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9화
지이잉! 쿠당탕!
추억 속 풍경이 사라져 간다.
그 옛날 추억 서린 공간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부서지고, 물품도 모두 사라져 간다.
건물조차도 외벽이 벗겨져 골조만 남는다.
'이건 좀…… 그러네.'
미니 멀티플렉스 1호점 공사를 시찰나온 진호는 씁쓸해지는 가슴을 긁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결국…… 아무도 안 오는 건가?'
1호점 공사에 들어가기 전 대대적으로 광고하여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까지 기사를 올렸는데도 그 누구 한 명 접근하지 않았다. 당시 리셋 라이프를 하던 유저들이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리셋 라이프를 얻은 건 정말 나뿐인 건가?'
혹여 그 혹은 그들이 다른 스킬을 해금하느라 바쁜 것일 수도 있지만, 진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스킬을 해금할 수 있는 특정 장소들에 수상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이곳 시네마천국뿐만 아니라 국내의 다른 장소들도 마찬가지다.
그 장소 그 위치, 리셋 라이프 유저들만 아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표님, 말씀하신 그곳들에 선물을 모두 보냈습니다."
"춘자 할머니는 살아 계시던가요?"
"……아, 그분들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대표님이 말씀하신 분들은 모두 무사히 생존해 계셨고, 건강검진 결과 약간의 영양 결핍이나 노환에 의한 보편적인 병이 있는 걸 제외하면 건강하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겨울을 대비한 보일러 및 내부 공사가 들어갈 겁니다."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본사는요?"
"큰 시주를 해 주셔서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곧 수능이라 온정의 손길이 많이 필요했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명동성당에서도 말입니다."
"특이점은 없었고요? 사소한 거라도요."
"음…….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재차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궁금증을 애써 삼키는 핫산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옛날에……"
그의 두 눈이 아련하게 물들어갔다.
"제 삶의 유일한 낙이자 도피처였던 한 게임을 할 때 신세를 졌던 분들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핫산에겐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입니다. 핫산은 제 최측근이잖아요."
"감사합니다……"
"뭘요. 당연한 거죠. 앞으로 궁금한게 있으면 물어봐 주세요. 앞으로 이런 식의 일을 계속 시킬 거니까요."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핫산이 물러나자 진호는 다시 1호점 공사 현장을 바라보았다.
'선본사도 특이한 점이 없다는 건가.'
거의 세계 최고의 미남이 되는 외모격변 스킬인 [스킬: 지성이면 감천이다]를 습득할 수 있는 경북팔공산의 선본사. 외모지상주의가 팽배한 현대 인간의 기초적인 욕구인 외모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꼭 들러야 할 곳이다. 진호 본인도 [스킬: 지성이면 감천이다]와 [스킬: 아이기스]를 놓고 많이 고민하지 않았던가.
즉, 외모에 극적인 변화가 생긴 사람이 있다면 소문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증시에도 특이점은 없고. 부동산쪽에도 특이점은 없고. 도박 도시들 쪽에도 별 뉴스는 없었다.'
99개 스킬과 연관된 분야에 갑자기 나타나거나 실력이 껑충 뛴 천재도 없었다.
'정말 나만 리셋 라이프를 얻은 거구나.'
현재까지는 말이다.
'내 바람일지 아니면 육감일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다른 리셋 라이프 습득자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그럴 것 같았다.
"음?"
몸을 돌린 진호는 깜짝 놀랐다.
"아이구, 우리 백만 장 가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톱스타 메이커 유저들이 적극적으로 앨범을 구매한 것도 모자라국내 대기업들이나 해외에서도 대량으로 구매하고, 사우디에서도 무려 30만장이 예약되면서 그녀는 현재 200만 장 가수가 되었다.
현재 가요계는 설아앓이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에헤헤. 뭘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요. 여긴 제 추억의 장소니까요."
"아, 그렇구나……. 저도 그런데……"
"음?"
"처, 처음으로 대표님과 함께 잔 곳이니까……"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인 이설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고, 순간 불끈한 진호는 본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돌겠네.'
이대로 끌어안고 싶다.
하지만 주위 시선들 때문에 그럴수 없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진호는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여기 1호점이 오픈을 하면 설아씨가 노래를 불러 줘야 해요! 그리고 일일 알바도 해 주셔야 하고요-!"
"아, 네! 당연하죠-!"
눈치가 빠른 그녀의 말에 씩 웃던 진호는 몸을 돌렸다.
설아가 왔으니 이제 데이트를 하러 가야 했다.
하지만 그건 핫산이 내미는 핸드폰에 잠시 뒤로 미뤄져야 했다.
"응? 엄마?"
그것도 영상 통화다.
"어, 어머니요?"
"잠시만요."
약간 떨어진 진호는 전화를 받았다.
-아들!
"엄마! 무슨 일이에요?"
-이제 곧 날도 추워질 텐데 우리 아들 잘 있나 하고 전화한 거지. 어떤 무심한 놈이 연락을 안 해서 먼저 한 게 아니야.
