
하지만 방금 전과는 다르게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다 볼수 있을 정도로 느리다.
이진호, 5대 암 완전 정복! 의사 연기하다 정말 의사 되다?
이진호, 마지막 세계 7대 수학난제까지 완전 정복!
이진호, 슈퍼 인공지능 컴퓨터 개발! 이름은 자비스! 마블, 그 이름을 써 줘서 감사하다.
스르륵 스크랩된 신문들을 쓸어내리는 주름진 손.
'풋. 꿈속의 나도 리셋 라이프를 얻은 건가?'
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띠띠띠띠띠! 띠리릭!
"할머니!"
"저희 왔어요, 어머니."
"어이구, 왔어?"
"어? 이진호 박사님이다!"
"아니야. 갓진호라고 했어!"
늙어도 고운 설아는 싸우려는 손자, 손녀를 꼭 끌어안으며 옅게 웃었다.
"그냥 편하게 부르면 돼. 이 사람은 그런 남자니까."
"어? 할머니, 갓진호 알아요?"
"아주 옛날엔 알았지. ……아마 그는 날 기억 못할 테지만. 그렇죠?"
'응?'
뭔가 이상한 말에 의아해했던 진호는 이내 눈을 부릅떴다.
'지금 날 보고……'
울링!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난 이렇게 살았답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행복한 삶을 살게 됐지만, 참 미련이 남은 삶이었죠. 그러니 당신은 부디 다른 나를……."
'어? 어?'
콰장창!
공간은 깨진 유리처럼 부셔져 내렸다.
"허억!"
"헉!"
동시에 벌떡 일어난 진호와 설아는 서로를 보았다.
온몸에서 흐르는 식은 땀.
"서, 설아 씨. 왜 그래요? 악몽꿨어요?"
"지, 진호 씨도……?"
"아."
둘은 깨달았다.
서로 같은 꿈을 꿨다는 걸 말이다.
"뭐 이런……"
둘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꿈을 다시 떠올려 갔다.
"……진호 씨."
"네."
"진호 씨는 날 왜, 나한테 왜 끌렸어요?"
'그러게. 왜 끌렸을까?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지?'
"……그냥 끌렸어요.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그냥……. 설아 씨는, 설아 씨는 왜 처음에 날 그렇게 어려워했어요?"
"……그냥 어려웠어요. 그냥."
처음엔 덩치가 커서 무서워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둘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끝낸 행복했네요."
"20대 땐 행복하지 않았죠. 너무 암울했어요. 제 앞에 있는 설아 씨와 다르…… 아."
"진호 씨?"
진호는 손을 휘저으며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펜을 꺼내어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한 악상을, 말을 빠르게 써 내려갔다.
갑작스런 행동에 두 눈에 걱정을 담으며 다가갔던 설아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됐다."
"지, 진호 씨. 이, 이건?"
너무도 밝은 음표들. 행복해 지고 싶은 소녀의 속내들. 그리고 끝내 행복해진 결말.
"진호 씨!"
진호는 격정하는 설아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설아 씨 5집 타이틀이 이렇게 완성됐네요. …… 한 번 불러 볼래요?"
"네, 부디!"
설아도 환하게 웃었다.
* * *
저벅저벅저벅.
'이렇게 좋은 날-.'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운 말에 콧노래를 부르던 진호는 지이잉 문이 열리자 생각을 멈추곤 표정을 싸늘하게 가라앉혔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오셨습니까!"
마치 진호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벌떡 일어난 주식-국내외 파트의 모든 직원들.
진호는 군기가 잔뜩 들어 있는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고, 직원들은 그런 그의 입을 집중했다.
"며칠 전 통보했다시피, 내일 이란을 향한 미국의 폭격이 시작됩니다."
……꿀꺽!
"막을 수도 없는 끔찍한 상황이지만, 그건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 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증권맨입니다!"
"예. 증권맨입니다. 그러니……"
진호의 두 눈에 불이 켜졌다.
"이 상황, 딱 3배만 먹고 나옵시다! 알겠습니까!"
"예-!"
진호는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직원들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이란 폭격, 중국 바이러스, 그리고……'
사건사고가 참 많고 많았다.
왜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이를 앙다문 진호는 발을 뗐다.
"자, 그럼 나도 시작해 볼까?"
사무실로 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아, 맞아."
잠시 멈춰 선 그는 정면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동안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호는 머리 위로 하트를 크게 그렸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완결)
그동안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를 사랑해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