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359화 (359/424)

15권 10화

진호는 아르노가 있는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았다.

-……추가하기로 하지.

-지분에 대한…….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울컥한 진호는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건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이었다.

'아무도 없어.'

가슴 속에 차오른 슬픔이 더욱 짙어졌다.

복도 전체에 손님은 커녕 아르노의 비서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겨우둘.

"이게 뭐야."

제아무리 정승이 죽으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찾지 않는다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후우."

신색을 바로 잡은 진호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아르노 씨."

진호는 놀란 아르노의 눈을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방금 통화했잖아요."

"……안젤라와 피에트로는 만나지도 않은 건가?"

아르노는 떠들썩했던 창밖을 통해 진호가 방금 전 도착했다는 걸 확인했었다.

"축하해 주시는 분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도 뮤즈의 축하를 무엇보다 기다리고 있을 거야. 자신들의 킹메이커를 말이야."

"그래서 이따가는 저 혼자 독점하려고요."

그렇게 말한 진호는 방 한편에 있는 위스키와 컵을 들고 아르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웃으며 말을 던졌다.

"기분은 좀 어떠세요?"

아르노의 입이 잠시 다물어졌다.

진호는 위스키를 따라 그의 앞으로 내밀었고, 아르노는 잠시 갈등을 하다가 단숨에 들이켰다.

"글쎄…….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감정이 생기지 않는군. 아직 사람들 앞에서 은퇴를 발표하지 않아서 그러나?"

"그래요? 흠, 홀가분해하고 계실줄 알았는데……. 이젠 모든 책임과 압박에서 벗어나게 되시는 거잖아요. 축하드려요. 이제 엔조이 라이프를 즐기시면 되겠네요."

"엔조이 라이프? ……하핫. 그렇겠군. 아, 그보다 더 로드 오브 월스트리트가 엎어졌다면서? 투자자들이 손을 털었다지?"

화제를 돌리려는 게 보였지만, 진호는 따라 주기로 했다.

"흠. 조기 종영한다는 소린 들었지만,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할 건가?"

"하겠어요? 저도 자존심이 있는데?"

"으하핫!"

"흐흐흐. 아, 처음 뵙겠습니다. 이진호입니다."

"……베르베우 씨의 개인 변호사장 따르농입니다, 무슈 리."

"네, 만나서 반가워요."

'그러니 그딴 건 태워 버리시겠어요?'

진호는 변호사의 서류 가방 속으로 다급히 들어갔던 몇 장의 종이를 떠올리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환하게 웃으며 아르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참으려 했지만, 더 이상은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자, 그럼 가시죠."

"음?"

"마지막이라도 황제는 황제다워야죠."

진호의 그 말에 아르노의 눈이 크게 떠졌다.

황제의 마지막.

모든 걸 내려놓았기에 시원섭섭하기는 하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조금 섭섭하기는 했지만, 잔잔했던 아르노의 가슴에 격정이 일었다.

그 순간 문이 다시 거칠게 열리며 캘리 메시어가 난입했다. 그녀는 놀라는 진호와 아르노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애인과 술을 마시고 있었군."

진호는 뜨악했다. 전에 만났던 그녀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험한 말들이었다.

"……끄응. 그 주둥이는 언제 깨끗해지는 건지. 무슨 일이야?"

"우리 르농이 혼자서 폼 잡은 채 울고 있을 게 뻔해서 위로해 주려고 왔지. 르농. 울었어, 안 울었어?"

'와. 이게 마담 메시어의 본 모습인가?'

진호는 입을 떡 벌렸다.

"……썩 꺼지지 못해!"

"흥. 원래 남편의 마지막은 아내가 챙기는 법이야. 그보다 앙트완과 델핀, 나머지 놈들은?"

"……."

아르노의 침묵은 대답이 되었다.

캘리 메시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그런 것들을 낳고 보양식을 먹은 내가 미친 년이지."

자식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예상이 되었다.

앙트완과 델핀은 피에트로에게 LVMH를 넘긴 아르노가 꼴 보기 싫어서 식이 시작할 때쯤에야 올테고, 이미 옛적에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하여 한 재산씩 들고 나간 나머지 자식 놈들은 아직도 삐져 있는 것이다. 낳고 키운 어미이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일어나, 아르노. 여기서 폼 잡고 있으면 누가 알아주기나 할 것 같아? 저기 있는 놈들이 '흠, 황제의 마지막은 깔끔하군'이라는 말을 할 것 같냐고.'황제도 늙으니 겁쟁이가 됐군'이라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황제로서의 모든 것을 이양하는 날이기에 그동안 각을 세웠던 모든 적들이 찾아 왔을 터였다.

