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화
4. 이름을 알리다
"어?"
6월의 어느 날, SJ 증권의 직원인 방성규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엉덩이를 들썩였다.
"왜? 무슨 일인데?"
"과, 과장님! 슈퍼 개미가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뭐?"
과장뿐만 아니라 팀원 모두가 화들짝 놀라 다가와 방성규의 모니터를 바라봤다.
약 한 달 전, 주식 판에서 떠났다 여겼던 슈퍼 개미가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 한 달간 전 세계 증시를 활발히 돌아다니며 말도 안되는 수익을 올리더니 다시 사라져 버렸다.
그에 증권가 사람들은 확신했다.
'슈퍼 개미가 막대한 손실을 일으킨 이들을 자르고, 팀을 새로 짰다. 그리고 털어먹을 건 다 털어먹어서 쉬고 있다.'
엘리트 중 엘리트인 증권맨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무지막지한 팀. 그에 증권가는 전담 모니터링 직원까지 두며 슈퍼 개미의 다음 행보를 주목했다.
"뭐, 뭐야. 이거?"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얘, 얘들이 여길 왜 공격해! 갑자기 왜!"
"일본?"
일본뿐만이 아니다.
슈퍼 개미의 막대한 자금 중 일부가 한국에도 공격 포지션을 잡고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재빨리 전화기를 들었다.
"김 대리! 지금 일본에 무슨 일있는지 살펴봐! 디스플레이, 반도체, 여행, 주류 등 그냥 다 살펴봐!"
"응! 그래, 나야! 일본 모리타 화학 내부 사정 좀 살펴봐!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순식간에 떠들썩해지는 사무실에 과장은 방성규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했어. 무슨 일로 일본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보너스 기대해도 좋을 거야."
"하하. 예! 감사합니다!"
'선배한테 정말 고맙다고 해야겠네!'
방성규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활짝 웃었다.
그렇게 슈퍼 개미가 일본을 공격한다는 소식에 한국 증권가가 뒤집어졌다.
* * *
'역시 요동치네.'
몇 달 전에 봤던 파도보다 낙폭이 더 큰 파도들이 생기고 있다.
'태풍이 몰아치는 것 같아.'
진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바다에 돌을 던져 봐야 아무런 티도 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쫒는 보석을 던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런데 이런데도 파도가 잠잠해질 생각을 안 한단 말이지?'
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도 한 달후의 파도가 잔잔해질 생각을 않는다. 지금 당장 자금을 빼버린다고 가정을 해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기획하고 있는 일은 무조건 일어난다는 소리였다.
"대표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아서 장렬히 폭발해 버린 사람이 진호다. 이 프로젝트가 반절의 성과만 얻어도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진호를 찾게 될 것이다.
그중엔 분명 돈과 권력을 갖춘 사람들도 있을 터였다.
"네? 아, 괜찮을 거예요. 어차피 다 던져 버릴 거니까."
"……예?"
진호는 모니터를 두드렸다.
"한 30퍼센트만 놔두고 모두 던질 거예요."
'한국 증권가에 경고한 뒤에.'
남은 30퍼센트만 해도 어마어마한 액수다.
진호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장경아는 그런 진호를 존경스럽다는 듯 보았다.
'대표님은 정말 욕심이 없으시구나!'
그렇기에 이렇게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30퍼센트만 먹는다면 위험도는 극히 낮아져. 당한 측도 체면을 차리는 거니까.'
그렇다고 해도 찾는 사람이 많아질 거라는 건 변치 않을 테지만 말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그 팀도 대표님을 믿고 따르는 거겠지!'
"……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그에 맞춰 움직이겠습니다."
"네. 딱 두 달만 고생해 주세요. 이후부터는 편해질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장경아는 자리로 향했고, 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으그그! 그럼 전 사우나 좀 다녀오겠습니다. 장 부장님도 찜질방 다녀오세요. 법인카드 허락하겠습니다. 풀코스를 도셔도 됩니다."
"……예!"
장경아는 곧바로 외투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솔직히 지난 한 달간 진호의 보조를 맞추느라 피로가 쌓일 대로 쌓여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경락과 피부 관리까지 받을 생각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 *
"푸후-!"
물에 흠뻑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긴 진호는 천장을 바라봤다.
온탕의 따뜻한 물이 그간 쌓인 피로를 녹이고 있지만, 진호의 표정은 꽤 심각했다.
"왜 자충수를 두는 거지?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지?"
보통 재고 처리는 값을 다운시켜서 한다.
하지만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일본 기업들은 거의 강매 형식으로 물량을 넘겼고, 일본에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진짜 이해할 수가 없네."
그렇다고 한들 봐줄 생각은 없다.
방사능 농수산물에 독도 망언, 위안부 파동등 일본은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는 국가였다.
