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3화
지름 5센티미터의 작은 원에 발끝이 온전히 들어가고, 자세도 완벽해야 하는 점프를 3시간.
그걸 장장 6시간 만에 해낸 진호는 결국 탈진하듯 쓰러지고 말았다. 그건 목이 터져라 외친 메리 볼스카야도 마찬가지였다.
"허억! 헉!"
'와, 빡세네. 그래도…… 해금했다. 아니, 얻었어. 어디?'
허리를 튕겨 일어난 진호는 3번 기본자세를 잡으며 무거워지자고 생각을 했다. 그러자 발이 아니, 바닥에서 올라온 거대한 손이 온몸을 잡아끌어 나무 바닥을 파고 드는 것처럼 온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억? 이건?'
연기가 아니다. 마치 실제같이 느껴진다.
연기력이 감각마저 속이고 있었다.
'으으으!'
진호는 바닥으로 끌려가지 않게 발버둥을 치면서도 환호했다.
"오오오!"
'이거구나!'
[스킬: 무중력]의 중력을 조절하는 듯한 연기력. 아니, 어쩌면 정말로 중력을 조절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는 6차 해금을 하며 얻을 수 있는데, 좁은 공간에서 최대한 다양한 빠 드 샤 재밌게 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혀지게 되는 것이다.
'스톱!'
진호는 재빨리 온몸을 구속하던 생각을 벗어던졌고, 겨우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아니, 그 생각이 좀 과해서 몸이 떠오를 듯 가벼워지기도 했다.
"와……"
'이거 사기네.'
[스킬: 무중력]은 정말 사기라고 할 수 있었다.
힘이 풀린 진호는 다시 누워 버렸다.
'이제 남은 해금 조건은 하나뿐인데……. 이게 문제란 말이지.'
코르 드 발레.
결국 연습하는 걸 들켜 쫓겨난 주인공은 어느 허름한 발레단에 들어가 코르 드 발레를 하며 스킬을 온전히 습득하게 된다.
'이걸 어떻게 말한다……. 으음.'
진호는 마돈나와 메리 볼스카야가 경악을 하는 것도 모른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저, 저건?"
동시에 눈을 비빈 둘은 서로를 보았다.
둘뿐만이 아니다. 조나단 파블로를 비롯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눈을 비볐다.
'방금……'
그들은 보았다.
마치 거대한 손이 진호를 바닥으로 잡아끄는 듯한 환상을. 그만큼 진호의 연기가 실감이 난 것이다.
시선을 마주한 마돈나와 메리 볼스카야는 서로의 눈빛을 통해 똑같은 광경을 보았음을 알 수 있었다.
오싸악!
마돈나의 입가가 사납게 찢어졌다.
그것은 분명 경악이었고, 공포였고, 환희였다.
"왔군."
왔다. 발레리나, 아니 정상에 선 댄서에게 찾아 오는 그 순간. 정상에 서려면 무조건 돌입해야 하는 그 영역. 언젠가 올 거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이 온 것이다.
그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던 마돈나는 이 어긋나면서도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재능에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하하! 역시 그 괴상한 짓을 말리지 않기를 잘 했어! 이 미친 애송이-!"
'왜 저래? 그리고 선생님은 또 왜……'
왜인지 흥분한 모습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메리 볼스카야.
얼굴만 보자면 이쪽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
'나,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물론 그 독특한 빠 드 샤 훈련을 오래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과하게 반응할 건 아니었다.
'아니, 발레단에 들어간 사람들은 하루 종일 빠 드 샤를 연습할 때도 있다면서요!'
그들과 비교하면 겨우 초등학생 훈련량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은 초인인 건가? 어떻게 이렇게 힘든 빠 드 샤를 하루 종일 연습……. 아니지?
왜 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는 거야? 난 발레 안 할 건데!'
이건 모두 저 두 사람 탓이었다.
그렇게 자위하던 진호는 메리 볼스카야가 머리 맡에 서자 다급히 생각을 멈췄다.
"그 빠 드 샤는 누구 아이디어지?"
"어……. 그냥 제 자체적인 아이디어인데요? 이러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매번 같은 점프만, 같은 턴만 하는 것도 재미없고……. 무, 물론 선생님의 가르침이 재미없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푸하하하핫!"
진호는 눈을 껌뻑였다.
'뭔데? 대체 왜 그러는데……요. 사람 무섭게.'
"내일부터는 대회반 수업에도 들어와!"
"……네?"
"코르 드 발레를 가르쳐 주지."
'……오오오?'
"앞으로 더 힘들어질 테니까 각오하고."
'……그럼 그렇지!'
그래도 군무를 배운다.
'아싸. 내일이면 스킬 얻겠다!'
그러면 이제 이 지옥도 탈출이었다.
진호는 환하게 웃었다.
"예!"
* * *
웅성웅성!
대학 입학을 위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하는 중고, 대학생들은 레깅스를 입은 채 몸을 푸는 진호를 보며 놀라워했다.
