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16화
왜 이리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또 왜이리 심장은 쪼그라드는 것일까.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쿡쿡. 진호 씨도 긴장이라는 걸 하네요?"
"이 상황에서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진호는 한 번 더 두 분께 드릴 선물을 점검했다.
아버님은 빈티지 포도주였고, 어머님은 고양이를 커피 밭에 뛰놀게 만들어 채집한 최고급 루왁 커피였다. 모두 돈이 있다고 해서 쉬이 구할 수 있는 물품들이 아니었다.
"후-. 가죠!"
그런 그를 귀엽다는 듯 본 서형도 이내 살짝 긴장을 하며 벨을 눌렀다.
띵동!
-어머. 서형아!
"문 열어 주세요, 이모."
-응, 응.
띠잉 문이 열렸고, 둘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진호는 마중을 나온 두 중년인은 부부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어머님! 서형 씨와 좋은 만남을 이어 가고 있는 이진호입니다!"
"……."
싸늘하다. 얼음으로 만든 칼이 심장을 파고드는 것 같다. 진호는 등에 꽂히는 날카로운 시선에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이 청년이……'
왜일까. 후광이 비출 만큼 잘 생기고 성공한 청년임에도 이리 못마땅한 이유는 말이다. 아마도 지난30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딸을 홀랑 채간 도둑놈이라서 그런 지도 몰랐다.
툭툭!
'여보. 혁진 씨.'
이서형의 아버지인 이혁진은 아내와 딸의 도끼눈에 결국 화를 풀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듣던 대로 기본예절은 됐군.'
"흠, 그래. 어서 오게. 서형이 아비 이혁진이네."
"최연하예요. 오느라 힘들었죠?"
"아닙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이건 선물입니다!"
"아니, 뭘 이런 걸…… 어머?"
선물을 확인한 최연하는 살짝 놀랐다.
그녀조차도 구하기 위해선 족히 반년은 기다려야 하는 루왁 커피에다가 빈티지 와인은 세상에 딱20병만 남았다는 물건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것들을……"
"두 분께 드리는 첫 선물이라서 최대한 노력해 봤습니다!"
이혁진도 최연하가 보여준 선물을 보곤 살짝 놀랐다.
"……들어오게. 식사해야지."
진호는 이혁진의 음성이 상당히 누그러들자 활짝 웃었다.
"하하. 그렇지 않아도 배가 많이 고프던 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그제야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휴우.'
이제 겨우 한고비를 넘겼다.
* * *
'서형 씨는 이런 곳에서 사는 구나……'
"받지."
"아, 옙!"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걸게 차려진 식탁에 앉은 이혁진이 바로 술병을 들었고, 진호는 황급히 잔을 들었다.
꼴꼴꼴.
"부모님께서 베이커리를 운영하신다고?"
"아버지는 가게를 마치실 때까지 계시는데, 어머니는 워라벨을 위해 오후에 퇴근하신 후 동네 친구분들과 운동을 다니십니다."
"골프를 치시는 건가?"
"어떤 날은 골프를 치시고, 또 어떤 날은 수영을 하시고, 일주일 내내 바쁘십니다."
"호오. 그런가?"
'부모의 직업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
이혁진 본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아는데도 말이다.
'가정 교육을 제대로 받았군.'
이혁진은 당당히 말하는 진호의 모습에 못마땅함이 조금 더 가시는 걸 느꼈다.
"나도 주게."
"예."
술을 다 받은 진호는 술병을 넘겨 받았다.
이번엔 진호 본인의 차례였다.
"호텔과 백화점 등의 유통을 맡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많이 바쁘시겠습니다."
"일은 직원들이 다 하지. 내가 하는 건 없네."
"그렇다고 해도 선장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잘못 잡으면 배는 좌초되죠. 아버님께서 유통을 맡으신 이후 매년 5퍼센트 이상의 매출상승이 일어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혁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많은 걸 알고 있군. 이쪽 일에 관심이 있는 건가?"
여러 뜻이 내포된 물음이었다.
진호는 여유롭게 웃었다.
"경영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취미로 주식을 좀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JP모건에 시스템 트레이딩프로그램을 팔기도 했습니다."
"음?"
순간 파바박 일어난 신경전은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이혁진은 지금 진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디에 뭘 팔아?'
되지도 허세를 부리는 건가 싶었지만, 펄쩍 뛰는 서형의 반응을 보자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악! 그거 팔았어요? 정말요?"
"네, 팔았어요. 이번에 재단을 만드는데 돈이 좀 필요해서요."
"얼마에요? 얼마에!"
"서형 씨 평생 연봉보다 많은 액수에? 이번 재단 설립에 들어가는 돈의 대부분이 거기서 나왔죠."
"아아……"
서형은 진하게 안타까워했고, 이혁진은 그런 서형과 진호를 번갈아 보았다. 그걸 본 진호가 입을 열었다.
