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18화
6. 다음 단계
버려진 땅에 핀 꽃.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기억하는가.
그 끔찍한 악몽의 날을 말이다.
그로부터 약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졌던 미국은 다시 일어섰다. 아니, 본 식자도 다시 일어섰다고만 생각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패셔너블한 젊은이들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 SNS를 장악한 비싼 바이크를 타고 돌아다니는 바이 커들, 푸드트럭에서 시작해 성공한 요리사.
미국은 다시 아메리카 드림의 아메리카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밝음 이면에는 지독히도 시리고 주운 어둠이 존재하고 있었다. 여전히 치료되지 않고 있었다.
하루에 겨우 두 번 오는 버스, 1시간 반을 꼬박 걸어야 있는 작은 마트, 저녁 9시가 되면 꺼져버리는 가로등, 그리고 겨우 20명만 남은 늙은 주민들.
미시건의 시골 마을을 말하는 거냐고? 아니다. 미국 최고의 도시뉴욕 안에 버젓이 존재하는 곳이다.
정부도, 그리고 각 주도, 도시의 행정부도 외면해 버린 악몽의 잔재.
<중략>
그런 버려진 땅에 다시 웃음이라는 꽃이 피기 시작했다.
나눔이라는 꽃이 피고, 사랑이라는 꽃이 피고, 동정이라는 꽃이 피었다.
드디어 정부에 여유가 생겨 그들을 돌보았냐고?
아니다. 혹시 진호 리라는 이름을 기억 하는가?
한국 전쟁에 참여한 재향 군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수억 달러를 투자해 재단을 만든 엔터테이너를 말이다.
그가 돌보았다. 그의 전화 한 통에…….
<하략>
올 3월 개봉하는 영화 카지노의 주인공 진호 리는 현재 감독 크리스 놀란과 함께…….
부스럭
"……와, 이건 뭐. 로비를 했다고 해도 믿겠네요."
트레일러 안, 진호는 혀를 내두르며 뉴욕 포스트를 덮었고, 그의 맞은편 화면 속 다미앙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대의 모니터속 분활된 화면에 있는 지사 임원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미국을 비롯해 각국의 공신력있는 주간지와 잡지에도 모두 이번 일과 관련된 기사가 기고될 예정입니다.
"최소 한 달은 떠들썩하겠네요."
기회다.
"미국 지사장은요? 헝거 휴론과 연계를 하려고 하는 그 사람은요?"
얼마 전 본사에서 지원 삭감이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다미앙 지사도 이제 궤도에 올랐으니 본사에서 부담하는 금액을 다른 지사들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공문이었다.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던지라 사내 유보금을 많이 쌓아 두어서 타격은 별로 없었지만, 타이밍이 참요상했다.
그래서 조사해 본 결과, 미국 지사장이 제법 많은 걸 본사에 양보하면서 본사회의에 이번 안건을 상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위해 미국 지사장은 두문불출을 했던 것이고, 헝거 휴론은 멍청하게도 그 안건을 통과시킨 것이었다.
-현재 남미 총괄 지사에 있는 걸로 판명되었습니다.
정보부서의 박 상무의 말에 진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새로운 모델들을 수급하러 간거군요."
-그런 걸로 판단됩니다.
잘만 세공하면 세계를 비출 원석들이 넘쳐나는 남미.
참 재밌는 수를 쓰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 전무를 보내려고 합니다.
순간 진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다미앙의 오른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최철규. 이미 지사 모델파트의 수장인 그는 인재들이 넘쳐나는 다미앙 지사에서 살아남기위해 정말 수 많은 업무와 감각을 익혀야 했다.
"최 전무님이라면 믿을 만하죠. 까타레나와 조나단, 올가도 함께 보내세요. 그 아이들이라면 자신들이 뭘 해야 할지 알 거예요."
스포츠로 치면 셀링 클럽이나 다름없는 남미 총괄 지사는 미국과 프랑스 지사 다음으로 발언권이 높지만, 그 수익은 동남아 지사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하다.
진호와 다미앙은 그런 남미 총괄지사에 모델을 발굴해 파는 것 외의 수익 모델을 제시하며 모든 노하우를 전수할 생각이다.
모델을 발굴해 다른 지사에게 넘기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돈맛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외부의 도움이 없어도 수익을 창출하게 될 남미 총괄 지사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것이 참 궁금해졌다.
본사의 제어를 벗어나다 못해 이쪽에 붙을 남미 총괄 지사 때문에 화들짝 놀랄 헝거 휴론의 얼굴도 보고 싶었다.
'다미앙 씨와 나를 버리려 들어? 노하우도 이제 어느 정도 전수받았으니까?'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았을 테지만, 회장으로서의 영향력을 위해 다미앙 지사의 성장에 제동을 걸려는 건 분명했다.
