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1화
이영재와 이서형뿐만 아니라 SSK의 최인호 부사장, 그리고 생전 처음 본 남녀도 세 명 있었다.
각기 이영재와 최인호가 데려온 이들이었다.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고 온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정중한 이영재의 인사에 번뜩 정신을 차린 진호는 뒤에 있는 직원들을 둘러봤다.
그들은 진호를 존경한다는 듯 바라본 뒤 이영재와 최인호 부사장등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영재 실장님도 어찌 보면 한 식구인데 같이 드시죠. 최 부사장님도요."
"헛. 저도 말입니까? 그래도 됩니까?"
세 명의 남녀도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
진호는 이영재를 보았다.
끄덕.
"들어오셔서 앉으세요. 고기가 많습니다."
"……그러면 염치 불구하고 실례 좀 하겠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GL의……"
모두 대한민국 20대 기업 로열가의 구성원들이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오던 그들은 살짝 놀랐다. 야외임에도 여름날의 더위가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그들은 곧 이유를 알아차리고는 눈을 빛냈다.
"이동식 에어컨을 준비하셨군요."
그것도 수십 대가 한꺼번에 돌아가고 있다.
"이런 날엔 야외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니까요. 이런 조치도 안 한다면 욕먹습니다. 그리고 1박 2일 렌탈하면 쌉니다."
"그렇습니까?"
눈을 빛낸 이영재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마저 생각에 잠기자, 진호와 다른 눈치 빠른 직원들은 각기업의 직원들을 향해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마음속으로 아주 잠깐 말이다.
"SJ 브랜드만 렌탈하는 곳도 있는데 모르셨나 봅니다?"
"그렇게 훌륭한 곳이 있단 말입니까?"
"으흠. 그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가전은 GL이라는 걸 모르나 보네요. 다음부턴 저희 GL을 이용해보세요. 10년 동안 켜 놓아도 도중에 꺼질 걱정은 절대 안 하셔도 됩니다."
……꿈틀!
"에이! 그건 아니지, 허민지 본부장. 전자는 SJ 제품을 써야지. 우리가 왜 세계 최고겠어? 저 쪼 아래에 있는 GL보다 여러 면에서 우월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툭 치면 고장 나 버리는 브랜드는 어디? 고작 태풍도 못 견디고 망가지는 브랜드는 어디?"
"뭐야?"
순간 분위기가 험해지자 진호의 직원들은 고래 싸움에 등 터질까 안절부절못했지만, 진호는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들과 같은 선상, 아니 더 높은 곳에 설수 있다 보니 딱히 겁이 나지 않았다.
'초딩끼리 싸우는 것도 아니고……'
고개를 저은 진호는 자신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서형과 다른 이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래서 이 대표님이 자랑 하신 매는 어딨습니까?"
최인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눈을 빛내고 있다.
그제야 이들이 찾아온 이유를 깨달은 진호는 피식 웃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펄쩍! 펄쩍!
"어머. 어머머."
"오오."
동물원에서 조차도 위험하다고 가까이 할 수 없는 동물인 매.
진호는 그들에게 위생장갑과 작게 자른 고기를 내밀었다.
"병원에서 소독해서 깨끗하고, 굉장히 순해서 물지 않으니까 마음껏 데리고 노셔도 돼요. 안아도 됩니다."
"저, 정말요? 눈을 쫄 수도 있어서 얼굴에서 멀리 떨어트려 놔야 하지 않나요?"
"얘 배고플 때 하는 짓 중 하나가 사람한테 안기는 거거든요. 아주 강아지가 따로 없어요. 발톱만 조심하시면 됩니다."
[스킬: 페로페로몬]의 반경 안에 있는 이상 매는 결코 진호의 뜻을 거를 수가 없다.
"오오?"
"우쭈주. 이리 온?"
"꾸룩! 쩝쩝쩝! 꿀꺽!"
"오! 먹는다, 먹어!"
"어머머!"
진호는 금세 참매의 매력에 빠져버린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는 자리에 앉았고, 아무도 집중해 주지 않아 말싸움이 흐지부지 끝난 이영재와 허민지도 진호의 곁에 앉았다.
그들은 매와 어울려 노는 지인들을 부럽다는 듯 보았다.
그러다 이영재는 그 모습에서 번뜩 떠오른 것이 있어 눈을 빛냈다.
'이거 잘 하면 그림이? ……그래, 이 대표의 이미지 메이킹을 도울수 있겠어!'
앞으로 계속 함께하고 싶은, 아니 그 능력이 다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옆에 잡아 둬야 하는 존재가 진호다.