움찔!

아르노의 낯빛이 크게 흔들렸고, 진호는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그가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렇게 안주인 노릇을 하고 싶었으면, 저택을 나가지 말았어야지."

"애들도 모두 다 키웠는데, 그 숨막히는 저택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

"……흥. 한발 늦은 주제에 잘도 지껄이는군."

아르노는 진호의 손을 강하게 잡으며 몸을 일으켰고, 단숨에 상황을 파악한 캘리 메시어는 서글피웃었다.

"…… 고마워요, 뮤즈. 당신이 자식들보다 낫네요."

"아뇨.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아르노 씨는 제겐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그 당연한 일을 왜 내 자식놈들은 안 한 걸까요.'

이젠 정말 포기였다. 아르노와 캘러 메시어는 이제 남은 미련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뮤즈."

"크흠흠."

"안 뺏어가, 이 고약한 늙은이야!"

"당신은 고약하지 않은 줄 알아!"

"하하, 가시죠."

재빨리 진정시킨 진호는 둘은 이끌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잠시만요, 뮤즈."

멈춰 선 캘리 메시어가 아르노의 넥타이를 매만졌다.

아르노는 너무 오랜만에 겪는 일에 화들짝 놀랐지만, 아내의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다.

그렇게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짧은 시간 동안 수 많은 대화를 나눴다.

"다 됐어. 하여튼 칠칠맞지."

그렇게 말한 캘리 메시어는 진호의 손을 잡아 끌어 자신과 아르노의 사이에 세웠다.

"마담?"

진호는 당황했지만, 아내의 뜻을 알아차린 아르노는 진호로 하여금 자신을 부축하게 하였다.

"아르노 씨?"

"흠. 이제 가지."

그 말이 뱉어진 순간 아르노와 캘리 메시어의 존재감이 커졌다.

그에 갈등하던 진호는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존재감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둘의 뜻에 어울려 주기로 한 것이었다.

'불쌍한 사람들……'

그렇게 그들 셋이 들어선 순간, 연회장의 시간이 멈춰 버렸다.

* * *

아무리 은퇴를 한다고 하여도 황제는 황제였다.

오늘 이 자리를 찾은 사람들은 아르노와 캘리 메시어가 등장한 순간 그들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고, 진호는 그 틈을 타 미영에게 다가갔다.

"이모!"

"아들!"

진호는 미영을 힘주어 안았다.

"그동안의 노력을 이렇게 보상받네요."

여성의 몸으로 최고가 되고자 가정마저 버려 가며 일에 매진했던 그녀의 처절하기까지 했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이뤘다.

디올 역사상 최초의 여성 CEO, 그것도 동양인 여성 CEO란 역사를 이룩한 것이다.

진호는 이게 너무도 자랑스럽고, 또 감격스러웠다.

"수고했어요."

토닥토닥 따뜻한 손길이 미영의 가슴을 울렸다.

"모두 아들 덕분…… 읍?"

미영의 입을 막은 진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모두 이모가 잘 했기 때문이고, 지영이가 잘 버텨 준 덕분이에요. 이모가 절 믿고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아들……"

미영의 마음이 다시 크게 출렁였다.

진호는 따뜻하게 웃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영 디올 CEO님."

"……저 역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뮤즈."

새로워질 디올과 진호의 케미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둘은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진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지영이는요? 안 왔어요?"

"……몰라. 졸업 논문 때문에 축하도 안 해 주는 그런 년은."

'에고. 지영아……'

솔직히 미영도 잘한 게 없지만, 오늘은 기쁜 날이기에 말을 아끼기로 했다.

'시간 내서 한번 만나 봐야겠네.'

그렇게 미영을 다독인 진호는 그녀를 찾아온 손님에게 그녀를 인계하고는 피에트로를 찾아 나섰다.

"여기 계셨네요."

피에트로는 테라스에 기대어 파리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는 담배가 하나 물려 있었다.

"후우……. 참 짧지만 긴 시간이었습니다."

