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2화
'인지도라……'
이영재의 설명은 길었지만, 요약하자면 두 가지로 나뉘었다.
HU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는 점과 무슨 일이 생길 때 지지 세력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흠."
나쁘지는 않다.
진호는 모두가 가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옥상에 앉아 맥주를 들이켰다.
탁! 치익!
"후우우."
'해야겠지?'
지지 세력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직원들의 의욕 고취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유의 일부분을 포기해야 하기에 약간은 망설여졌다.
"……아오. 돌겠네."
단숨에 한 캔을 비운 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내일 정신 차리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원래 중요한 결정은 결코 술김에 하는 게 아니었다.
언젠가 술김에 동료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큰 낭패를 본 적이 있은 후부터 생긴 지론이었다.
"으그그. 그럼 나만의 2차를 생각해 볼까?"
노화를 제외한 모든 질병을 막아내는 깨끗한 신체 [스킬: 아이기스]가 간마저 10대의 그것으로 바꿔서 그런지 여간해선 만취하지 않게 된 그였다.
그렇게 옥상을 빠져나가려던 진호는 저벅저벅 옥상으로 올라오는 작은 발 소리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음?'
"어? 설아 씨?"
"……사장님."
달큰하게 퍼지는 목소리에 진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촉촉하게 젖은 이설아의 눈망울이 무언가를 무척이나 갈구하고 있다.
'어, 어라? 이, 이거 설마?'
아니겠지. 이런 미인이 왜 내게 먼저 고백하겠어라고 포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시죠?"
진호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목소리 떨지 않고 제대로 말했다.
"그, 그게……"
"네."
'자! 어서, 어서요! 우리 서로 원하는 말을 하기로 해요!'
진호의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맺혔고, 갈등하던 이설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에라이!'
"정말 감사합니다!"
"……밤이 늦었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그, 그리고……"
"그리고?"
무언가 할 말이 더 남은 듯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이내 다시 허리를 푹 숙이고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고, 잔뜩 기대했던 진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밀당 같은 거 싫은데."
정확히는 밀당 같은 행위에 시간과 정신을 낭비하기 싫어진 것이다. 30대는 그런 나이였다.
'그래도……'
마지막 우물쭈물한 그녀의 반응은 충분히 이쪽으로 하여금 행복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해서 기분이 좋아진 진호는 7층 엘리베이터 정면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쏴아아! 타악!
"역시 훌륭한 몸이야."
소중이도 듬직하고 흘륭해서 매일 거울 앞에 서는 게 즐거웠다.
반바지만 입은 채 소파 앞 바닥에 앉은 진호는 맥주 캔을 따며 영화 채널을 켰다. 술 마실 때는 영화가 최고였다.
띵동! 띵동!
"아, 먹태 왔나 보다. 네, 나가요!"
후다닥 달려가 현관문을 열며 손을 내밀었던 진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 사장님?"
얼굴이 시뻘건 정구호 사장.
그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서 있었다.
오늘 무슨 일인지 계속 낯빛이 어두웠던 정구호의 모습을 떠올린 진호는 표정을 싸늘히 가라앉혔다.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 * *
'대표님은 몸이 좋구나.'
분명 운동선수를 연상케 할 만큼 근육질의 몸이었다.
위협적이기까지 한 그 몸은 살만 뒤룩뒤룩 찐 일반 매니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설마 공장 일이 아니라……'
부르르!
'아니야. 그런 사람은 절대 아니야.'
머릿속에 차오르는 나쁜 생각을 털어 낸 정구호는 진호가 내미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둘은 잠시 커피 타임을 가졌다.
……탁.
"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만약 술주정을 하려는 거라면……'
정말 아웃이다. 무례한 사람과는 같이 일을 할 수 없었다.
"후우……. 대표님."
"말씀하세요. 단, 깊이 생각하고 말씀하셔야 할 겁니다."
움찔!
'진짜냐……'
눈빛이 더 차가워진 진호는 고개를 숙인 정구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이제야 마지막 미련을 털어 낸듯 벌떡 고개를 든 정구호는 진호의 두 눈을 또렷이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제 지분을 모두 양도 하고 싶습니다."
'뭐?'
진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제 생각보다 더 형편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포기하겠다고? 이제야 앞으로 나아가려는 설아 씨를 두고?'
분노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압니다. 그래서 제 지분을 5퍼센트, 아니 10퍼센트 남기려고 합니다."
……까드득!
"당신, 그 말을 안 했으면 나한테 처맞았어."
각오를 깊게 한 정구호지만, 지금만큼은 오금이 저렸다.
"죄송합니다."
진호는 혀를 찼다.
'10퍼센트의 지분은 설아 씨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일 터.'
그게 정구호가 걸레가 되지 않게 된 이유였다.
"이유가 뭡니까?"
"오늘 일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전 차 부장을 비롯한 직원들과 설아를 이끌 자격이 없다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기초부터 배우려고 합니다."