"아쿠아맨이다."
"내 동생이 우리 학원에 아쿠아맨과 놀았다고 했지만, 그게 진짜 일 줄이야……"
"와, 배우다. 존 리야."
"진짜 잘 생겼네. 동양인이 왜 저렇게 잘 생겼지?"
"꺄아아."
'어휴. 그래. 더, 더 칭찬하렴. 오빠가 끝나고 밥 사 줄까?'
역시 누군가 알아봐 주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짜악!
사람들의 시선이 메리 볼스카야에게로 향했다.
"오늘부터 여기 진호 리가 너희와 같이 수업을 받을 거다."
"네? 저희랑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호기심과 기쁨이 가득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진호는 그 급작스런 변화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 콩쿨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저희도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그리고 솔직히 저기 카메라들도 거슬려요!"
"네!"
'아.'
진호는 그제야 그들의 감정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대회를 코앞에 둔 상황이니 만큼 새로운, 그것도 불협화음을 일으킬 것이 다분한 초보자 때문에 페이스를 잃을 수 없기에 반발하는 것이다.
직접 해 보며 느낀 점은 발레는 예술이라는 거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예민할 수밖에 없고, 멘탈이란 건 한 번 흔들려 버리면 수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들의 반발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도 이런 반응일 거야.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있으니까. 하지만 딱 한 번 만이면 안 되겠니?'
한 번, 어차피 딱 한 번이다.
5분이어도 좋고, 1분이어도 좋고, 단 1초라도 좋다.
코르 드 발레에 섞이기만 하면 스킬을 습득할 수 있다.
"시끄러.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는 놈들이 무슨 콩쿨이고, 대회야! 제이미. 너 지금 카메라가 거슬리다고 했어? 그래 놓고 관객들 앞에서 연기할 수 있겠어? 이미 촬영을 허락해 놓고 왜 딴 소리야!"
"아니, 그건……"
"그딴 식으로 할 거면 이 학원에서 꺼져! 넌 발레 할 자격도 없으니까!"
'아, 아니, 그런 식으로 말하시면 제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생님!"
"왜!"
"저 사람이 코르 드 발레를 할 줄은 아나요? 웬만큼은 맞아야 저희도 손해를 보지 않죠!"
이건 맞는 말이었다.
"할 줄 아냐고?"
코웃음을 친 메리 볼스카야는 진호를 보았고, 진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할 줄은 압니다. 그러니 방해는 되지 않을 거예요."
'웬만한 건 다 외웠으니까.'
백조의 호수를 비롯해 지젤, 호두까기 인형, 돈키호테, 로미오와 줄리엣 등 대표적인 작품들은 어제 모두 외웠다.
메리 볼스카야가 영상을 보여준 덕분이다.
그리고 단번에 비슷하게 재현해냈고, 마돈나와 조나단 파블로 등의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어젯밤에는 진짜 죽을 뻔했지.'
대표 작품들의 리믹스. 안무와 연기를 시시때때로 바뀌는데 정말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 그렇게 몸을 혹사 시킨 반동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야……"
발레리노를 꿈꾸는 남대생이 순순히 물러나자 진호는 살짝 놀랐다.
'와, 볼스카야 선생님이 정말 신뢰를 받나 보구나.'
저렇게 험하게 말을 하는데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람이 없다는 건 그녀의 가르침이 엄청난 하이레벨이라는 방증이었다.
짜악!
"그럼 워밍업으로 지젤부터 간다. 모두 자리 잡아."
진호도 재빨리 맨 끝에 서며 자리를 잡았고, 메리 볼스카야는 그런 진호를 향해 씩 웃으며 음악을 재생시켰다.
그리고 모두가 몸을 움찔 거리는 그 순간, 진호는 감각이 바뀌는 걸 느끼면서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따, 라라라라, 따, 따라-!
'흠. 이런 감각이었구나.'
[스킬: 갓 오브 워], [스킬: 괴도 루팡], [스킬: 나는야 자연의 왕자], [스킬: 사상 최강의 제자], [스킬: 유리가면] 등의 공간 지각 능력.
이미 여러 스킬들로 인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공간 지각 능력에 [스킬: 무중력]이 얹어진 것뿐이다.
진호는 [스킬: 무중력]을 얻는다면 그럴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건 뭔가 좀……. 신기하네.'
보지 않아도 옆 사람들이 뭘 하려는지가 느껴진다. 움찔 거리는 근육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려는지, 어떤 의도를 담는지가 훤히 느껴진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감정과 생각마저 느껴졌다. 동물들과 어울릴 때는 느끼지 못한 불쾌감, 질시 같은 감정이 온몸에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알게 되어 버렸다.
'이거……. 눈과 귀를 막아도 들리네?'
화들짝 놀란 진호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정작 놀랍고 경악스러운 건 다른 데에 있었다.
'이제 춤이 뭔지 알 것 같아.'
