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2. 분홍빛 인생 서막. 다시 써진 시나리오
갑자기 눈에 전기가 통한 것 같더니 마치 잉크를 뿌린 듯 계약서가 새까맣게 변했다.
'……이, 이건 그건데? 그 스킬의 능력인데?'
매매할 건물에 엄청난 하자가 있을 경우 직감이 보내는 경고.
이 부동산 중개소에 들어오기 전까지 생각했던 그 스킬을 1차 해금했을 때 얻는 능력이다.
1차 해금 조건은 '부동산 거래하기'.
임대차 계약이든 매매 계약이든 부동산만 거래하면 이 스킬의 1차 조건이 해금된다.
이 스킬의 주인공은 청춘을 바쳐 죽을 둥 살 둥 모은 돈을 허무하게 날리면 어쩌나 하는 극한의 스트레스로 인해 이 능력이 발현된다.
'대체 어떻게? 왜? ……서, 설마?'
"의뢰인?"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계약서를 챙기던 전 건물주마저 혹여 계약을 무를까 떨리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아, 제가 처음으로 제 명의의 건물을 가지는 거라서 흥분을 했나 봅니다."
재빨리 수습한 진호는 머리를 긁적였고,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번창하길 빌겠소."
"예, 감사합니다. 잔금은 다음 달5일까지 보내 드리겠습니다."
"…… 고맙네."
전 건물주가 떠나자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복비를 지불한 진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동산 중개사무소를 나섰다.
"그럼 전 나머지 법적 절차를 밟기 위해 움직이겠습니다."
"예. 수고해 주십시오. 의뢰비는 남은 서류를 받을 때 넣어 드리겠습니다."
"당연한 말이십니다. 그럼."
도명안도 그렇게 떠나자 의연했던 진호의 얼굴이 급격히 무너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물었다.
찰칵! 착! 착!
손이 얼마나 떨리는지 불이 켜지지 않는 라이터.
결국 라이터를 내던친 진호는 맞은편에 있는 건물을 죽일 듯 노려보며 '사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자.
"……하!"
옅은 노란색으로 빛나는 3층 건물.
"약간의 하자가 있지만, 그래도 안전빵이라는 뜻……. 돌겠네."
계승된 하나의 스킬과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가장 중요한 스킬까지 합하여 둘이 아니었다.
셋, 어쩌면 넷.
"아니면…… 아흔아홉."
하나의 스토리에 하나의 스킬이라는 법칙은 이미 진즉에 무너졌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진호는 핸드폰을 들어 친구 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쇼?
"야."
멈칫!
진호는 입을 다물었다.
-왜? ……뭐야? 여보세요?
"……만약에. 만약에 네가 돈을 많이 벌 재능이 있다면 뭘 할 거냐?"
-낮술 했냐? 술 먹었으니까 자랑 하려고?
"여하튼! 정말 그런다면 뭘 할 거냐고."
-…….
친구의 목소리가 심각해서 일까, 재준도 진지해졌다.
-돈 벌면서 내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겠지. 취미든, 꿈이든. 그런 의미에서 너도 취미 하나 만들어라. 우울하게 집안에만 있지 말고! 씨바, 좀 꾸미고 다녀야 여자가 생기든 말든…….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진 않고?"
-…… 많이 벌어서 뭐하게? 풍족하게 먹고살 만큼 있으면 그냥 하고 싶은 거나 하고 사는 게 망고 땡이야. 그러니까 너도 헛 생각 말고 네 그 주식 재능이나 갈고 닦아.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그렇지. 돈은 이미 많이 있지.'
머릿속에 냉수를 부은 듯 뜨거웠던 머리가 차가워졌다.
"알았어. 끊어. …… 고맙다."
-오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술은 조금만 마셔.
전화를 끊은 진호는 땅바닥을 구르는 라이터를 챙겨 켰다.
차악! 치이익!
"후우우."
진호는 하늘을 보았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리셋 라이프를 모두 클리어했기에 리셋 라이프의 스킬을 남용했을 때 얼마나 무서운 지 알고 있다.
만날 나라면 이렇게 하지 않을 텐데, 이런 건 안 되나 수없이 생각하고 좋지 못한 결론으로 게임을 새로 시작했기에 모를 리가 없다.
큰일 정도가 아니라 인생 자체가 아예 망가질 뻔했다.
'재준이와 통화를 안 했다면 분명 그랬을 거야.'
홀로 생각하고, 홀로 멍청한 결론을 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스킬들에 휘둘려 '배드 엔딩'을 맞이하게 됐을 터였다.
'그 주인공들처럼……'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호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하나가 더 생기든, 아흔일곱 개가 더 생기든 무슨 상관이야."
[스킬: 블랙 펄의 선장]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이 되었다.
솔직히 남은 스킬들을 모두 얻고 싶다는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도 다행이네. 사기를 당하진 않을 거잖아."
조물주 위 건물주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스킬.
