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25화
가까이 서 보니 더 예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인이 좋아하는 전형적인 스타일의 외모는 아니었다.
'배우 쪽도 아닌 건가?'
눈이 파르르 떨렸다가 차분해지는 여성의 모습에 진호는 말을 꺼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핸드폰속에서 여자친구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황이었다.
진호는 아쉬움을 접는 대신 팁을 더 많이 꺼내서 넘겨주었다.
"고마워요."
'이 작은 호의가 당신에게 도움이 되길.'
원래 운 좋은 사람 곁에 있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법이었다.
앞으로 엮이게 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진호는 먼 훗날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한 번 더 놀란 여성은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빠르게 멀어졌고, 진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이서형을 향해 샴페인을 보여 주었다.
"짜잔."
-……먹고 싶다.
"샴페인을? 아님……"
-적당히 하시죠, 이진호 씨.
"하하하. 서형 씨도 얼른 마실걸……아, 회사겠구나."
-……얄미워, 진짜!
다시 웃음을 터트린 진호는 서형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갔다. 비키니와 근육의 향연으로 가득한 풀 파티 클럽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 * *
히죽히죽.
재준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진호는 간 크게도이 위험한 미국에서 날밤을 새고 돌아온 재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물리지 마라. 여기서 물리면 진짜 답 없다."
"우리 안젤리나는 꽃뱀 아니다! 난 이 라스베가스에서 내 인생의 반쪽을 찾은 거야!"
이게 미쳤나 싶었다.
"미성년자는 아니지?"
"민증 확인했음."
"그럼 됐어."
여자에 관해서도 운이 좋은 재준이다.
재준이 여자 때문에 사건사고가 꽤 일어나기는 했지만, 도덕적 및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던 걸 떠올린 진호는 그냥 믿기로 했다.
"뭐하는 사람인데?"
"변호사. 그러니까 저녁에 차나내놔, 짜사!"
운 좋은 놈은 마당을 쓸다가도 돈을 줍는다더니, 정말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국제면허증은 땄냐?"
"내가 누구냐? 당연히 안 땄지."
"그냥 저녁에 드라이빙 서비스신청할게. 그거 타고 가. 미국에서 면허증 없이 차 몰고 다니다가 걸리면 진짜 골치 아파진다."
한국처럼 대응했다가는 경찰에게 총을 맞을 수도 있다.
"어, 진짜? 알았어. 그보다 오늘은 어디 가냐?"
"가긴 어딜가. 저녁에 파이팅하려면 체력 보충 좀 해야지."
"그건 그렇지……. 알았어. 하암."
하품을 크게 한 재준은 스위트룸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고, 진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임자를 제대로 만났네.'
저토록 밝고 만족스런 얼굴은 처음이었기에 진호는 응원하기로 했다.
* * *
"어? 진짜요? 많이 다친 거예요?"
-깁스는 해야 하나 봐. 음, 그래서 그런데 그 신은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아.
"흐음. 뭐, 알았어요.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은 진호는 입맛을 다셨다.
남자 배우로서 참 고마운 신이고, 또 합법적인 일탈이라서 굉장히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 배우의 발목이 부러졌다니 어쩔 수가 없었다.
"킬힐을 신고 클럽에서 춤추다 다쳤으니 자업자득이지만……. 음. 라스베이거스에 오디션을 볼 여자 배우가 있을지 모르겠네."
진호는 고민을 접었다.
배우 캐스팅은 감독의 영역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진호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리는 수영장을 바라보며 옆에 놓인 음료수를 마셨다.
쪼옥!
"아, 좋다."
이런 여유가 얼마 만인지 몰랐다.
하루에 촬영하는 시간이 많지는 않다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긴장을 했기에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고마운 놈.'
이렇게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것도 모두 재준이 놀러 와 준 덕분이었다. 앞으로 무려 5일간의 휴가. 나른하게 웃은 그는 옆에 둔태블릿 PC 집어 들어 미튜브를 클릭했다.
토도독! 스윽!
"……정말 운 좋은 사람 옆에 있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나."
선물시장이 크게 요동을 치려는 전조가 보이고 있었다.
"유가라……. 에휴. 기름 가진 사람들이 장난을 치려나 보네."
정점에 이를 파도의 높이를 보면 전쟁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파도가 일어날 시점이 당장 내일이었다.
"이런 건 배팅해 줘야지."
에버리지까지 풀로 땡기면서 막대한 액수를 투자한 진호는 기지개를 쭉 폈다.
'아차.'
진호는 얼른 서형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또 수영장이네.
"응? 오늘은 잠옷이 바람직하지 않네요? 날 위한 네글리제는 어디갔어요?"
