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1화
1. 무중력
따, 따라라라, 딴, 따다-지독한 가난에 어떤 일이든 해야 했던 주인공이 대극장의 청소부로 취직한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몰랐다.
한 순간도 쉬지 못하고 일만 해야 했던 주인공은 청소부로 취직한 그날, 난생 처음 발레 공연을, 그것도 백조의 호수를 보곤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상체는 너무도 여유롭고 우아하게 움직이지만, 그 발은, 그리고 무대 뒤는 지옥과 다름없는 치열하고 처절한 모습.
주인공은 거기서 동질감을 받았다.
나와 다르지 않구나.
그러자 주인공에게도 처음으로 갈망이 생겼다.
최소한 저 무대 위의 백조들처럼 우아해지고 싶다. 겉으로라도 화려해지고 싶다.
그때부터 주인공은 발레리노의 꿈을 꾸게 된다.
'바로 지금의 나처럼 눈물을 흘리며.'
진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름답다.'
왜 여태까지 이 공연을 보지 못했는지 억울하고, 겨우 아름답다고 밖에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어휘 능력에 화가 났다.
짝짝짝짝짝!
커튼콜에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는 그 순간까지도 진호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우르르르르!
와글와글! 북적북적!
아직은 서늘한 뉴욕의 밤바람을 맞으며 대극장을 빠져나온 진호는 옆에서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는 마돈나를 타오를 듯 뜨거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이래서 예술이라고 불렀군요."
"그래, 맞아. 예술이지. 표현의 예술 "
진호는 동의했다.
그 합이 딱딱 맞는 군무와 일체화된 호흡이 외치는 수 많은 말들.
오데트도 지크프리트 왕자도, 마법사도 모두 몸으로 하고픈 모든 말과 감정을 토해 냈다.
귀를 막고, 코를 막고, 입을 막아도 들리는 그들의 이야기.
그것은 전율이자 공포였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죠? 호흡조차 하나로 들리다니!"
그냥 일체화된 게 아니다.
기계가 아님에도 호흡, 손짓, 발짓 등 모든 게 똑같았다. 아니, 한 사람처럼 하나였다.
"내가 그래서 발레를 그만둔 거야. 아니 도망친 거지."
"……예?"
마스크를 내린 마돈나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진호는 근처에서 파파라치가 느껴졌지만, 그녀의 씁쓸한 눈빛에 입을 열지 않았다.
탁! 치익!
"내가 왜 현대 무용에 빠져들었는지 알아?"
현대 무용.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자유로운 표현……"
"그래. 그것엔 자유가 있었지. 뒷골목 술집의 무대에도, 저녁에만 열리는 클럽에도 자유가 있었어."
그 자유가 전성기의 마돈나를 만들었다.
"하지만 발레는 다르지. 바늘귀만한 좁은 원 위에서 어려운 턴을 했을 때나 겨우 느껴지는 아찔한 성취감. 한계까지 올라간 발끝이 1밀리미터 더 올라갈 때서야 온몸을 관통하는 쾌감."
그때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쉰 마돈나는 진호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넌 지금 그런 걸 배우러 가는 거다, 애송이."
……꿀꺽!
순간 그냥 현대 무용을 익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진호는 웃었다.
"확실히 지독하네요."
"그래, 지독하지."
"하지만."
단호하게 말한 진호는 놀라서 이쪽을 보는 마돈나를 보며 사납게 웃었다.
"모델도 밀리미터의 세계에요. 그리고 난 모델에 입문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밀리미터의 세계에서 살고 있고요. 지금 이 순간에도."
스킬을 얻고 끝낸 게 아니다. 스킬 주인공들이 훗날 어떤 결과를 이룬지 알기에 그리 되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러니 날 폄하하지 마요."
"……푸하하하핫! 끄윽 끅!"
퍼억!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 마돈나의 손바닥이 진호의 등을 강하게 쳤다.
"큽?"
"건방진 놈. 가자."
"……옙! 아,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가요?"
"푸후우. 미시건."
"……네?"
LA에서 뉴욕으로, 뉴욕에서 미시건으로.
"내 진짜 고향으로."
'와-. 오늘 비행기 엄청 타네.'
그래도 스킬의 1차 해금을 해서 다행이었다.
진호는 사라 선셋이 세워 놓은 차에 오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지독히도 좁은 세계라……'
생각만 해도 암울하고 처절하다고 느껴지는 세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전의가 치솟기 시작했다.
그렇게 진호는 미시건의 베이시티로 향했다.
* * *
'분명 그렇게 그 지독히도 좁은 세계를 보란 듯이 통과해 버리겠다고, 날 무시하는 놈들이 있다면 다 눌러 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왔는데 말이야……'
"와아아아아아!"
