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4화
뿌드득!
"크어!"
이제 막 해가 떠오른 새벽.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던 진호는 문 위에서 이쪽을 찍는 카메라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치이익!
노릇하게 구워지는 스팸과 계란 옆에서 누렇게 끓기 시작한 된장국. 너무 이르게 시작 된 진호의 아침이지만,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말끔한 모습을 한 카메라맨들과 작가들은 살짝 놀랐다.
"반찬이 무척 간소하시네요?"
방송에선 자막으로 처리될 질문에 진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덩치라고 아침부터 막고기 구워 먹진 않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농담이에요. 사람 입맛 별거 있겠어요. 다 똑같죠."
인터넷으로 주문해도 한 캔에 1, 500원이 넘는 스팸과 62그램 특란은 예전엔 꿈도 못 꿀 사치품이었다.
'역시 비싼 건 달라도 다르지.'
짭짤한 맛이 싸구려 천 원짜리 와는 비교조차 안 되게 고급스럽다.
'그래도 좀 아쉽기는 해?'
만날 거기서 거기인 식사 메뉴는 솔직히 물릴 대로 물린 상태였다.
'흠. 진짜 요리 관련 스킬 얻을까?'
냉장고를 열어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고깃덩이를 꺼낸 그는 베란다의 창문을 열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이익!
"끼아악!"
창공을 울리는 높고 매서운 울음 소리.
"아."
카매라맨들과 작가들은 저 먼 하늘에 찍힌 점이 빠르게 다가오자 탄성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퍼드득!
"와!"
"우와!"
온갖 동물들을 만난 애니멀 팜 제작진도 감탄을 터트릴 정도로 위엄 있는 참매의 모습. 베란다 난간을 움켜 쥔 채 진호의 손길에 머리를 비비는 모습은 자못 신비롭기까지 하다.
"꾸르륵."
"그래, 너도 잘 잤어? 자, 아침 먹어."
콱!
발로 고깃덩이를 움켜쥔 참매가 고기를 뜯기 시작하자 진호는 돌아서다 아차 싶어 다시 입을 열었다.
"오후에 가족이 올 거니까 괴롭히지 마라."
오늘 드디어 하양이가 퇴원을 한다.
"꾹?"
'내 여보?'라는 말을 가볍게 무시한 진호는 아침을 마저 차린 뒤 배달 된 신문을 펼쳤다. 영자 신문에, 스페인어 신문 등 온갖 외국신문들을 본 제작진들은 화들짝 놀랐다.
"모두 이해하시는 거예요?"
"응? 당연하죠. 전 세계 증시를 돌아다니는데, 그 나라 언어를 모르면 되겠어요?"
그렇게 대답한 진호는 메모지를 가져와 중요한 점을 기록 하고는 2층에 마련해 놓은 헬스룸에 들어가 운동을 시작했다.
"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그러게. 이 대표님 엄청 스마트하시다."
거기다 등도 우람하게 크고 단단하니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여성스태프들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 * *
"한 달 내로 유가가 크게 요동칠것 같네요. 관련 정보 체크해 주시고……."
"예? 갑자기요?"
진호는 오늘 아침에 메모한 것들중 일부를 보여 주었다.
옥탑방 사무실 중앙에 놓인 둥근테이블에 모인 HU 컴퍼니 주식파트의 직원들은 메모 속 사건의 흐름을 보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확실히 저점을 찍기는 했지만……."
"흠, 그래도 가능성 있어. 유가를 조절할 때가 되긴 했지. 그래도 말도 안 되게 상승하지는 않겠는데요, 대표님?"
아니다.
약 20일 후 유가가 크게 반등하며 선물시장에 불이 질러진다.
'이 정도면 거의 원유 시설에 재해가 덮친 수준이지.'
이 재해급 파도가 사우디에서 생성된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테러려나.'
워낙 험한 동네다 보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어차피 경고해 봐야 씨알도 들어먹지도 않을 테고.'
테러 관련자가 아니냐며 잡혀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SSK나 구성에 알려 줘야 하려나……. 이영재 실장에게도.'
