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24화
8. 한국에서 찾아 온
진호는 아침 일찍부터 라스베이거스 공항으로 향했다.
반갑지만, 반갑지 않은 손님이 한국에서 찾아 오기 때문이었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이트 앞에서 있던 진호는 문이 열리며 나타난 손님에 헤벌쭉 찢어지려는 입가를 억지로 진정시키며 걸음을 옮겼다.
"왔냐. 피곤하지?"
"누구…… 어, 존나 피곤해. 아니, 그보다 미국은 왜 이렇게 입국 심사가 까다로운 거냐?"
"니가 범죄형으로 생겨서 그랬나보지. 암튼 이 또라이 새끼. 어떻게 미국에 올 생각을 했냐."
"뒤질래? 나 진짜 하마터면 LA 공항에서 영화 터미널 찍을 뻔했거든!"
"……너 그 영화 볼 때 어디서 누구랑 봤냐?"
"여자친구랑 DVD 방에서? 왜? 그런 내용 아니야?"
"에라이."
무척 반갑지만, 반갑지 않고, 또 한국에서 여기까지 날아와 줘서 엄청 고맙고도 감동스럽지만, 정말 미친 것 같은 친구 재준을 한심하다는 듯 본 진호는 그의 짐을 살폈다.
"짐은 캐리어 하나뿐이야?"
"부족한 거 있으면 사면 되는 거지! 마스터, 비자 카드 다 준비해왔다!"
"오-. 준비성 철저한데?"
친구를 보기 위해 그 먼 거리를 날아온 재준에게 돈을 쓰게 만들 생각은 없었던 진호는 그래도 그를 기특하다는 듯 보며 공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 이게 내 차다."
"헐. 이거……"
"응, 맞아. 식스티 세컨즈. 케서방이 안엄마와 함께 타고 나온 차."
"미친 새퀴. 이걸 사다니……"
"산 게 아니라 폐차장에서 죽어가던 거 소생시킨 거다."
"……아오! 최소 보름짜리 콘텐츠가 날아갔네. 넌 인마, 이런 일이 있으면……"
"꺼지시고요. 타기나 하세요."
"잠깐! 나 이것 좀 찍고!"
황급히 캐리어에서 카메라를 꺼내 드는 재준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진호는 그래도 친구의 브이로 그를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자, 이제 시동 걸어 봐! 빨리!"
피식 웃은 진호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쿠르릉!
"오오오오오!"
"출발한다. 안전벨트 매라."
둘은 그렇게 숙소인 윈 호텔로 향했다.
* * *
오는 동안 난생 처음 보는 라스베이거스의 풍경에 감탄을 하던 재준은 진호가 머무는 스위트룸에 입성하자마자 다시 한번 감탄하며 이곳저곳을 찍었다.
진호는 그런 그를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와, 미국의 최고급 호텔은 달라도 다르네. 이거 하몽 햄이지? 캬. 때깔 봐라. 그래, 이게 진짜 햄이지."
"많이 먹어라."
"오냐. 음. 딜리셔스!"
답지도 않은 이상한 추임새를 하는 재준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진호는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돌린 재준은 입을 떡 벌렸다.
"운동하고 오셨나 봐요?"
"아침에 쳐져 있는 버릇이 들면 나중엔 영원히 침대에서 못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쪽은?"
진호는 메튜 데이먼에게 재준을 소개해 주었다.
"오! 반갑습니다. 메튜 데이먼입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스트리머 JP, 재준 박입니다! 호,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영상을 찍어도 될까요?"
"지노의 친구인데 당연하죠. 특별히 출연료는 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 되나요?"
그렇게 몇 가지 포즈와 몇 마디말을 한 메튜 데이먼은 진호에게 저녁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는 멀어졌고, 재준은 그의 등을 보며 넋을 놓았다.
"……와- 씨. 제임스 본 형님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아, 너 저분과 왜 친한 거냐?"
마치 '너 따위가'라는 듯 하찮아하는 눈빛이 재준의 눈을 가득 채웠다.
"어? 같이 연기한다고 말 안 했나?"
"……안 했거든!"
"아, 그래? 그럼 지금 하면 되지, 뭐. 메튜도 이번 영화에 출연해. 됐지?"
'죽일까?'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넣어 둬. 에헤이, 넣어 두라니까."
"……쯧. 아무튼 저분만 출연하는 거야? 여주는 없어?"
진호는 두 눈이 음흉해지기 시작한 재준을 한심하다는 듯 보았다.
"할리우드 영화인데 없겠냐! 당연히……아, 저기 오네."
"어디? 어디?"
진호가 가리킨 곳을 본 재준은 다시 입을 벌렸다.
웨이브를 준 금발을 틀어 올리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미녀 스타.