"……제게 시간을 달라는 거군요."
"그리 오래 귀찮게 하진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 시고, 내일 다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대표님! 저는……!"
"제 지론 중 하나가 술 마신 사람이 하는 말은 절대 믿지 마라입니다. 내일 맨 정신으로 다시 생각하고 이야기해 주세요. 저도 맨 정신으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으니."
"아……. 죄, 죄송했습니다!"
그제야 진호를 배려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후다닥 일어난 그는 연신 사과를 하며 현관문을 나갔고, 남겨진 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골치 아프네."
정구호의 결심은 아마 내일이 되도 바뀌지 않을 터였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로엠 컴퍼니의 지분을 소유하게 된 이상 설아 씨와는 자주 만나게 될 것이고, 자주 만나게 되면……'
"으흐흐!"
아차하며 고개를 저은 진호는 눈을 빛냈다.
"그래. 방송에 출연하자."
이설아가 모르는 멋진 모습들을 보여 주고 싶었다.
* * *
"왜죠?"
"뭐가?"
"난 분명히 방송을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한 것뿐인데요?"
"그래서 내 방송에 출연하면 가르쳐 준다고 했잖아."
"그게 나 홀로 산다라고는 말하지 않았잖아요."
"나 이거 말고 다른 예능에는 출연 안 하는데?"
진호는 이죽거리는 경훈을 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때릴까?'
"어! 그러는 거 아니야! 어허, 형 화내?"
"아나, 이 뺀질이. 진짜 형만 아니었으면…… 어후."
이래서 술 먹고 결심하면 안 되는 거다.
고개를 저은 진호는 PD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당황한 나머지 실례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 아닙니다! 경훈이 씨가 설명을 제대로 못한 탓이죠!"
PD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국내 모든 재벌가들을 비롯해 세계 유수 투자 회사들과 은행들이 팔로우하는 슈퍼 개미! 개천에서 승천한 용! 일본 침공의 선봉장!'
성격상 강짜를 부릴 생각도 없지만, 강짜를 부렸다가는 영원히 이바닥에서 떠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무서운 존재가 바로 진호다.
'거기다 방송 출연은 우리 방송이 처음!'
벌써부터 전국의 모든 주식 개미들이 방송을 시청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어휴. 몸이 정말 좋으시네요. 배도 안 나오셨고."
"얘 알몸 보면 더 대단해요. 피부는 완전 아기 피부 같아서……"
퍽!
"크억?"
진호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무릎꿇은 경훈을 향해 웃어 주었다.
"쓸데 없는 말은 하는 게 아닙니다. 나도 한 번 형 프라이버시 떠들어 볼까요? 들은 게 많은데?"
PD를 비롯한 제작진의 눈이 번뜩이자 '뼈, 뼈'를 중얼거리던 경훈이 하얗게 질렸다.
"형이 미안해!"
"……아주 한 번만 더 그래 봐라. 아, 이 입 가벼운 형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하하하. ……그보다 정말로 피부가 좋으시네요, 대표님! 아니, 왜 이렇게 좋으시지?"
화제를 돌리려 진호의 피부를 살폈던 PD뿐만 아니라 오늘 촬영을 온 제작진도 깜짝 놀랐다. 피부 모델 저리 가라 할 만큼 잡티 하나없는 애기 피부였기 때문이다.
"아하하. 돈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니 피부가 좋아지더라고요."
"오! 스트레스!"
"스트레스는 무슨. 그 악마 고문용 해독 주스 때문이겠지."
진호는 싱긋 웃었다.
"경훈이 형이 얼마 전 청담동에서……"
"악! 악! 잘못했어!"
"……쯧, 아쉽네요. 보낼 수 있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아쉽군요."
"이 사람들이 진짜! 이러깁니까?"
다시 웃은 진호는 검지와 중지로 본인의 눈과 경훈의 두 눈을 번갈아 가리키며 'I see you.'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경훈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이 모습은 가감 없이 카메라에 담겼다.
"자, 그럼 이제 대표님께서는 평소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 주시면 됩니다."
움찔!
"음. 평소 모습이라……. 방금 전 그게 평소 모습인데요……"
"……네?"
PD는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어……. 그러니까 파라솔 아래앉아 기타를 치시며 맥주를 마시는 게요? 컨셉이 아니었던가요?"
그 유명한 참매도 테이블 위에서 기타 연주에 몸을 흔들고 있었기에 방송에 출연한다고 무리한 설정을 한 줄로만 알았다. 개그로 말이다.
"네. 얼음물에 발 담그고 이동식 에어컨 바람 맞으면서 노는 게 평소 하는 일입니다. 국내 파트는 제 소관이 아니기도 하고, 장 마감 시간도 지났으니까요. 이러고 두 시간 정도 놀다가 건설 파트의 일을 보러 갑니다만…… 아무래도 좀 더 그럴듯한 모습을 보이는 게 좋겠죠? 방송 이미지상?"
