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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420화 (420/424)

외전 46화

'핫!'

눈을 번쩍 뜬 이설아는 경악했다.

눈앞을 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튼튼한 가슴과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고른 숨 소리.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을 살폈다.

잠들기 전과 달라진 게 없는 옷차림.

신발과 양말만 벗었을 뿐이다.

다행이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왜인지 짜증이 났다.

또 그러면서도 지켜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정이 복잡해진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잠들어 있는 진호를 보았다.

둥실둥실하면서도 의외로 유려한 턱선이 눈에 들어왔다.

"속눈썹이 길구나."

고른 숨결에 섞여 있는 알싸한 담배 연기마저도 향기로운 걸 보니 참 중증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헤.'

그동안 몰랐던 내 남자의 면모를 하나하나 알아 간다는 건 꽤나 재밌었다.

"가슴…… 단단해."

꾸욱!

의외로 근육질이다. 배도 단단하고, 팔뚝도 단단했다.

"대표님……. 근육이 많구나……"

꾹! 꾹!

보송보송 솜사탕인 줄 알았는데, 온몸이 강철이다.

말랑한 고무를 두른 강철.

"책임지지 못할 거면 누르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으꺅!"

데구르르 구른 이설아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일어났어요?"

"누구 때문에요. 잘 잤어요?"

"……씨, 씻고 올게요!"

그제야 화장을 한 채 잠들었다는 걸 깨닫고 화들짝 얼굴을 가린 이설아는 룸을 빠져나갔고, 진호는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 풋웃으며 기지개를 폈다.

"끄으아!"

소중한 사람을 품고 자서 그런지 몸에 활력이 넘치는 기분이다.

벌떡 일어나려던 진호는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가로 누워서 다행이지."

이불 속 잔뜩 성이나 있는 소중이를 들켰다면 굉장히 어색한 상황이 될 뻔했다.

진호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물을 들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곰탕과 계란 프라이, 김치와 깍두기.

"근처에 맛집이 있어서 배달 시켰어요."

"잘 먹겠습니다!"

후룩!

"으으음!"

다이어트 도중엔 먹을 수 없는 뜨끈한 국물과 매콤하면서도 달달한 김치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몸서리가 쳐질 만큼 행복했다.

진호는 그런 그녀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숭을 떨지 않는 이런 모습 때문에 더 예뻤다.

"맛있어요?"

"네! 이런 DVD방에선 볼 수 없는 음식이라서 더!"

흠칫!

"……그래요?"

"네!"

"…… 많이 먹어요."

"대표님도……"

진호의 옆에 쌓인 3층 공깃밥을 본 그녀는 활짝 웃었다.

"대표님도 많이 드세요!"

"네."

그들은 그렇게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으응……"

"왜 갑자기 어리광을 부리실까?"

진호는 품에 안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오늘도 다치지 말고 열심히. 파이팅?"

"……파이팅."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진호는 설아의 등을 두드리며 떠나보냈고, 이설아는 잔뜩 아쉬워하면서도 결국 시네마천국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딸랑 닫힌 문을 본 진호는 곰탕의 냄새가 남은 시네마천국을 둘러보며 팔짱을 꼈다.

"추억. 깨끗한 DVD방……. 추억, 깨끗한……"

푹 자고 일어난 이설아의 밝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DVD방에서 볼 수 없는 음식이라……"

예술영화나 독립영화의 리스트도 진호의 머릿속을 스쳐지 나갔다.

톡톡톡.

검지로 팔뚝을 두드리던 진호는 케이지를 보았다.

"케이지."

"예, 대표님."

"DVD방에 대한 보편적인 이미지와 사업이 몰락해 가는 이유, 10대와 20대, 30대까지 반응 조사를 해 주세요. 그리고 현재 유행하고 있는 형식의 노래방과 PC방에 대한 것도요."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진호는 다시 DVD방을 둘러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 * *

'후……'

"1차 해금 해제."

