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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333화 (333/424)

14권 9화

한국인에게는 참 아픈 역사 중 하나인 6.25.

같은 민족끼리 싸운 전쟁이라서 더 아프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그 때문인지 워싱턴 6.25 참전용사 기념관을 찾은 진호는 절로 숙연해졌고, 정 실장도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당신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제가 태어날 수 있었고, 이렇게 마음 편히 살 수 있습니다."

"Please be happy in heaven…… Amen."

그렇게 읍을 한 진호와 정 실장, 월터는 몸을 돌렸고, 7월의 바람이 그들을 부드럽게 감쌌다가 멀어졌다. 마치 기억해 줘서 고맙다는 그들의 넋두리인 양 바람은 무척이나 시원했다.

진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기 미국에도 참전용사 및 그분들의 후손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주세요."

이미 한국에서는 하고 있었다.

6.25전쟁의 영웅인 국가유공자들은 대부분 생활고에 시달리는데, 진호는 이미 데뷔 때부터 이런 생활고에 시달리는 독거노인 및 소외 계층을 지원하고 있었다.

"아예 참전국들을 대상으로 찾아 볼게. 에티오피아에서도 힘들게 사시는 분들이 많다더라."

"그래 주시면 감사하고요. 그리고 내일은 워싱턴에 거주하시는 참전용사나 그분들의 후손 좀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래야지."

둘의 이런 대화에 이젠 한국어를 어느 정도 알아듣는 월터의 눈시울이 울컥 붉어졌다.

"……미국인을 대표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당연한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국가의 부름이라는 미명 아래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작은 나라를 위해 뜨거운 피를 차가운 대지에 흘린 분들이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고, 그렇기에 이를 이용하고 싶지 않아서 전속 파파라치인 윌리엄 채셔를 떼어놓았고, 이렇게 변장을 한 것이었다.

"그래도 쉽지 않은 일이야."

"하하. ……한 바퀴 둘러보고 올게요."

칭찬을 받으려 한 일이 아님에도 칭찬을 받아 버리자 머쓱해진 진호는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내 곧 느려졌다.

사방에 세워진 동상들이 그의 발을 잡아 세웠기 때문이다.

결국 멈춰 선 진호는 마치 진격하라는 듯 뒤를 바라보며 손을 앞으로 크게 뻗는 동상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다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진호는 옆에 누군가 서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동상을 바라보았다.

"한국인인가?"

힐끔 옆을 본 진호는 자세를 바로 했다.

백발이 성성한 70대의 백인 노인.

머릿속에서 떠오르는게 있었다.

"네. 혹시……"

"아버지가 한국 전쟁에 참전하셨지."

"……감사합니다. 아버님의 희생이 계셔서 오늘날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좋아하시겠군. 평생 자랑이셨거든."

"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맙네."

잠시 입을 다문 둘은 다시 동상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음?"

"절 찾아 오신 이유가 뭔가요?"

움찔!

몸을 굳힌 노인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진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쪽을 향한 시선들이 많아서요."

"……군인이나 경호원이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말이야."

노인은 동상을 바라보았다.

"그저 내일 눈을 감아도 이상치않을 늙은이의 호기심이라고 해두지. 어쩌면 구매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월 스트리트에 계시나 보네요."

"정말이었군……. 허허."

노인은 웃었지만, 그 속은 경악으로 가득했다.

'역시 시스템 트레이딩 프로그램이었던 건가!'

현재 진호가 이곳에 있음에도 진호의 증권 계좌들은 계속 매도와 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자동매매 프로그램인 시스템 트레이딩밖에 없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더 로드 오브 월 스트리트에 자문을 맡았던 매니징 파트너 잭 윌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진호 리가 만든 트레이딩 프로그램이 있다고 했지……. 세상이 잘못 알고 있었군.'

외계인이 맞았다.

노인의 눈에 서린 호기심이 더욱 짙어지기 시작했고, 진호는 입맛을 다셨다.

'아, 귀찮아지겠네.'

말을 잘못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따악! 딱!

"음?"

둘은 한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지팡이를 짚으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80대의 동양인 노인을 발견하곤 서로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진호는 의아해했지만, 백인 노인은 다시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앞까지 다가온 동양인 노인이 백인 노인을 보며 혀를 찼다.

