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5화
나중에, 아주 나중에는 올 수 있을까 생각했던 호텔 레스토랑이다.
그녀는 고급스런 인테리어에 약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난생 처음 보는 한 입 사이즈의 음식도 어떻게 먹어야 좋을지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그냥 대충 먹으면 돼요."
"대, 대충이요?"
"대충 먹고. 대충 마시고. 예절은 사람에게 지키는 거지, 음식에게 지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즐기는 거다.
"아……"
"그렇다고 평소처럼 쩝쩝거리진 말고요."
진호는 순간 째려보는 이설아의 눈빛을 피하며 식전주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군."
둘을 번갈아 본 무하마드가 음흉하게 웃자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공을 들이고 있는 중이죠."
"확실히 귀엽기는 한데……. 아, 이쪽의 레이디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젠 세상 그 어떤 고귀한 사람도 만날 수 있는 진호다.
솔직히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그의 말에 진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모레 오픈 행사 때 보시면 알아요. 내가 왜 이 사람에게 반했는지."
"호오?"
진호는 무하마드의 시선이 이설아에게 향하자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정부에서 접촉은 해 왔어요?"
"1시간 전에 연락이 왔지."
토옥!
다 마신 와인 잔을 내려놓은 무하마드가 고맙다는 듯 진호를 보았다.
부탁하는 입장이 아니라 부탁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 그는 덕분에 체면이라는 실리를 지킬 수 있었다.
"제값에만 사 주세요. 그거면 돼요."
"하핫! 그거야 당연한 말이지! 연구원들, 농민들까지 모두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말도 해 놓지."
진호는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고맙네……. 정말 다행이야.'
가슴에 살짝 얹혀 있던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어.'
진호는 본인이 알아낸 일을 말하기로 했다.
"이란과 미국을 주시하세요."
"……설마?"
"미국에서 이란을 노리고 있어요. 중동을 비롯해 세계가 흔들릴 겁니다. 시기는 아마 올 연말에서 내년 초."
이 말을 꺼내기까지 참 많이 고민을 했다.
이 판타지 같은 시나리오가 맞는 건지, 이 평화로운 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건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인간들이라지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지, 과거전쟁 상황의 증시 동향까지 모두 낱낱이 뒤져야 했다.
그 결과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이건 나 혼자서만 알아선 안 될 일이야. 절대로!'
달그락!
식기를 떨어트린 무하마드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호가 말한 이상 진실일 것이다.
"그 오리 놈이 결국……"
흠칫 놀란 그는 얼른 보안 팀장을 불렀다.
"예, 왕세자님."
"도청은?"
"반경 2백 미터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거리 도청도?"
"방해 장치를 켜 놓았습니다."
"알았어. 물러나 있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보안 팀장이 물러나자 무하마드는 복잡한 눈으로 진호를 보았다.
"경솔했어."
"형님의 수행원들을 믿은 거죠."
사소한 말 한마디도 막대한 무게를 가지는 왕가의 2인자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식의 보안은 당연했고, 이는 곧 진호가 최종 목표로 삼을 지향점이었다.
"동생에게 뭘 해 줘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군."
"형님과 형님의 나라가 무사하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형 동생 사이에 고마운 게 어딨고, 은혜가 어딨어요."
"허……"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감동한 무하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
'음?'
"네. 피해가 없길 바랄게요."
뭔가 어투가 이상했지만 신경을 끈 진호는 의아해하고 있는 이설아에게 얼른 먹으라고 말한 뒤 다시 식사를 이어 갔다.
달달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 둘을 보는 무하마드의 눈은 다시 흔들렸다.
* * *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그런 거 없어요. 그보다 식사는 어땠어요?"
만약 무하마드가 없었으면 바닥까지 긁어먹을 기세였다.
'그 모습마저도 귀여웠으니……. 나도 참 중증이네.'
"정말 좋았어요!"
양고기 스테이크라는 게 그렇게 부드럽고 맛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왕세자님도 엄청 젠틀했고요! 생각했던 이미지랑 완전 다른 거 있죠? 그리고…."
'나한테 대표님을 잘 부탁한다고 했어! 꺄! 정말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헤어질 때 무하마드가 통역사를 통해 한 말을 떠올린 이설아는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게 진호가 놓은 덫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진호는 너무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했던 이미지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게 맞을 겁니다."
"네?"
진호는 더 할 말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이설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아, 아니겠지.'
그런데 왜 엄마가 한 말이 떠오르는 걸까.
순간 얼굴이 달아오른 이설아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고, 차 안에는 작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백미러로 지켜본 월터는 옅게 웃었다.
