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15화
5. 동시 진행
부우웅!
어딘가로 향하는 차량 안,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온 진호가 시나리오를 힘겹게 넘기고 있다.
그러나 그 두 눈동자는 활기로 넘치고 있었다.
'이거 진짜 미쳤네.'
읽고 또 읽어 봐도 미쳤다는 생각만 든다.
대사, 지문 등등 특수효과가 빵빵터지거나 CG가 도배되는 그런 블록버스터가 아니건만 이건 무조건내 거라는 욕심만 가득 가득 생겨났다.
'누구에게도 못 줘!'
하지만 정 실장의 생각은 달랐다.
"진호야, 너 진짜 그거 할 거냐?"
"당연하죠!"
너무도 귀한 보물인 양 시나리오를 끌어안는 진호의 모습에 정 실장의 화는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왜! 블록버스터도 있고, 마블이나 DC의 히어로물도 있고, 발랄한 뮤지컬이나 애절한 로맨스도 있는데 왜! 그 개리 제이머가 다해 준다는데 왜에에-!"
"그중 이게 최고니까요."
분명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 비슷한 크기를 가진 운의 파도를 보였다. 그런데 거기에 어떤 인물들을 추가하자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황금의 태풍이 몰아쳤다.
진호는 그 장면을 보여 줄 수 없다는 게 너무도 안타까웠다.
'내 의견을 들어 주면 좋을 텐데……'
배우로서 너무 괘씸한 발언이 될 것이기에 진호의 입술이 바짝 말라 왔다.
"하아. 그래, 내가 어떻게 널 말리겠냐. 다 왔어."
"아, 네! 어?"
몸을 일으키던 진호는 갑자기 휘청였다.
"괜찮냐!"
"……아, 네. 괜찮아요. 요사이 꽤 무리를 했나 봐요."
순간 하얗게 질렸던 정 실장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러니까 내가 작작하라고 했지!"
"하하. 죄송합니다. 오늘 미팅 끝나면 내일까지 푹 쉴게요."
"……지랄. 그렇게 말해 놓고 작업실로 쪼르르 들어갈 거면서. 개가 똥을 참지!"
거기다 오늘 또 녹음이 있다.
정 실장의 말은 굉장히 격해졌지만, 진호는 그게 자신을 걱정하는 것임을 알기에 미안하다고 웃어줄 뿐이었다.
"이거나 써."
"앗. 감사!"
정 실장이 넘겨준 선글라스를 끼며 차에서 내린 진호는 바로 거대한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제시, 어제 나온 페이크 레전드 들었어?"
"페이크 레전드? 어제 어메이징 서바이벌 때문에 검색 못해 봤는데, 뭐 새로운 곡 나왔어?"
"아렐이랑 레일라 스위프트의 듀엣 말하는 거지? 나 들었어!"
로비를 오가는 수 많은 사람들 중 몇몇의 대화에 귀가 쫑긋 솟았다.
"와우. 진짜 판타스틱했지! 아니, 그건 전율이었어!"
"맞아! 난 둘이 합창하는 부분에서 울었잖아!"
"아렐이랑 레일라 스위프트가 그렇게 어울릴 줄이야! ……하아, 진짜 아렐이랑 레일라 스위프트가 듀엣 앨범을 내면 좋겠다……"
"아님 콘서트에서 이벤트성이라도……"
"매니지먼트는 일을 안 하는 건가? 이렇게 판이 깔렸잖아! 페이크 레전드가 서로 어울린다고 증명했잖아!"
'그렇지. 더, 더.'
대중들의 반응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 가고 있다.
진호의 입가에서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내일 녹음이 브루노 마스랑 범수 형님이었지? 재범 형님까지."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범 삼촌은 도나랑 아리예요."
"크-. 미쳤네, 미쳤어. 내가 죽기 전에 빌보드 레전드랑 한국 레전드가 콜라보 앨범을 내는 걸 볼수 있을 줄이야!"
정 실장은 사이다를 한 잔 거하게 들이켠 추임새를 뱉어냈다. 그런 그들에게 안경을 낀 50대의 남성이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지노 리. 개리 제이머 씨의 비서, 질 커크입니다."
그랬다. 진호는 오늘 개리 제이머와 미팅을 하러 온 것이었다.
"반갑습니다. 이진호입니다. 이쪽은 제 매니저 정구호입니다."
"매니저 구호 정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질 커크는 그들을 꼭대기 층으로 안내했다.
똑똑똑!
"개리, 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질 커크가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가며 선글라스를 벗은 진호는 시거를 물고 있는 이마가 꽤 넓은 백인 노인을 보곤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개리 씨. 순례길은 잘 걸으셨어요? 다친 곳은 없고요?"
"……오우. 날 기억하는 겁니까?"
떨리는 가슴을 겨우겨우 다스리며 진호가 오길 기다리던 개리 제이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제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드신분의 얼굴을 잊어버릴 리 없죠."
웃음을 크게 터트린 개리 제이머는 자리를 권했고, 진호는 굳이 시간을 끌 필요 없다는 듯 대본을 내밀었다.