'컥!'
"크흠. 그러게요. 그 무심한 놈참 나쁘다, 그쵸?"
-그러게. 아주 나쁜 놈이지.
"아, 아버지는요?"
-옆에 있어. 바꿔 줄까?
-아들! 잘 있냐! 일하는 중이야?
"하하. 예. 운전 중이신 거 같은데 바꿔 주진 마시고요. 제가 이따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 그런데 두분이서 오붓하게 어디 가는 중이세요? 데이트?"
-우리? 아들 집에 가는데? 김장 담갔어!
"잉? 벌써? 아, 하긴 그럴 때가 됐긴 했구나."
벌써 11월이었다. 보통 김장철은 11월 중순이지만, 어머니 나진희는 배추 값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남들보다 김장을 조금 일찍 담갔다.
-비밀번호 몇 번 이야? 오늘 늦게 끝나?
"엄마, 아버지 오셨는데 빨리 끝내야지……"
-스톱.
"응?"
-너 왼쪽으로 카메라 틀어 봐.
"왼쪽?"
진호는 의아해하면서도 그 말을 따랐다.
-스톱!
'대체 뭐…… 허억!'
진호는 어느새 등 뒤로와 있는 설아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어머님!"
'어이구야.'
진호는 마음속으로 이마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 * *
"저, 정말 안 봬도 되요?"
"괜찮아요. 저녁에 스케줄 있는 사람이 정신 사나워지면 못써요."
"하지만……"
정말 괜찮다는 듯 억지로 원룸앞까지 따라온 그녀의 등을 두드리고 떠나보낸 진호는 한숨을 내뱉었다.
'들켰을까?'
분명 들켰을 거다. 눈치가 보통이 아닌 사람이 바로 어머니이니 말이다.
"에효……. 그래. 가자, 가."
갑자기 원룸이 마왕성처럼 느껴졌지만, 들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대표님, 차지혜 부장 전화입니다."
"아, 계속 핸드폰을 맡기고 있었네요. 이리 주세요."
진호는 전화를 받았다.
"네, 이진호입니다."
-차지혜입니다, 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일전에 말씀드린 게 완료되었기에 연락드렸습니다.
"일전…… 아! 벌써요?"
'진짜 능력 좋네.'
겨우 3일 전에 엔터-가수 파트 기획부 직원이 10명 충원됐다.
-예, 그런데……
"그런데?"
의아해하던 진호는 이어지는 차지혜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응."
-죄송합니다.
"아니요. 알았다고 전해 주세요. 날짜 잡아 주시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끊습니다."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갈무리한 진호는 피식 웃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퇴근하세요."
"……예. 필요한게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고개를 숙인 핫산은 다른 비서실직원들과 함께 진호가 근처에 마련한 숙소로 향했고, 진호는 넘겨받은 두부를 들고 원룸 안으로 향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안에 계시죠?"
"예."
경호원이 문을 열어 주자 안으로 들어간 진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콧속을 파고드는 수육의 묵직하고 기름진 향기가 방금 전 살짝 불쾌해졌던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렸다.
"엄마! 아버지!"
쿠당탕!
"아들!"
하양이와 참매를 끌어안은 채 안쪽에서 달려나온 부모님의 모습에 진호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씻고 나온 진호는 거실에 앉았고, 때마침 어머니가 수육과 삶은 두부, 된장찌개, 오늘 막 담은 김장김치를 가져왔다.
"크-! 내가 진짜 이걸 먹으려고 1년을 기다린다, 기다려!"
"그렇게 먹고 싶으면 말하지……."
"딱 이때 먹어야 제일 맛있는 거잖아."
"말이나 못하면……. 얼른 먹어. 식겠다."
"옙! 아버지 한잔 받으세요."
"그래. 우리 대표 아드님께서 주는 술을 받아 볼까?"
"하하핫. 엄마도 받으세요. 김장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세 가족은 잔을 부딪쳤다.
쭈우욱!
"크-!"
소주의 쓴맛을 씻어 내리는 수육과 김치, 두부 삼합의 맛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입안에서 조금씩 줄어드는 게 너무도 안타까울 만큼 말이다.
"그래서……"
"움?"
진호는 의아해하며 아버지를 보았다.
"사귀냐?"
"쿨럭! 컥! 컥!"
사례가 제대로 들렸다.
한참을 튕굴며 고생한 진호는 애써 웃었다.
"집은 어때요? 괜찮아 보여……"
"닥치고. 사귀냐? 사귀는 거 맞지?"
"아니, 엄마가 아들한테 그렇게 험한 말 써도 돼?"
"네. 입 다무시고 엄마가 한 말에 대답해 주세요, 아드님. 그 아가씨와 연애 중이신거 맞나요, 아드님?"
'……들켰네.'
고상하게 묻는 부모님의 두 눈이 확신으로 차 있다.