저마다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래도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오려고 하고 있기에 진호는 살짝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곧 추석이니 여유 자금 모두 긁어모으고 애버리지 최대로 땡겨서 떡값 좀 넉넉하게 벌어 보죠. 관련 상품과 종목들도 쭉 훑어서요."
가볍게 한탕 하자는 말.
'당분간은 자중하려고 했지만…….'
솔직히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예!"
장경아 부장을 제외하면 진호와 처음으로 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보니 세 명의 과장들은 전의에 불타올랐다.
"그러면 장 부장님?"
고개를 끄덕인 장경아 부장은 오늘 거래할 종목들을 브리핑하였고, 그 뒤를 이어 다른 과장들도 브리핑을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조 과장님은 오늘 스케줄 차질 없이 진행…… 아차, 그건 정 이사님에게 말해야 하는구나."
정구호는 합병된 회사에서 이사직을 맡게 됐다.
머리를 두드린 진호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럼 전 현장 둘러보러 갈 테니 수고해 주세요."
"옙!"
진호는 그렇게 사무실을 나섰고, 제작진들이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로 맞이했다.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치이잉! 쿠당탕! 쿵딱쿵딱!
안전모를 쓴 채 현장을 둘러본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사 속도가 빠르네요?"
"예! 이 속도라면 올해가 가기 전에 목표량의 반절은 해치울 것 같습니다! 역시 SJ더군요!"
"다행이네요. 원래 여름보다 겨울이 더 힘들잖아요."
여름이야 찬물 샤워와 얼음, 선풍기로 어찌어찌 버틸 수 있다지만, 추운 건 정말 답이 없다.
'어쩌다 수도관이라도 터지는 날엔……. 어휴.'
진호는 장경아 부장을 보았다.
"완공되는 순서대로 바로 입주준비를 해 주시고……. 음, 임대건물 관리 파트를 신설할 테니 장부장님과 최 이사님이 수고 좀 해주세요."
"예!"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현장 근처에 계약한 뷔페 식당으로 향했다.
"아이고, 사장님. 오셨습니까!"
"하하. 식당에서 말썽을 피우는 분들은 안 계시죠?"
"아무렴요! 이런 현장 또 없다고 술도 안 마시는 걸요!"
진호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식당 사장의 모습에 옅게 웃으며 다른 민원은 없는 지 물었다.
그때, 주방에서 이설아가 뛰어나오다가 화들짝 놀랐다.
"대표님 오셨…… 꺅!"
진호의 곁에 있는 카메라를 발견한 이설아는 다급히 주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지만, 이내 곧 끌려나와야 했다.
"어딜 도망갑니까, 어딜."
"하지만 카메라가! 나 생얼인데!"
"원래 이런 건 내추럴하게 오픈하는 거예요."
"아닌데! 절대 아닌데요! 자기는 화장해 놓고!"
"난 메인이니까 화장해야죠."
"나쁘다! 아, 좀 놔요!"
몸부림친 덕분에 풀려난 이설아는 재빨리 주방 뒷문으로 빠져나갔고, 그걸 보며 잘 했다고 주먹을 불끈 쥔 진호는 카메라를 응시했다.
벌써 이틀째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방금 그 아가씨가 저희 회사의 하나뿐인 가수입니다."
작가가 눈을 빛냈다.
"지금 홍보하시는 건가요?"
"네. 아니면 설아 씨를 오픈할 이유가 없죠."
이미 사전에 협의된 내용이지만, 참 골 때리는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점을요?"
"예쁘다는 거?"
"이, 이런 곳에서 일하는 착한 모습이라거나 가창력이 좋은 게 아니라요?"
"엄연히 월급을 받고 일하는 건데, 착한 모습은 무슨. 사모님, 어때요? 설아 씨 일 좀 적응했습니까?"
"호호! 그럼요! 아가씨가 참 야무져요."
"……깨트리는 거 있으면 바로바로 청구해 주세요."