진호는 이걸 습득하기로 마음먹었다.
"2차 해금 조건이 뭐였더라……"
희뿌연 담배 연기가 허공에서 흩어지며 춤을 추었다.
* * *
이 스킬의 주인공이 스킬을 습득하는 과정은 제법 재밌다.
관련 지식을 먼저 배우는 게 아니라 능력부터 발현하고 난 후 관련 지식을 습득한다.
그래서 현재 진호는 죽을 맛이었다.
꾸벅!
"헉!"
눈을 비빈 진호는 들고 있던 건축 관련 책자를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끄으어! 아우, 학창 시절에도 안한 공부를 하려니 죽을 것 같네."
리셋 라이프를 할 때 자료 조사는 어떻게 했는지 몰랐다.
"이럴 때 전국수석 스킬이나 셜록의 후예 스킬이 있으면 한 번만 봐도 바로 외울…… 헉!"
욕심을 버리고자 했으나 아쉬운 마음에 투덜거리던 진호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스킬: 전국수석]의 1차 해금 조건이 떠올라서였다.
"저, 전국 수석은 떨어지는 간판에 머리를 맞아야 하잖아……"
그로 인해 두뇌가 비이상적으로 발달된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그는 고개를 털며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이건 평생 봉인이다!'
그렇게 도착한 공사 현장은 텅 비어 있었다. 골격만 남은 건물만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아, 새참 먹을 시간이구나."
그러고 보니 2차 해금을 한다고 아침 식사를 거른 게 생각났다.
눈을 가늘게 뜨며 건물을 둘러본 진호는 근처에 계약한 식당으로 향했다.
딸랑 문을 연 순간 기름진 냄새가 후욱 풍겨 왔다.
"……아이고! 사장님 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인부들의 우렁찬 인사에 진호도 꾸벅 허리를 숙였다.
"어떻게 식사들은 입에 맞으세요?"
인부들은 활짝 웃었다.
"예! 맛있습니다!"
"최곱니다!"
그 어떤 의뢰인이 새참과 식사로 바닷장어와 오리훈제를 주겠나.
인부들은 휴식과 식사를 충분히 제공해 주는 이 현장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이네.'
군대에 가기 전 노가다를 뛰었을 때, 진호의 유일한 불만은 새참이었다. 라면이나 제과점 빵과 우유 정도면 양반일 정도로 새참이 부실하거나 아예 주지 않는 현장도 참 많았다.
물론 하루하루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고마워 참 열심히 했지만, 그래도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 건물을 짓게 되면 식사 걱정만큼은 없게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하, 많이 드세요. 계속 말한 것처럼 가실 때 싸 가시고요."
진호는 인부들의 환호를 받으며 자기 몫의 음식을 퍼 와 마침 자리가 비어 있는 50대 중년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인망이 없는 거 아니세요? 만날 앞자리가 비어 있으시네요?"
"어떤 분이 만날 찾아 오시니 비워 두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번 공사를 맡은 업체의 사장이다.
"하하. 건물 상태는 좀 어때요?"
사장은 혀를 내둘렀다.
"정말 싹 다 걷어 내길 잘한 것 같습니다. 전에 말한 대로 누수에 합선에, 쓰레기로도 못 쓸 내장재까지……. 어후우. 어떤 놈이 시공했는지 모르겠지만, 콱 모가지를 비틀고 싶더군요. 이런 놈들 때문에 애꿎은 저희들만 욕을 먹는 거 아니겠습니까!"
'역시 그렇구나.'
심각한 하자가 있다며 검게 물들었던 계약서.
"……그래도 건물은 꽤 튼튼하게 지어져서 사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공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역시!'
방금 전 골격만 남아 있던 건물은 제법 짙은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자재는 정말 그것들로 쓰실 겁니까?"
"네. 당연하죠."
리셋 라이프에서 이 스킬의 스토리를 진행할 당시 썼던 자재들.
있는 기억 없는 기억 긁어내 겨우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건 최고급 빌라나 저택에 들어가는 자재들인데……"
개중 몇 개는 이 바닥에서 30년 이상 구른 사장도 이름만 들어 본것들이라 일반인은 결코 알 수가 없었다.
자재값만 하더라도 저 원룸 가격에 필적할 터였다.
"이 정도면 월세를 70만 원씩 받아도 몇 년간 손해를 볼 겁니다."
'……도명안 씨가 정말 좋은 분을 소개시켜 주셨구나.'
진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원룸 형은 30만 원, 투룸 형은 35만 원에 내놓을 생각입니다."
"예에?"
사장뿐만 아니라 주위 인부들까지 모두 들썩였다.
"반지하나 옥탑방에서 십 년 동안 살아 보니까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밤에 노래 한 곡 크게 틀 수 없는데도 방값과 공과금으로 월급이 뭉텅 떨어져 나가는 게 참 서럽더라고요."
"허어-."
진호는 감탄하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미간을 긁었다.
