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1화
무하마드가 스케줄 때문에 떠난 자리를 본 진호는 두 잔째 커피를 홀짝였다.
호록!
"이 양반도 재밌네."
사우디아라비아가 다세대주택 프로젝트에 합류한다면, 한국 국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 줌으로 써 아랍에미리트의 입지를 줄일수 있었다.
즉, 무하마드는 지금 사우디아라비아를 택할 거냐, 아랍에미리트를 택할 거냐고 대한민국 정부에 압박을 넣으려는 것이다.
"기름이 깡패지, 깡패야. ……뭐, 나야 손해 볼 거 없으니까."
아니, 이득만 본다.
무하마드는 이번 프로젝트에 중도 참여를 하며 한국의 선진화된 다세대주택 건설 기술을 수입하고 자 한다고 했다.
낙후화된 도심을 재개발하고, 헐벗은 국민들을 위해 무료로 다세대주택을 제공한다는 굉장히 큰 프로젝트였다.
이는 갑작스럽게 정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진행하려고 했던 프로젝트라고 했다.
즉, HU 컴퍼니 건설 파트의 사우디 진출이 확정됐다는 소리였다.
"역시 기름 파는 양반이라 통이 커."
방금 전 한 말을 깔끔하게 부정한 진호는 핸드폰을 들어 모바일홈 트레이딩 시스템에 접속했다.
'……건설주 미쳤네.'
현재 [스킬: 블랙 펄의 선장]이 볼 수 있는 미래 끝자락의 파도가 하늘을 뚫듯 상승하고 있다.
진호는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최 이사님, 아직 출근하기 전이면, 저 좀 보실래요? 여기가……"
사세를 확장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 * *
"저희 백호 경호를 이, 인수하고 싶다는 말입니까?"
"예, 아무래도 경호 인력을 충원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번 일만 봐도 그렇다.
결국 무하마드라는 좋은 형과 사귀게 됐지만, 그 이전에 이영재를 비롯한 사람들이 사무실이 있는 옥상에 왔음에도 그 누구 한 명 제지하지 못했다.
아니, 온 것조차 몰랐다.
보안이 취약하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아마 힘들겠지.'
알뜰살뜰 꾸려서 백호경호를 여기까지 키운 최덕재다.
백호경호가 자식 같을 테니, 인수합병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안 되면……'
진호는 따라나서는 월터를 보았다.
"월터."
"무슨 일입니까?"
"혹시 돈이 필요한데, 신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움찔!
"설마?"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배신하지 않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몇 푼 돈 따위에 흔들리지 않을 그런 사람들이요."
월터는 진지해졌다.
'이걸 대답하는 순간 최 사장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된다.'
진호는 흔들리는 월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참고로 전 그들 가족 전부의 삶까지 책임질 겁니다."
이 말은 쐐기가 되어 그의 가슴에 깊게 박혔다.
"……있습니다.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까지 범위를 확대하면 굉장히 많습니다."
"잘 됐군요. 한번 모아 보세요. 국적 관계없이요."
"……Yes, Sir!"
-우리 둘 담아 준 사진을 태워…….
차에 오른 진호는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아들, 이번 추석엔 어떻게 할거니?
심상치 않은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던 진호는 이내 피식 웃었다.
"왜? 친척집 돌자고? 아들 자랑하게?"
-미쳤니? 그 사람들 보게?
"……여행은 지금 좀 힘든데."
-왜? 많이 바빠? 할아버지, 할머니도 뵈러 못 갈 만큼?
"아……. 할아버지, 할머니."
그는 머리를 긁었다.
'우리 강아지, 우리 장손'하며 예뻐하고 귀여워해 주셨던 두 분의 모습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안 간 지도 오래됐네."
-그렇지. 네 아빠 퇴직한 이후부터 못 갔으니까…….
"알았어요. 이왕 내려간 김에 근처 온천도 가요. 1박 2일로."
-안돼. 편의점 열어야 돼.
"거 하루 안 한다고……"
-씁. 그러는 거 아니야. 장사하는 사람이 신의가 있어야지.
"……에휴, 알았어요. 그럼 성묘 다녀와서 찜질방 가요."
-아들이 풀코스 쏘는 거지? 콜! 끊는다!
'……암튼 귀엽다니까.'
옅게 웃은 진호는 운전을 하는 월터를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의 머릿속으로 무하마드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수행원도 구해야겠구나……'
뭔가 굉장히 바빠지는 것 같았다.
* * *
"에고. 에고."
"후욱! 흑!"
산을 오르는 어머니 나진희와 아버지 이형만의 숨이 거칠다.
차가 올라올 수 없는 산등성이에 산소가 있는 지라 별다른 운동도 하지 않고, 도심 생활만 해 온 두분으로서는 벅차 할 수밖에 없었다.
'10년 만에 오는 거니까.'
부모님도 그때보다 10년이나 늙었다는 소리다.
그래도 아버지는 오랜만에 조부모님을 뵐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연신 미소를 짓고 있어서 참 보기 좋았다.
"수원 돌아가면 두 분 모두 운동 좀 하세요. 골프도 좀 치시고, 수영도 좀 하시고."
