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9화
6위로 도착한 엠마 샬롯와 에이미 샤크, 조나단 파블로와 레이몬드 재커 감독과 한 달 반 만의 해후를 뜨겁게 나눈 진호와 서형은 곧바로 한국으로 향했다.
결혼식이 보름 뒤에 치러지기 때문이었다.
웅성웅성.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오우, 진호! 오랜만이다?"
"헛!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어머, 그래. 활동하는 모습 잘 보고 있어요. 한국을 알리느라 고생이 많아."
"감사합니다!"
분명 이재정의 결혼식인데 진호의 허리가 펴질 줄 몰랐다.
연예계 원로들부터 중견 배우들까지 진호에겐 다 까마득한 선배님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재정의 인맥이 넓다는 증거였고, 덕분에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는 이재정과 인사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삼촌도 결혼을 하긴 하는구나. 평생 안 할 줄 알았는데. 이제 좀 마음이 놓입니다."
"짜식이……"
눈을 흘긴 이재정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들어줘서 고맙다."
결혼식을 올리기 보름 전에 갑자기 축가를 맡겼다. 한창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진호에겐 정말 무리한 부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각오해요. 나 현금 많이 뽑아 왔으니까. 아니, 어떻게나 말고 다른 분에게 축가를 맡길 생각을 했어요? 내가 어떻게 2순위예요? 진짜 실망입니다."
"축가 가수가 승훈 형이랑 건모형이었는데?"
"……2순위라도 감사합니다!"
"흐흐, 고맙다. 이 은혜 잊지 않을게. 아, 이쪽은 내 어머니와 아버지."
"안녕하십니까. 이진호입니다! 이제 마음이 푹 놓이시죠?"
이재정의 부모는 살짝 어이없어 했다가 이내 푸근히 웃으며 진호의 손을 맞잡았다.
"바쁜 와중에도 축하해 주러 와줘서 고맙고, 오늘 축가 잘 부탁해요."
"옙! 걱정 마십시오."
"진호야, 이쪽은 내 장인어른과 장모님. 장인어른, 장모님!"
"안녕하십니까!"
"……오, 이 청년이?"
번뜩 눈을 뜬 DS그룹의 회장이 진호의 손을 콱 잡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최창욱이라고 합니다."
"김현주예요."
"이진호입니다. 여기 못나고 부족한 삼촌에게 숙모님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야, 인마. 끄응."
"……호호호호호!"
"으하하하핫!"
"최 회장!"
"오, 박 회장!"
진호는 이재정의 장인과 장모가 바빠지자 슬그미니 뒤로 빠져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와-."
차례를 기다려 신부에게 다가간 진호는 쌍엄지부터 내밀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숙모님."
"진호야!"
밝게 웃었던 최세령은 반사적으로 진호의 옆을 살폈다.
진호는 살짝 불안해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세상 당찬 숙모님이 뭘 그렇게 무서워하실까. 서형 씨가 행복하게 사시라고 전해 달래요."
"……그러니? 호호, 고마워. 우리 아버지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줘서도 고맙고."
'음? 아, 그런 거였구나.'
어째서 그 이재정이 무리한 부탁을 하나 싶었다.
'중동 쪽 자본 때문인가? 아니면……'
걸리는 일들이 좀 있었다.
진호는 그런 속내를 감추며 히죽 웃었다.
"삼촌이 못되게 굴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같이 씹어 드릴게요."
"…….호호호호호!"
"신부님, 진호 씨 사진 한 장 찍을게요."
진호와 세령은 자세를 잡으며 카메라를 보았다.
"자, 하나 둘 셋!"
찰칵!
* * *
사회는 이재정과 같이 영화를 찍었던 중견배우 김정민이었다.
-하객 여러분께선 저 못생기고 무식한 노총각 신랑을 구원해 주신 천사 신부님을 힘찬 박수로 축하해 주고 맞이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진짜 진짜 수고하셨습니다!
하하하하하하!
화를 삭이는 이재정을 향해 끅끅 웃어 준 김정민은 크게 외쳤다.
-평강공주 천사 신부님 입장!
식장에 음악이 울려 퍼지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꾸민 신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입장하였다.
진호는 사람들과 함께 열렬히 박수를 치며 입맛을 다셨다.
'……부럽다.'
장인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세상예쁜 신부를 넋 놓고 보는 이재정의 짧지만 긴 기다림이 부러웠고, 신부를 인계받으며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는 이재정의 미소가 부러웠다.