"Sir."
"네, 월터 씨."
"이젠 슬슬 방탄 차량을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진호는 눈을 빛냈다.
'방탄차!'
남자로서 로망일 수밖에 없는 아이템이다.
"한국은 총기 소유가 불법인 나라인데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흠, 한국에선 구하기가 힘들 텐데……. 알았어요. 그래야 마음이 편하겠다면 그렇게 해야죠. 그 김에 사무를 도와 줄 직원들도 뽑으세요."
고맙다는 듯 대답한 월터는 다시 앞을 보았고, 진호는 이설아를 곁눈질했다.
그러는 사이 차는 원룸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오늘부터 경호를 시작한 경호원들이 맞이해 주었다.
'역시 자동 바리게이트랑 검문소를 얼른 만들어야겠네.'
주차장 입구에 서있는 경호원들을 보니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아, 맞아. 앞으로 이분들이 원룸의 보안을 책임질 거예요."
"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예."
스륵! 끽!
탁! 탁!
월터와 경호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원룸 안으로 들어온 진호는 이설아의 집 앞에 섰다.
"오늘 수고했고, 푹 쉬어요."
진호의 목소리가 원룸 복도를 묵직하게 울렸다.
그에 괜스레 부끄러워진 이설아는 진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네, 대표님도 푹 쉬세요. 그, 그런데……"
"네?"
'그 외국어, 대표님께서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경호원들에게가 아니라 진호에게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부끄러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아뇨. 아니에요."
"으음?"
"아니라니까요. 얼른 들어가세요!"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아쉬움을 접으며 돌아서다 아차 했다.
"아, 맞아. 전에 쿠키 맛있었어요. 정말로."
'흡!'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이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반응해 버렸다.
복도가 환하게 밝아지는 미소.
진호가 속으로 심장을 붙잡을 때, 자신이 너무 좋아했다는 걸 깨달은 이설아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 더 해 드릴까요?"
"그래 주면 고맙죠. 기대 할게요."
"그, 그럼!"
비밀번호를 누른 그녀는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고, 진호는 돌아서며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띠디디디디! 디리릭!
"안전합니다. 그럼 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만 들어가세요. 할 일이 많잖아요."
"음……."
맞다. 경호 동선이나 교대 등 할 일이 태산이다.
결국 월터는 그러겠다며 집을 빠져나갔고, 진호는 냉장고로 걸어가 맥주를 꺼냈다.
치익! 딱!
"크-."
오늘 이설아와의 일을 안주 삼아 맥주를 홀짝이던 진호는 아까 전 무하마드가 한 말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내겐 다 똑같지."
리셋 라이프 앞에서는 고귀한 사람이건 아니건 다 똑같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들보다 위에 설수 있는데, 왜 그딴 걸 신경 써야할까.
"딱히 위에 설 마음은 없지만 말이지."
적당히. 적당히.
"그냥 마음이 가는 사람을 만나면 되는 거야."
빈 캔을 내려놓은 진호는 이설아를 떠올리며 샤워실로 향했다.
* * *
"진호야!"
"아니, 바쁜 사람이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농땡이지. 이런 스케줄은 원래 앞뒤 3시간은 쉬어 주는 거야."
이영재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고생하시네요, 누나."
"걱정 마. 이거 다 모아서 나중에 지분 싸움 일으킬 거니까."
"돕겠습니다."
"고마워!"
"어이?"
셋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다 진호는 4층짜리 원룸 건물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 조그만 건물 때문에 이런 거물들이 모이다니.'
구의원에 여야 국회의원, 시장까지 온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마천루라도 완공한 줄 알 터였다.
"그보다 잡았다며?"
"네? 아."
진호의 표정이 굳었다.
어젯밤 7호 원룸에 불을 지른 범인을 잡았다. 이쪽의 예상대로 근처 원룸의 주인이었다.
"술김에 했다고 하더라고요."
술김에, 홧김에 모닥불을 피웠다고 했다. 그 흔적이 있으면 충분히 경고가 될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바람 때문에 커졌대요."
"믿어?"
이영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죠. 이제부터 그 사람 인생을 작살낸다는 게 중요한 거지."
형사, 민사 모두 소송이 들어갈 예정이다.
"일벌백계. 무조건 최대로입니다."
그제야 이영재와 이서형의 표정이 풀렸다.
"우리 법무팀도 움직이지."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저희 쪽 변호사 실력이 좋거든요."
당장 내일 검찰로 송치된다. 도명안이 얼마나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가끔 간판이 필요할 때도 있어. 그리고 이건 내 일이기도 해."
