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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342화 (342/424)

14권 18화

움찔!

진호는 한 발 물러서며 거리를 두었다.

"얘가 큰일 날 소리 하네. 나 여자친구 있거든?"

"푸훗. 농담이야, 농담. 잘 사귀고 있지?"

"얼마 전 공인커플이 됐지. 그녀의 부모님께 인사드렸거든."

"아, 축하해. 결혼까지 생각하는 거야?"

"서형 씨가 서른다섯 되기 전에는 하지 않을까 싶어. 나도 해야 할 일이 있고, 서형 씨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보다 넌 여기 어떻게 있는 거야?"

"아, 난……"

앨리는 이곳에 있는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했고, 진호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뭐야, 그게. 할아버지가 왕이야?"

"우리 화교의 전통이야. 시간 절약도 되고."

"걸러야 할 사람과 함께할 사람을 알게 된다는 뜻이야?"

"아빠 세대와 우리 세대는 다르니까."

"그렇다면야 썩 괜찮은 방법이긴 하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타인의 방식이기에 참견할 수 없었다.

아니, 할 마음도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된 거였군. 그동안 잘 지냈어?"

"그랬으니까 이렇게 된 거겠지?"

"말이 뾰족합니다, 아가씨."

"이후로 한 번도 안 온 누구 때문에."

"……아, 그건 봐주라. 나 바빴던 거 알잖아. 그래서 따로 뇌물도 챙겨 줬잖아."

"그것 때문에 안 때리는 거야."

"감사!"

진호는 꾸벅 고개를 숙였고, 앨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진호는 마주 웃어 주며 그녀와 그간 쌓인 이야기를 풀어 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진호는 눈가에 푸근하지만, 단호한 미소가 어렸다.

이젠 끝이었다.

"응원할게."

미소가 가득했던 앨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젠 정말 끝이구나.'

"……응. 고마워."

이미 각오를 했지만, 아직 다 놓지 못한 미련의 끈이 마지막 발악을 하며 손을 칭칭 감는 듯하다.

그러나 놓아야 한다.

그게 앨리 본인을 위해서도, 진호를 위해서도 좋은 길이었다.

이 이상 계속 붙잡고 있는 건 서로에게 파멸만 불러올 뿐이었다.

앨리는 진호가 내민 손을 살짝 잡았다가 놓는 것으로 미련을 완전히 떠나보냈다.

"잘 자."

"너도."

'안녕……'

미련을 버렸음에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녀는 차오르는 눈물을 숨기고 자 재빨리 몸을 돌렸고, 진호는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눈빛을 서늘히 가라앉혔다.

"엿듣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요."

움찔!

그리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드리운 그림자가 흔들리더니 한 여성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홍룬의 손녀였다.

"미안해. 고의는 아니었어."

난처함이 스며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본 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그녀가 일부러 찾아 왔음을 알아차린 탓이다.

"무슨 일이시죠?"

대충 무슨 일인지 예상이 갔다.

그런 진호의 예상이 맞다는 듯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눈치가 빠르네."

"내 특기 중 하나죠. 그보다 답을 듣지 못했는데요."

"흠. 너라면 내가 왜 왔는지……."

"아, 주제를 알라는 그딴 소리를 하러 온 거라면 그냥 돌아가…… 아니네?"

"아니지."

진호는 순간 입을 다물었고, 흥룬의 손녀인 홍메이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끄응. 죄송합니다. 신경이 좀 날카로웠네요."

"아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널 제대로 몰랐을 때의 나라면 분명 그런 말을 했을 테니까."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가 누님 입장이라고 해도 그랬을 거예요."

그 말에 홍메이린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화 안나?"

진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화를 내야 하나요?"

홍메이린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그럼 앨리의 정체도 신경 쓰지 않는 거겠네."

"그랬다면 달콤한 말로 떠나지 못하게 했겠죠."

웃음을 터트린 홍메이린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렸다.

"자주 놀러 오렴."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에요. 앞으로 바빠질 예정이라 얼마나 자주 찾아 뵐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 늦었다. 잘 자."

"네, 누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 봬요."

"그래-."

진호는 그녀가 멀어지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가족 한 명 만드는 것도 일이네, 일이야."

고개를 저은 진호는 방으로 향했다.

한편 멀어진 홍메이린은 잠시 멈춰 서며 피식 웃었다.

"솔직히 할아버지가 저 아이를 보호하러 갔을 때만 해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중국 정치계의 괴물인 웨이양과 저우지엔을 사사로이 할아버지라 부르고, 다음 대 주석이 유력한 양양을 삼촌이라 부른다.