"소소하게 프로그램 제작도 좀 하고 있습니다."
"그게 소소한 거면 다른 프로그래머들은 다 굶어죽어야겠네요. 아빠, 이 사람이 만든 업무 통합 프로그램이 HU 에이전시 전체에서 쓰이고 있어요."
이혁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듣던 대로 가진 바 능력이 많군."
"그래서 저도 매번 놀라는 중입니다."
"겸손도 있고."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마시지."
"예!"
채앵!
이 집에 들어선 지 무려 20분 만에 겨우 술잔을 부딪칠 수 있게 됐다.
다시 한고비를 넘겼다고 봐야했다.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진호는 몸을 돌려 단숨에 들이켰다.
"흐음!"
"음. 역시 다시 마셔도 좋은 술이네요."
이혁진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왜인지 기쁨이 찰나 동안 서렸다가 사라졌다.
"호. 무슨 술인지 아나?"
"이강주는 운암정에서 일할 때 몇 번 마셔 본 경험이 있습니다."
'흠. 안동소주는 알아도 전통주를 모르는 사람이 참 많은데 말이야. 여러모로 식견도 넓군.'
잘못한 건 잘못한 거지만, 인정할건 인정해야 했다.
"술을 좋아하나 보군."
"맛있는 걸 좋아해서 말입니다. 그래도 못 마시지는 않습니다."
'호기도 부릴 줄 알고.'
"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치고 잘 마시는 사람은 없던데 말이야."
'어라?'
별거 아닌 말처럼 보이지만, 이혁진의 몸에서 보내는 모든 신호가 한 번 더 달라졌다.
'날 인정하셨다? 아니지. 날 못마땅해하던 게 거의 가셨어!'
남은 건 아빠로서의 작은 분노였다.
이젠 정말로 큰 고비를 모두 넘겼다.
진호의 얼굴에 여유가 생겼다.
"아버님의 좋은 술상대가 되어 드릴 자신은 있습니다.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흥. 바쁜 사람이 그런 공수표를 남발하는 게 아냐."
"최소한 오늘은 그럴 수 있습니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이혁진은 소주잔을 옆으로 치웠다.
"큰 컵으로 가져다줘."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머님!"
그제야 식탁에 내려앉은 긴장감이 모두 해소되었다.
최연하와 이서형의 입가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어휴. 집에 술꾼이 한 명 더 생겼네. 저 사람이 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게 그렇게 좋았는데……"
"하하. 예쁘게 봐 주십시오!"
이후 진호와 이혁진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고, 술이 들어갈수록 이혁진은 권위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네, 아버님."
"자넨 왜 대기업 광고를 찍지 않는 건가?"
자네라는 말이 참 듣기 좋았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그 기업들의 이미지 때문입니다."
"그렇지. 말이 많기는 하지."
"SJ그룹의 광고를 찍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래, 와가 노동자와 소비자에게 나쁜 짓을 많이 하기는 했지. 부정하지는 않겠네."
"사후 처리만 잘 되었다면 저도 생각을 달리했을 겁니다."
"그 점도 부정하지 않아."
"대신 유통 쪽에서 광고를 제안하신다면 찍도록 하겠습니다."
"……눈치겠군."
이서형과 최연하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아빠!"
"여보!"
진호와 이혁진은 여자친구와 부인에게 손을 내밀어 말을 멈추게 했다.
"왜인가?"
"오늘 제가 본 아버님은 혹여 그런 사고가 일어나도 납득할 만한 보상은 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는군."
"어차피 그룹 승계와는 동떨어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룹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페이스메이 커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건방졌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뼈아픈 충고는 언제나 피와 살이 되는 법이지. 그런데 그래서 돈은 벌겠나?"
순식간에 뒤바뀐 말투에 진호는 히죽 웃었다.
"아마 제 재산이 아버님보다 많다는 것에 운암정 VIP식사권을 걸 수도 있습니다."
"자넨 참 좋은 것 같은데 허세가 좀……"
툭툭!
이서형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빠, 진짜야. 진호 씨가 1년에 올리는 매출만 2천억이 훌쩍 넘어. 최근에 그린 그림은 경매에서 15억에 팔렸는 걸?"
"그보다 조금 높기는 합니다. 그리고 정산 비율은 8 대 2고요. 제가 8입니다."
이혁진과 최현아는 눈을 껌뻑였다.
"……걸어 다니는 중견 기업이군."
"최소한 서형 씨가 하고 싶은 거 다 해줄 정도는 법니다. 하하. 그렇다고 시스템 트레이딩은 못 줘요, 서형 씨."
"나쁘다!"
"혼자만 쓴다고 약속할 수 있으면 줄게요."
"……칫!"
이혁진은 딸아이와 티격태격하는 진호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건 뭐 인정을 안 하려야 안할 수가 없군.'