"……그럼 한 분만 부탁드릴게요."
"그래, 체면 차려 줘서 고맙다. 그 도 변호사라는 분도 이 기회에 인맥을 더 넓히라고 해. 말해 놓을 테니까."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제가 어제 말한 거 잊지 않았죠?"
"…… 걱정 마. 꼬투리 잡히지 않게 움직일 테니까."
아주 차근차근 세심하게 움직여야 한다.
진호뿐만 아니라 SJ의 안위도 흔들릴 만한 일이기에 전의 사우디 정유시설 테러 때처럼 급하게 움직일 순 없었다.
"그런데……"
"쉿."
이영재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고, 이영재 실장님!"
반사적으로 웃은 이영재는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40대 중년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반갑습니다. 이영재입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하하. 당연히 모르실 만도 하시죠. 구의원 추규철입니다."
"아……. 예."
"오, 이쪽이 이진호 대표님이신가 보군요! 반갑습니다, 추규철입니다!"
"이진호입니다."
그렇게 오늘 이 자리를 찾은 내빈들과의 인사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와, 나."
진호의 양옆에 앉은 이영재와 무하마드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진호는 그 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학을 뗀 상태였다.
"손뼈 부러지는 줄 알았네. 아니 왜 악수하는 사람마다 힘을 주는 거야?"
"네게 본인이 누군지 각인시켜야 하니까. 딱 그것만 신경 쓰는 양반들이거든."
"각인만 시키면 내가 알아서 해줄 거다?"
"그런 거지. 나중에 부탁할 때 철판 깔기도 쉽고."
'지랄. 암튼 이놈의 정치인들은 마음에 들지를 않아요.'
정작 주인공이 되어야 할 1호 원룸 입주자들이 맨 뒤에 자리하게 된 것만 봐도 그렇다.
고개를 저은 진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난리 났네."
수십 명의 기자들과 수십 대의 카메라들이 이쪽을 찍고 있다.
"이러다 누가 깽판이라도 치면 나가린데……"
진호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체면이 깎인다. 진호는 딱히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걱정 마. 우리 쪽도 너희처럼 매일같이 찾아 가면서 부탁했으니까."
"그럼 다행이고요."
-그럼 커팅식에 앞서 흥을 돋우고자 축하 가수의 공연을 보시겠습니다. HU 엔터테인먼트의 가수, 이설아씨입니다.
가수라는 말에는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내빈들은 HU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눈을 빛낸 진호는 긴장 가득한 얼굴로 걸어 나오는 이설아를 보곤 혀를 찼다.
'이런.'
"설아 씨, 파이팅! 아자-!"
웅성이기 시작한 공간을 꿰뚫는 외침.
"저 여가수가 이 대표의……"
내빈들은 재빨리 손을 들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대, 대표님.'
얼른 긴장을 풀라는 듯 연신 쌍엄지를 치켜드는 진호.
'……그래. 실수할 수 없어! 저렇게 용기를 낸 대표님을 위해서라도!'
숨을 깊게 들이마신 이설아는 허공을 울리는 반주를 듣다가 맨 뒤, 1호 원룸에 입주하는 세입자들을 양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가 붙들렸다.
* * *
"허허. 이 대표님께서는 정말 훌륭한 가수를 데리고 계시는군요."
서울 시장의 말은 진심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지만, 듣는 귀가 먹은 것은 아니었다.
'무하마드 형님도 정말 엄청 칭찬을 했지.'
역시 노래라는 건 대단하다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고 열변을 토했다.
배시시 웃음을 보여 주며 떠난 이설아를 떠올린 진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말을 직접 들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앞으로 하시는 일 번창하길 빌겠습니다, 이 대표님."
"앞으로도 좋은 행정, 좋은 정치 부탁드리겠습니다, 시장님."
"이 대표님께서 도움을 많이 주셔야 합니다."
-그럼 커팅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하나, 둘!
싹뚝! 짝짝짝짝짝!
"자, 찍겠습니다!"
촤라라라!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옆 사람과 악수를 나누며 1호 원룸 오픈 행사의 끝을 고했다.
그렇게 이영재와 무하마드도 스케줄 때문에 후를 기약하고 떠난 자리.
사람들이 치우기 시작한 의자에 앉은 진호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이를 갈았다.
행사 내내 억지웃음을 지으며 수 차례 악수를 나눴더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내가 진짜 다신 이런 일 하나 봐라."
진호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그건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마지막 엔딩 장면을 찍은 사람극장 제작진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대박! 대박, 대-박!'
엔딩이 정말 대박이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