"그런 거 없으니까 걱정 말아요!"
"아닐 텐데……"
고개를 저은 진호는 주방 뒷문으로 향했다.
씨익! 씨익!
당했다. 그것도 너무 뜬금없이 제대로 당했다.
"진짜 왜 저렇게 성격이 나쁘지?"
가끔 툭툭 던지는 말들이나 행동이 이렇게 속을 뒤집는다.
"나 이제 어떡해……"
생얼이 TV에 나가게 됐다. 망했다고 봐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초화장은 했다는 것이다.
"편집하겠지? 그래, 할 거야. 하나 있는 가수인데……"
솔직히 5년을 함께해 온 정구호가 10퍼센트의 지분만 남기고 모든 지분을 넘겼다는 소리에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후부터 마치 정밀한 기계처럼 빠르고 세밀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회사의 모습에 정구호의 선택이 정답이라는 것을 깨닫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일은 없지만, 이제야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모두 대표님 덕분이야!'
이렇게 주방 찬모로 일하는 건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벌기 위해서 자처한 것뿐이었다.
"하나 있는 가수니까 편집은 안할 겁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꾸며 놓은 모습만 보여요? 스마트하고 내추럴하게, 좋잖아요."
"내가 안 좋아요! 진짜! 대표님!"
이설아는 이쪽을 찍는 카메라에 다급히 얼굴을 가렸고, 진호는 그 모습마저도 귀여워서 미소를 지었다.
"안 꾸며도 충분히 예쁘니까 스케줄 갑시다. 돈 벌어야죠."
"……칫."
입술을 삐죽 내민 이설아는 진호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차를 주차해 놓은 곳에 도착할 때 즈음이었다.
"사람 그렇게 사는 거 아냐! 지금 영세 임대업자를 죽이려는 거야 뭐야-!"
진호는 삿대질을 하는 노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고, 이설아는 진호의 뒤에 숨었다. 제작진은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은 이내 곧 진호의 혼잣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영세 임대업자는 개뿔. 코딱지만한 방을 60만 원 받아먹는 게 영세 임대업자? 그딴 건물로 달에 2천 이상 버는 게 영세업자?"
상대할 가치를 못 느낀 진호는 몸을 돌렸지만, 노인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디가! 아직 내 말 안 끝났는데! 이 어린놈의 자식이!"
"STOP!"
"어, 어이쿠!"
진호는 파랗게 질리는 노인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월세 높이라고요?"
"……아니, 서로 상도의를 지키며 살자는 거지."
노인은 카메라를 의식해 말했지만, 진호는 코웃음을 쳤다.
"전 그럴 생각 없습니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그만큼 벌었으면, 이젠 베풀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어르신이라 말을 좋게 해야 하지만, 가슴이 울컥거려 말이 좋게 나오지가 않았다.
"뭐야? 이놈이 진짜!"
"그래서 어르신들 피해 안 가도록 원룸촌에서 떨어져 있는 건물을 매입한 거잖습니까."
다시 코웃음을 친 진호는 몸을 돌렸고, 남겨진 노인은 부들부들 떨뿐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투욱!
'아, 진짜 왜 이렇게 귀엽지?'
진호는 이설아가 잡아서 늘어지는 슈트에 헤벌쭉 웃었다가 이내 눈빛을 가라앉히며 핸드폰을 들었다.
'검정색으로 보일 만큼 빨간색이었지.'
원룸에 막대한 피해를 끼칠 인물이라는 소리다.
아쉬워하며 이설아의 손을 떼어낸 진호는 제작진에게서도 멀리 떨어져 최철규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최 이사님. 오늘부터 SJ에게도 알려서 보안 점검 확실히 하시고, 현장 및 현장 주변 CCTV 계속 백업해 두세요. 아무래도 가깝지만 먼 이웃이 난동을 부릴 것 같네요."
전화를 끊은 진호는 곧바로 도명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호사님, 아무래도 해 주셔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드디어 제 밥값을 하게 생겼군요. 어떤 일입니까?