지젤의 아름다운 선율이 온몸을 파고들어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
"이게 춤을 춘다는 거구나……"
난생 처음 겪은 황홀한 경험에 심장이 거세게 뛰며 온몸이 달아올랐다.
"진짜 사기다, 사기."
'그런데, 흠. 뭐랄까……'
"에이, 아니다."
고개를 저은 진호는 실험해 볼게 생겨서 [스킬: 괴도루팡]의 도움을 빌어 존재감을 아예 없애 버렸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공기가 전해 주는 이야기에 집중하며 손과 발을 움직였다.
그걸 본 메리 볼스카야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한 곡이 끝나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진 사람들은 진호를 힐끔힐끔 응시했고, 진호는 조나단 파블로에게 다가가려다가 몸을 돌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보니 지금 접근해선 안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메리 볼스카야에게로 향했다.
"저 어땠어요?"
"이제야 길 수 있게 됐어."
메리 볼스카야는 헛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모든 톱니바퀴가 맞물렸다.'
그녀는 이 경이로운 재능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오? 으흐흐.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이 인색한 그녀의 칭찬이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어땠어?"
처음 해 본 코르 드 발레에 대한 소감을 묻는 게 아니었다.
"아, 그건……"
진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 역시 그럴 줄 알았지."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눈빛을 서늘하게 가라앉혔다.
"다음 노래부터는 네 템포대로 해 봐."
"어? 네? 그, 그게 무슨 말이신지?"
"저놈들 눈치 보느라 중간중간 눈 뜨는 그런 짓 하지 말고, 네 진짜 실력을 보이라고."
"에이, 무슨 진짜 실력이요. 이제 코르 드 발레를 한 번 해 본 것뿐인…… 진짜요?"
"그래."
진호는 난처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스킬: 셜록의 후예]가 말하고 있다. 다 뽀록났다고 말이다.
'대체 나의 뭘 믿고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좁은 세상 속 개구리 놈들 좀 놀라게."
"저 발레 배운 지 이제 일주일도 안 된 초보자인 건 아시죠?"
"알지. 저 하늘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그런 엄청난 공감각 능력과 집중력이라니……"
'진짜 다 뽀록났네.'
방금 전 춤을 알게 되자마자 저들의 레벨에 맞춰 춤을 춰 버리고 말았다는 걸, 그리고 진호 본인의 공간이 이 학원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끄응. 그렇게 말하시니 뭐……. 알겠습니다."
"전력으로 해 봐."
"넵."
진호는 다음 곡인 호두까기 인형을 떠올렸다.
'흐음. 호두까기 인형이라……'
* * *
따, 따라라라, 딴, 따다-
'뭐, 뭐야!'
'이건 뭐야!'
대회를 코앞에 둔 발레리나, 발레리노들은 당황했다.
끌려간다. 어디론가 끌려간다.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있다.
그리고 사로잡혀 강제적으로 몸이 움직여지고 있다.
'아악! 높아! 난 거기까지 다리가 찢어지지 않아!'
'윽! 내 턴은 이렇게 빠르지 않은데!'
'대체 누구야! 누가 이러는 거야?'
그들의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옮겨졌기 때문이다.
무리의 가장 뒤편, 그것도 가장 구석진 곳에서 시작 된 흐름이 자신들을 휘어 감은 채 강제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다.
강제적으로 감정을 불어넣고, 강제적으로 연기를 하게 만든다.
'아아악!'
'으으윽!'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격렬한 그랑 바트망.
요골이 흔들릴 만큼 강력한 그랑 주테.
장난과 웃음, 따스함으로 가득 해야 할 공간이 발버둥 치고 허우적거리는 절망으로 가득 해진다.
"서, 선생님. 이건……. 흡!"
하얗게 질려 메리 볼스카야를 본 보조 선생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서고 말았다.
"그래, 이거지. 이게 진짜 호두까기 인형이지."
아무리 꿈속 이야기지만, 마법에 걸려 호두까기 인형이 된 인형들.
거기다 맨날 전투를 치른다. 서로 죽고, 죽이고.
결코 따뜻할 수가 없는 배경이었다.
메리 볼스카야는 그 본인이 현역시절 의아해했던 부분 중 하나를 그대로 해석해 현실로 끌어와 버린 진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우당탕!
"허억! 헉!"
"크허 억!"
전쟁터가 이럴까. 아님 길고 긴 마라톤을 끝낸 마라토너가 이럴까.
금방이라도 죽을 듯한 사람들의 모습에 진호는 자신이 사고를 쳤다는 걸 깨달았다.
'어, 어쩌지? 이걸 어쩌지?'
짜악! 짝짝짝짝짝!
"응?"
고개를 돌린 진호는 식겁했다. 사납게 빛나는 눈을 한 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메리 볼스카야 때문이었다.
"지노!"
"네, 넵!"
"너 콩쿨에 나가라."
"……넹?"
순간 이해를 못한 진호는 눈을 껌뻑였다.
그 순간.
"안돼-! 내 거야!"
쾅!
문이 거칠게 열리며 등장한 마돈나.
진호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