잔뜩 졸린 눈을 한 채 흐느적거리며 걷는 모습조차도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헤, 헤르……"
저벅저벅 다가온 미녀는 진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좋은 아침이야, 지노."
"잠 깨요, 엠마. 아, 이쪽은 내 친구 재준이."
"친구? ……어?"
"스트리머 JP. 재준 박입니다! 헤르미온느, 아니 엠마 샬롯."
"……와우, JP! 만나서 반가워요. 미튜브 영상 잘 보고 있어요."
"헐? 정말요?"
"네. 케이 팝과 한국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 브이로그의 영상미가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팬이 됐어요."
재준은 하루 평균 라이브 방송 시청자 숫자가 30만에 육박하는 초대형 스트리머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꽤나 알려진 유명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며칠간 라스베이거스에 있는다고 했지? 좋아, 우리 친해져 보자."
"네,네."
"그럼 식사 잘 해. 아, 지노. 오늘은 뭐가 맛있어?"
"에그 베네딕트. 치프 쉐프가 잡았어."
"에그 베네딕트? 고마워."
그렇게 엠마 샬롯이 멀어지자 재준은 다급히 진호를 보았다. 아니, 그의 멱살을 잡았다.
"야, 어떻게 된 일이야? 엠마 살롯이 왜 여주야! 너 똑바로 말해!"
진호는 재준의 손을 쳐내며 콧대를 세웠다.
"뭘 엠마 정도로 놀라고 그래. 원래 여주는 레이첼 아담스였어."
"……뭐?"
"다만 나랑 나이가 안 맞아서 섭외가 실패했을 뿐이야."
그쪽에서 먼저 고사를 해서 진호도 굉장히 아쉬웠다.
"허어……. 그래서 어떤 역할인데? 너랑 어떻게 엮이는데?"
"라스베이거스에 처음 도착했을 때 들른 식당의 여종업원으로 서서로 첫눈에 반하게 되지. 저녁엔 서버와 플레이어로서 만나게 되고."
"……부러운 새끼. 진부한 내용이지만, 부러운 새끼."
진호는 재준의 말에 동의했다. 서로가 만나는 장면은 굉장히 진부하지만, 그녀는 주인공의 행보에 무척이나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었다.
"그나저나……. 배우 라인업 죽이네. 메튜 데이먼에 엠마 샬롯."
한국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 두 명과 자신의 친구가 영화를 찍는다. 그것도 조연 같은 주연이 아니라 진짜 주연으로서 말이다. 친구인 진호가 너무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워서 눈물이 나올것 같았다.
'에구.'
진호는 얼른 말을 돌렸다.
"영화 초반에는 식스티 세컨즈에서 다리 저는 아저씨 있지? 그분나와. 이외에도 배우진이 죽이지."
"헐. 진짜 미쳤네. 잠깐, 이렇게 되면 영화 세계관이 어떻게 되는 거야?"
"관객들이 식스티 세컨즈의 프리퀄이라고 생각할 때, 메튜 데이먼을 등장시키면서 뒤통수를 치는 거지. 하지만 영화가 3분의 1 정도 된 시점에는 오션스 시리즈가 이영화의 프롤로그처럼 보이게 될 거야."
"……자신 있냐?"
"없으면 내가 받아들였겠냐? 걱정 마라. 완전히 지워 버릴 거니까."
재준은 살벌하기까지 한 진호의 굳은 표정에 주먹을 쥐었다.
"그래.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파이팅이다."
진지함으로 가득한 그의 말에 싱긋 웃은 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대충 먹었으면 일어나. 베이거스 구경해야지."
"어, 그래…… 아니, 가긴 어딜가! 아직 한 그릇도 안 먹었거든!"
"……에라이, 분위기 파악 못하는 놈."
"시끄럽고. 이거나 더 받아 와. 이거 맛있네."
"……에휴. 알았다. 더 먹고 싶은건 없고?"
진호는 오늘 기꺼이 친구의 손발이 되어 주기로 했다.
* * *
오전과 오후 모두 관광 명소를 둘러본 진호와 재준은 해가 저물어 가자 라스베이거스의 필수 코스인 카지노로 향했다.
띠리리리링!
"예싀 예스!"
진호는 경쾌한 소리를 내뱉는 슬롯머신과 허공을 향해 연신 어퍼컷을 때리는 재준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현재 10달러가 300달러로 불어난 마법을 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 맞아. 이놈 원래부터 운이 좋았지?'
재준은 잘 생긴 외모에 금수저 버금가는 은수저, 거기다 운까지 좋은 치트키 같은 캐릭터였다.
진호는 어디하며 [스킬: 골드아이]의 스위치를 켰다.
"와."