이는 분명 아르노의 은퇴식 때 생긴 일 때문일 테지만, 참 멍청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확실히 치우긴 치워야겠네요. 현재 저희 편으로 돌아선 지사가 어디어디라고요?"
-동남아 지사들과 아시아 총괄지 사, 포르투갈…….
진호와 다미앙, 임원들은 이후로도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페이크 레전드가 조용하네요. 한국은 몰라도 미국이라면 분명 내가 프로듀서다라고 말할 사기꾼들이 나타나야 할 텐데요."
진호가 그린 그림대로 플랜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그런 사기꾼들이 나타나 주어야만 했다.
"벌써 몇 달째 정체된 건지……. 아, 사기꾼들 진짜 소심하네."
-흠. 아무래도 마돈나를 비롯한 레전드들의 이름값이 너무 높아서가 아닐…….
벌컥!
"진호야!"
"응? 정 실장님?"
다급히 달려온 정 실장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거! 이 기사 봐 봐! 이게 우리가 원하던 거 맞지?"
'월간 FL의 프로듀서는 나다?'
진호는 기사 제목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휴우. 드디어 나타났네요. 우리 대신 세상을 흔들어 줄 사기꾼이……"
-그 사기꾼이 시작이죠.
다미앙과 임원들의 얼굴에도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이제 이 사기꾼이 어떤 방식으로든 돈을 벌게 되면서 작은 빈틈을 드러내며 의혹을 만드는 순간, 너도나도 페이크 레전드의 프로듀서라 주장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펼칠 노이즈 마케팅이 바로 다미앙 지사가 노리는 것이었다.
-그럼 저흰 가수분들에게 다시 한번 사정을 설명하고,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겠습니다. 이 불이 세상을 뒤덮을 때까지.
'이렇게 된 김에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소문을 더 키우자. 그리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고 따라 할 수 없는 성을 만들자.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는 그들을 설득시키기 위한 사탕발림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어설프게 따라 하는 사람이 생겨서는 안돼.'
후에 따라할 이들이 수익 전액 기부라는 뜻깊은 일을 하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이 크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그런 것이니 말이다.
분명 모창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이득을 취하려 들 것이고, 그럴수록 페이크 레전드의 질은 떨어지게 될 것이다.
레전드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고, 레전드의 페이크 싱어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결국 레전드보다 이름값이 떨어지는 가수들을 모창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된 순간부터 페이크 레전드는 일개 모창 프로젝트가 되어 버린다.
진호는 결코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고, 그래서 사기꾼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세상 전부가 불타오르면 그 사기꾼들을 싸그리 박멸해야지.'
그렇게 되기까지 참 처참한 진흙탕 싸움이 될 테지만, 의외로 이쪽에는 타격이 별로 없다. 애초부터 겉으로 드러난 건 페이크 싱어일뿐이기에 모든 일이 명명백백 밝혀지면 세상은 인내하고 또 인내한 레전드들과 진짜 페이크 싱어들을 칭송할 터였다.
혹여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이런 계획이 아니었다면 결코 사기꾼의 등장을 용납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럼 이제 저도 이제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겠네요."
진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자 다미앙을 비롯한 임원들의 눈도 찬란히 빛나기 시작했다.
-예. 카지노 개봉 한 달 후 기점에 맞춰 앨범을 발매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주 후에는…….
"월간 페이크 레전드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죠. 페이크 레전드, 아니 진짜 레전드들의 정규 앨범발매를요."
쿵!
너무도 무겁고 경악스런 말에 공기가 잠시 무거워졌다.
'세상 사람들은 레전드의 대거 복귀에 혼란해 하면서도 기뻐할 것이고, 올 한 해는 별들의 전쟁과 축제가 벌어지겠지.'
그렇게 된 순간, 페이크 레전드는 잠시 힘을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화려한 피날레를 위한 잠시 동안의 숨고르기일 뿐이었다.
-휘유. 올 한 해는 정말 대단하겠군요.
"네. 세계적인 축제가 될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야죠."
활짝 웃은 진호는 이후 조금 더 회의를 하다가 트레일러를 나섰다.
그런 그에게 슈트를 입은 세 명의 백인 남성들이 다가왔다.
"아, JP모건에서 오셨다는 분들이네요."
JP모건도 이 동네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압류되었는데 경매로도 팔리지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그 매물들을 쥐고 있던 JP모건이 진호를 찾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마트와 코인세탁소, 보험 회사 3곳, 숙박업소 2곳의 입점 계약이 완료되어서 이렇게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미스터 리."
"네? 왜 그걸 저에게……"
50대의 히스패닉계 남성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런 대형 정보를 알려 주신 것에 대한 작은 호의랄까요. ……아니면 저희 JP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준 프로그램을 판매해 주신 소중한 파트너를 위한 작은 호의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진호는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정보는 차이나타운에도 넘겼는 데요, 뭘."