"언제든 대학가 원룸촌 전체에 세무 조사가 들어갈 수 있도록 민원 넣을 준비해 주시고, 안전 점검 나올 수 있도록 구청에도 민원 제기할 준비해 주세요. 그쪽에서 수작을 부릴 수도 있으니 그에 대비도 하시고요. 활동비 무제한으로 지급하겠습니다. 명심하세요. 무제한입니다. 한도 따위 없습니다."
-……최고의 결과를 내겠습니다.
"믿겠습니다."
'건드리기만 해 봐. 얄짤 없어.'
그 놀부 심보를 모두 박살을 내줄 생각이었다.
* * *
-띠리링.
가제 싱어송라이터 속 노래들을 녹음하기 위해서 오늘 하루 대여한 스튜디오를 찾은 진호는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노래에 미간을 찌푸렸다.
'애매한데?'
[스킬: 옥탑방 스타]가 말하고 있다.
이건 그 누가 와서 불러도 차트인은 하기 힘들 거라고 말이다.
그는 가이드 녹음을 들으며 고개를 까딱이는 펄 게이트 사람들을 보았다.
"어때요?"
"……솔직한 심정을 말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라고 모이라 한 건데요. 여러분이 만들 게임에 들어갈 곡이잖아요."
"그러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몇 십만 원짜리 음악만 써 온 저희가 뭘 알겠습니까. BGM은 자신 있지만…… 아하하."
'게임 음악 전문가를 영입해야 하려나…….'
진호는 이설아를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부를 곡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어떻게든 입에 붙여 보려고 따라 부르고 있다.
'아직은 이 정도인가.'
좋다, 나쁘다를 생각하지 않을 수준.
앞으로 좋은 음악만 듣고, 좋은 노래만 부르다 보면 자신만의 음악 세계관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겠지.'
진호는 A&R 팀의 부장 김상혁을 보았다.
"이게 전부인가요?"
"다른 곡도 들어 보시겠습니까?"
"오, 있어요?"
김상혁은 대답 대신 다른 노래들을 틀었다.
"음."
"지금 할당된 예산으로는 이 정도 레벨이 최선입니다."
"김 부장님이 추천하는 곡은요?"
"5번 트랙과 17번 트랙입니다."
"기승전결 중 기?"
김상혁은 화들짝 놀랐다.
정구호와 이설아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알아차리셨습니까?"
"네, 뭐……. 노래가 중독성은 있지만, 빈티가 좀 있고 어색하더라고요. 게임 속 설아 씨가 무명으로 전전하는 시절을 나타내기엔 알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맞습니다, 대표님! 와, 진짜!"
이전 기획사에서도 알아주지 않았던 걸 이곳에 와서, 그것도 음악과 전혀 상관이 없는 진호가 알아줄 거라고는 생각 못한 김상혁은 엉덩이를 들썩였고, 진호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이 사람 진짜 천재네.'
'들리는 노래'를 '시각화'한다. 노래에 스토리를 집어넣는다.
결코 평범한 재능은 아니었다.
'옥탑방 스타도 이와 비슷한 재능이니까. ……그런데 말이 통한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 건가?'
비슷한 레벨의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즐거웠다.
"설아 씨는 어떤 걸 택하고 싶으세요? 5번? 17번?"
"저, 저요?"
"설아 씨가 불러야 할 노래잖아요. 감정이입이 돼야죠."
"으음. 하지만……"
"괜찮아요. 골라 봐요.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 없어요."
"지, 진짜요?"
진호는 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용기를 얻은 이설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 노래를 찍었다.
"아뇨, 전 이거요. 15번 트랙. 정말 처음부터라면 전 이걸 부르고 싶어요."
"네?"
'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노래.
노래의 가사를 떠올린 진호와 김상혁은 눈을 크게 떴다.
'너무 희망차서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왜죠?"
"고작 3년 차라면 포기하지 않을 때니까요……"
진호는 부끄러워 하는 이설아를 멍하니 응시했다.
'곡을 고르는 안목이 있었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진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