한숨을 폭 내쉰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귄 지는 얼마 안 됐고요."
"어머머머! 거봐요, 내가 사귄다고 했잖아요! TV에서도 너튜브에서도 얘랑 그 아가씨 눈에서 그렇게 꿀이 떨어지는데 안 사뀔 리가 없지!"
"아, 조용히 좀 해 봐. 그 아가씨 부모님은…… 아니지, 그런 건 상관없지. 너희 둘이 서로 좋아하는 게 중요한 거지. 그보다 누가 먼저 고백했냐? 너냐? 아님 그 아가씨가?"
진호는 흥분한 부모님을 멍하니 바라봤다.
특히나 언제나 엄하고 진지했던 아버지의 이런 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설아 씨를 데려오지 않길 잘 했다! 방금 전 과거의 나! 칭찬한다!'
"제가 고백했어요. 놓치기 싫어서요."
"잘했다."
"……응?"
"왜?"
"할 말은 그걸로 끝이세요?"
"그럼?"
아버지 이형만은 피식 웃었다.
"성인 남녀 둘이 서로 좋아해서 사귀는 건데 부모가 뭘 참견해야 돼는 거냐? 코치해 줘야 해? 너 그렇게 못났어?"
"아니요?"
"어차피 요즘 세상 결혼 늦게 하는 거 흠도 아니니 나나 네 엄마나 결혼 재촉할 생각 없고, 그 아가씨도 이래저래 하고 싶은 거 다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고, 너도 일하는 재미에 빠져서 바쁠 테고. 관계자 모두 서로를 이해하는데 문제 될 거 있냐?"
"……없죠?"
"그럼 됐잖아? 아, 나중에 너희 결혼할 때 바라는 게 있긴 하다. 너희 둘 모두에게."
"이 엄마도 바라는 게 하나 있지."
진호는 갑자기 진지해진 부모님의 모습에 마른침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이형만은 그런 진호를 보며 씩 웃었다.
"손주."
"쿨럭!"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까 손녀만 혼수로 들고 오라 해."
"엄마도 같은 생각이야. 남녀 쌍둥이면 더 바랄 거 없고! 오호호!"
"아, 진짜! 아버지! 엄마-!"
* * *
경호원들, 비서들과 SJ호텔 앞에선 진호는 입술을 비틀었다.
'재밌네.'
차지혜 부장이 섭외한 사람들, 아이돌 팬클럽 회장이거나 최고 간부였던 이들과의 미팅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잡았다.
"꼭 봐야겠다고 했다고요. 저와…… 설아 씨까지 모두."
진호는 하얗게 질려 있는 설아의 등을 두드렸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차 부장님이 죄송할게 뭐 있겠습니까. 그저……"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겨우 누른 진호는 살벌하게 웃었다.
"대체 어떤 면상들인지 저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제아무리 부자라지만, 어쩜 이렇게 제멋대로일까.
'제대로 된 철퇴를 맞아 보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넘쳐 나는 돈으로 마음껏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어이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일 터였다.
'지금 이설아 씨에게 중요한 순간만 아니었다면……'
200만 장 가수가 되었다지만, 아직 그녀의 지반은 탄탄하지 않다.
대중들은 이제야 이설아라는 가수를 알아 가고 있다.
이런 순간에 그들이 움직여 루머라도 퍼트린다면 날아오르던 설아의 두 날개는 그대로 꺾여 버리고 말 터였다.
'그리고 낫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그렇기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런 개수작을 부린 사람들을 단칼에 베어 버릴 수단만 있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경고를 하기 위해서 왔을지도 모른다.
"……대표님."
"네, 설아 씨."
"저 때문이라면 참지 말아요. 지난 한 달 동안 충분히 행복했으니까요."
움찔!
진호는 단호한 눈빛을 짓고 있는 이설아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내 여자라니까."
"그, 그래도 좀 무서우니까……"
설아는 진호의 옷깃을 꼭 잡았고, 진호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도착한 SJ호텔의 자랑, 미슐랭 3스타 가온.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룸 앞에 도착한 진호는 설아의 손을 꼭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잊지 말아요. 난 지금도 충분해요."
'후. 정말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까득!
하찮은 수작을 부리려는 목적이면 자신의 모든 걸 이용해서 박살을 낼 다짐을 다시 한 진호는 종업원을 보았다.
똑똑!
"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네."
'일단은 여성이군.'
스르륵!
열리는 문에 설아의 손을 잡은 손을 떼던 진호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것도 모자라 살기가 등등했던 그의 표정이 어벙해졌다. 안쪽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몇 명의 여성중 아는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형 누나?"
SJ그룹 이영재의 동생이자, 사사로이 누나동생 관계를 맺은 이서형. 그녀가 가장 상석에 앉아 이쪽을 보며 짓궂게 웃고 있었다.
"서프라이즈?"
"……아, 씨."
날카로워졌던 마음 속 칼날이 순식간에 무뎌졌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