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5화
"왔어?"
식당 안, 태연하게 손을 흔드는 나연석의 모습이 참 얄밉다.
그러나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하며 소비할 시간은 없었다.
"미션이 뭐예요?"
"미션? ……크흠. 이겁니다."
탁!
진호와 서형은 살짝 당황했다.
"컵 쌓기?"
"스포츠 스태킹?"
"제한시간은 17초, 도전 기회는 총 3번입니다. 도전에 성공하면 근사한 식사와 숙소, 카드를 총 두개 뽑을 수 있고, 실패하면 이대로 돌아서 도시를 빠져나가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독하다. 저 말은 수돗물도 받지 말라는 뜻이다.
미션에 실패하면 탈락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고 봐야했다.
"또한 두 분이 기록을 갱신하면 이후 도착한 팀들은 그 기록을 깨기 전까지 두 분을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제법 놀라운 말이었다.
'미션을 클리어하는 시간까지 중요하다는 거네.'
오직 승자 독식. 진호는 이제야 이 서바이벌의 본질을 알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연습 시간은요?"
"오늘 안에만 도전하시면 됩니다."
'쯧.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컵을 쌓는 게 뭐 어렵냐고 할 수 있지만, 정말 그렇다면 대회가 있을 리 없다. 한두 번 버벅거리면 17초는 그냥 날아간다고 봐야했다.
'페널티 3개 정도는 더 받겠네. 그래도 압도적인 기록을 내려면 어쩔 수 없지.'
후우 한숨을 길게 내쉰 진호는 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턱!
새하얀 손이 진호보다 먼저 컵을 잡았다.
"……서형 씨?"
"여태까지 수고 많았으니까 이번엔 제가 할게요. 날 믿어 봐요."
끔뻑거리는 진호의 눈에 자신감으로 가득한 서형의 미소가 비쳐졌다.
타타타타탁! 타라락! 타라락!
진호만 넋을 놓고 있는 게 아니다.
나연석과 제작진, 그리고 구경나온 이 식당의 종업원들까지 모두 컵이 쌓였다가 허물어지는 테이블 위를 넋 놓고 바라본다.
"8, 8초 31!"
"……꺄아! 진호 씨, 저 해냈어요!"
서형은 달려와 진호에게 와락 안겼지만, 진호는 서형과 가지런히 놓인 컵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아, 아니, 이게…… 이게?"
어떻게라는 물음이 목구멍에 막혀 나오지가 않았다.
서형은 딱 한 번 연습하더니, 그것도 아주 느리게 쌓고 허물더니 바로 도전하여 성공했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연이어 도전하더니 결국 마지막 세 번째에 저 엄청난 기록을 갱신하게 되었다.
"제가 저 믿으라고 했죠?"
"……정말 어떻게 된 일이에요?"
시간도 시간이지만,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별거 아니에요. 대학시절 축제때 학부 대표였을 뿐이에요."
"……서형 씨와 대화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부족했나보네요."
"에헤헤. 난 언제나 환영이에요."
품을 더 파고드는 그녀에게 수고했다며 등을 두드린 진호는 하얗게 질려 있는 나연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 식사와 숙소를 주시죠! 그리고 카드도!"
검게 죽는 그의 얼굴을 보니 아주 속이 다 후련했다.
* * *
후우. 살겠다."
몸에 한 장의 샤워타월만 두른 채 욕실을 빠져나온 서형은 그대로 침대에 다이빙을 했다.
"아웅!"
'침대가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지난 3일간 쌓인 피로가 모두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서형은 달그락달그락 배낭을 개조하는 진호를 빤히 바라봤다.
자유 쇼핑 30분이라는 카드로 여러 가지를 산 진호는 낮에도 걸을 수 있도록 가방에 간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단번에 저 카드를 뽑을 수가 있지?'
페널티 카드는 10개였지만, 이득을 보는 카드는 30개였다.
플레이어는 그중 각기 하나씩, 또는 두 종류 중 하나를 택해 두 개를 뽑을 수가 있었다.
'식재료 2킬로그램은 또 어떻고?'
엄청나게 낙담하는 제작진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 진호가 뽑은 그 두 개의 카드가 최고의 패였다는 게 확실했다.
'역시 잘 났다, 내 남자…… 핫!"
순간 졸았다 깬 서형은 고개를 털며 일어나 옷을 입었다.
"응? 왜 입어요?"