영화와 드라마 촬영이 끝날 때 즈음엔 중국 전통 찻집이라든가 차이나 레스토랑, 마사지 같은 곳들이 입점할 터였다. 그를 위한 계약은 이미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는 애써 조성할 랜드 마크를 망치는 행위가 아니었다. 크리스 놀란이 애초부터 영화 배경으로 만들어 놓은 가짜 업체들을 진짜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인테리어까지 똑같다고 봐야 했다.
진호는 은행뿐만 아니라 이들까지 끌어들였다.
'이제 사람만 오면 돼!'
안 오는 게 더 이상 한 판을 벌여뒀으니, 이제 이 동네도 곧 북적북적해질 터였다. 메리 할머니를 비롯한 20명의 독거노인들도 웃음과 활기를 찾을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좋은 일을 하시는 겁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뜻깊은 일을 하게 해 주셔서 오히려 저희 JP모건이 더 감사합니다. 그럼."
그들이 그렇게 떠나자 다시 머리를 긁은 진호는 몸을 돌렸다.
저 멀리서 너무도 익숙한 차를 선두에 세운 차량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르릉. 끼익!
애마인 67년형 쉘비 머스탱 GT 500이 멈춰 서며 너무도 보고 싶었던 두 사람이 내리자 진호는 활짝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지노!"
"진호야!"
"어서 오세요, 조나단 감독님! 그리고……"
진호는 한국에서 온 소중한 사람을 와락 끌어안았다.
"장 감독님!"
드라마도 이제 크랭크 인이었다.
* * *
겨울의 찬바람이 싱싱 부는 옥상.
넓게 쳐진 천막과 작은 모닥불이 추위를 쫓아내고 있고, 나무 박스를 의자 삼아 앉은 진호와 한 남성이 소시지를 구우며 맥주를 홀짝이고 있다.
"약은 좀 팔려?"
"그냥 저냥 대충. 겨울이라 감기약이랑 비타민도 꾸준히 팔려 주고 있죠."
오랜만에 찾아온 동네 형의 안부인사가 왜 이리도 거슬리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풋. 아직도 프로모션 약 빼돌려서 팔아먹는 거냐?"
"남이사. 그보다 요새 어때요? 무역 일은 잘 하고 있는 겁니까?"
움찔!
진호는 입을 꾹 다무는 동네 형을 빤히 응시했다.
"혹시……"
"어, 사기 당해서 다 털렸어. 남은 건 겨우 이 가방 하나뿐이지."
"……."
진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연기력으로는 말이 필요 없는 남자, 벤 에플럭은 밤하늘을 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러니 맥스 네가 이것 좀 팔아줘야겠다."
"네?"
오직 시나리오만 보고 참가한 벤 에플럭의 ■이 흉흉하게 빛났다.
"이게 인도에서 비밀리에 개발된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 그리드라는 거거든?"
가방을 두드린 벤 에플럭은 진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팔아 줘."
쿵!
공기가 순간 무거워졌지만, 진호는 눈빛을 서늘하게 가라앉히며 코웃음을 쳤다.
"꺼져요."
"……커엇! 오케이-!"
크리스 놀란의 외침이 터지자, 진호와 벤 에플럭은 누가 먼저 랄 것 없이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역시 섭외에 응하길 잘 했지."
결코 자신에게 밀리지 않은 연기력. 아니, 진호가 코웃음을 칠 때는 순간 연기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한 대 쳐 버리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벤 에플럭은 그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메튜가 그렇게 칭찬한 이유가 있었어.'
진호는 호의가 가득한 그의 눈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에휴, 난 표정이 더 다채로운 브레들리 루퍼 씨나 마크 월버그 씨가 됐으면 싶었는데……"
"뭐?"
진호는 장난이라는 듯 씩 웃었고, 어이없다는 듯 웃은 벤 에플럭은 진호의 머리를 헤집었다.
"앗! 바로 드라마 촬영 들어가야 하는데!"
"어차피 덥수룩한 스타일이잖아."
"덥수룩한 거랑 새집은 다른 겁니다만!"
진호는 방방 뛰면서도 그가 참 고마웠다.
영화와 드라마의 동시 촬영.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벤 에플럭은 '재밌겠네'라는 말을 하며 바로 승낙했기 때문이다.
"자, 자! 배우들! 그만 노시고 촬영합시다."
"네."
"넵!"
진호는 어느새 스태프와 중요 장비가 다 교체되고, 방금까지 크리스 놀란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은 조나단 파블로와 장영진을 보며 몰입에 들어갔다. 그건 벤 에플럭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결코 짧지 않았던 시간이 흐른 후 진호와 벤 에플럭은 동시에 손을 살짝 들었고, 장영진은 눈을 빛냈다.
"신 넘버 15-1! 하이-액션!"
그렇게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