"이 자리까지 온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죠?"
"이런, 성격이 급하군요."
개리 제이머는 그렇게 말했지만, 시나리오를 보낸 지 며칠이 됐다고 굉장히 헐어 버린 대본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건? ……허어.'
헛웃음을 흘린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진호를 보았다.
"의외의 작품을 골랐군요."
"진주들 속에 묻혀 있는 다이아몬드죠."
"다른 작품들이 진주라는 겁니까?"
"모두 찬란한 보석들이었죠. 진주도 있고, 에메랄드도 있고, 루비도 있고! 고르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앓는 소리를 낸 진호는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가요. 당신의 시험을 통과한 건가요?"
"……으하하하핫!"
개리 제이머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듯 정말 속 시원하게 웃었다. 그러다 돌연 정색한 그의 눈빛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퍼펙트하게!"
개리 제이머는 진호의 작품고르는 안목을 살펴보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작품뿐만 아니라, 배우라면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갈 작품들을 섞어 그에게 보냈었다.
그리고 진호는 성공적으로 모든 유혹과 함정을 뿌리치고, 개리 제이머가 강렬히 원하는 영화를 들고 왔다.
이는 운명이었다.
"지노. 당신은 정말 욕심이 없군요. 그 많고 많은 영화중 이런 저예산 영화를 고르다니!"
"돈을 많이 쓴다고 좋은 작품인건 아니니까요."
훌륭하다. 이래서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그렇게 매달리는 것일 터였다. 개리 제이머 본인도 지금 당장 진호를 주머니 속에 넣어서 꽁꽁 숨기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원하는 감독이 있습니까, 지노?"
"이런……"
정말 난처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그건 진호가 그토록 원하던 질문이기도 했다.
개리 제이머는 속내를 쏙 감춘채 난처한 표정만을 짓고 있는 진호를 보며 옅게 웃었다.
'저 정도로 성공하면 분명 까다로워질 때도 됐는데 말이야……'
그는 운명을 한 번 더 시험해 보기로 했다.
"말하기 힘들면 쪽지에 적어서 로에게 보여 주는 건 어떻습니까? 당신과 제가 얼마나 통하는지 알고 싶군요."
"……비밀 엄수를 해 주신다면 한번 써 보겠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은 개리 제이머는 메모지와 펜을 진호에게 내밀었다.
'작품 욕심이 대단한 이 배우가 감독을 고르지 않을 리 없지.'
그 어떤 대작이라고 해도 감독을 잘못 만나면 망작이 되어 버리는 게 이 바닥이다. 진짜 배우는 시나리오만큼 감독도 가리는 까다로운 존재였고, 진호는 그런 진짜 배우였다.
'어디 얼마나 욕심이 많은 배우인지 볼까?'
"다 썼어요."
"저도 다 썼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뒤집어 볼까요?"
진호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과연 내가 생각한 그 분을 적으셨을까?'
진호는 그 점이 무척이나 기대되고, 또 기대되었다.
'부디!'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진호는 투욱 작은 소음을 내며 뒤집어진 하얀 메모지에 적힌 두개의 이름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개리 제이머는 그런 진호를 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어떻습니까? 제가 그 작품을 위해 생각해 두었던 감독들이?"
쪽지에 적힌 이름은 크리스 놀란과 스티븐 버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감독 두 명이었다.
* * *
진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쩌냐니.'
꿈에서조차도 감히 생각한 적 없는 감독들이다.
너무도 까다롭고 까다롭기에 스스로가 뽑은 배우가 아니면 절대 연출을 하지 않는다는 대가들이다.
'잠깐?'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식겁한 진호는 그 두 명의 이름을 떠올리며 대본을 보았다. 그리고 넋을 놓았다.
콰아아아아아!
소리만 들린다. 그것 외에는 온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절로 경건해진다.
절로 심장이 빠르게 뛰며,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평생토록 바라만 보고 싶은 이적의 풍경.
"……노? 지노?"
'아.'
재빨리 스위치를 끈 진호는 재밌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한 개리 제이머의 모습에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놀랐습니까?"
"……네. 그 두 분은 생각지도 않았으니까요."
"호오. 그렇습니까? 그럼 이제 지노가 생각한 감독들을 볼 수 있을까요?"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당당히 쪽지를 뒤집었다.
분명 개리 제이머가 택한 인선에 크게 밀린다고 하지만, 이들도 결코 꿀리는 이들이 아니었다.
'절대로! 그건 운의 태풍이 증명했으니까!'
개리 제이머는 진호가 고른 감독들을 보곤 동요를 보였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조나단 파블로, 영진 장?"
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레오에게 오스카를 거머쥐게 한 레버넌트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라니."
한 방 맞았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는 분명 나이는 많지만, 분명 크리스 놀란이나 카메론 뒤아즈 감독만큼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감독이었다.
오스카는 결코 아무나, 어쩌다 터진 포텐 따위에게 트로피를 쥐어줄 만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니 말이다.
"거기에 조나단 파블로라……"
솔직히 조나단 파블로는 정 때문에 택한 인선이 아닌가 싶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 않다.
