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400화 (400/424)

외전 26화

툭.

영롱하게 번들거리는 두루치기를 입에 가져가던 차지혜는 진호가 한 말에 젓가락을 떨궜다. 로엠의 다른 직원들도 본인이 맞게 들은 건지 귀를 의심했다.

"예?"

"뭘 못 들은 척하세요. 유명한 프로듀서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겠냐고 물었잖습니까."

정확히는 아이돌 프로듀서지만, 현재 국내에서 유명한 프로듀서는 대부분 아이돌 프로듀서였기에 상관없었다.

리셋 라이프의 수 많은 스토리 중엔 세계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되는 스토리가 있는데, 진호는 그 스토리의 스킬을 얻고자 했다.

"저도 이제 대표로서 기획사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알아야 할 테니까요."

이는 게임 분야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래밍 스킬이야 길어도 일주일이면 얻을 수 있으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부터 해치워야지!'

이 스킬들을 얻었을 때 시야가 어떻게 달라질지, 또 어떤 마음으로 그 분야를 대하게 될지, 그리고 '어떤 걸 해낼 수 있을지'가 진호는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어제 설아 씨의 세션으로서 녹음했을 때 느꼈던 그 감동과 성취감을 매번 느낄 수 있겠지. 다른 분야의 일을 할 때도!'

마치 마약 같던 어제의 그 짜릿함을 매번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몸이 달아올라 미칠 것 같았다.

'어? 잠깐? 나 왜 일중독?'

[스킬: 블랙 펄의 선장]을 얻은 이유가 뭐겠는가.

적당히 벌어 적당히 쓰며 느긋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 일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아니지. 겨우 이 정도로 일중독이라 생각하면 안 되지. 억지로 일하는 것과 즐기며 일하는 건 다르니까!'

조금씩 늘어 가는 통장 잔고와 리셋 라이프만이 삶의 전부였던 이전의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난 언제든 놀 수 있잖아?'

이게 가장 중요한 점이다.

언제든, 얼마든지 쉴 수 있다는 것. 즉, 일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인생을 즐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이설아라는 뛰어난 가수와 합주를 할 때처럼, 월터와 영어로 이야기를 할 때처럼 다른 것에서도 성취감을 얻고 싶을 뿐이었다.

지금보다 더 낫고 즐거운 삶.

진호는 그렇게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기틀을 세웠다.

"그러니 수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꼭 유명해야 됩니까?"

"그저 그런 프로듀서보단 성공한 사람에게 더 배울 점이 많겠죠?"

맞는 말이다.

로엠의 직원들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수 많은 후보들을 떠올리고 쳐낸 그들은 이내 곧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조건에 맞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한데……"

진호는 이어지는 차지혜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

"……."

리셋 라이프를 얻은 이후 자신감과 자존감이 하늘을 꿰뚫은 진호지만, 이번 만큼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관계가 역전됐기 때문이다.

"그…… 프로듀싱에 대해 배우고 싶으시다고요."

양진혁은 희희낙락하며 진호를 찍는 카메라를 곁눈질 하고는 말했다.

움찔!

'……아, 미치겠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기획사에 소속된 '유명하고 성공한 프로듀서'에게 의뢰를 하면 레슨비 이상의 것을 토해 내야 할 테고, 기획사 소속이 아닌 사람들중에선 유명하고 성공한 '프로듀서'가 없으니 말이다.

수 많은 명곡을 쓴 작곡가들도 있지만, 그들은 작곡가일 뿐이지 프로듀서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예. 정확히는 작곡, 녹음, 노래, 댄스 등 한 명의 가수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모든 걸 알고 싶은 겁니다. 대표로서."

'프로듀싱이란 개념은 꽤나 광범위하지.'

프로듀싱이라는 게 단순히 음향기기 조작이나 편곡, 마스터링만 하면 되는 건 줄 알고 스토리를 진행했다가 처음부터 다시 한 게 몇 번 인지 몰랐다.

"아, 그런 의미의 프로듀싱이었군요……"

양진혁은 진호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냥 투자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얼마 전 일어난 사태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만 생각했다.

진호는 권력과 힘을 가진 권력자 이니 말이다.

그런 진호가 이렇게 진심으로 이 바닥 일을 생각할 줄 몰랐던 양진혁은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라면 얼마든지 가르쳐 드려야죠."

'이걸 계기로 투자받을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

기회였다.

양진혁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떤 것부터 배우고 싶으십니까?"

양진혁의 속내를 알아차린 진호는 한숨을 폭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음향기기를 조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싶습니다."

이번에 얻으려는 스킬의 1차 해금 조건은 '음향기기 조작법 배우기'였다.

'흠?'

양진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진호의 말은 기초부터 배우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진심이구나.'

보통 프로듀서는 믹싱이나 마스터링에서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음표를 다룰 줄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좋은 노래를 선별하고, 좋은 소스를 만들겠는가.