진호의 이미지가 좋아지는 건, 거기에 도움을 주는 건 결국 이영재 본인에게도 득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진호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술병을 들었다.
"자, 한잔 받으시죠."
"아, 전 소맥으로 하겠습니다."
"저도요! 첫 잔은 역시 소맥이죠!"
사람들은 그런 둘을 신기하다는 듯 보았다.
'재벌도 소맥을 마시는구나……. 양주나 포도주만 마실 줄 알았는데……'
이런 누추한 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참석한 것도 신기했다.
"크. 역시 배운 분들이라 술 드실줄 아시네요. 그럼 황금 비율로 따라드리겠습니다!"
"황금 비율이요?"
"……와, 이걸 모르시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마셔 보면 압니다."
진호는 공장 선배들에게 배운 비율대로 소맥 폭탄주를 제조했다.
마지막 화룡점정은 역시나 숟가락을 이용한 거품 일으키기였다.
땅! 쏴와아!
"엇?"
"우오두!"
"자, 일단 잡숴 보세요. 한번 맛들리면 필름이 끊길 수밖에 없는 폭탄주니까요."
쨍!
약간 미심쩍어하면서도 입 안으로 술잔을 기울인 그들은 이내 곧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원샷을 했다.
"아니, 이건?"
진호는 푸근히 웃었다.
"괜찮죠?"
"……정말 맛 들리면 필름이 끊길 수밖에 없겠군요."
지금껏 많은 소맥을 마셔 왔지만, 이렇게 부드럽고 맛있는 건 처음이었다. 허민지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고,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살짝 기뻐했다.
인정받은 것 같기도 하고, 동질감도 느껴지는 등 여러모로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흥겨운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 * *
"하하."
"호호."
'칫!'
재벌들, 그리고 다른 나이 든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진호의 모습에 이설아는 괜스레 뿔이 나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까까진 나만 신경 써 놓고!'
비슷한 또래의 재벌가 구성원들, 그중 여성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굉징히 거슬린다.
너무도 세련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것도 모자라 직책도 대단한 여성들.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다 성형…… 응?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화들짝 놀랐던 그녀는 너무도 낯선 자신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했다.
제대로 된 연애 경험 한 번 없는, 항상 먼저 다가온 이들을 받아들이기만 해 봤던 그녀로서는 이런 감정은 굉장히 낯설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상경해 가수의 길에 매진한 이후로는 연애를 멀리 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게 당황하던 그녀는 이내 곧 입술을 깨물었다.
"…… 싫어."
낯선 자신의 모습이 싫지만, 더 싫은 건 진호에게 엉겨 붙는 여자들이었다. 다른 여자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진호의 모습도 지금만큼은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자리에 끼기도 싫었다.
흠칫!
'진짜 나 왜 이러지? 술을 많이 마신 건가?'
확실히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평소 주량을 넘기긴 했지만, 아직 정신은 멀쩡했다.
"안돼. 사람이 먹는 건 먹으면 안돼. 아……"
당황하던 그녀는 혹시 몰라 챙겨온 기타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설아야, 노래 부르게?"
"……네!"
"잘 생각했어! 이런 자리엔 노래가 있는 게 좋지!"
"……그건 그런데, 왜 그렇게 좋아하세요?"
"내, 내가? 아닌데?"
눈을 가늘게 뜨며 정구호를 응시하던 그녀는 이내 기타케이스를 벗겼다. 정구호보다는 진호가 더 신경 쓰였다.
'다시 날 봐!'
이설아는 기타 현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기회를 얻지 못한 실력 좋은 가수 이설아의 진심과 전력을 담은 노래가 옥상 위에 퍼져갔다.
디리링!
"브라보!"
"휘이익! 휘이익!"
"와, 이것도 좋은데? 정 사장님, 이번에 무슨 노래예요?"
"이번엔 저희 가수 3집 타이틀곡입니다!"
'……흥!'
밝게 웃으며 박수를 치는 진호의 모습에 약간 마음이 풀린 이설아는 세 곡이나 연달아 친 기타를 내려놓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펄 게이트의 세 남성이 다가왔다.
이설아는 여태까지 남자들이 많이 보냈던 눈빛과 똑같은 눈빛을 짓는 그들의 모습에 다시 뿔이 났다.
'올 사람은 안 오고!'
"저……"
"죄송하지만, 지금은 연애에 관심없어서요."
움찔!
"네, 저도 관심 없습니다. 전 제 여자 친구도 과분하거든요."
"저도 제 부인이면 충분합니다만."
"……네?"
잠시 멍해졌던 이설아의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 그러면 무슨 일이신데요?"
그녀는 본인의 실수를 감추고자 뾰족하게 말했다.