'결혼하는 커플이 부러워지게 되면 결혼할 때가 된 거라던데……'
머릿속으로 서형이 신부드레스를 입는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정말 결혼할 때가 된 건가……"
'결혼할까?'
마음이 약간 심란해졌다.
"네-!"
쩌렁쩌렁 울리는 이재정과 최세령의 대답에 진호는 정신을 차리곤 둘을 응시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신랑 이재정군과 신부 최세령 양이 백년가약을 서약했음을 선포하겠습니다.
와아아!
짝짝짝짝짝!
'후우. 진짜 부럽네.'
김정민과 하객들의 짓궂은 외침에 결국 입을 맞추는 둘의 모습에 진호는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하객들을 향해 '저 결혼합니다'라고 외치는 이재정의 흡족한 미소와 최세령의 수줍지만 행복한 미소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어휴, 순재 선생님도 참 길게 주례하시네."
"재정 삼촌이 노총각이긴 했잖아요. 얼마나 걱정하셨겠어요. 이제 남은 노총각은……"
말을 툭 걸렀던 우해진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진호는 키득키득 웃으며 마이크를 만지작거렸다.
축가를 부를 때가 가까워지자 괜스레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기라성 같은 레전드 가수들이 주위에 포진해 있는데도 첫 번째로 노래를 부르게 돼서 더욱 그랬다.
"진호야, 준비해라."
"아, 네!"
'후우, 후우우.'
-그럼 지금부터 못난이 신랑 측의 잘 생긴 지인들의 축가가 있겠습니다. 아, 참고로 얘는 여자친구있으니까 신부 측 지인들은 눈독들이지 마세요.
하하하하하!
-뮤직 큐!
땅, 따당!
조명이 살짝 어두워지고 전주가 울리자 진호는 이재정과 최세령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기다리란 말만 하면서 외면했죠.
나지막하게 깔리는 노래 가사가 오랜 시간 연애만 했던 최세령과 이재정이 서로에게 했던 변명인걸까.
둘의 눈시울이 급격히 붉어졌다.
-오랜 시간. 조금 기다리면 그때가 올 거라고 Someday……
'잘 사세요.'
진호는 진심과 전력을 다하여 축가를 불렀다.
* * *
웅성웅성.
'역시 호텔 결혼식! 요리들이 대박이네!'
가장 놀라운 건 손만 들면 서버들이 스테이크나 랍스터를 가져다준다는 점이었다.
"아까 부러웠냐?"
"정민 삼촌."
얘가 언제 이렇게 컸나 하며 대견해하는 김정민의 말에 곁에 있던 최승우가 진호의 어깨를 감쌌다.
"얘가 뭘 결혼에 대해 알겠어요? 진호야, 넌 결혼하지 마라. 해도 정말 정말 늦게 해."
"결혼도 안 한 놈이! 너나 결혼해, 인마! 정우 너도!"
"전 또 왜 걸고 넘어져요? 난 포기했습니다."
"포기하지 마, 인마! 내가 선생님볼 때마다 면이 안 선다, 안서!"
"소개나 시켜 주고 그런 말을 하던가!"
'에휴. 이 삼촌들은 나이가 들어도……'
진호는 아웅다웅하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재정을 통해 김정민과 친해지게 되면서 알게 된 김정민의 패밀리들. 진짜 연기파 배우들만 모인 모임이었다.
"진호야!"
와락!
더 씨프를 함께 찍었던 김주아가 진호의 등을 덮쳤다.
"어이구, 내 새끼.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미국물이 그렇게 좋아쪄?"
"넌 왜 또 진호를 괴롭히니? 미국에서 활동하느라 힘든 애를."
"놔두세요, 선생님. 재가 저러는 거 하루 이틀인가요?"
"안녕하십니까, 김애숙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김애숙과 김수혜가 다가와 진호의 볼을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진호가 있는 테이블이 시끄러워지자 오늘 결혼식을 찾은 하객들은 놀라워했다. 면면들이 너무도 화려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진호를 신기하다는 듯 보았다.
그런데 진호도 본인을 신기해했다.
'와.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나도 아는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
한 명 한 명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이고, 가수들이다.
그런 이들이 자신을 보기 위해 이렇게 찾아 왔다.
그게 무척이나 신기하고 또 뿌듯했다.
'솔직히 재정 삼촌의 하객으로 찾아온 연예인들 중 90퍼센트 이상은 다 한 번 씩은 술을 같이 마셔본 친한 분들이지만……. 허, 나도 알고 보니 마당발이었네.'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 같지 않아서 참 뿌듯하면서도 좋았고, 앞으로 나아갈 길도 보여서 기뻤다.
