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22화
담배 연기가 자욱한 어느 레스토랑. 긴 테이블에 앉은 백인, 흑인, 라틴, 히스패닉, 황인 등 수 많은 인종의 남성, 여성들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누군가는 헛웃음을 흘리고, 누군가는 분노를 토해 냈다.
"네놈!"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에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날아온 HU 에이전시 차이나 지사장, 로버트 첸은 다미앙을 노려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드디어 다미앙이 굴복하여 자신을 회장으로 추대하려는 건가 신이 나서 날아왔기에 더욱 분노가 치솟았다.
"감히 네놈이 뒤통수를 쳐!"
다미앙은 입에 문 담배를 내려놓으며 이를 악물었다.
"뒤통수를 친 건 당신들이지."
맹렬한 살기가 공간을 뒤덮었다.
"이게 밝혀졌을 때 일어날 사태에 대해 손톱만큼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당신들은 너무도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고, 모든 걸 잃고 뒷골목을 전전하기 싫으면 닥치고 가만히 있으십시오, 첸!"
다미앙은 이 자리를 찾은 프랑스지사장 등의 이 끔찍한 스캔들에 얽힌 이들을 불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네, 네놈이……. 끄으응."
졌다. 만약 다미앙이 개인적으로 접촉해 이런 자료를 내밀었다면 어떻게든 입을 다물게 했을 텐데, 지금 이 자리에는 HU 에이전시의 모든 지사장들이 온 것도 모자라모든 걸 알게 됐다.
외통수였다.
이들이 한 목소리를 낸다면 자신이 제아무리 차이나 지사장이라고 해도 모든 걸 잃을 수밖에 없었다.
첸은 분노로 뻣뻣이 솟았던 꼬리를 마는 수밖에 없었다.
"본사 임원들이 이걸 용인할 거라고 보나!"
HU 에이전시에서 주식까지 줘가며 붙들어 놓은 괴물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임원이자, HU 에이전시의 주주였다.
다미앙은 프랑스 지사장을 응시하며 입술을 비틀었다.
"용인하지 않을 본사 임원이 몇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이 폭탄이 터지면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릴 그 알량한 주식 쪼가리가 여전히 그들의 힘이 되어 줄 것 같습니까? 아님 주먹 속의 모래알처럼 사라져 버릴 돈이 그들의 힘이 되어 줄 것 같습니까?"
"헛!"
"음."
본사 임원들마저 굴복했다는 말에 이 스캔들에 연루 된 지사장들은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지켜보던 백발의 흑인은 텅태블릿 PC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이를 드러냈다.
"이게 진짜 사실이라는 말이로군."
"단 1퍼센트의 조작도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의 명예이자 자부심인 HU 에이전시는 그런 끔직한 일을 저질렀고, 우리들의 목에 채 울 목줄마저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다미앙이 나눠 준 태블릿 PC 안에는 각 지사장들의 비리마저 적혀 있었다.
"혹시 기억나지 않는 겁니까?"
"…… 그럴 리가. 아니, 이걸 보니 기억이 다시 난다고 해야 하나. 허허, 20년 전 일이라서 나도 잊고 있었던 걸……"
다미앙은 분노를 토해 내다 이쪽을 보며 작은 불안과 불신을 머금는 아군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게 원본이고, 사본은 없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그 목줄을 쥐고 여러분을 흔들려고 한다면 언제든 저를 치십시오. 아니, 솔직히 지금의 제게 HU라는 간판이 필요할 거라고 보십니까?"
움찔!
"……그건 아니지."
아무리 나이가 들어 머리가 굳었다고 해도 뻔히 보이는 것마저 인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다미앙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저는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잘 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저의 진호씨가 제게 그러하듯 저 역시도 여러분들과 좋은 것들을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피식.
"그놈의 혀는 여전히, 아니 예전보다 더 매끄러워졌군. 이제 자네도 연륜이 농후해졌다는 거겠지."
백발의 흑인, 남미 총괄 지사의 지사장은 태블릿 PC를 챙기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좋은 리더는 돈을 벌게 해 주는 리더더군."
흠칫!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모두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던 남미 총괄 지사장은 다미앙에게 윙크를 하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지지하지."
그 말이 시작이었다.
희비의 명암은 더욱 짙어졌다.
"나 역시."
"나도 지지하겠어. 그러니 앞으로 돈을 좀 더 많이 벌게 해 달라고."
쿵!
이 말만을 기다려 왔던 다미앙은 크게 박동하는 심장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미앙은 태블릿 PC를 챙겨 들고 일어나는 아군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로데오. 감사합니다, 여러분."
"날짜를 잡아서 통보해."
그렇게 아군들이 모두 나가자 다미앙은 이쪽을 죽일 듯 노려보는 이들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의 눈빛은 식어 버린 음식보다 더 차가웠다.