이제 첫 만남이라 비전 같은 건 물어볼 수 없지만, 그래도 확실한 목표가 없는 이상 이를 수 없는 것들을 이뤘다.
눈치와 뚝심도 참 대단했고, 머리도 영특했다.
아빠로서 인정하긴 싫지만, 솔직히 딸이 한참 모자랐다.
"들지. 음식은 입맛에 맞지?"
"예! 아주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받으십시오!"
그렇게 그들의 시간은 깊어져 갔다.
"……후아!"
진호는 서형의 집을 나서고 나서 10분 만에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오구오구. 그렇게 긴장했어요?"
"그럼 긴장을 안 할까요? 그래도…… 좋은 분들이시네요."
이혁진과 최연하는 끝까지 LA에서 진호가 서형과 무슨 짓을 했는 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로서의 부심도 부리지 않았고, 선을 넘지도 않았다.
'저런 두 분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니 서형 씨가 이렇게 예쁘게 자탔지.'
"오늘 고마워요, 진호 씨."
"뭘요, 당연한 건데요. 그보다 들켰다면 들켰다고 말해 주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나, 나도 엄마, 아빠가 알고 계실지는 몰랐어요!"
"그게 말이 됩니까, 이서형 씨? 그렇게 변명하면 끝입니까?"
"……난 진호 씨처럼 눈치가 빠르지 않다, 뭐."
툭!
서형이 돌을 차며 시선을 돌렸고, 진호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해야 될 일이기는 했지.'
그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뤄질지는 몰랐을 뿐이다.
"그런데 진호 씨 부모님은 뭐라고 말 안 하세요?"
"안 하긴요. 우리 아들 홀랑 감싼 그 여자 얼굴 좀 보자고 난리지."
"네에?"
"풋. 농담이에요. 오히려 제가 잘못했으니까 가서 무조건 빌라면서 야단치셨어요."
"……진짜!"
"하하핫."
진호를 노려보던 이서형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진호 씨 부모님도 좋은 분들이신가 보네요."
"대한민국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평범한 부모님이세요. 그러니까 나중에 혹여 만나게 되도 긴장하지 마세요."
진호는 이서형의 볼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서형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진호 씨 부모님은 어떤 걸 좋아하세요?"
"음……. 딱히 없네요."
"……암튼 남자들은 이래서 문제야. 너무 무심해."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선호하는 게 없으세요. 아버지나 엄마 두분 모두 얼마 전까지 천 원 한 장쉽게 쓰시지 못하면서 사셨거든요. 어떤 걸 선호한다는 사치를 부릴 수 없으셨어요."
"아……. 죄송해요."
"아니에요. 서형 씨 잘못이 아닌데요, 뭘"
"그래도……. 그런데 아버님께서 대기업 부장님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17살이 될 때까지 이씨 집안 전체의 가장 이셨어요. 친가까지. 고모, 삼촌들이 많았거든요."
그렇게 속박에서 벗어났는데도 어머니 나진희는 아끼고 아끼는게 습관으로 굳어 버려, 진호가 성공하기 전까지 돈을 함부로 쓰지 못했다. 지금도 10만 원이 넘어가는 구매는 머뭇거리신다.
"아."
"그 없는 살림에 저는 부족함 없이 키우시겠다고 아등바등 고생하신 좋은 분들이세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분들이고요."
"……그건 좀 질투 나네요. 난 진호 씨에게 첫 번째가 되고 싶은데."
"포기해요. 아마 평생 가도 변하지 않을 테니까."
"치이."
"아니다. 여기에……"
진호는 이서형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우리 둘의 결실이 생긴다면 또 모르죠?"
"암튼 응큼해! 그리고 그런 프러포즈는 좀 근사하게 해 주시죠, 이진호 씨!"
"흐흐흐."
진호는 그녀의 얼굴을 잡아 입을 맞췄고, 곧 둘은 잠시 뜨거운 키스를 나눴다.
"후우. 그래서 언제 시간이 나는데요? 우리가 데이트를 못한 지 몇 달 째인 줄은 알죠?"
"음……. 아마 5일 후?"
"아니, 쉬는 사람이 왜 그렇게 바빠요."
"원래 백수가 세상에서 제일 바빠요. 그리고 갈 곳이 있거든요."
'모레는 가야지. 웨이양 할아버지한테.'
이서형은 의아해했고, 진호는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답을 회피하며 발을 내딛었다.
"우리 더 걸어요."
"네."
그렇게 둘은 천천히 걸었다.
* * *
회사 직원들과 회식을 하고 이틀후, 부모님과도 1박 2일 여행을 다녀온 진호는 바로 중국 상해로 향했다.
웨이양의 저택에 도착한 그는 눈을 빛냈다.
"참 할 이야기가 많아요, 할아버지."
진호는 웨이양의 저택을 향해 발을 성큼 내딛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