"장 감독님도 결코 뒤지지 않는 명감독입니다."
"……더 씨프와 코리안 쉐프. 확실히 그렇겠군요."
개리 제이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들이 크리스나 스티븐만큼 이 작품과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들진 않는군요."
"부정할 수 없네요."
세상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둘 중 누구를 택하겠습니까? 전 그래도 스티븐보다는 크리스가 좋다고 보는군요."
"……저 역시."
"그럼 크리스가 메가폰을 잡는 걸로 합시다."
개리 제이머는 손을 내밀었고, 진호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것보다 빨리 끝나 버린 일에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크리스 놀란 이라니!'
진호는 자신에게 스킬이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벌써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진한 의문이 생긴다.
"음. 초를 치려는 건 아니지만, 크리스 놀란이 감독을 맡으려 할까요? 그분에겐 이미……"
열렬한 서포터이자, 떼어 놓으려고 해도 결코 뗄 수가 없는 전속제작자가 있다.
지금의 크리스 놀란을 완성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초대형 제작자, 에이프릴 토마스라는 부인이 말이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그건 제작자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최고의 연기를 보여 줄 생각만 하면 되는 겁니다, 지노."
"아……"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가능하기에 크리스 놀란을 언급한 거겠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개리 제이머는 환하게 웃는 진호의 얼굴에 마주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런데……. 이걸로 끝인가?'
외계인으로 불리며, 어디로 튈지 몰라서 참 골치 아프다는 푸념이 돌아다니는 진호다.
그래서 엄청 기대를 했는데, 이렇게 미팅이 끝나 버릴 것 같다.
초조해진 개리 제이머는 결국 먼저 묻고야 말았다.
"더 바라는 건 없습니까?"
"더 바라는 거요?"
움찔!
있다. 있긴 있는데, 너무 어이가 없는 일에다가 너무 과한 일이라서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진호가 괜히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조나단 파블로, 장영진을 적은게 아니었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개리 제이머가 가지고 있는 호의마저 사라질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에 진호는 침묵을 하기로 했다.
"아뇨. 없습니다. 제작자가 개리 제이머이고, 감독이 크리스 놀란인데, 더 바라는 게 있을 리가 없죠."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고,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다.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음…….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개리 제이머는 그제야 진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흠. 그런데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군요.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음……. 글쎄요. 아마 이번 영화에 호재일 일?"
"예?"
진호는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 * *
"엠마, 이 시나리오 좀 봐 봐."
지중해에서 여유롭게 휴가를 즐기던 크리스 놀란은 그 개리 제이머가 보낸 한 권의 시나리오와 CD 몇 장을 부인이자 영원한 파트너인 에이프릴 토마스에게 보여주었다.
"뭔데?"
"개리가 보낸 거야."
"개리 제이머?"
가운을 걸친 채 졸린 눈으로 걸 어오던 에이프릴 토마스는 눈을 번쩍 뜨며 시나리오를 받아 들어 살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지막 장을 덮은 그녀의 두 눈엔 진한 의혹이 담겨 있었다.
"한번 물면 결코 놓지 않는 미친 개 같은 사람이 이런 작품을 왜 우리에게 보낸 거지?"
너무 끌린다.
남편인 크리스 놀란의 취향에 딱 맞는 작품이기에 더더욱.
그렇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이 CD들을 보면 알겠지."
그들은 거실의 스크린을 내려 프로젝트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다섯 장의 CD를 모두 봤을 때 그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에이프릴 토마스는 얼굴을 와락구겼고, 크리스 놀란은 두 눈을 강렬히 빛내고 있었다.
"안돼, 여보. 절대 안돼…… 뻑!"
다급히 남편을 말리려 했던 에이프릴 토마스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결코 남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는 특이한 성격을 가진 감독이자 남편인 크리스 놀란이 불이 붙고야 말았다.
이건 이제 말릴 수가 없고, 역시 그 생각이 맞다는 듯 그의 입에선 그녀가 듣기 싫은 말이 흘러나왔다.
"미안, 엠마. 이렇게 정중히 초대하는데 안 갈 수가 없잖아."
'이런 배우가 그 시나리오를 연기 하려는데 맡아 볼 생각이 없냐, 너 이거 거부하면 다른 감독 준다'라는 너무도 정중한 초대장.
거기다 그 개리 제이머가 발굴한 배우에다가 시나리오다. 연출자로서의 피가 끓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그 늙은이 진짜 싫어! 암튼 가기만 해 봐! 정말 각방이야!"
"딱 3개월 동안만 쓰는 걸로 할까?"
3개월. 그건 영화 촬영에 들어가는 평균적인 기간이었다.
"……다신 집에 들어올 생각 마!"
에이프릴 토마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크리스 놀란은 다시 첫 번째 CD를 플레이어에 넣을 뿐이었다.
진호의 첫 번째 주연작, THE J를 시청하기 시작한 그는 입술을 비틀었다.
"역시 병신 같은 할리우드. 이런 배우를 또 이렇게 늦게야 발견하지. 그래서 나로선 감사하지만!"
그의 눈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사랑에 빠진 소녀의 그것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