이뿐만이 아니다.

LVMH의 황제 아르노 베르베우와 다음 대 LVMH의 회장으로 유력시되는 디올의 CEO 피에트로 베타리, 현재 엄청난 주가를 올리면서 확실시됐던 후계 구도를 흔들고 있는 영국 왕실의 에드워드 왕자, 스페인 왕실 등 진호의 인맥은 상상을 초월한다.

월가의 거물인 JP 모건의 제이먼 체스탁도 있고, SJ의 이씨 일가와는 곧 한 가족이 될 게 유력하다.

또 본인 스스로 버는 돈은 어떠한가.

20대의 청년이 이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홍메이린과 비교해도, 아니 그녀조차도 아직 이룩하지 못한 업적들이었다.

홍룬의 발표 때문에 깜짝 놀랐던 화교들은 진호를 다시 보게 되면서 LVMH를 끌어들였고, 홍메이린은 혹여 후계의 자리가 뺏기는 건 아닌지 공포마저 느껴야 했다.

그런 진호가 오늘 홍룬에게 따지러 왔다. 자신의 일에 자신 모르게 손을 썼냐고 말이다.

그녀로서는 감히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고, 저녁 식사 시간 홍룬이 그 말을 했을 때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본인의 실력에 확신이 있는 거야. 그 누구의 도움이 없더라도 성공할 자신이."

그렇게 마음마저 단단한 이가 홍메이린 본인을 누님이라고 부른다.

"단 한 점의 사심조차 들어 있지 않은 눈으로……"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눈동자는 솔직히 제법 충격이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성질의 시선이기 때문이었다.

기억조차도 희미한 아주 어릴 적을 제외하면 이제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홍룬조차도 짓지 않는 눈빛이었다.

"동생이라……"

외동인 그녀로서는 인연이 없는 단어이자, 어릴 적엔 그토록 얻기를 꿈꿨던 존재.

홍메이린의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걸렸다.

진호가 홍메이린 본인의 자리를 노리지 않아서 더 마음이 놓였다.

'경쟁자가 아닌 동생.'

"동생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더라…… 아."

그녀는 핸드폰을 들었다.

"내 동생 진호가 이번에 어떤 작품에 들어가는지 알아보세요."

다시 발을 떼는 그녀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 * *

치지직!

기다란 담배가 재떨이에 짓이겨진다.

한숨을 길게 내뱉은 조나단 파블로는 본인도 모르게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었다가 이내 다시 집어 넣었다.

"빌어먹을 투자자들. 대가리 굳은 병신들. 시류도 모르는 머저리들!"

쿵!

그 두꺼운 팔로 책상을 내려쳤지만, 그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발머!"

"예, 존!"

조나단 파블로는 다급히 달려온 40대의 중년인을 죽일 듯 노려봤다.

"투자 들어온 거 없어?"

"……아직 입니다."

"제길!"

쿵!

그의 주먹이 다시 책상을 내려쳤다.

"이게 말이 돼? 그렇게 호평을 받은 시나리오잖아! 그런데 왜 투자자들이 난색을 표하냐고!"

조나단 파블로 본인이 찍는 영화라면 무조건 투자하겠다는 투자자 들마저도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발머라 불린 40대 백인 중년인은 씁쓸히 웃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알잖습니까. 주인공인 동양인이라서 그럽니다."

"지노는 빌보드 1위의 가수야! 북미에서만 100만을 동원한 가수라고! 필모그래피도 좋잖아! 결정적으로 그 미모를 봐! 파급력이……"

"하지만 동양인이죠."

이게 문제다. 아무리 유명하고 잘 나간다고 해도 할리우드의 투자자들은 결코 동양인에게 투자를 하지 않는다.

"푸후우. 지금이라도 한국의 SJ와 구성, LVMH의 투자를 받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들의 투자라면 예산이 넘치도록 뽑힐 텐데요. 더 로드 오브 월 스트리트처럼 말입니다. 아, 지노에겐 중국과 영국자본도 있군요."

"하지만 그래서는……!"

"예. 언론에게 좋은 소리는 못 듣겠죠. '해외 자본으로 찍은 한국영화, 할리우드에서 상영하다'라는 제목이 타이틀로 걸릴 겁니다. 존이 걱정하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존."

발머는 담배를 다시 빨았다.

"후우우. 영화는 찍어야 하잖습니까. 아니, 찍고 싶잖습니까."