그냥 운의 파도가 밀려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전신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왜?"
"너 진짜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가 보다."
"뭔 개소리야?"
"그런 게 있다."
'운을 타고난 다는 게 이런 거구…… 응?'
진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가 경악했다.
'뭐, 뭐야. 저 사람은?'
너무 밝아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조차 없는 거대한 운의 집합체.
'메튜나 엠마, 조나단 감독님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재빨리 [스킬: 골드 아이]의 스위치를 끈 진호는 그, 아니 그녀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살짝 당황했다.
'서버?'
그녀는 분명 카지노에서 음료가 든 쟁반을 들고 움직이는 서버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뭐지?"
"뭐가…… 오, 예쁘다. 여윽시 미국. 여기 알바인가? 아님 모델?"
"……모델은 아니야."
모델로서의 체형이나 자세가 잡혀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유한 집안의 딸이라고 여기기에는 빈티가 흘러넘쳤다.
진호가 당황한 것도 바로 이 점때문이었다.
'저 정도의 운을 두르고 있으면 여유로운 삶을 살아야 할 텐데……'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반했냐?"
진호는 음흉히 웃는 재준을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그리고는 턱밑으로 내밀어진 재준의 핸드폰 낚아채 높이 쳐들었다.
"형님아! 어제 산 거예요!"
"……모함하지 마라. 뒤진다, 진짜."
"네.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콧방귀를 뀌며 핸드폰을 내민 진호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계속 슬롯만 당길 거야?"
"아니? 당연히 여기 미국까지 왔으면…… 으흐흐."
"표정이 더러운데?"
"아잉. 형님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잖아. 누님들이 봉 잡고 어? 그런 곳은 합법이라며."
"미안하다. 걸리면 신문 1면에다가 서형 씨한테 혼나."
"……제기랄."
크게 낙담하는 재준의 모습에 진호는 마음이 안 좋아졌다.
"에휴. 일어나. 그런 데가 아니라도 갈 곳이 있으니까."
"어디?"
"네가 가면 무척이나 좋아할 곳."
"클럽?"
"……그냥 클럽은 아니지."
진호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쿵쿵쿵쿵쿵!
"꺄아아아아!"
"와아아아아!"
재준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놓았다.
"여기는…… 천국?"
넓게 펼쳐져 빛을 뿜어내는 풀과 비키니를 입고 신나게 몸을 흔드는 여성들, 근육을 자랑하는 남성들.
"너무 신나하지 마. 저기 풀에서 노는 애들 중 절반 이상은 이 클럽에서 고용한 모델이거나 배우지망생이니까."
"헐, 진짜?"
"응. 여기가 꽤 고급 클럽이거든."
진호는 이쪽으로 다가온 슈트를 입은 흑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에요, 지미."
"왜 이렇게 안 왔어, 지노? 자리는 거기로?"
"네. 두 개 주세요. 이 친구가 이런 곳은 처음이거든요."
"오우. 그럼 제일 좋은 자리로 안내해야겠군."
"술은 전에 먹은 걸로 주시고요."
"오케이. 따라와."
그가 안내한 곳은 풀과 살짝 떨어진 커튼을 칠 수 있는 침대였다.
옆으로 이런 침대들이 열 개가량 놓여 있었다.
이런 곳인지 몰랐던 재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진호를 경멸하듯 노려보았다.
"배우들이랑 한번 와 봤던 것뿐이야."
그렇게 대답한 진호는 핸드폰을 꺼내어 바로 서형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비춰 봐요.
그녀의 목소리는 서늘했지만, 진호는 거리낄 것 없다는 듯 클럽의 정경을 주욱 훑어 주며 입을 열었다.
"재준이가 여기에 오고 싶다고 드러눕더라고요. 휴우, 괜히 말했나 봐요."
"야, 내가 언……"
"같이 와 줬으니까 됐지? 넌 가서 놀아. 난 서형 씨랑 통화할 거니까!"
진호는 살려 달라는 눈빛을 재준에게 보냈고,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재준은 몸을 돌려 풀로 향했다. 삐친 듯 쿵쾅거리며 걷던 몸은 금세 비트에 맞춰 흔들어지고 있었다.
"저거 봐요. 애가 얼마나 놀고 싶었는지 보이죠?"
-……다시 생각해 봐야겠네요. 아는 동생 소개시켜 주려고 했는데……
'미안하다, 재준아!'
"에구. 그랬어요?"
"주문하신 술 나왔습니다."
"아, 감사……"
따로 꺼내 놓은 팁을 넘겨주려고 고개를 든 진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비키니를 입어 육감적인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는 금발의 여성.
그녀는 분명 아까 카지노에서 봤던 그 여성이었다.
'이 사람이 여기 왜 있어?'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