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3. 한 발을 내딛다
그렇지 않아도 취미를 하나쯤은 가지고 싶었던 진호는 곧바로 움직이려고 했지만 난관이 생겼다.
"이거 1차 해금 조건이 문제네……"
이 스킬의 1차 해금 조건은 '추억이 서린 기타 넘겨받기'다.
결코 돈을 주고 구입을 해선 안되기에 중고 거래를 할 수도 없다.
"끄응. 기타 스킬은 이것밖에 없는데……"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며 만나온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려 보기로 했다.
* * *
차를 몰아 강남에 위치한 대학병원에 도착한 진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 삼촌. 저 도착했어요. 아, 제1외과요? 알겠습니다. 곧 갈게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 인맥의 대다수를 차지하다 보니 결국 부모님께도 물어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날 약속을 잡게 된 사람은 아버지의 고향 친구분이셨다. 옛날에 가끔 집에 찾아 오실 때면 항상 용돈을 주셨던 좋은삼촌.
'그때는 만날 삼촌이 언제 오나 기다렸었는데……'
행복했던 옛 추억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진호는 시계를 보곤 빈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곧 약속 시간인 점심시간이었다.
"푸후우. 왔냐?"
"아, 삼촌."
몸을 일으킨 진호는 작은 키의 노인, 강철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근처 간호사들이 깜짝 놀라 둘을 쳐다봤다.
"……허. 이놈 봐라? 운동했네?"
진호는 깜짝 놀랐다.
"바로 알아보시네요?"
"내가 의산데 당연히 알아볼 수 밖에 없지."
강철중은 서슴없이 진호의 몸을 만졌다.
"사, 삼촌?"
"근육도 옹골차게 차 있고……. 피부까지 매끈한 걸 보니 이 정도면 성인병 걱정은 없겠다."
퍽!
강철중의 손이 진호의 팔뚝을 때렸다.
"윽!"
"잘 생각했다. 형만이가 좋아하겠어. 아, 맞아. 형만이한테 집을 사줬다면서!"
"네에?"
그걸 어떻게 아는지도 놀랍지만, 너무 크게 말해서 당혹스러웠다.
진호는 새빨개진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삼촌……"
"으하핫! 그래, 밥 먹으러 가자! 오랜만에 조카가 왔으니 맛있는 거 먹어야지-!"
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강철중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제 콜이 올지 모르니까 일단 기타부터 받아라."
"감사합니다. 대학 시절 때 사신거라고 했죠?"
"그랬지. 그땐 기타 치며 노는 게 낭만이었으니까……"
강철중의 눈빛이 아련하게 젖어간다.
진호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걸 이렇게 주셔도 돼요?"
"응, 괜찮아. 쓸 일도 없어. 그리고 솔직히 그때 기타 칠 때도 잘 치지 못했고."
"…… 잘 쓰겠습니다."
진호는 조심스럽게 기타를 받아들었다.
'1차 조건 해금.'
기타를 어깨에 두르는 진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거야? 얼마 전에 형만이 만나러 가지 않았다면 모를 뻔했잖아."
'아, 그렇게 알게 되신 거구나.'
부모님은 5억대의 제법 좋은 매물을 찾아 편의점을 여시고, 그 주상복합 건물의 꼭대기 층에 이사를 하셨다.
그중 절반은 대출이었다.
"부모님이 편히 사셔야 저도 걱정 없이 돈 벌죠."
부모님과 재준에게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는데, 강철중에게 말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설명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네가 효자다. 어휴, 그 코찔찔이가 언제 이렇게 컸는지."
진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고, 강철중은 피식 웃었다.
"기억나냐? 너 이 병원에서 일한거?"
"당연히 기억나죠!"
기억이 나지 않을 리 없다.
제대를 한 후 이곳의 의약 창고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미래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다가 리셋 라이프를 알게 됐으니 말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스킬도 얻을 수 있었지. 흠……. 아니다. 지금은 딱히 필요없으니까.'
"차라리 그때 공부를 했으면…… 아니다. 이런 꼰머 발언은 하면 안되지."
"쿨럭! 그런 말도 할 줄 아세요?"
"환자는 나이를 가리지 않잖아."
"아……"
꽤 심오한 말이었다.
"의사는 그런 환자를 이해해야 되는 직업이고."
'……이래서 가끔 씩이라도 일반진료를 보시는 건가?'
참 존경스러웠다.
"아무튼 잘 쓸게요. 감사합니다."
"그래, 너도 일 잘 하고. 프로는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 해야 돼."
"하하. 감사합……"
또각또각!
"어? 김 닥?"
놀라는 강철중처럼 진호도 굳어버렸다.
'김이나 선생님……'
"뭐야. 출산한다고 하지 않았어? 벌써 복귀한 거야?"
"늑장 부리다가 제 자리 없어지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쪽 분은?"
"아아, 내 조카. 그래. 복귀한 거 축하하고, 다음에 또 보자."