"곧 출발해야 하니까?"
그녀 역시도 깨닫고 있었다. 어메이징 서바이벌은 오직 승자 독식이라는 걸 말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다음 지점에는 무조건 첫 번째로 도착해야죠!"
"……됐으니까 일단 한숨 자고 있어요. 이거 조립만 끝나면 바로 마사지해 줄 테니까."
"네? 하지만……"
"대신 새벽 3시에 출발하기."
"……알았어요."
진호는 크게 실망하며 침대에 눕는 서형을 사랑스럽다는 듯 응시했다. 힘들다 칭얼거리기는 커녕 먼저 나서려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하지만 정말 그녀의 몸엔 한계가 찾아 오고 있어서 이대로 출발할수가 없었다.
'오일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원래 본인이 만든 심신이완용 오일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공항금지 물품이라서 가져오지 못한 진호.
[스킬: 골드 아이]의 힘을 빌어 자유 쇼핑 30분이라는 패를 뽑지 않았다면, 새벽 3시가 아니라 내일 오후에나 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질 좋은 마사지 오일을 구할 수 있어서.'
[스킬: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의 주인공은 전 세계에서 오일을 구입하고 조합하여 본인만의 테라피 오일들을 개발하는데, 개중에는 중동권에서만 파는 오일들도 있었다.
'……마사지는 만국 공통인가?'
"고르릉."
'……하핫.'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잠들어 버린 서형을 힐끗 바라본 진호는 다시 조립에 열중해 갔다.
그리고 새벽 3시. 그들은 다음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 * *
"이 팀은 진짜 빈틈이 없네."
나연석은 진호와 서형 팀의 분량을 모니터링하며 혀를 내둘렀고, 조연출과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형 씨가 완전 복병이었어요. 아니, 펀드매니저가 왜 그렇게 할 줄 아는 게 많아요? 거기다 체력은 왜 그렇게 좋고?"
벌써 일곱 번째 중간 미션을 성공리에 마쳤다.
그중 서형의 미션 통과 기여도는 무려 50퍼센트에 달했다.
그녀는 문무겸비의 커리어우먼이었다.
'체력이 왜 그렇게 좋은지는 알지.'
진호가 매일같이 그녀를 마사지 해 주며 심신의 피로를 풀어 주기 때문이다. 십 년 묵은 피로도 날려버리는 그 경이롭기까지 한 특제마사지 오일로 말이다. 진호에게 마사지를 받았을 때를 떠올린 나연석은 고개를 저었다.
'체력이 소진된 만큼 채워지는데 피곤할 리가 없지. 진호도 미션 두번에 한 번은 꼭 자유 쇼핑 30분 카드를 뽑으니 마사지 오일이 떨어질 일도 없고.'
그렇지 않아도 치트 캐릭터인 진호가 운까지 좋으니 미치고 팔짝될 노릇이다. 서형이 허당이기라도 하면 괜찮은데, 그녀도 만능캐릭터였다.
"이러면 다른 팀이 불리한데 말이야……"
나연석은 줄줄이 놓인 핸드폰에 투영되는 조나단 파블로 등 여덟명의 PD를 보았다. 아쉽게도 다섯번째 미션 전에 한 팀이 리타이어를 했다.
"다른 팀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프랑스 팀 전원 감기에 걸렸습니다. 미션에도 실패해서 다음 미션 전에 리타이어를 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중국 팀은 한 명이 허리를 다쳤습니다.
-미국 1팀은 팀 닥터가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엠마와 에이미 모두 체력에 한계가 온 듯합니다.
-영국 팀은…….
서바이벌을 시작한 지 벌써 보름 지났다.
이제 겨우 3분의 1지점을 통과한 것뿐이지만, 슬슬 몸이 망가지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으음. 어쩔 수 없군요. 다음 지점에서는 스페셜 미션을 가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걸 벌써?
-으음. 확실히 그럴 수밖에 없군요. 알겠습니다.
나연석은 긍정을 하는 PD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스페셜 미션의 통과 여부에 따라 모두가 생존할지, 아니면 3분의 2 지점을 통과하기 전 다섯팀 이상이 탈락할지가 가려질 터였다.
사람들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 * *
휘이이이잉!
바람이 강하게 부는 사막 위, 푹푹 빠지는 모래가 사람들의 체력을 더욱 빼앗아 갔다.