"일본인들까지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위해 나서 줄 이유는 없다.
고개를 저은 진호는 사우나를 둘러 보았다.
"역시 비싼 곳은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네."
새삼 돈을 많이 벌었다는 걸 깨닫는다.
'예전에는 동네 목욕탕도 쉽게 못갔는데.'
목욕비면 무려 담배 한 갑에 음료수도 하나 사 먹을 수 있다.
"다음엔 부모님과 한번 와 봐야겠다. 재준이도."
기뻐할 부모님과 친구의 얼굴을 생각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 났다.
"흠, 그런데 이런 건 얼마나 하지?"
진호는 순수하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한 이백억 정도 하려나? 아니지, 건물까지 합하면…… 칠백억?"
"그보다는 많을 겁니다. 요샌 땅값이 비싸니까."
"아, 그렇……"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이쪽을 보는 50대의 중년인.
'아, 쪽팔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 진호는 미안하다는 고개를 숙이고는 슬그머니 다른 곳을 보았다. 때밀이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만큼 쪽이 팔렸다.
출렁!
'아니, 왜 오시는 건데요!'
도망칠까, 말까 엄청난 고민이 그의 머릿속을 휘감았다.
결국 진호는 모른 척 다른 탕으로 향했고, 눈을 가늘게 뜬 중년인은 그런 진호를 바라보다 이내 입맛을 다셨다.
'휴우. 이렇게 비싼 곳에도 오지랖 넓으신 어르신들이 있긴 있구나.'
동네 목욕탕에 앉아 있으면 가끔 혼자 왔냐, 무슨 일 하냐 등 타인의 일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있다.
오다가다 만날 수 있는 동네 주민이라 상대를 안 해 드릴 수도 없기에 참 난처했었다.
"에휴……. 아, 왔네."
진호는 안으로 들어오는 세신사를 발견하곤 몸을 일으켰다.
우글우글. 웅성웅성.
저녁때가 되자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개운하게 때를 밀고 찜질방으로 향한 진호는 식혜의 단맛에 몸부림을 쳤다.
"크-. 이게 찜질방에서 먹는 식혜 맛이구나."
왜 이렇게 몸속으로 스며드는지, 이 맛을 모르고 산 과거가 참 안타까울 뿐이다.
진호는 무려 한 판을 구입한 구운 계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외에도 그의 앞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지이잉!
"응? 이놈이 왜?"
문자를 확인한 진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백만 돌파……. 확인 시 연락 바람? ……뭔 소리야?"
의아해하던 진호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설마 그 영상을 말하는 건가?"
약 한 달 전 이설아가 진호의 기타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을 때 재준이 찍은 그 영상을 말하는 것 같았다.
재준은 이런 건 혼자 볼 수 없다며 SNS와 너튜브에 영상을 올린다고 했고, 진호와 이설아는 허락했다.
"오?"
너튜브에 접속해 영상을 확인한 진호는 눈을 껌뻑였다.
"……신기하네."
자신의 영상이 무려 백만이나 달하는 조회수가 찍힌 것을 보자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한국인만 본 것은 아닌지, 댓글에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많은 언어로 달려 있었다.
'그런데……'
"뭐라고 적은 거야?"
꼬부랑 글씨들을 알아먹을 수가 없다.
분명 고2까지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은데, 영어도 잘 알아먹기가 힘들었다.
'진짜 언어 관련 스킬을 얻어야 하나……'
"흠."
진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지 않아도 해외 증시를 돌아다닐때 언어때문에 참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사전과 번역기를 열심히 쓴 결과 지금이야 대충 뭐가 뭔지 눈치로 때려 맞춘다지만, 앞으로도 글로벌하게 움직일 것이기에 언어 능력은 필수 요건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스킬의 1차 해금 조건이……"
세계 최고의 통역가 및 번역가로서 전 세계를 누비다 말년엔 전세계에 외국어 학원 프랜차이즈를 세우는 주인공의 스킬.
'분명 10개국 영화 및 드라마…… 응?'
진호는 반대편에 서서 바닥에 늘어놓은 음식을 빤히 응시하는 서양인 소년을 발견하곤 피식 웃었다.
'여기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알려졌나 보네.'
둘러보니 외국인 몇 명이 보였다.
"you it?"
너무도 저렴한 언어였지만, 다행히 통한 것 같다.
"Really?"
"Sure, you choose."
"thank you!"
"you're welcome."
'아오, 답답해!'
소시지 핫바를 고른 소년은 엄마를 외치며 어떤 여성에게 달려갔고, 화들짝 놀란 여성은 소년이 가리키는 진호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저어준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얻자.'
약 한 달 전, 일본인과 통화를 하던 장경아 부장이 있어 보이지 않았던가.