"네. 식사 맛있게 하세요, 교수님."
진호는 싱긋 웃으며 멀어지는 김이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독 들이지 마라. 유부녀다."
"윽! 그런 거 아닙니다!"
그저 20대 짝사랑의 상대일 뿐이었다. 신분 차이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짝사랑 말이다.
"……그런데 유부녀요?"
"응. 펀드매니저? 아무튼 금융계 관련 종사자와 결혼했어. 그쪽은 애 딸린 돌싱……. 아니, 이런 말까진 할 필요 없지."
'그랬구나. 하긴, 그때 나보다 6살 연상이었으니까……'
진호는 김이나가 인턴 때 만났다.
'그런데 날 못 알아보네. 그때 몇번 위로해줬는데……'
김이나는 진호가 일하던 의약 창고에 와서 몇 번이나 울었고, 진호는 그런 김이나를 그때마다 위로 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에는 누나라 부르기도 했다.
'하긴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아무튼 아까 이 삼촌이 간호사들 들으라고 크게 소리 친 거 봤지? 넌 딱 정하기만 해. 이 삼촌이 어떻게든 다리 놔줄 테니까!"
'그래서!'
이마를 붙잡은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식사하러 가시죠."
"어허. 삼촌이 말했지? 남자는 무조건 적극성이라고!"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는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천천히 하시자고요. 뭐 드실래요? 제가 사겠습니다."
"뭐? 푸하하하하!"
둘은 웃으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 *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12층의 빌딩 입구 옆에 자리한 커다란 편의점.
소시지 핫바 하나를 고른 진호가 계산대 앞에 섰다.
떡!
"에세 체인지 1밀리 하나도 주세요, 어머니."
"네……"
고개를 든 뽀글 파마머리의 50대 여성이 화들짝 놀랐다.
"악!"
"하하. 잘 계셨죠?"
"진호야! 언제 왔어?"
"방금요. 얼른 계산해 주세요."
"으응."
황급히 계산한 그녀는 옆의 알바생에게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말하고는 계산대를 빠져나왔다.
진호는 인상을 찌푸리는 알바생의 모습에 실소를 터트렸다.
딸랑.
편의점 옆에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와 빈 자리에 앉은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하시네요. 알바에게 정체 안밝히셨죠?"
"사장 있을 때는 잘하고, 사장 없으면 노가리 까는 애들이 어디 한 둘이니? 시급을 만이천 원 주면서 일 시키는데, 이 정도 인사평가는 기본으로 해야지. 아, 참고로 걔는 이번 달 말까지만 일 시킬 거야."
아르바이트생뿐만이 아니라 이 빌딩에 입주한 사람들 대부분이 건물주의 얼굴을 모르고 있다.
원체 그런 걸 드러내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셔서 그렇다.
'정말 어딜 봐서 이분이 이 빌딩의 주인으로 보일까.'
통통한 체구와 뽀글 파마머리, 등산복은 어떻게 봐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줌마다.
"아르마니네? 셔츠는 돌체 앤 가바나에 시계는 오메가 씨마스터 신상?"
"어머니 만나러 온다고 쫙 빼입고 왔죠. 아, 여기요."
"뭘 이런 걸 가져와."
진호가 내민 종이 백을 확인도 않고 옆에 내려놓은 그녀의 눈빛이 갑자기 사나워졌다.
"읊어 봐."
"끙. 진짜 이런 모습도 여전하시다니까."
재준이가 누굴 보고 배웠겠나.
진호는 숨길 건 확실하게 숨기며 요 몇 달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렇게 현재는 재준이가 보여준 건물 하나랑……"
"진호야, 6년 만에 이 아줌마 찾아와 놓고 계속 속일 거야?"
잊고 있었다. 어머님의 통찰력을 말이다.
"……이후로 원룸 건물을 두 채 더 샀어요. 현재 내부 공사 중이고요."
"경매야? 근저당은 살펴봤고?"
"대출 끌어안는 조건으로 싸게 샀습니다."
"갭투자는 좀 위험한데……. 수익은?"
"못해도 5년은 마이너스죠."
"그래?"
진호의 담담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재준의 어머니는 생각에 잠겼다.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온 너라면 못해도 1억은 모았을 테고, 네 성격상 진희랑 형부한테 건물 하나는 해줬을 거고, 원룸 하나당 대략 7억씩 잡으면……. 법인은 무조건 세웠을 테니까……"
그녀의 눈에 경악과 대견함이 서렸다.
"반년 만에 한 50배 수익률을 올렸다고 보면 되겠네? 현금이랑 주식으로 한 20억쯤 쥐고 있을 거고."
"……어머니가 계산이 빠른 것도 잊고 있었네요."
진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경계심을 가졌다.
재준의 어머니는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진호야. 이 아줌마, 지금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세계여행을 다녀도 저 빌딩은 남아 있어."
"……죄송합니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흐뭇이 웃었다.