"그,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그럼 노트북으로 설렁설렁 작업하는 모습을 보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한 PD는 다시 촬영을 이어 갔다.
"카메라! 롤-!"
타악!
"그래서 너 지금 뭐하는데? 일하는 중이야?"
"그냥 뭐……. 정보 수집중이죠."
"뭔데? 무슨 정보인데?"
타악 소리 나게 노래가 흘러나오는 노트북을 닫은 진호는 입꼬리를 뒤틀었다.
"이 형님 안 본 사이에 간이 많이 커지셨네. 이게 얼마짜리 정보인지 알고 보려고 하실까? 감당가능?"
"……아뇨."
쭈구리가 된 경훈은 참매를 끌어안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갑자기 왜 방송을 알려달라는 거야? 너 이런 거 싫어하지 않았어?"
"아, 이번에 어쩌다 보니 로엠 컴퍼니라는 영세 기획사 하나를 인수 합병했는데, 대표로서 방송 쪽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흠칫!
경훈뿐만 아니라 PD와 제작진도 동요했다. 처음 듣는 정보이기도 했지만, 기획사라면 방송 쪽이었기 때문이다.
"인수 합병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이었구나……"
"인수 합병이 뭐 어렵다고. 백만 원만 있으면 인수 합병을 할 수 있는 회사들이 넘쳐나는데. 왜, 리스트 만들어 줘요?"
"뭐? 진짜?"
"네. 대신 그 뒤에 법정 관리를 받아도 내 책임 아닙니다."
"……에이, 그게 뭐야. 괜히 설랬네."
PD와 제작진도 아쉬워했다.
진호는 코웃음을 쳤다.
"배우면 연기에만 집중하세요. 괜히 엄한 데 한눈 팔지 말고."
"아니, 나도 이제 재테크를 신경써야 되는 나이라서……. 그래서 그런데 장기로 투자할 수 있는 종목이 있을까?"
"SJ전자 사요. SSK나 GL도 괜찮고, 다른 20대 안쪽 기업도 괜찮아요. 20대 기업 안까지 올라오면 그 밑으로 잘 내려가지 않으니까."
"아니, 그런 거 말고!"
"……하아, 이러니까 사람들이 한강 가지. 이보세요, 방경훈 씨. 뉴스 안 봐요?"
"뉴스?"
"SSK가 국내에 불화수소 공장을 짓고 있고, 포토레지스트가 순수 국내 기술로 상용화됐어요. 그 외에도 국내 기업들이 그간 일본 기업이 국내에서 차지하던 비중을 먹어 치우고 있다고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아! 국내 기업들의 몸집이 커지겠구나!"
"호재가 제대로 터지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으니까 투자할거면 지금 이 타이밍이에요. 아, 물론 투자는 여유 자금 중 일부만."
"어? 왜?"
"원래 주식은 여유 자금 중에서 일부만 가지고 하는 거예요. 전문가도 나가떨어지는 게 이 바닥인데, 몰빵했다가 지하실 보면요?"
"그렇구나……"
"이 바닥 로우리스크, 로우리턴이란 법칙은 없습니다. 욕심 부리면 무조건 지하실 봅니다."
"무, 무섭네."
진호는 싱긋 웃었다.
"그래서 오늘 뭐 할 거예요? 참고로 저 지금 거의 내부 거래 수준의 정보를 준 거고, 오늘은 황금보다 귀한 불금입니다."
"으응? 어…… 서핑 할래?"
"콜!"
"……오케이! 잠깐 끊어 가겠습니다!"
"상철아! 물!"
'오?'
갑자기 부산해지는 제작진들을 흥미 어린 시선으로 보기 시작한 진호에게 PD가 다가왔다.
"와, 이 대표님. 말 잘 하시는데요?"
"하하. 그래요? 감사합니다."
솔직히 진호 본인도 놀라는 중이었다.
"방금 내용 아주 좋았습니다. 공익적인 측면으로 사회에 일침을 가할 수도 있으니 편집 없이 내보내도 되겠습니다."
"아하하. 그럴 목적은 아니었는데……"
PD는 머리를 긁는 진호를 존경한다는 듯 보다가 이내 낯빛을 굳혔다. 그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진호는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시죠?"
"그게…… 음."
"편히 말하세요."
PD는 갈등을 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후우. 방금 전 로엠 컴퍼니를 인수하셨다고 하셨는데, 혹시 요사이 로엠 컴퍼니에 일어난 일을 알고는 계시는 겁니까?"
이번엔 진호의 낯빛이 굳었다.
"네. 당연히 알고 있죠. 그래서하는 말인데……"
진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MBS의 가장 높은 분께 제 말 좀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MBS의 주주인 HU, 아니 HU 컴퍼니의 대표 이진호가 좀 뵙고 싶다고요."
"……예?"
PD뿐만 아니라 제작진 모두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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