음향기기를 다루는 법은 프로듀서에겐 기초 중 기초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었고, 진호는 이 점을 조사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어느 정도는 진심으로 가르쳐야겠지.'

양진혁은 본인도 모르게 생겨났던 괄시하는 마음을 깔끔하게 지워 버렸다.

'나에 대해서도 어필할 수 있겠어!'

"……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암기에 자신이 있습니까?"

"암기요?"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셋 라이프를 얻기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다르다.

'옥탑방 스타와 무너진 바벨탑이 있으니까.'

노래를 듣는 순간 노래를 구성하는 모든 코드를 외워 버리는 암기력을 가진 [스킬: 옥탑방 스타]와 생전 처음 듣는 언어라도 며칠 만에 현지인보다 매끄럽게 구사하는 [스킬: 무너진 바벨탑]. 두뇌 관련 스킬의 최고봉인 [스킬: 전국수석]만큼은 아니라도 암기와 이해는 자신 있었다.

"예. 어디 가서 뒤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응?'

의미심장하게 웃은 양진혁은 그들이 앉아 있는 대표실의 책상 아래서 라면 박스 하나를 가져와 내려 놓았다.

쿵!

'어? 설마?'

"이걸 외우시면 됩니다. 모두."

"……네?"

진호는 박스 안을 가득 채운 책과 노트를 보며 하얗게 질렸다.

* * *

"응?"

코를 닦은 진호는 손가락에 묻은 뻘건 액체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 피다."

순간 진호의 방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피! 누가 휴지 좀!"

사람들은 난리 법석을 떨었지만 진호는 덤덤했다.

아니, 오히려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네.'

무릎에서 자고 있는 하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진호는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아!

능숙하게 휴지로 코를 틀어막고 나온 진호는 냉장고에서 커피를 꺼내었고, 제작진들은 아연실색했다.

"괘, 괜찮으세요?"

"네, 뭐. 코피는 익숙하니까요."

"익숙하다고요?"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에 급하게 돈이 필요하거나 통장에 빵꾸가 나면 공장일 말고도 노가다를 하거나 대리운전을 뛰었거든요. 그러다보니 코피는 거의 달마다 날아오는 고지서처럼 친숙한 존재였죠. 열심히 사는 증거 같아서 기분이 좋기도 했고요."

처음엔 그랬지만, 나중엔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짜증과 울분만 솟았다.

"아……"

제작진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옅게 웃은 진호는 다시 책상에 앉아 다음 장을 넘기며 중요한 부분을 체크하고 메모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와, 이게 끝나긴 끝나네.'

툭 볼펜을 던지며 눈을 감은 진호는 자신이 외운 것들을 복기하기 시작했고, 제작진은 그런 그를 보며 숨을 죽였다.

'됐어. 다 외웠어.'

대체 얼마 만에 이렇게 공부한 건지 스스로가 참 자랑스럽고, 또 대견했다.

'……솔직히 이렇게 공부하면서 옛날에 조사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면 힘들었겠지.'

이 스킬을 얻기 위해 열심히 조사했지만, 기존의 핸드폰이 리셋라이프 습득과 함께 타 버리면서 날아가 버린 자료들.

세월의 흐름 때문에 기억 속에서 잊혔던 지식들.

공부를 하다 보니 하나둘씩 떠올랐다.

'아리송한 부분이 꽤 있지만, 그건 기기를 만지면서 보충해도 돼. 그렇게 기기만 몇 번 조작하면 1차 해금이지. 그리고 곧바로 2차 해금을……. 응? 잠깐?'

2차 해금 조건을 떠올린 진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2차 해금 조건인 '댄스 배우기'.

'설마 2차 해금도 이 정도 분량을 공부해야 되는 건가?'

아니다. 그냥 이론만 살짝 배우고 메가 히트의 TKS가 연습하는 것만 보면 된다.

그렇게 하기만 해도 2차 해금 조건은 해금된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열의에 불타던 양진혁의 얼굴이었다.

'……오-. 쉣.'

진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생각해 보니 댄스라는 카테고리안에는 수 많은 장르의 춤이 있었다.

주르륵!

"대표님! 피!"

"네? 아."

코를 숙 름친 진호는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아니겠지? ……그렇겠지?'

코피를 씻어 내는 진호의 심장이 초조하게 뛰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은 심정으로 메가 히트를 찾은 진호는 환하게 웃고 있는 저승사자를 볼 수 있었다.

"다 외우셨다고요."

"네. 주신 건 다 외웠습니다."

진호는 다섯 권의 연습장을 보여주며 씩 웃었고, 양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인가?'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

진호에게 준 건 그가 처음 이 바닥에 들어와 3년 동안 배운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그 3년을 10일로 줄였다는 건 누구도 믿지 않을 이야기였지만, 필기로 빼곡한 연습장을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핵심은 파악 했을…… 어?'