"아냐. 돈 가진 사람이 경계심을 가지는 건 정말 좋은 모습이야. 진희와 형부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오케이! 사과받았다!"
정말 여장부 중 여장부였다.
"그래서 관리인은 있어?"
"관리인이요?"
"너 대신 원룸 계약이나 청소 같은 거 다 해 줄 관리인. 일에 경중은 둬야지."
재준의 어머니는 입을 다무는 진호를 보며 혀를 찼다.
"진호야, 티끌 모아 티끌이야. 그런 돈은 아끼는 거 아니야."
"아……"
머리가 확 개는 기분이었다.
"혹시 좋은 사람 있으면 추천해주실 수 있으세요?"
"……이놈의 자식은 방금 전 내가 뭘 말했는지도 잊은 것 같네."
"모르는 사람보다는 어머님이 추천해 주시는 사람이 더 믿을 만하죠. 설마 어머니가 이 아들의 재산을 탐내시겠어요?"
"……만약 그렇다면?"
"굉장히 슬프겠죠.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재준이랑은 계속 놀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 재산 다 빼먹도록 옆에서 꼬시겠습니다!"
"얘가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는지……. 옛날에는 덩치 빼곤 쓸 곳도 없었던 것 같은데……"
"저도 이제 사회인 경력 10년 차되는 베테랑임돠. 흐흐흐."
고개를 저은 재준의 어머니가 눈을 빛냈다.
"추천해 주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있어. 그런데 소문이 좀 안 좋아."
진호의 눈빛이 신중해졌다.
"……믿을 만은 하고요?"
"내 빌딩 옆 증권사에서 펀딩 일을 하다가 사내 정치에 휘말려 일찍 퇴사해 버리게 된 사람이야. 소문이 고약하게 나서 그 바닥에서 일은 못하게 됐고. 나이는 올해 서른여섯."
'아.'
원룸 건물 관리를 맡기기에는 너무 고스펙이다.
진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연락처 주세요."
"좋아. 그럼 이제부터 내 둘째 아들이랑 데이트를 가 볼까?"
"영화관에서 레스토랑으로 이어지는 코스 어떠세요?"
"어머, 이 아줌마 심쿵. 우리 진호가 이런 말도 할 줄도 알게 됐네? 역시 사람은 주머니에 돈이 있고 봐야 한다니까."
"하하."
'저도 놀라는 중이에요.'
"술은 껍데기에 소주지?"
"재준이 빼고 콜?"
"아이참. 우리 둘째 아들이 이렇게 엄마 마음을 잘 알아요. 콜!"
둘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 * *
진호는 약속 장소에 나타난 사람을 보곤 살짝 놀랐다.
"안녕하십니까, 장경아입니다."
'여성일 줄은 몰랐는데……'
굉장히 차가운 인상의 여성은 정장마저 입고 있어서 접근하기가 꺼려지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떤 일을 하실 건지는 듣고 오셨죠?"
"대표님을 대신해 건물 관리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만 말하셨구나……. 나머지는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거겠지.'
그래서 좀 신기했다.
그녀는 체념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한국대 경영학과 출신에 유명 증권사에 일했는데도 말이야. 나였다면 분명 될 대로 되라 체념하고 나왔을 거야.'
그런데 그녀는 무척이나 단정했다. 화장과 헤어도 마치 숍을 다녀온 듯 깔끔했다.
어떤 일을 맡건 확실히 하겠다는 의지가 전해져 왔다.
'…… 마음에 들어.'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고민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그것도 맞는데 전 다른 일까지 시킬까도 생각 중이에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나요?"
"예, JH법인은 투자 회사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고민을 참 많이 했었다.
"아시면서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 다시 도전해 볼 의향이 있으시다는 거겠죠?"
왜 없겠나. 그 누구도 자금을 맡기지 않아서 좌절할 뿐이지 다시 몰아치는 파도를 누비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전 좋지 못한 일로 퇴사했습니다."
"사내 정치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손해를 본 적도 많습니다."
"주식을 하는데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건 사기꾼이나 할 말이죠. 어차피 결과로 말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전장경아씨를 추천해준 어머님을 믿습니다."
"……자본금이 얼만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함께 일하시게 되면 오픈할 거고, 일단은 국내 증시와 건물 관리를 맡길 생각입니다. 참고로 원룸 건물은 현재 다섯 채고, 그중 네개는 내부 공사 중이에요."
"……그러면 저도 일의 양에 따라 연봉을 협상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따라오세요. 사무실을 보여 드리죠."
진호를 따라 옥탑방에 올라오며 약간 실망했던 그녀는 진호가 컴퓨터로 보여 주는 국내 증시 거래자료를 확인하곤 경악했다.
"이, 이건?"
잘 해야 10억, 혹은 20억 정도일거라 예상했던 게 완전히 빗나갔다. 그녀는 숫자의 향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이 종목들과 이 타이밍은?'
그녀는 질겁하며 진호를 보았다.
"대, 대표님이 그 슈퍼 개미셨습니까?"
진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