"그, 그건 나중에……. 이, 일단은…… 허억! 헉! 헉!"
'에고고.'
"다 왔어요. 요 앞이니까 힘내세요."
"그, 그래!"
두 분은 환하게 웃으며 힘을 쥐어 왔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얼마 가지 않아 사라져 버렸다.
"이 씨발……"
"아버지! 엄마-!"
"흐윽!"
대체 몇 년 전부터 이렇게 방치된 것일까.
몇 년 전부터 이렇게 쓸쓸히 계셨던 것일까.
자라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기다란 잡초들과 야생 동물이 여기저기 파헤친 흔적들.
"꿈에라도 나오지! 꿈에서 말이라도 해 주지!"
이형만은 흙먼지가 수북하게 내려앉은 비석을 쥔 채 울음을 터트렸고, 나진희도 눈물을 흘렸다.
진호는 월터가 이곳보다 조금 밑에 있는 걸 감사하며 담배를 물었다.
"진짜 너무한다, 너무해."
지난 10년 동안 오지 않은 자신들이 할 말은 아니지만, 이 참담한 모습을 보니 누군가를 욕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담배를 끈 진호는 아버지 이형만의 어깨를 잡았다.
"성묘해야죠, 아버지."
"……그래. 해야지. 저 참담한 머리들 깎아 드려야지!"
이를 악문 이형만은 맨손으로 잡초를 뜯기 시작했고, 진호도 그를 도왔다. 그들은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절을 할 수 있었다.
진호는 묘비를 쓰다듬으며 입술을 달싹이는 이형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수원으로 모시죠, 아버지."
움찔!
"……담배 하나만 줘 봐."
퇴직 이후 가장 먼저 담배부터 끊으셨던 아버지.
진호는 이를 악물며 담배를 물려드리고 불을 붙여 드렸다.
이형만은 산소 앞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이 아빠 고향인 건 알지?"
"왜 모르겠어요? 옛날엔 명절 때 마다 내려왔는데."
어렸을 땐 저 아래의 작은 마을에서 잠시 동안 살기도 했다.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저렇게 작은 마을에서 이 아빠랑 네 삼촌 고모들을 키웠어. 어렸을 땐 저렇게 작은 동네가 이 아빠 세상의 전부였어."
"……."
"나중에 일하는 게 힘들어지면 내려와 살려고 했는데……. 후우."
작은 땅을 사서 부부가 일 년 먹을 농사나 지으며 살려고 했다.
'일하는 게 힘들어질수록 도시에 사셔야죠.'
슈퍼 한 번 가는 것도 힘든 이런 시골보단 도시가 백배천배 나았다.
흙바닥에 다 편 담배를 비벼 끈 이형만은 그사이 10년이나 늙어버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수원으로 모시자."
"잘 생각하셨어요. 제가 알아볼게요."
"……그래라. 네가 나보다 더 성대히 모실 수 있겠지. 갈게요. 아버지, 엄마. 곧 다시 올게요."
"조금만 참아 주세요. 아버님, 어머님."
'저도 곧 다시 올게요. 할아버지, 할머니. 그땐 정말 좋은 곳으로 모실게요.'
그들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하산했다.
* * *
그날은 결국 찜질방에 가지 못했고, 그렇게 추석이 끝났다.
추석 다음 날, 확인해 볼게 있어서 옥탑방 사무실을 찾은 진호는 화들짝 놀랐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장경아 부장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명의 과장들도 모두 출근해 있었다. 진호는 핸드폰을 켰다.
자신이 어제 6시간 잔 게 아니라 30시간을 잔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오늘까지 쉬는 날 맞는데?'
"난 분명 명절 끝난 다음에 출근하라고 했을 텐데요……"
"네! 그래서 출근 했습니다!"
"……네?"
"흐흐. 저희뿐만 아니라 건설과 엔터 파트 직원들도 모두 출근했다고 합니다!"
"……왜요?"
진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직원이 휴일에도 자발적으로 나와서 일한다고?'
이건 단체로 미쳤거나 직장에 큰피해를 끼쳤거나 집에서 쫓겨난게 틀림없다.
"다들 집에서 쫓겨난 거예요?"
"설마 쫓겨났으려고요."
"걱정 마십시오! 명절 내내 엄청 대우받고 왔습니다!"
"오히려 얼른 일하라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정말 얼마 만에 듣는 말인지! 크-!"
"아, 그래서……"
"흐흐. 예!"
풀썩 웃은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뭐, 잘 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모레에 전체 회의를 소집할까 했는데……"
직원들의 눈이 빛났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리 심각한 건 아닌데, 일단 서로의 업무를 공유해야 할 것 같아서요. 도 변호사님까지 모이라고 해 주세요."
"예!"
그들은 재빨리 각 파트에 연락을 했고, 진호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비서 같은 사람들을 구해야겠어. 그렇게 되면 이제 이 옥탑방 사무실도 안녕이라는 소리였다.
'이건 좀 아쉽네.'
진호는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건설 파트와 엔터 파트의 직원들이 모였다.