"늙었으면 엉덩이가 무거워야지."

"그러기에는 참 호기심을 자극하는 청년이라서 말입니다. 그보다 당신이 워싱턴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곳도 차이나타운은 있으니까."

동양인 노인의 시선이 진호를 향해 돌아갔다.

"네가 진호냐?"

"예. 제가 이진호입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웨이양에게 말 많이 들었다."

진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사람이 언급된 것이었다.

"하, 할아버지에게서요? ……아, 혹시?"

언젠가 웨이양에게 스쳐 지나가 듯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 큰 형님으로 모시는 이가 산다고 말이다.

"다시 인사드릴게요, 큰할아버지. 이진호입니다."

"……허헛. 바로 인정하는 게냐?"

"웨이양 할아버지가 큰 형님으로 생각하신다면 저에게도 할아버지 신 거죠. 먼저 찾아 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그리고 이런 몰골로 뵙게 되어서도 죄송하고요."

동양인 노인은 진호의 맑은 눈과 백인 노인을 번갈아 보다가 혀를 찼다.

"……내가 괜히 온 것 같구만."

"그럴 리가요. 정말 잘 오셨어요."

"아니다, 됐다. 늙은이가 괜한 주책을 부린 게야. 후에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찾아 오거라."

"헛! 벌써 가시려고요?"

"이런 늙은이라도 찾아 주는 사람이 많아서 말이야. 나중에 연락하자꾸나."

"……끄응,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곧 찾아 될 게요."

최소한 기념관 입구까지 모시고 싶었지만 너무 단호했다.

진호는 멀어지는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백인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처음엔 중국 쪽 비자금을 굴리는 건가 싶었지."

백인 노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차린 진호는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죠."

"그런 것 같네. 저분이 내게서 자넬 보호하려고 모습을 드러내셨으니까."

진호가 일개 얼굴마담이었으면,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미국 화교의 거물.

노인은 진호의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처음부터 다시 인사하지. 만나서 반갑네. 작은 투자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제이먼 체스탁이라고 하네."

진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제이먼 체스탁. 월가에 잠시나마살아 본 사람으로서 모를 리가 없는 이름이었다.

"……월가의 대변인, JP모건의 회장님께서 뉴욕이 아니라 워싱턴에 계실 줄은 몰랐네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진호입니다."

"허명이지. 그보다……"

제이먼 체스탁의 눈이 빛을 강하게 머금었다.

"얼마를 주면 팔 건가?"

의아해했던 진호는 이내 마치 가면을 쓴 듯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에 사실래요?"

'선제시요.'

* * *

부우웅! 달리는 차 안.

"내가 경솔했다고 보느냐."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동양인 노인의 말에 그의 옆자리에 앉은 30대의 동양인 여성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긴. 속으로 욕을 하고 있을게 뻔하구만."

노인은 그거 보라며 코웃음을 쳤다가 이내 진호를 떠 올렸다.

'내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했을 텐데도 흔들리지 않았지.'

오히려 정말 할아버지처럼 편하고 존경 어린 기색을 보였다.

그는 웨이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형님이 어느 자리에 있든, 어떤 존재든 진호는 형님을 친할아버지 처럼 대할게요……라고 했던가?'

정말 말 그대로였다.

그 어떤 욕심도, 욕망도, 공포도 진호의 눈에 깃들지 않았다.

할아버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순수한 눈빛을 받아 보는게 얼마 만일까……'

아마 눈앞의 손녀가 5살 이전에 보냈던 게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거참. 늙은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구만.'

"잘 살펴보아라. 그 아이 역시 우리의 형제이니."

"네. 어려움 없게……"

"아니, 그러지는 말거라. 그 아이 성격상 본인의 성취에 누군가의 도움이 깃든다면 모든 걸 털어 버린다고 했으니. 그저 지켜보기만 하거라."

"……네. 그렇게 할게요."

"그래. 피곤하구나."

노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고, 여성은 그런 노인을 바라보다가 운전기사에게 천천히 가라며 신호를 주었다.

* * *

'안 그래도 돈을 크게 쓸 일이 있었는데, 잘 됐네.'