"현명한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멍청한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푹
그들은 다시 고개를 떨구는 걸로 마지막 반항을 멈추었다.
다미앙은 패잔병처럼 식당을 빠져나가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몸을 일으켜 식당 안쪽의 룸으로 향했다.
"후."
이제 마지막 마무리다.
그리고 마지막은 아름다워야 했다.
옷매무새를 다시 다듬은 그는 문을 열며 룸 안에 있는 이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의 연극이 재밌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스터 휴론. ……그리고 스승님. 미스터 베르베우."
까드득!
다미앙은 이를 가는 헝거 휴론과 박수를 치는 스승 윌리엄, 아르노 베르베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 * *
짝짝짝!
아르노는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뮤즈로 하여금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들더니, 뒤로는 이렇게 멋진 계승식을 준비할 줄이야! 현재 우후죽순 튀어나오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월간 페이크 레전드의 프로듀서들이 자네와 뮤즈가 뿌린 덫이자 연막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진호와 카밀라 카베스의 발언으로 인해 세상이 시끄러워졌다.
레전드가 욕심을 내고, 그 수익이 얼마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수 많은 명곡들.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영국, 프랑스 등 전 세계에서 내가 진짜 프로듀서라는 사기꾼들이 튀어나오며 난장판을 만들고 있었다.
"내 인생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훌륭한 연극이었네, 토마소 회장."
솔직히 이런 계승식은 아르노 본인이 바라던 것이었다.
앙트완과 델핀, 둘 중한명이 아비의 목을 치고 왕좌에 앉는 그런 철혈의 계승식.
"초대장을 보내지도 않았는데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스터 베르베우."
"누가 회장이야, 누가! HU의 주인은 나야!"
아르노는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치는 헝거 휴론을 무심히 바라봤다.
"버러지가 말도 할 줄 아는군. 신기해."
"이보시오, 베르베우 회장!"
"패션계에서 퇴출당하고 싶으면, 버텨 봐."
주먹을 휘두를 듯 날뛰던 헝거휴론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뭣?"
"LVMH가 지금 당장 샤넬을 공격하면 어떨까? 그러면서 그 이유를 네놈으로 돌린다면?"
그 말의 뜻을 알아먹은 헝거 휴론은 새하얗게 질렸다.
"지, 지금 무슨 말을……"
"네놈이 그렇게 목소리를 높일수 있는 건 모두 나 아르노 베르베우가 현재까지 허락하고 있었던 덕분이라는 거다. 하지만 글쎄……. 여기 다미앙 회장과 나의 뮤즈가 빠진 HU가 내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크흑!"
"내가 네놈 따위와 이렇게 같은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모두 여기 다미앙 회장 때문이다. 뮤즈를 발굴하고, 내 LVMH에 막대한 이득을 가져온 다미앙 회장 때문에. 그러니 더 이상 내 귀를 더럽히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
헝거 휴론은 고개를 숙인 채 덜덜덜 떨었다.
코웃음을 친 아르노는 다미앙을 향해 계속 하라는 손짓을 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다미앙은 헝거 휴론을 차갑게 응시했다.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미스터지사와 본사 임원 70퍼센트 이상이 이쪽을 지지하고 있다."
주주 총회를 연다고 해도 바보가 아닌 이상, 설사 백기사라 할지라도 이쪽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주식이 휴지 조각이 되는 것보다 나을 테니 말이다.
"……윌리엄-!"
지금 이 사태를 일으킨 모든 자료를 다미앙에게 넘긴 정보원.
그는 수 많은 레전드 모델들을 캐스팅한 전설적인 캐스팅 디렉터 윌리엄이었다.
"자네가 어떻게! 다음 회장은 자네였어!"
"대세를 따른 것뿐일세, 휴론."
"대세라니!"
"내가 회장이 되면 뮤즈가 용납할 것 같나?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온 그 괴물이?"
"그래, 이제야 기억나는가 보군. 내가 말했지 않나. 뮤즈의 가장 큰무기는 그 두뇌라고. 결국 듣지 않더니……. 쯧쯧쯧."
"……."
"자넨 진거야."
헝거 휴론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가만히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경찰들이 당신을 연행해 가는 꼴을 보긴 싫군요."
"뭣?"
다미앙은 이제 결정하라는 듯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헝거 휴론은 그런 다미앙을 죽일 듯 노려보다 어깨를 늘어트렸다.
"개인적으로 저지른 범죄에 대한 대가만 치르면 되나."
헝거 휴론은 그렇게 마지막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침몰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미앙은 한숨을 내뱉었다.
'끝났군.'
다미앙은 몸을 일으켜 헝거 휴론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미스터
"……HU를 잘 부탁하네."
고개를 끄덕인 다미앙은 어울려줘서 감사하다는 듯 아르노와 윌리엄에게 인사를 하고는 식당을 빠져 나갔다.