뭔가를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뜬 양진혁은 빼앗듯 진호의 연습장을 가져와 필기한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해, 핵심을 잘 요약한 것 같군요……"

'어떻게?'

프로듀서 과정을 밟은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진짜 핵심들이 진호의 연습장에 적혀 있다.

진호는 의문이 가득한 그의 눈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진짜 프로듀서에게 비싼 음료수 바쳐 가며 배운 건데 핵심일 수밖에 없지.'

진호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처음엔 대견해하면서도 살짝 견제했다가, 게임을 위해서 배우는 거라는 말에 어이없어하던 트로트전문 프로듀서의 얼굴을 말이다.

'그땐 진짜 음료수값 많이 깨졌는데……. 그 형님은 잘 살고 계시려나 몰라.'

미스트로트의 김가인이라는 걸출한 인재로 인해 트로트 열풍이 새로 불고 있는 만큼 트로트 전문 프로듀서인 그 형님도 잘 살고 있을 터였다.

이런 진호의 속사정을 모르는 양진혁은 고민을 하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그 로엠이란 곳에 소속된 작곡가나 프로듀서에게 자문을 구한 것일 수도 있겠어.'

무작정 외우는 것만으로는 능사가 아니었기에 그는 더 깊게 파고 들지 않기로 했다.

"약간 뽕삘이 섞인 것 같지만……. 정말 열심히 공부하신 것 같아서 좋군요. 그럼 이제 실전으로 들어가 볼까요?"

"예!"

진호는 당연하다는 듯 크게 대답했고, 양진혁은 진호를 건물 안쪽으로 안내했다.

"여기가 제작업실 겸 녹음실입니다."

"어?"

얼마 전 들린 스튜디오에서 본것보다 더 크고 복잡해 보이는 음향기기를 발견한 진호는 살짝 놀랐고, 양진혁은 그런 진호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헤벌쭉 웃었다.

"알아봐 주시는군요? 솔직히 그동안 번 돈의 대부분을 쏟게 만든 놈입니다, 이게. 하하."

"……."

'그러니까 연습생이 아니라, 언제든 대여할 수 있는 기계에다가 가진 돈을 모두 썼다고?'

그게 투자자가 될 지 모르는 사람앞에서 할 말인가 했던 진호는 이내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생각을 달리했다.

"확실히 좋은 기기에서 좋은 음질이 나오는 법이죠. 이렇게 장비를 갖춰 놓으면 스튜디오에 아쉬운 말을 할 필요도 없고요."

"그, 그렇습니다!"

진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아차했던 양진혁은 하얗게 질렸지만, 진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선택을 칭찬했다.

"잘 하셨습니다. 어떤 일이든 시간은 중요한 법이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그, 그러면 가볍게 음원을 분리하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예."

진호는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가즈아-!'

* * *

'아, 해금했다.'

찌릿!

몸속과 머릿속의 어떤 감각이 흔들린다 생각한 순간, 귀에 들리는 소리가 달라졌다.

'흠? 뭐지?'

뭔가가 거슬린다. 방금까진 조화가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들어 보니 아니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진호는 처음부터 다시 재생했다.

"……아, 그렇구나. 미세하게 늘어지는 부분들이 있구나."

[스킬: 옥탑방 스타]의 감각으로는 잘 캐치할 수 없는 아이돌 음악의 템포.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다시 기기를 만졌고, 양진혁은 실시간으로 고쳐지는 부분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어떻게 이걸?'

양진혁은 진호를 가르치기 위해 여러 교제를 만들면서 웬만한 프로듀서도 인식하지 못할 함정도 함께 제작했다.

이는 양진혁 본인의 능력을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람이 다 끝났다고 말하면 그때 지적해 주려고 했는데!'

그런 식으로 어필하려고 했는데, 말조차 꺼내기 전에 무산되어 버렸다.

그 순간 혼란스러워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래, 요약 노트!'

"이 대표님, 혹시 전에 프로듀싱에 대해 배운 적이 있으십니까? 최소 3년 이상, 빡세게!"

"제가요? 아뇨? 하루 벌어먹고 살기 바빴는데 그럴 시간이…… 아, 제가 정답을 맞췄나 보네요. 그렇죠?"

양진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설마 진짜로 재능이 있다는 건가! 뭐 이런?'

재벌가도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 난 투자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음악적 재능도 가지고 있다.

솔직히 반칙이었다.

'정말, 저 하늘은 언제나 공평한 적이 없군.'

뛰어난 재능으로 남들보다 성공한 인생을 살아온 양진혁 본인이 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허탈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기본은 떼신 것 같군요. 다음에 배울건……"

"댄스. 댄스로 하죠."

'부디! 제발!'

진호는 간절히 빌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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