몇 십만 명일지 모를 참전용사및 그들의 후손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번 돈의 반절 정도는 쏟아부으려는 각오까지한 상태에서 제이먼 체스탁의 거래 제안은 참 시기적절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월가의 거물과 이야기를 제대로 나눠 보지 못한 건 좀 아쉽네……'

제이먼 체스탁은 시간이 없다고, 다음엔 꼭 같이 식사를 하자며 전화번호를 교환한 뒤 사라졌다.

'그나저나……'

그 제이먼 체스탁이 '그분'이라고 칭할 만큼의 거물인 웨이양의 지인. 은막 뒤에 있을 게 분명한 그런 존재가 웨이양의 손자라는 이유 하나로 커튼 밖 세상에 나타나주었다.

고맙고도 또 고마웠다.

"달달한 걸 만들어서 찾아 봬야 하려나……. 아무래도 월병이 낫겠지?"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정 실장뿐만 아니라 6.25 참전용사 기념관에 이상한 인물들이 나타난 걸 알아차리자마자 다급히 진호를 찾은 월터도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았다니까요. 양양 삼촌의 지인이셨어요."

"아……"

정 실장과 월터는 그제야 이해하고는 안심했다.

중국 내에서 정치 서열이 무척이나 높은 양양이니 그의 지인도 그런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었다.

"헉! 호, 혹시 그러면……"

"안 해요."

"……끄응. 역시 그러겠지?"

"당연히 그렇죠. 나 못 믿어요?"

"못 믿긴! 당연히 믿지! 하지만 그런 분의 도움이 있으면…… 응, 그래. 너라면 미국에서 철수해 버리겠구나."

"당연한 말은 하지 마세요."

"……쩝."

정 실장이 아쉬워 물러나자 히죽 웃은 진호는 대기실 문을 바라봤다.

그 순간.

벌컥!

"지노! 나 안 늦었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등장한 그녀는 카밀라 카베스였다.

* * *

이날의 콘서트도 수 많은 이야기를 양산하며 아름답게 끝을 맺었고, 진호는 다음날 진호는 참전용사들이 머무는 실버타운을 찾았다.

이번에도 윌리엄 채셔는 함께하지 않았다.

"괜히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어르신들께서 무척이나 좋아하실 거예요. 그런데……"

실버타운의 원장은 진호의 뒤를 살피다 낯빛을 흐렸다.

그 이유를 알아차린 진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요. 대신 제 SNS에 6.25 관련 영상을 제작해서 올릴 생각이에요."

"아, 그러신가요?"

원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자 진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인이 이런 봉사 활동을 할 때 기자와 함께하는 건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서기도 하지만, 봉사대상을 돕기 위해서기도 하다.

연예인을 통해 그들의 과거와 삶이 집중 조명이 되면서 구원의 손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늦어서 죄송하죠. 그런데 제 강아지가 함께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희도 어르신들의 치매 예방과 멘탈 치료를 위해 반려동물을 적극 이용하는 걸요."

"그런가요?"

"반려동물에게 밥을 주고, 반려동물과 함께 산책하고, 또 반려동물을 씻기는 등의 육체적 행동을 통해서 무기력증이나 PTSD가 호전되신 분들이 많으세요."

"휴. 다행이네요."

버려진 충격 때문인지 점점 어리광쟁이가 되어 가는 바람에 마음이 쓰였는데 다행이었다.

진호는 옆에서 앉아 있는 까망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끄응?"

"아니야. 가서 다른 친구들과 놀고 있어. 좀 이따 가 보자."

"……왕!"

까망이는 열린 문을 통해 빠르게 사라졌고, 원장은 살짝 놀랐다.

"역시 현실판 아쿠아맨, 아니 동물의 왕답네요."

"으헛? 저, 저를 아세요?"

"봉사하러 오신다고 해서 조사 좀 해 봤어요."

"아하하. 그, 그럼 전 어떤 것부터 하면 될까요?"

'역시 한국인은 겸손하네.'

한국인 봉사자가 이곳을 찾은 게 진호가 처음은 아니었다.

가끔 이렇게 봉사를 하러 오는 한국인들이 더러 있었고, 한국에서 특집 방송을 찍기 위해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겸손하고 또 착했다.

"원장님?"

"아."

원장은 진호를 보며 눈을 빛냈다.

"혹시…… 특별한 빵을 만들어주실 수 있어요? 어르신들이 드실 수 있도록 부드러운."

살짝 놀랐던 진호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

"그게 제 특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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