"꺄르르르르!"
"지노, 지노."
"비켜! 이번엔 내가 지노 무릎에 앉을 거야!"
암울하고 처절하기는 커녕 이것들이 사람인지 비글인지조차 구분이 잘 가지 않을 정도였다.
재잘재잘 너무 떠들어 대서 머리마저 울릴 정도였다.
그래도 분홍 발레복에 하얀 스타킹을 신고 똑같이 머리를 틀어 올린 아이들은 귀여움 그 자체였다.
'그런데 너무 많이 몰렸는데……'
이번 타임에 교습을 받는 원생들이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주위에 몰려 있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때문인가?'
얼굴을 비비적거리거나 코를 킁킁거리다 기분 좋다는 듯 배시시 웃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고, 진호는 될 대로 되라는 듯 그냥 정신을 놓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30대 여성이 바라보며 푸근히 웃었다.
"착한 사람이네요."
"정신이 빠진 머저리가 아니고?"
그녀의 옆에 선 마돈나가 코웃음을 쳤다.
"또 그렇게 마음에 없는 말하신다. 부럽다면 부럽다고 표현하세요."
"……흥."
여성은 고개를 돌리는 마돈나를 온기가 서린 눈으로 바라봤다.
혀를 찬 마돈나는 진호에게로 다가갔다.
"완전 보모군. 발레를 배우러 온게 아니라 보모로 취직하러 온 건가?"
"아, 그게……"
"으! 담배 냄새!"
"할머니, 담배 냄새 나요!"
"웩!"
"나쁜 말하는 마귀할멈!"
마돈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자 하얗게 질린 진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아이들을 다독였다.
"자! 이제 쉬는 시간 끝!"
"에에!"
"더 놀고 싶은데! 나 아직 지노 무릎에 안 앉았는데!"
"안돼. 쉬는 시간은 정확하게 지켜야지! 그렇게 노는 거 좋아하면 돼지 된다?"
"……히잉."
돼지는 어디서나 통하는 만국 공통어 같았다.
아이들이 발레 바로 다가가 쉬는 시간 동안 굳은 몸을 풀자 진호도 아이들의 끝에 서서 몸을 풀었다.
아이들과는 약간 다르게 말이다.
"독특하군."
마돈나는 진호의 스트레칭 자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진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크라브마가, 칼리, 유술, 유도, 킥복싱 등 여러 가지가 짬뽕 됐죠."
정확히는 [스킬: 사상 최강의 제자]의 스트레칭 법이다.
온몸의 모든 근육을 이완시키고 달구어 관절의 행동반경도 더 넓혀 주는 스트레칭 방법.
이걸 모르는 마돈나는 그래도 썩나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다 입술을 비틀었다.
"쪽팔리지는 않아?"
"뭐가요? ……아, 이거요?"
꼬툭튀. 하얀색의 발레 스타킹은 약간 외설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진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티팬티에 셔츠만 입고 런웨이를 걸은 적도 있는데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뭐……"
"……쯧."
"성격이 대체 얼마나 나쁜 겁니까?"
"시끄러. 기본 자세를 제대로 배우기나 해. 오늘 저녁에 확인할 거니까."
"오! 그럼 오늘 저녁엔 마돈나의 스승님을 뵙는 거예요?"
대답 대신 진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 마돈나는 다시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고, 방금 전 마돈나와 대화를 나눴던 여성이 앞으로 나왔다.
짝짝!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몰렸다.
"자,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게! 턴 아웃!"
"턴 아웃!"
아이들과 진호는 복명복창을 하며 양 발뒤꿈치를 서로 붙였다.
'2차 해금 조건. 기본 자세 500번씩 하기……'
마돈나의 말처럼 모든 춤의 근원이라는 듯 스킬 해금 조건이 굉장히 많은 발레 스킬.
'오늘 안에 해치운다.'
당장 내일, 아니 모레부터 면 현실판 아쿠아맨으로 불리기 시작할터였다. 그 열기가 식기 전에 마돈나, 케이지와의 공동 작업을 뉴스로 선보이려면 시간이 굉장히 부족했다.
진호는 이를 악물며 자세를 취해갔다.
* * *
해가 저물어 버린 어두운 밤, 작은 발레 학원이 있는 작은 건물앞에서 정 실장이 담배를 입에 문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당연히 못 가지. 글쎄? 내년까지는……."
저벅저벅저벅.
적막한 거리를 울리는 발 소리에 고개를 돌린 정 실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야야. 끊는다! 오셨습니까, 감독님!"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넌 꼭 거리감 느껴지게 감독님이라고 부르더라? 구호야, 너랑 나랑 그것밖에 안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실장이라고 불러 줘?"