턱 목구멍이 막힌다. 조나단 파블로는 고개를 푹 숙였고, 발머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 디즈니조차도 백인이 아닌 주인공을 데리고 촬영할 땐 투자자가 잘 몰리지 않고, 수 많은 욕을 먹는다.

'흑인 투자자조차도 흑인이 주인공이면 쉽게 투자를 하지 않지. 미국은 아직까지도 다민족이 아니라 백인의 나라야. 이런 상황에서 동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소액 투자자들이 따라붙은 게 용할 정도다.

"메인 투자자는 백인이 대표로 있는 적당한 미국 기업으로 하면 됩니다. 이름만 빌리는 건 제 역량으로 충분히……"

띠리링! 띠리링!

너무도 원색적인 소리가 주머니에서 울리자 발머는 조나단에게 양해를 구하며 핸드폰을 꺼내었다.

"네, 발머 스트레인지입니다. 예. 아, 투자 말이죠! 잘 연락하셨습니…… 네? 어디요? 흐음……. 이번에 찍을 영화가 어떤…… 알고 연락을 주셨다고요. 예, 진호 리. 그가 주인공이 맞습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발머는 핸드폰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지?"

"투자자 대신 사기꾼이 붙는 것 같군요."

"음?"

"자기가 펩시랍니다."

"……빌어먹을. 대니얼 클로니라도 불러야 하는 건가."

할리우드의 대표 미남 중 하나인 대니얼 클로니.

그라면 투자 모집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것 같았다.

띠리링! 띠리링!

"네, 발머 스트레인지입니다. 아, 예. BMW라고요……"

발머는 이거 보라는 듯 귀에 대고 있는 핸드폰을 가리켰고, 조나단 파블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골치 아프군……'

이번엔 조나단 파블로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젠 나한테 전화가 오냐는 듯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눈을 부릅떴다.

"미스터 체스탁?"

제이먼 체스탁. 영화제에서 만나인사를 나누었지만, 이후로 잊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일단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체스탁."

-오랜만입니다, 파블로 감독. 지금 바쁩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영화를 찍는데 투자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할리우드…… 아니, 북미 전체에 소문이 다 났군. 정말 무모한 도전인 건가……. 아니다. 절대 아니야. 지노는 분명 성공한다!'

수 많은 작품을 찍은 감독으로서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시나리오와 진호는 엄청난 싱크로율을 보이고 있었다.

이건 무조건 성공이기에 그는 주먹을 꽉 쥐며 약해지지 말자 다짐했다.

-……합니다. 여보세요? 듣고 있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아니 JP모건에서 이번 영화에, 미스터 리가 주연으로 출연하는 그 영화에 투자를 한다고 했습니다.

"……예?"

- 성공할게 확실한 상품을 사지 않는 건 바보나 할 짓이잖습니까.

조나단 파블로는 눈을 껌뻑였다.

'그러니까 지금 그 제이먼 체스탁이 JP모건의 이름으로 투자를 하겠다? 왜?'

"왜입니까, 미스터 체스탁. 수 많은 투자자가 외면하는 이 영화를 왜……"

-흠. 펩시나 BMW 등이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투자를 하겠다고 말입니다. 아마 그 어떤 터치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다시 눈을 껌뻑인 조나단 파블로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발머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 전화들이 진짜 였다고? 진짜 펩시와 BMW라고?'

-그런 대형 투자자들이 붙으면서 성공 확률이 높아진……

제이먼 체스탁은 차분히 말을 했지만, 이미 넋을 놓은 조나단 파블로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 * *

툭 전화를 끊은 핸드폰을 내려놓은 제이먼 체스탁은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

"화교가 움직였다라……"

오늘 차이나타운의 공주라 불리는 홍메이린에게 연락이 왔다.

화교가 진호의 영화에 투자를 하려고 하는데, 당신도 투자를 할 거냐고 말이다.

"결국 화교마저 움켜쥔 건가……."

그 액수가 얼마일지 아무도 모르는 화교의 자본이 진호를 돕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홍메이 린의 그 연락은 화교가 JP모건에도 더욱 투자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러니 그가 조나단 파블로에게 직접 연락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대단한 친구야."

사내에서 엄청난 극찬을 받고 있는 시스템 트레이딩을 떠올린 그는 시거를 입에 물며 피식 웃었다.

"그래. 성공이 확실한 상품은 무조건 사야지."

왜인지 오늘따라 뉴욕의 야경이 더욱 화려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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