짧지만 참 머리 아픈 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머리가 좋아진게 오히려 에러네."

대사 한 마디, 손짓 하나까지 다 기억하고 의도치 않았는데도 분석해 버리려 하니 1차 해금을 하는 내내 머리가 과부하된 것 같았다.

"회사로 가죠."

"예!"

"그릭 107.3 달러 매수 시작합니다!"

"로얄티론 31.2 파운드 매도 완료!"

주식- 해외 파트가 뜨겁고 시끄럽다.

직원은 몇 명 되지 않는데도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열기에 흡족하게 웃은 진호는, 다급히 달려온 우해진이 넘겨준 중간 결산 현황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제 예상보다 훨씬 더 잘해 주고 계시는군요."

"매도 매수 타이밍을 아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안 되죠."

아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15퍼센트를 더 벌었다. 타이밍을 안다고 해도, 예상치를 넘는 수익률을 만들어 낸 건 이들의 능력이다.

'증명됐군.'

이 정도면 이들의 능력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하. 그럼 수고해 주세요. 보너스도 기대해 주시고요."

"……손가락이 부러져도 어떻게든 해내겠습니다!"

듣기로 저번의 사우디 정유시설테러 사태 때 국내 파트 직원들 전원이 타워펠리스 두 채 값씩을 보너스로 받았다고 했다.

자신들도 그러지 말라는 법 없었다.

'무조건 빌딩 하나 산다!'

알아주는 대기업 펀드 매니저였던 우해진 부장조차도 달 수 없었던 타이틀인 빌딩 건물주.

"모두 빌딩 하나씩 사자-!"

"……우오오오오오!"

등 뒤에서 터져 나온 함성 소리에 진호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펀드 매니저도 빌딩을 원하는 건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이잉!

"음?"

진호는 전화를 받았다.

"응, 영재 형! 어제 인수 합병 마무리 소식 잘 들었습니다!"

어제 일자로 SJ그룹은 여러 일본 기업들에 대한 인수 합병을 모두 마무리했다. 일본 정재계에서 특히 내각총리가 여론 조작에 음해 등온갖 방해를 했지만, 결국 SJ그룹은 해냈다.

매번 빼앗기기 바빴던 한국이 드디어 일본의 것을 가져오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뭐야, 아는데도 전화를 안 했어?

"했는데, 통화 중이던데요? 바빴죠?"

-……아직도 목 아파.

"크큭. 그래도 후계 확정 지은 거 축하드립니다."

-크-! 진짜 좋은 말이긴 한데, 확정된 건 아냐. 우리 회장님은 이 정도로 후계를 확정 지을 만큼 물렁한 분이 아니시거든.

"에효. 정말 수고하시네요."

-그러게 말이다……. 아, 맞아. 너 요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더라?

"아아, 펄 게이트 인수 합병에 쓸 돈 좀 모으고 있는 중이에요."

-……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된 말이었다.

"증시는 제 개인 광산이죠, 뭐. 흐흐. 그리고 형이잖아요."

-……진짜 잘난 형 되기 어렵다, 어려워.

웃음을 터트린 진호는 순간 낯빛을 굳혔다.

"얼마 전 미국에서 의학 포럼 열린 거 알아요?"

-팬데믹?

"예. 아마도 중국발인 것 같은데, 준비하는 게 좋을 겁니다."

곧 중국 증시를 비롯한 세계 증시가 공포에 빠진다.

의료 관련 특히 마스크와 손세정제 제조업체들 주가가 급등한다.

"미국도 머리 아프고요. 아마 모두가 단합해서 움직여야 할 거예요."

-……그렇다면 존스홉킨스의 경고가 맞다는 건데……. 빌어먹을. 세상 진짜 왜 이러냐.

"정치인들이 이걸 이용하지 못하게 해야 해요. 메르스나 사스 때보다 심각합니다."

-……알았어. 우리 쪽에서 들키지 않게 여론을 조성시키고 대책을 마련할게. 마침 반년 후면 총선이니 잘 먹힐 수 있겠어.