담담히 뱉어지는 말에 진호도 피에트로처럼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피에트로는 담배를 권했고, 진호는 받아들였다.

치익!

"후우-."

"솔직히 처음엔 팀이 참 유난을 떠는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그랬죠. 당시 전 일개 대학생이었을 뿐이니까요. 팀이 찾아 왔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하하.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본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골 빈 모델과 다르구나. 이 젊은 친구는 잡을 수 없는 바람이구나. 그게 부러워 당신의 등에 디올이라는 이름표를 붙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로 날아가건 당신은 디올이라는."

"쿡쿡. 그랬군요. 이제야 이해되네요."

피에트로는 수십 년 동안 패션계에 종사하며 수 많은 톱모델들을 만나온 사람이다. 제 아무리 [스킬: 지성이면 감천이다]와 [스킬: 내가 제일 잘 나가]가 시너지를 일으켰다고 해도 햇병아리 모델에게는 그렇게 과분하고 엄청난 대우를 해 준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그런데 그 심술이 저를 여기까지 끌고 왔습니다. 잡을 수 없는 그 바람이 전 세계를 헤집어 놓더니 제가 그토록 바라는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앉혀주었습니다."

진호는 깨달았다.

'흔들리고 있구나.'

온전히 자신의 역량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호는 난간에 등을 기대어 하늘을 보았다.

"그 작은 심술은 제게 돈의 무게를 알게 해 주었고, 효도의 맛을 알려 주었고, 안정을 주었습니다. 당신이 등에 붙인 디올이라는 이름표는 나로 하여금 세상의 크기를 알게 했고, 그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게 할 원동력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스무 살 이진호의 세상은 무척이나 좁았습니다. 재능이 있었더라도 한국 전체도 아닌 서울이란 도시만이 스무 살 이진호가 가진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그걸 깨부셔 준 게 당신입니다."

당시 진호가 아무런 걱정 없이 마음껏 날갯짓할 수 있었던 건, 결국 디올이라는 방패와 피에트로라는 아낌없는 후원자가 존재한 덕분이었다.

진호는 피에트로의 흔들리는 두눈을 또렷이 응시했다.

"팀이 제 등을 떠밀었다면, 피에 트로 당신은 제게 꿈을 꾸게 해주었습니다. 아, 내가 세계에서 통할 수 있겠구나. 그럼 세계를 노리자."

파르르 떨린 피에트로의 눈이 점점 진정되어 갔다.

"당신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렇군요."

피에트로는 담배를 짓밟으며 피식 웃었다.

"이거 앓는 소리를 했다가 크게 혼나고 말았습니다. 역시 뮤즈는 너무 엄해요."

"귀가 얇은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 법이죠."

"……풋!"

둘은 서로를 보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LVMH의 주인이 된 걸 축하드립니다, 피에트로."

"앞으로 영원히 LVMH의 상징으로 남아 주시길 바랍니다, 뮤즈."

"당신과 저의 우정이 지속된다면."

"이런."

"하하. 가실까요? 오늘 이 무대의 주인공들이 모일 시간이 됐군요."

"부탁드리겠습니다."

* * *

식이 시작되려 하자 모두 본인들의 자리로 향했고, 진호도 다미앙을 찾아 움직였다.

그는 아까 보았던 백인 노인과 함께 앉아 있었고, 그들 주위 테이블들에는 모델계에서 내로라하는 에이전시의 대표들과 톱급 모델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진호가 다가오자 눈살을 찌푸리거나 강렬한 욕망을 드러냈다.

진호는 그런 시선들을 모두 무시하며 백인 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미앙과 진호 본인이 매듭을 지어야 할 인물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헝거 휴론."

헝거 휴론. HU 에이전시라는 거대한 개미집의 여왕개미이자 주인이었다.

다미앙과 진호 본인, 그리고 헝거휴론 이 셋이 지어야 할 매듭은 하나뿐이었다.

"만난다 만난다 기회만 엿보다 결국 이렇게 늦게 만나게야 됐군요. 결국 킹메이커가 된 걸 축하드립니다, 뮤즈."

진호는 경계심 없이 선뜻 내밀어진 손을 강하게 잡으며 싱긋 웃었다.

'그래요, 킹메이커. 그러니 이제 그 자리에서 내려 올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미스터 휴론.'

전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모델 에이전시, HU 에이전시의 주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이제 다미앙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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