서형은 웬일로 반팔티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뒤에 배경이 굉장히 친숙…… 하네요?"
특히나 소파의 색상과 디자인이 그랬다.
게다가 이 말을 한 순간 서형의 표정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어머머. 너희 이런 말하고 노니?
"……엄마?"
훅- 화면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어머니 나진희였다.
순간 진호의 머릿속이 엉켜 버렸다.
그렇게 혼란의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설명되자 진호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서형이 더 아름답고 예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말은 해 주지……"
-어때요. 나 점수 좀 딴 것 같아요?
그녀의 용기가 참 고맙고 미안했다.
"엄청 나게. 서형 씨가 우리 집에 있는 게 그 증거죠."
갑자기 찾아온 서형에 의해 놀랐을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히헛.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재준 씨랑 투어 다닐 시간 아니에요?
진호는 그 내막에 대해 설명했고, 서형은 능력도 좋다며 혀를 내둘렸다.
"아, 그보다 미국 시각으로 내일부터 유가가 좀 크게 요동칠 거예요. 아마 일주일 정도."
-……!
쿠당탕!
서형이 소파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아가, 왜 그러니! 저놈이 무슨 말을 한 거야? 야, 이 자식아-!
"……완전히 사로잡았네. 그보다 괜찮아요?"
-그, 그거 확실한 정보예요?
"중동 쪽 애들이 또 장난을 치려는 것 같은데……. 어때요. 이 정도 정보면 9월 인사이동 때 승진 할 수 있겠어요?"
- 충분히! 일주일이라고……
흥분하며 답하던 서형이 입을 다물었다.
진호도 갑자기 스윽 어깨를 타고 가슴으로 넘어오는 새하얀 팔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응? 뭐야? 누구랑 통화해?"
'도랏?'
쏴아아 온 몸의 피가 발끝으로 빠져 나갔다.
서형의 표정이 굳어 가고, 어머니나 진희의 머리가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 게 아주 느리게 보이고 있다.
'이게 죽음 직전에 나타난다는 현상인가?'
진호는 옆으로 몸을 날리듯 뒤집었다.
분명 꽤 아플 테지만, 이것만이 살길이었다.
쿠당탕!
* * *
"오, 준."
"크흑. 안젤리나!"
'꼴값을 떤다.'
벌써 몇 시간째인지 모른다.
5일 전에 오늘부터 1일이 된 저 바퀴벌레 커플의 애정 행각, 아니 이별 장면을 보는 게 말이다.
'그런데……. 둘 다 진심이었네.'
특히 러시아와 브라질의 혼혈인 안젤리나는 라스베이거스에서 꽤 유명한 로펌의 변호사라서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 가냐? 너 그러다 비행기 놓친다?"
"이 매정한 놈! 넌 우리의 이 슬픈 이별을 보면서도 고작 그따위말밖에 못하냐!"
"너무해!"
"너무해'라는 한국말은 또 언제 배웠는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흑흑! 이제 가야겠어, 안젤리나. 들어가서 영상통화할게."
"기다리고 있을게, 허니."
'똥 싼다. 진짜.'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돌아선 재준은 터벅터벅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마치 뒤를 돌아보지 않는 남자는 멋있다는 듯 재준은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안젤리나!"
"오! 준!"
와락 끌어안은 둘은 다시 눈물을 찔찔 흘리다가 정말로 이별을 고했다. 안젤리나는 머리 위로 흔들며 떠나는 재준을 배웅했고, 그 슬픈 광경에 마음이 불편해진 진호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걱정 마요. 쟤가 저래 보여도 정말 한 여자만……"
"휴. 이제야 갔네. 아무튼 귀엽다니까."
지금 무엇을 보는 걸까.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은 안젤리나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흐뭇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치 귀여운 작은 동물을 보는 듯한 성질의 흐뭇함이었다.
"……안젤리나?"
"오. 미안해요, 지노. 준이 너무 귀여워서 당신에게 실례를 하고 말았어요."
"귀엽다고요? 저게? 저 덩치가?"
180cm가 훌쩍 넘는 키에 90킬로 그램이 넘는 근육 돼지가 재준이다.
"얼굴이나 하는 짓이 큐트하지 않나요? 우리 러시아나 브라질, 미국에서는 없는 스타일이에요. 거기도 허리힘도 좋고."
진호는 조용히 물러섰다.
'러시아 스타일이었구나.'
불곰마저 눈빛으로 제압하는 타고난 포식자인 러시아 형님, 아니러시아 누님 스타일이었다.
재준이 갑자기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지노."
"네, 네?"
"한국에서 변호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진호는 조용히 재준의 명복을 빌었다.