"부탁드립니다."

-걱정마라. 무조건 막을 테니까.

"예. 아, 혹시 JC의 JCGV의 사장님과 연결 가능할까요?"

-그건 경오한테 연락해 봐. 경오가 연결시켜 줄 거야. 그런데 갑자기 거긴 왜?

"소소하게 DVD방 사업에 진출해 볼까 하고요. 요새 PC방이나 노래방처럼 세련되게 꾸며서요."

-……흐음. 기존의 모텔 이미지를 탈피하고 오락 공간으로 만들겠다? 굳이?

"요샌 집에서 다 볼 수 있다지만, 비싸잖아요. 충분히 메리트가 있다고 봐요. 투자해 볼래요?"

-……오케이. 한번 마련해 볼게. 그럼 끊는다.

"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전화를 끊은 진호는 JC ENM의 상무 이사인 이경오에게 걸기 위해 연락처 목록을 뒤졌다.

"아, 대표님! 여기 계셨군요. 안 그래도 찾아 가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됐습니다."

"무슨 일이죠, 정 이사님?"

"설아 컴백 활동에 쓸 무대 의상 및 일반 의상에 대한 예산 결재를 받으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음? 그 정도는 정 이사님 선에서 해결되지 않나요?"

"그게 액수가 좀 나가서……. 하하. 여기 있습니다."

진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영세 기획사의 대표로 살아온 정구호이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대체 얼마기에……. 음?'

"협찬인데도 돈을 줘야 하는 건가요?"

"설아가 게임과 대표님을 통해 인지도를 많이 얻긴 했지만, 아직 방송적으로 이뤄 놓은 게 없다 보니……"

진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뒷돈이라는 소리군.'

"사세요."

"예?"

"그냥 다 사시라고요. 뭘 모양 빠지게 돈까지 줘 가면서 협찬을 구걸 합니까?"

"예에? 하, 하지만 그러면 돈이 너무……!"

"우리가 돈이 없습니까?"

"아."

"전 이리저리 참견받고 휘둘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훨씬 낫다고 봅니다. 앞으로 설아 씨 방송활동에 들어가는 모든 것은 구매하는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다시 결재 올려 주세요."

부르르!

'와, 정말 대단하시구나!'

계속 느끼고 있는 거지만, 배포가 자신과는 차원이 달랐다.

"……예! 내일 안까지 다시 결재올리겠습니다!"

"그래요. 다음부터는 이 정도 일은 정 이사님 선에서 결재 끝내시고 저한테 통보만 해 주세요. 수고 하세요."

"크헉! 예-!"

씩씩하게 멀어지는 정구호를 바라보던 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경오 형!"

* * *

"오, 오디션 말입니까?"

"네."

2차 해금 조건인 '오디션 보기'.

"구,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뮤직비디오 감독은 식은 땀을 뻘뻘 흘렸다.

쩐주가 오디션을 본다? 김권택 감독 정도 되는 대감독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담돼서 할 수 없었다.

이런 감독의 기색을 알아차렸지만, 진호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제가 아무리 투자자 겸 설아 씨회사의 대표 이사라고 해도 좋은 작품을 위해서라면 오디션을 봐야죠."

흠칫!

"그, 그럼 그 말은?"

"예. 제 연기가 미흡하다 싶으면 탈락시키셔도 됩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오디션에 돌입하는 순간, 손짓 하나라도 하는 순간 연기력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허어……"

'역시 젊은 사람이라서 그런지 다르네.'

만날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달라 갑의 의향만 따라야 했던 감독으로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출연하고 싶다기에 그냥 재미 삼아 해 보려는 건 줄로만 알았더니……'

무척이나 진지한 진호의 눈빛에 감독은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음……. 정말 탈락하실 수 있습니다."

"탈락한다면 깔끔하게 물러나겠습니다. 감독님께 피해 주는 일도 없을 겁니다."

감독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약속하신 겁니다. 조연출! 인형탈 가져와!"