진호는 언어 관련 스킬을 얻기로 마음먹었다.
* * *
타각타각.
"음."
장경아는 낯빛을 굳혔다.
한국 증권가가 움직이고 있다.
그 자금의 규모는 그리 크다 볼순 없지만, 대부분 일본 기업들의 하락세에 베팅을 하고 있다.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기에 대부분 관망을 하는 거겠지.'
솔직히 그건 장경아 본인도 마찬가지다. 진호가 확신을 가지고 움직였기에 그녀도 동조한 것뿐이지, 본 심정은 회의적이다.
'재고 처리를 한다지만, 그게 왜 하락세로 이어지는 걸까?'
재고를 처리한 기업은 현금을 확보할 수 있기에 더 탄력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렇게 확보한 현금을 엄한 곳에만 쓰지 않는다면, 기업의 가치는 높아진다고 봐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설마 생산 중단?'
아니다. 타깃으로 잡은 일본 기업들이 모두 미쳐 버리지 않는 이상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거기다 타깃으로 삼은 종목군이 너무 광범위해.'
공통점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일본 전체에 암운이 드리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진호를 곁눈질했다.
'……하아.'
헤드셋을 낀 채 잔뜩 졸린 눈으로 서양인들이 나오는 영화를 시청하는 진호의 모습을 보자니 다시 믿음이 사라진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더 정신을 차려야 해!'
증권가에서는 높은 수익을 내는 사람이 갑이고, 그런 갑인 진호의 명령이다.
그녀는 믿기로 하며 어떤 정보라도 있을까 인터넷을 켰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뭐, 뭐야 이건!'
일본, 한국 화이트리스트 제외 검토!
눈을 비벼 보았지만, 기사 제목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 대표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장경아가 질겁하며 외치자 프랑스 영화가 흘러나오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땐진호는 의아해했다.
"왜 그러시죠?"
코앞에 벼락이 떨어져도 표정 하나 변치 않을 것 같은 장경아가 새파랗게 질려 있다.
"여기 이것 좀 보십시오!"
장경아가 내민 핸드폰을 통해 기사 내용을 확인한 진호는 이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거였구나.'
"이거 아무래도 얼마 전 그 징용배상판결 때문인 거 같죠?"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장경아는 정신이 없었다.
'이걸 미리 예측하다니! 대표님은 일본 고위 정부 관계자들과도 끈이 연결되어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일본은 이미 이에 대한 매뉴얼이 있었다는 뜻이고, 매뉴얼대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뜻이다.
'대, 대체 대표님은……'
장경아는 갑자기 옥탑방이 거대한 성처럼 느껴졌다.
"하, 이 새끼들은 어떻게 반성이 없냐. 진짜 이것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징용배상판결 때문에 일본이 무슨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강수까지 꺼내 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지. 이런 강수가 쓰니까 그런 하락장이 발생하지.'
즉, 일본 기업들은 미리 이에 대해 언질을 받고 물량을 떠넘겼다는 뜻이다.
그놈이 그놈이었다.
'문제는 이 일로 인해 벌어지는 어떤 사태가 하락장을 발생시킨다는 건데……'
무슨 일인지 아직 감이 잡히질 않지만, 굴러 버린 수레바퀴다.
이젠 내릴 수도 없고, 내리기도 싫어졌다.
'주는 것 없이 미운 놈들!'
그게 일본이었다.
눈빛을 서늘히 가라앉힌 진호는 장경아를 보았다.
"장 부장님, 지금부터 일본 기업들에 공매도 들어갑니다."
"대, 대표님!"
"그리고 닛케이 하락장에 포지션 잡고 공격합니다."
진호는 오늘 낮에 잠깐 확인한 지수 포인트와 타이밍을 빠르게 적어 내밀었고, 장경아는 아연실색했다.
"이, 이 날짜까지 이 정도나 빠진다는 말입니까?"
"제 예측은 그렇습니다. 제 움직임을 따라붙은 세력이 동조하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을 테지만 말입니다. 아니,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하락장에 베팅하고 있을 수 있겠군요."
그럴 확률은 적겠지만 말이다.
그 누가 있어 민간의 일인 강제징용배상판결 때문에 국가 대 국가의 싸움으로 번질 거라고 예상할 수 있을까. 여기에 베팅을 한다는 건 정말 미친 놈이 아니면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축제를 여는 것처럼 떠들썩하게 알린 후에 들어갑시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빠집시다. 기분이 나쁘다고 위험을 자초할순 없잖아요."
'……그래, 이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야! 일본도 절대 물러서지 않겠지!'
그렇다면 그 혼란의 틈에서 이득을 취하는 게 펀드매니저가 할 일이었다. 주먹을 불끈 쥔 장경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장경아가 자리로 돌아가자 진호도 영상을 끄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