참가자도, 제작진도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은 그 어떤 잡념도 떠올리지 못했다. 말라 죽어 간다는 게 이런 걸까.
극한 생존은 제작진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흠칫 놀란 진호가 다급히 한 곳을 가리켰다.
'대체 왜……'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두 눈을 부릅떴고, 머릿속에선 다른 의미로 잡념이 사라졌다.
"저, 저……!"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얇은 갈색 기둥이 하늘로 향하는 게 보인다. 그게 점점 몸집을 불려 가며 빠르게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사막의 악몽, 모래 폭풍.
"피, 피해!"
"움직여-!"
"얼른 여기로 차량을 보내요-!"
사람들은 꼬랑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뛰기 시작했다.
진호는 다시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달려요-!"
후아아아앙!
거대한 모래 폭풍이 그들이 있던 자리를 덮쳤다.
"와. 죽다 살아났네."
"아오! 휘말렸어야 한국에 가는 건데!"
"한국이 아니라 천국에 갔겠지!"
정말 코앞에서 스쳐 지나간 모래폭풍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아찔한 추억을 안겨 주었다.
방송에 내보내도 시청자가 믿지 않을 판타스틱한 장면을 찍긴 했지만, 그들은 짙은 원망을 담아 진호를 보았다.
'이게다!'
진호가 X를 뽑았기 때문이었다.
도로가 아닌, 정확히는 도로 위의 차조차도 보이지 않을 만큼 도로와 멀리 떨어져 나침반과 지도에만 기대어 다음 지점까지 걸어야 하는 루트.
진호는 서형마저 원망스럽다는 듯 노려보자 정말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내가 뽑고 싶어서 뽑았습니까! 그렇게 미친 듯 빛나는데 뽑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진호 본인도 하필이면 그걸 뽑아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하아. 대체 뭐가 뭔지. 이 사막 한가운데 행운이 있을 리가 없잖아!'
"뭐, 그래도 이제 곧 중간 지점에 도착할 수 있겠네."
"네?"
진호는 나연석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이 사막 위에서 방금 죽을 뻔했는데 중간 미션이요?"
"응! 아까 먼저 차를 보내서 세팅해 두라고 했지!"
'……진짜 사람 맞나?'
정말 사람이라면 이렇게 악랄할수가 없었다.
"하아. 뭐, 그래요. 가요."
그렇게 도착한 곳은 나연석이 먼저 보냈다는 차량 몇 대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토질이 꽤 단단해졌다는 것이다. 흙과 모래의 색깔도 바뀌었다.
"여기서 뭘 하라고요?"
"흐흐. 뭘 하냐고?"
급히 카메라 앞에 난입한 나연석은 진호와 서형을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제작진이 준비한 특별한 스페셜 미션! 보물을 찾아라!"
"엥? 보물찾기요? 갑자기?"
"반경 200미터 내에 저희 제작진이 숨겨 놓은 보물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다른 팀에게 페널티를 줄 수도 있고, 또 1박 2일간의 완벽한 휴가를 보낼 수 있고, 완벽히 치료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잠깐 1박 2일 휴가는 페널티잖아요. 거기다 반경 200미터라뇨!"
'지금 누굴 잡으려고!'
말이 반경 200미터다. 축구 경기 장보다 더 큰 공간을 단둘이 뒤져야 한다는 소리다.
"지금까지 두 분이 걸어온 시간과 거리를 계산하여 1박 2일 후에 도착할 지점까지 저희 제작진이 편안하게 이동시켜 드립니다."
진호와 서형의 눈이 번쩍 떠졌다.
단순히 생각해도 엄청난 이득이었다.
"여러분이 저희 제작진에게 제출할 보물은 총 3개! 시간은 총 2시간! 그럼 지금부터 스페셜 미션 보물찾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서형 씨!"
"네!"
둘은 제작진이 내미는 호미를 들고는 재빨리 흩어졌고, 진호는 한 참을 달리다가 멈춰서 가만히 땅을 훑었다.
'흙의 색이 다른 곳을 찾아야해.'
헤집었다가 덮었다면 분명 티가 날 터였다.
물론 작렬하는 햇빛과 사방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찾기 힘들지라도 스킬들을 이용하면 찾을 수 있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찾아 볼…… 응?"
성큼 발을 내딛던 진호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멍해져 버렸다.
'설마 저것 때문에 이 루트가 그렇게 빛난 거라고?'
진호의 입이 함지박하게 찢어졌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