"후우."

'답답하네.'

인형옷 안은 꽤 답답했다.

어두웠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시야도 잘 보이지 않았고,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가슴을 눌렀다.

'한 번이야. 딱 한 번만 하면 돼!'

정말 한 번이다.

진호는 귀를 열고 감독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 순간이었다.

"자, 음악 갑니다! 하이 큐!"

-당당당! 말랑말랑!

진호는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짜릿!

'아…….'

해금했다.

온몸의 감각이 바뀌고 있다.

답답한 족쇄같은 인형 옷을 어떻게 하면 내 몸처럼 움직일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귀엽게 움직일지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머리가 끊임없이 이렇게 움직여라 말하고 있다.

진호는 그 낯선 감각에 재밌어하며 몸을 움직였다.

파닥! 파닥!

그리고 감독은 그 귀엽고 깜찍한 율동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시멜로우 인형 역할은 진호에게로 돌아갔다.

* * *

'와! 우와아!'

설아는 마치 실내 운동장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공간과 세트들을 보곤 넋을 잃었다.

"이, 이사님! 이, 이러면 돈이 너무 많이 들지 않아요?"

장소를 따로 빌리는 것보다 이렇게 세트를 짓는 게 훨씬 비싸다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다.

오늘 뮤직비디오 의상은 더 난리였다.

"이, 이거지, 진짜 디올이잖아요-! 디올뿐만이 아니야!"

한 벌에 몇 백 만원씩 하는 진짜 하이패션 브랜드의 옷들이 줄줄이 걸려 있다.

"이걸 어떻게 협찬받은 거예요?"

아직 이설아의 인지도로는 결코 협찬받을 수 없는 옷들이었다.

정구호와 차지혜는 흐뭇하게 웃었다.

"협찬은 무슨. 샀어. 대표님이 돈 아끼지 마란다."

다시 결재를 받으러 갔을 때, 진호는 5억이나 6억이나 별 차이 없다며 다시 정구호를 놀라게 했다.

"네에? ……이 사람이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미쳤어, 미쳤어!"

눈앞에 있으면 정말 때려 줄 만큼 화가 치솟았다.

차지혜는 그렇게 방방 뛰는 이설아를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설아야. 이게 오히려 돈을 아끼는 거야. 시간이라는 돈을."

"……아."

"그래. 촬영장소 이동하는데 드는 시간, 그로 인해 늘어난 촬영시간, 공방 무대에 오를 때마다 스타일리스트가 협찬을 받기 위해 돌아다녀야 하는 시간 등등 대표님은 돈을 더 쓰는 걸로 모든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인 거야. 그 결과……"

차지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 컴백 활동 기간 전체에 들어갈 비용과 직원 복지를 생각하면 협찬으로 움직일 때와 별 차이가 안 나."

"……진짜요?"

"응. 진짜로. 협찬사의 따발따발 소리 듣지 않아도 되니까 감정 소모도 줄어들고."

"찢어지고 망가지면 수선하면 되니까 그냥 막 움직여. 알았지?"

"네에……. 가요, 실장님."

이설아는 새롭게 합류한 스타일리스트 팀원들을, 진호의 큰 배포에 황홀해 하는 그들을 끌고 대기실로 향했고, 차지혜와 정구호는 한곳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대표님."

"큼."

스태프들 사이에서 모자를 푹 눌러쓴 진호가 걸어 나오자 둘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진호는 슬그미니 시선을 돌리며 촬영 준비에 집중하고 있는 감독을 보았다.

'이제 남은 건 촬영뿐!'

카메라 뷰파인더에 모습이 담긴 순간 스킬 습득이었다.

'그럼 놀려 볼까?'

이설아가 향한 대기실을 바라보는 진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스킬: 연신연왕]

[배우에게 하나의 영화는 하나의 그림이고, 하나의 캐릭터는 하나의 물감이다. 그 물감이 겹치지 않으니 같은 그림이라도 다른 그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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