"일단 이렇게 다들 모이라고 한건 한 가지 호재를 알려 드릴 겸, 각 파트별의 업무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서로 공유하기 위해 섭니다."
사무실 테이블에 모인 직원들이 눈을 빛냈다.
"여기 최철규 이사는 알고 있는 일이지만, 곧 건설 파트가 정규 직원을 지금보다 5배 이상 더 뽑게 될 겁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얼른 호재를 말하라는 압박에 진호는 싱긋 웃었다.
"사우디에서 총 천오백 억짜리 다세대주택 건설 수주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최철규 이사를 제외한 모든 직원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우와악!"
"이사님! 이것 때문에 채용 공고 내라는 거였어요?"
다른 파트의 직원들은 건설 파트를 향해 축하의 박수를 쳐 줬다.
진호는 주식 파트 직원들을 향해 메모지에 글을 적어 보여 주었다.
=이건 총 액수가 얼마인지 모를 도시재개발 사업입니다.
메모를 읽은 장경아를 비롯한 다른 과장들과 다른 파트 직원들은 경악했다.
"설마 건설주……"
"쉿."
주식 파트 직원들이 재빨리 입을 다물자 진호는 엔터 파트 기획팀의 차지혜를 보았다.
"일주일 후 1호 원룸 오픈식에 이설아 씨 축하 가수로 세우는 거 가능합니까? 참고로 그날엔 이영재 실장님과 무하마드 왕세자, 그 지역구 국회의원과 구의원들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즉, 지상파 방송국과 각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서 촬영을 한단 소립니다."
그제야 이 자리에 불려온 이유를 알게 된 차지혜는 입술을 비틀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믿어 주십시오."
'흠? 아, 설마?'
"설아 씨가 그 기획안을 받아들인 겁니까?"
"목소리에 서린 각오부터 달라졌습니다."
'진짜?'
진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호에게 기획안을 받은 차지혜는 이렇게 말했다. 이설아가 진심으로 움직이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이 기획안은 결코 보여 주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땐 기분이 나빴지만, 맞는 말이라서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현재 이설아의 마음 상태로는 그 어떤 기획을 들고 와도 성공하기 힘들 거라는 차지혜의 독설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어쩌다?'
진호는 의아해하며 차지혜를 보았지만, 그녀는 싱글싱글 웃을 뿐 더 이상 대답은 하지 않았다.
'쳇. ……그래도 다행이네.'
어쩜 이렇게 대견한지 몰랐다.
"에이, 이거 썸 타는 사람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너무 그렇게 행복하게 웃지 마시죠?"
"푸흐흐."
"하하하하핫!"
얼굴이 달아오른 진호는 헛기침을 하며 도명안을 보았다.
"이런 상황이니 변호사님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 어떤 오점도 남기지 않게 해 주십시오."
"예. 믿고 맡겨……"
우우웅! 우우웅!
눈살을 찌푸린 사람들은 매너 없는 사람을 찾았다가 살짝 놀랐다.
최철규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받으세요."
"그, 그럼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최철규는 전화를 받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뭐어? 누가! 어떤 새끼들이! 범인은 잡았고? 알았어! 끊어!"
전화를 끊은 최철규가 다급히 돌아섰다.
그에 진호도 불안해졌다.
"무슨 일입니까?"
"어, 어젯밤 7호 원룸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철렁!
진호뿐만 아니라 직원들 모두 일어섰다.
"왜요! 무슨 일로요! 다친 사람은 없고요?"
"다행이 어젯밤 사이 일어난 일이고, 그마저도 1층만 타다 말아서 인명 피해는 없었다는데……. 화재가 발생한 이유는 방화인 것 같고, 아직 범인은 모른다고 합니다."
"……CCTV에도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까?"
"경찰에서 지금 막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새벽에 연락했는데 안받았다고……. 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최 이사님이 죄송할게 뭐 있겠습니까."
"그, 그래도 제가 어제 쉬지 않거나 좀 더 일찍 출근했으면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을 수……"
"됐습니다. 불이 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다친 사람이 없다니 다행이죠."
마른세수를 한 진호는 도명안을 보았다.
도명안이 주먹을 꽉 쥐며 일어났다.
"드디어 제가 나설 때가 된 것 같군요."
까득!
진호는 이를 갈았다.
"우발적이든 아니든 법의 무서움을 확실하게 알게 해 주십시오. 제아무리 실수라고 해도 선처 따윈 없습니다. 그게 혹여 10대 애들이 놀다가 한 실수라도 말입니다!"
"예!"
고개를 푹 숙인 도명안은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진호는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제발 근처 원룸 주인이어라.'
그렇다면 앞으로 입도 뻥끗하지 못하게 해 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쉽지만 회의는 여기서 종료하도록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휴우, 진짜 어떤 놈인지 걸리기만 해라……"
직원들은 이를 뿌득뿌득 갈며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진호도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피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우리 둘 담아 준 사진을 태워……
'응? 누구지?'
연락처에 등록되기는 커녕 난생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다.
진호는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예, 이진호입니다. 누구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이진호 대표님. 청와대 입니다.
"……예?"
진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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