"아, 다름이 아니라……"
"무슨 일입니까? 설아 씨, 이 사람들이 귀찮게 합니까?"
'그랬기만 해 봐! 확 씨!'
이설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장님!"
진호의 살벌한 눈빛을 받은 세명은 하얗게 질렸다.
"그런 게 아닙니다, 대표님! 저희는 여기 이설아 씨를 대상으로 게임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 여쭤 보려 했던 겁니다!"
외침이 커서일까. 옥상이 잠시 조용해졌다.
"게임이요?"
"예!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그래, 이거! 이거였어!'
얼마 전 떠오른 생각이 말이다.
이들의 평균 다운로드 숫자는 30만이다.
'30만 명중 100분의 1만이라도 설아 씨에게 관심을 가져 주고, 음원을 구입해 준다면?'
그녀에게 3천 명의 팬이 새로 생기는 것이다.
"……자세히 좀 듣고 싶군요."
진호의 눈빛이 진지해지자 그들도 자세를 바로 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아셔야 할게, 육성 시뮬레이션의 다운로드 숫자는 굉장히 높습니다. 주 타깃 층이 10대와 10대 이하의 여성이라서 구매력도 좋습니다. 이 중 여성향인 오토메 게임과 신데렐라 육성 시뮬레이션 등은……"
"본론은요?"
"애니메이터만 제대로 쓴다면 충분히 구매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BGM 이나 특정 유료아이템 등에 여기 이설아씨의 목소리가 녹음이 된다면 수익 창출도 될 테고요."
"톱가수로 육성을 한다면 진짜 존재하는 공연장을 배경으로 써서 몰입감을 높일 수도 있습니다."
"오호?"
진호뿐만 아니다. HU의 주식 파트 직원들과 로엠 컴퍼니의 직원들도 눈이 커졌다. 특히 기획팀의 차지혜가 과도한 관심을 가졌다.
"그거 정말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아니, 훌륭한 아이디어입니다!"
진호는 그녀의 과한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습니까?"
"예! 저희 다노에서도 남자 아이돌을 캐릭터 삼아 똑같이 진행하려다가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포기한 프로젝트니까요!"
진호는 눈을 빛냈다.
"왜죠? 남자 아이돌은 캐시카우가 아니었던가요?"
"투자자와 주주들이 용납지 않는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게임을 완성시킬 때까지 3억 이상의 돈을 들여 놓고 사람들이 다운, 아니 결제를 하지 않으면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3억이요? 어떤 퀄리티의 게임이요? 가격이 너무 애매한데?"
"인형놀이처럼 캐릭터가 별다른 동작을……"
"아, 그런 수준이면 양아치네요."
"맞아. 3억이면 캐릭터가 브레이킹 댄스는 못 추더라도 율동 정도는 하게 해야지. 이런 놈들 때문에 우리 같은 선량한 개발자가 욕먹는 거지."
진호는 열심히 떠드는 그들을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가능하겠습니까?"
"여기 이설아 씨가 도와준다면 제작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퀄리티에 따라 4개월 정도 걸릴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요? 설아 씨 생각은 어떻죠?"
흠칫 몸을 굳힌 이설아는 진호가 자신을 신경 써 주는 것에 잠시 기뻐하면서도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정구호를 보았다.
그런데 그의 낯빛이 어두웠다.
"사장님?"
"으, 응? 아, 좋은 기회네! 해라! 아니, 이런 걸 놓치면 안 되지! 하자!"
잠시 의아함이 들었지만, 일단 정구호의 허락도 떨어졌기에 이설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게요! 하게 해 주세요!"
"오오!"
"와아아!"
사람들은 술술 풀려 버린 일에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 * *
"이 대표님의 주위는 참 재밌는 일이 많군요."
이영재는 진심이었다.
방금 전 모든 부서가 서로 유기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프로젝트의 뼈대를 잡아 가는 건 인에서 태스크 포스팀을 운영해도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각 부서와 개인의 이득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서 더 그렇지.'
어찌 보면 기업의 경영자들이 꿈꾸는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구성원의 숫자가 적기에 보일 수 있는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호의 리더십이 뛰어나지 않다면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다른 재벌가의 구성원들도 이영재와 같은 생각이었다.
'역시 친해져서 나쁜 인물이 아니다!'
그들의 욕심은 더 깊어졌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은 이영재는 난처해하는 진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중심을 잡고 조율을 하던 진호의 모습을 보니 얼마전 고민하다만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참매, 이 대표. 그리고…… 엔터!'
"이 대표님."
"예?"
"혹시 방송에 출연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예?"
사람들은 멍하니 이영재를 보았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