"그러니 제가 십 년 후엔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입조차 뜨지 못한 음식을 안타깝다는 듯 본 진호는 몸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식당을 나서는 음식을 담은 봉지를 들고 나가는 진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해!"
화들짝 놀란 인부들이 사장을 보았다.
"얼른 먹고 일하러 가야지! 우리가 저 젊은 사장님 도와줄 수 있는 게 뭐겠어! 공사를 빨리 끝내는 거잖아!"
"……예!"
"아이구, 맛나다! 왜 이렇게 맛난거여!"
허겁지겁 수저를 움직이는 인부들을 본 사장은 진호가 들고나간봉지를 떠올리며 흐뭇이 웃었다.
어찌 보면 쪼잔한 모습으로 볼수 있지만, 사장은 그걸 없이 살아온 삶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생긴 습관이라고 받아들였다.
"역시 세상은 아직 살 만 해."
사장은 부디 좋은 세입자가 들어오길 빌었다.
* * *
"오셨어요!"
벌떡 일어난 다연이 진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네. 잘 계셨죠? 변호사님은요?"
"저기 계세요. 변호사님! 이진호 의뢰인님 오셨어요!"
우당탕!
'어이쿠.'
도명안이 다급히 일어나려다 넘어졌다.
"하하, 오셨습니까. 다연 씨, 여기 그 차 좀 가져다주세요!"
진호는 무릎을 비비는 도명안을 보며 걱정했다.
"괜찮으세요?"
"하하. 괜찮습니다. 자, 어서 앉으시죠."
'오, 소파 시트가 달라졌네.'
저번엔 푹 꺼졌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제법 탄력이 있다.
아무래도 시트만 바꾼 것 같았다.
"이번엔 법인 설립 문제로 법률자문이 필요하시다고요?"
"예."
그렇게 대답한 진호는 한구석에서 차를 타고 있는 도다연을 티나게 응시했다. 다행이 알아들은 건지 도명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차 나왔습니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드세요."
"도다연 씨, 자리 좀 비켜 주세요."
"……네, 변호사님."
낯빛이 굳은 다연이 사무실을 나가며 문을 닫자 진호는 입을 열었다.
"건물을 네 채를 더 구입하려고 합니다."
이번 스킬의 마지막 해금 조건이 바로 이것이었다.
'부동산 4개 더 구입하기.'
예상치 못한 말에 도명안은 작은 동요를 보였다.
"……그를 위해 법인을 설립하시려는 거군요."
확실히 이런 일이라면 보안을 요구하는 게 맞다.
도명안은 이런 신중한 진호의 모습에 제법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서른하나밖에 안 됐는데……'
"예, 세금 문제도 있으니까요."
이전에 부모님께 보여 드린 명함은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일부러 만든 것이었다.
"그런 문제라면 잘 문의하셨습니다. 어떤 업종의 법인을 설립하시려는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아실 내용이니까요. 투자 회사를 설립할까 합니다."
도명안은 그제야 진호가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었는지 알아차렸다.
'슈퍼 개미! ……그런데도 이렇게 검소하구나.'
메이커 하나 없는 옷차림이다.
하지만 진호가 여태껏 옷보다는 먹는 것에 더 치중하며 살아왔기에 딱히 옷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도명안은 진호가 더욱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회사 법인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3인 이상의 등기 이사가 필요합니다."
정확히는 아니지만, 3인 이상이 필요한 건 맞다.
"아니요. 개인 법인을 설립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세금이 많이 나올 겁니다만……"
진호는 씁쓸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부모님이나 친구 재준밖에 없는데, 아직은 그들에게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법인 설립은 필수였다.
'따라붙는 세력들이 생겼으니까 어쩔 수 없어.'
불과 2개월 만에 3대가 풍족하게 살 만큼 벌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아직 따라붙는 자금의 액수가 작다는 점이다.
마치 간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안일했어.'
스킬에 휘둘려 돈만 보았다.
얼마 전 욕심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분명 큰일이 났을 것이다.
'절반 넘게 털어야겠지.'
아쉽지는 않다. 앞으로는 법인의 이름으로 벌면 되니 말이다.
'욕심을 내려놓았다지만, 돈을 포기한 건 아니지. 안전하게 가자.'
"음, 알겠습니다. 그럼 생각해 두신 매물이 있으십니까?"
진호는 당연하다는 듯 들고 온 대봉투를 내밀었다.
내용물을 살핀 도명안은 다시금 동요를 보였다.
"……모두 대학교 근처 원룸이군요."
방금 전 진호에게 소개시켜 주었던 업체의 사장에게 전화가 왔다.
정말 좋은 건물주를 소개시켜 줘서 고맙다고 말이다.
'들었나 보네……'
입맛을 다신 진호는 이내 싱긋 웃었다.
"제 친구가 그러더군요. 저는 하늘에 감사해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하늘이 준 기회이니 만큼 베풀며 살고 싶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