"아하하."
정 실장은 머리를 긁었지만, 말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다미앙 지사 콘텐츠 제작부서의 수장이 바로 앞의 중년인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진호의 이번 도전을 멋지게 찍어 줄 사람이었기에 결코 무례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쪽 분은 누구신…… 응?"
왜인지 익숙하지만, 낯선 실루엣에 모자를 푹 눌러쓴 거구의 덩치를 지닌 사내를 보았던 정 실장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 어? 어어어?"
후덕한 덩치의 사내는 웃음을 흘리며 모자를 벗었고, 정 실장은 입을 떡 벌렸다.
"오랜만이군요, 미스터 정."
"다, 당신은-!"
'조나단 파블로!'
그랬다. 그는 아이언맨과 아메리칸 셰프를 찍은 감독이자, 진호와 약간의 친분이 있는 조나단 파블로였다.
"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모자를 벗은 조나단 파블로가 흰머리를 쓸어 올리며 머쓱 웃었다.
"미스 장이 연락을 주더군요. 그 마돈나와 케이지가 공동 프로듀싱을 하는데, 그 대상이 내가 잘 아는 그 진호 리인데, 그걸 찍어 볼 의향이 없냐고!"
말을 하면서 흥분한 건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 아니, 그래도……!"
급이 맞지 않다. 조나단 파블로는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스타로 취급받는 감독이다. 그런 감독이 진호의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닌가?'
생각해 보면 진호도 꿇릴게 없다.
미국 내에서의 인지도가 떨어질 뿐이지, 세계 최고의 모델이라는 수식어는 어딜 가지 않는다.
"……와. 장경아 그 냉혈마녀가 제대로 사고쳤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정 실장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만약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장영진 감독님을 호출했을 사람이 그 냉혈마녀야.'
생각을 정리한 정 실장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독님."
"올라가죠."
대답을 회피한 조나단 파블로는 계단을 내딛으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진호 리.'
실패한 필모그래피가 단 하나도 없는 완전무결한 외계인.
여기에 더 로드 오브 월 스트리트와 코난 쇼가 얹어졌다. 미국 내에서의 흥행도 보란 듯이 성공시킨 거다.
이 정도면 충분히 진호를 데리고 작품을 찍어도 투자자들이 별말을 하지 않을 상황까지 왔다.
드디어 진호를 처음 만났을 때 다짐했던, 함께 작품을 찍을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마돈나와 케이지가 공동으로 프로듀싱을 한다고?'
무조건 찍어야 했다. 이걸 찍지 않으면 감독이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미안하군요, 게리 씨. 그리고 레이몬드. 진호 리는 내가 먼저 발견했습니다. 당신들이 잘 발굴하고, 잘 키웠으니 이제 내가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서늘하게 웃은 조나단 파블로는 쿵쿵 계단을 올라 이 건물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던 층의 문앞에 섰다.
"과연 어떤 트레이닝을 받고 있을까."
그것도 이미 시건까지 와서 비밀스럽게 말이다.
조나단 파블로는 마치 오래전 헤어진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듯 거세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그 순간.
후욱!
'흡?'
후끈하다 못해 뜨겁다 느껴질 만큼 달아오른 공기. 담배 냄새가 섞여 더 고약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공간의 중앙에서 진호가 턴을 하고 있다.
'발레?'
"……나쁘지 않아. 아니, 마돈나다운 선택이다."
휘릭! 휘릭! 휘릭!
'오호? 제법?'
그런데 웰까. 시선을 떼기가 힘들다.
푸에테. 축다리는 뒤꿈치를 들었다 내리고, 회전다리는 구부려 채찍처럼 감아서 연속으로 도는 턴의 한 종류 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 때문에 진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마돈나와 차갑게 노려보고 있는 60대의 여성을 늦게 발견하게 되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둘의 표정.
왜인지 이 공간에서 저 둘만 무척이나 심각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해 의아해하던 조나단 파블로는 이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본인도 모르게 눈을 비비면서까지 확인하게 되는 모습이었다.
'또, 똑같아!'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단 한 번의 완벽한 턴을 계속 반복해서 재생하는 듯했다.
발끝의 궤적, 손끝의 궤적, 흔들리는 머리카락, 흩날리는 땀방울, 눈의 깜빡임까지 모두 똑같았다.
"프, 프로의 턴은 언제나 똑같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기이하고도 괴이한 광경.
'어?'
그는 다시 몸을 멈췄다.
"그런데…… 지금 몇 바퀴째지?"
……오싸악!
그는 급히 뒤를 향해 손짓했다.
카메라. 카메라가 필요했다.
'찌, 찍어야 해! 어서-!'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