시리도록 맑은 봄 하늘의 따뜻한 햇살이 그를 비추었다.
"예정되었던 성공……"
진호와 함께하는 순간 이미 약속된 성공이었고, 승리였다.
그런데 왜일까.
방금까지 거세게 뛰었던 심장이 막상 항복을 받아 내고 나니 차갑게 식어 버렸다.
'아직 왕좌에 앉지 않아서일까.'
마지막까진 마지막이 아니란 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왕좌에 앉아 야만 진짜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런 거겠지."
정말 그렇다는 듯 그제야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피식 웃은 다미앙은 핸드폰을 들었다.
달칵!
"이쪽은 끝났습니다, 진호 씨."
* * *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지만, 그건 분명 범죄였다.
"……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려 하지 않았음을 참작한다. 이에 맥스던에게 금고 3년 형을 선고 한다."
땅땅땅!
웅성웅성.
참관인들의 소음이 법정을 울렸지만, 진호는 억울해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무척이나 담담했다.
'끝났구나.'
이젠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된다.
이젠 언제 발각될까 가슴을 졸이지 않아도 된다.
이젠 신발을 벗고 잘 수가 있다.
'아쉽다면, 정말 티끌만큼 아쉬운 점이 있다면 더 이상 그들을 구할수 없다는 것일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자신은 그저 적당히 오지랖이 넓고, 적당히 소시민일 뿐이었다. 살려달라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이상, 아픈 이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마스크 쓴 이 한 명 없는 참관석을 느릿하게 훑어본 진호는 제복을 입은 경관들의 인도에 따라 법정을 나섰다.
부우웅!
"이봐, 귀염둥이. 넌 무슨 죄를 저지른 거야?"
"……."
진호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고, 옆 자리에 앉은 백인 범죄자는 쳇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이봐. 이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뜬 진호는 이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길가에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줄줄이 서 있다.
남자, 여자, 노인, 아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중지와 약지를 구부린 채 활짝 편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곧 그들은 벗으면 안 될 마스크를 벗으며 진호를 향해 미소를 보내 왔다.
울컥!
"뭐, 뭐야, 저건!"
진호는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을조렸다.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난 잘못하지 않았구나.'
진호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커엇!"
덜컹.
멈춘 버스 안에 지대한 긴장감이 흘렀다.
마치 2시간 같은 20여 초의 시간이 흐르고, 크리스 놀란과 조나단파블로, 장영진이 눈물로 뒤덮인 볼을 거칠게 닦으며 크게 외쳤다.
그 모습이 그들 세 감독이 내뱉을 말을 미리 해 주었다.
"오케이-!"
"더 찍을 필요 없습니다!"
"최고야! 최고!"
그들은 장담했다.
이건 자신들 인생 역사상 최고의 작품이 될 거라고 말이다.
스태프, 배우 모든 이들이 지르는 커다란 함성이 마치 미래의 성공을 말하는 것 같음에 그들과 진호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끝이구나.'
끝이다. 이제 영화와 드라마의 모든 촬영이 끝났다. 한숨을 길게 내쉰 진호는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성공할까? 하겠지?'
미약하게 든 의문이 점점 몸집을 키워 갔다.
마치 좀을 먹는 것처럼 불안이라는 어둠이 마음속에서 커져 가고 있다.
"뭐해? 뒤풀이 장소로 이동할 준비 안 해?"
진호는 멍하니 정 실장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해맑게 웃고 있는 그.
괜스레 심술이 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아 나. 진짜 산통 깨는 데는 뭐 있다니까?"
"뭐, 인마. 뭐."
"나 센티해지고 있는 중이었거든요? 담당 연예인이 사색을 즐기는 것 같으면 어?"
정 실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센티하기는 무슨! 이렇게 좋은 작품에서 이렇게 대단한 연기를 했는데, 뭔 지랄 났다고 센티해져?"
맞는 말이다. 최고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최고의 감독들의 연출아래 최고의 연기를 보였다.
불안해지거나 우울해질 이윤 없었다.
'진짜 고맙다니까.'
곁에 있어줘서 언제나 고마웠다.
진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하늘을 보았다.
방금까진 공허하게 느껴졌던 하늘이건만 지금은 무척이나 밝고 따뜻했다.
"완연한 봄이라서 그런가 봐요."
"지랄. 가을도 아니고."
"허. 자기 연예인한테 말하는 것 좀……."
우우웅!
진호는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다미앙 씨? ……설마? 여보세요."
다급히 전화를 받은 진호는 이내 들려오는 다미앙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오싹 갑자기 온몸에 드는 오한에 정 실장은 깜짝 놀라 진호를 바라보았다가 이를 악물었다.
진호가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럼 저도 밑밥을 깔아야겠네요."
전화를 끊은 진호는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네, 피터."
피터 에르난데스, 그건 브루노 마스의 본명이었다.
마지막 피날레가 다가오고 있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