"왜 여기 다 모여 있어요?"
"오, 왔어?"
주위에 몰려 있던 연예인들도 한 복을 입은 이재정과 최세령을 반겼다. 남성들은 술병부터 들었다.
"술은 좀……. 아직 인사드려야 할 분이 많아요. 좀 이따가 마실게요."
"허어, 정민 형! 오늘 피로연이 몇 시라고 했죠?"
"저녁 7시! 잘 말린 북어로 확실히 준비했다!"
노총각들의 눈이 순간 번뜩였고, 그중 몇몇은 허공에 스윙을 하며 이재정과 최세령의 낯빛을 하얗게 질리게 만들었다.
진호도 엄지를 세워 목을 긁으며 킬 사인을 보냈다.
결국 이재정은 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톡톡.
'응?'
진호는 자신을 건드리는 최세령을 보았다.
"왜요?"
"진호야, 혹시……"
"아뇨."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커트한 진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이재정의 부인인 최세령과는 비즈니스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응.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줘. 미안해."
"응? 뭐가요? 무슨 말을 하셨어요?"
장난스럽게 모른 척한 진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 그런데 이 결혼 속도위반은 아니……"
"억?"
"이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정말 혼날래!"
"……. 어형! 선생님, 재정 삼촌이 저 때려요. 새신랑 아닌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진호는 김애숙의 품을 찾았지만, 돌아오는 건 딱밤이었다.
탁!
"이번엔 진호 네가 잘못했어. 저 덜떨어진 재정이가 무슨 속도위반이니?"
"……서, 선생님?"
오랜만에 편을 들어 주는 김애숙의 모습에 방심을 했던 이재정은 넋을 놓아 버렸다.
"……푸하하하핫!"
"여윽시 선생님!"
그렇게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져갔고, 이날 밤 이재정은 잘 말린 북어 2개가 부러진 뒤에야 완전히 풀려날 수 있었다.
진호도 북어를 부러트리는데 한 몫을 하였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진호는 곧바로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 * *
파리 최고급 호텔의 연회장. 새로운 LVMH그룹 CEO 및 크리스찬 디올 CEO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날아온 패션계, 정재계 인사들이 꽤 심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철혈의 황제 아르노의 자식들이 CEO가 되지 못한 것도 모자라, 아직도 현역인 아르노 베르베우가 완전한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는 패션계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정재계에 떨어진 폭탄이었고, 그들은 그 여파를 확인하기 위해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흠칫!
무언가를 느낀 각국의 거인들은 재빨리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탄성을 터트렸다.
저벅저벅.
당당한 걸음 소리가 커질수록 전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존재감. 그 주인공은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외모를 지닌 20대의 사내였지만, 세계 각국의 거인들은 자신들이 순간이나마 밀린 것에 불쾌해하기는 커녕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등장한 사내는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LVMH의 뮤즈……"
"호오. 저자가 피에트로 베타리와 안젤라 리의 검인가."
"틀려. 무슈 리는 피에트로 베타리와 안젤라 리를 왕좌에 앉힌 킹메이커다. 일개 검이나 뮤즈 따위가 아냐."
움찔!
누군가의 말에 몸을 굳혔던 사람들의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킹메이커……. 그렇군, 그랬어.'
'맞다. 저자는 킹메이커다.'
"킹메이커라……"
왕을 만드는 존재, 킹메이커.
그들의 마음 속 욕망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진호는 자신에게 달라붙는 끈적끈적하고 뜨거운 시선과 그들이 내뱉는 말을 모두 들었지만, 모두 무시한 채 오연히 서서 연회장 내부를 스윽 둘러보았다.
"거물들께서 재밌는 말들을 하시는군요.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요."
다미앙의 말에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던 진호는 이내 다시 무심한 시선으로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없나……'
보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
저 멀리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는 미영 이모와 피에트로 가 보이긴 하지만, 당장이라도 달려가 축하인사를 건네고 싶지만, 그보다 먼저 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
"역시……. 다미앙 씨?"
"전 여기 있겠습니다. 마침 저곳에 제가 보고자 하는 분이 계시는군요."
다미앙의 시선을 따라간 진호는 샴페인을 홀짝이는 한 노인을 발견하곤 눈을 빛냈다.
다미앙과 진호 본인 모두 꼭 만나야 할 인물.
진호는 단 한 번 본 적이 없지만, 매듭을 지어야 할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는 게 더 급했다.
잠시 후를 기약한 진호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가며 핸드폰을 들었다.
"네, 아르노 씨. 어디세요?"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