* * *
"어머니, 재준이 결혼 문제는 이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변호사 며느리 얻으실 것 같거든요. 그것도 아주 아리따운 백인 혼혈 변호사 며느리를! 네. 푹쉬세요!"
전화를 끊은 진호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 그래도 되는 거냐?"
"네? 뭐가요?"
"아니, 재준이 프라이버시…… 아니다."
"그럼요. 그놈에게 프라이버시가 어딨어요. 전에는 있었더라도 이젠없어요."
"응?"
진호는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보았다. 올가미를 든 사냥꾼의 미소를 말이다.
'그냥 똑똑한 여성도 아니고 변호사에게 걸렸으면 게임은 끝이지.'
"아, 맞아. 정 실장님."
"응? 왜?"
"오늘 찍을 내용은 절대 서형 씨한테 말하면 안 됩니다. 이거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에요!"
"어차피 영화 보면 다 나올……"
"허락은 맡기 어려워도 용서는 구하기 쉽다! 모릅니까!"
"……너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좋기는요! 제가 영화를 위해 이한 몸 불사 지르겠다는 건데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하는 겁니까!"
"그렇게 정색하니까 더 그래 보여."
진호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정 실장의 말처럼 더 하면 정말 변명이었다.
그의 눈빛이 삽시간에 서늘해졌다.
'상대 배우가 잘 소화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단 한 컷이라도 극의 몰입을 깨면 안 된다. 그것이 혹여 스쳐 지나가는 신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나리오도 시나리오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이나 중요했다.
'어설프면…… 쫒아내야겠지.'
그가 탄 밴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 실장은 과하게 날카로워지는 진호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회사는 어떻게 할 건지."
"뭘요?"
"배우 파트 때문에 말이 좀 있잖아."
슈퍼스타 지니어스를 통해 선발된 아이들이 돌아오기까지 이제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중 배우를 지원해 줄 부서는 반드시 필요했는데, 문제는 그들이 돌아와 활동을 시작한다고 해도 꽤 오랫동안 적자를 볼 거라는 점이었다.
계륵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전문 부서를 만들지 않을 수는 없는 게 HU 에이전시에서 가장 수익을 많이 올리는 미국 지사를 추월해 매출 1위를 찍기 위해선 무조건 배우 파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네가 올릴 수익에 기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흠. 그렇기는 하죠."
'직접 발로 뛰며 스카우트를 해야 하려나……'
하지만 그건 오버다.
회사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떠먹여 주는 것에 익숙해지면 안 되었다.
"도착했다."
"네."
촬영장소는 벨라지오 호텔 앞이었다.
늦은 밤 사람들을 통제하는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며 한쪽에 세워진 트레일러로 향했다.
"지노!"
진호는 다가오는 엠마 샬롯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다시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억 때문이었다.
"1미터. 준수해 줘요."
"그땐 실수였다니까! 사과했잖아!"
"대신 도망쳤죠. 내가 그때…… 어휴, 우리 잠시만 시간을 가져요."
"……네 맘대로 해!"
'왜 저래? 화낼 사람이 누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뭐야? 둘이 왜 싸워?"
"그런 일이 있어요. 그보다 오늘 같이 찍을 상대 배우는요?"
주연 배우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면 꽤 골치 아파진다.
하지만 오늘 찍을 신을 생각하면이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고개를 주억인 조나단 파블로는 옆을 가리켰다.
"옆 트레일러에. 아마 지금쯤 분장을 끝냈을 거야."
"그래요? 봐도 되죠?"
'일단 연기력은 합격인가 보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곧 같이 연기할 건데 당연하지. 가 봐."
외투만 벗은 진호는 위스키를 챙겨 옆 트레일러로 향했다. 오늘 찍을 신은 여성에게 좀 수치스러운 지라 촬영 전에 이야기할게 꽤 있었다.
이게 한국에서 배운 주연으로서의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이러고도 안 된다면 정말 쫓아내는 거지.'
쿵쿵!
"네. 들어오세요."
진호는 활짝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노?"
"하하. 오늘 제 상대 배우가 되어 주실 분과 잠시 이야기 좀…… 어?"
진호는 짙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틀어 올린 여성을 보며 굳어 버렸다.
그러나 여성은 알고 있었다는 듯 잔뜩 긴장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진호는 허탈하게 웃었다.
'허. 이렇게 엮이네……'
그녀는 카지노의 서버이자, 고급클럽의 서버였던 그 여성이었다.
'운의 집합체가 이 영화를 택했다라……. 설마 이 사람이 영화를 통해서 운이 폭발하는 건가? 거기서 더?'
아무래도 무조건 스카웃해야 할 인재를 만나게 된 것 같았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