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13화
'난 찔리지 않다! 난 찔리지 않다! 난 찔리지 않……!'
맹렬히 발휘되던 [스킬: 연신연왕]과 [스킬: 유리가면]도 다정한 모습으로 걸어 들어오는 서형과 제니퍼를 보자 그대로 작동을 정지해 버렸다.
살아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스킬의 도움이 무척이나 필요했다.
'……난 찔리지 않드아-! 스킬들아! 도움을 줘-!'
"진호 씨!"
"……."
진호는 격하게 품을 파고드는 서형의 행동에 살짝 놀랐다가 이내 푸근히 웃으며 힘주어 안았다.
그리고 재빨리 제니퍼 로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야, 제니퍼!"
제니퍼 로제는 진호가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진호를 응시했다.
1초가 1년과 같은 시선 교환. 심장이 쪼그라들고, 등골을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제니퍼 로제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 손을 쳐냈다.
짜악!
진호의 품 안에 있던 서형도 깜짝 놀라 제니퍼 로제를 보았다.
"꺼져. LA에서 활동하면서도 여태껏 연락을 한 번도 안 해? 넌 오늘 죽었어."
흠칫!
생각지 못한 반응에 눈알을 굴린 진호가 이내 곧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살려 주세요?"
"……여자친구?"
"응. 이쪽은 이서형, 진지하게 만남을 이어 가는 사람이고. 서형씨? 이쪽은 제니퍼 로제. 알죠?"
고개를 끄덕이며 진호의 품을 빠져나온 이서형이 제니퍼 로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진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초조히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면서 이야기하는 동안 소개를 안 했네요. 진호 씨를 아껴 주신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이서형이에요."
"지노랑 다정한 모습들은 잘 봤어요. 저 제멋대로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어머. 옛날부터 그랬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그게 매력인걸요."
"자, 잠깐?"
"닥쳐. 이런 사람을 두고 1년간 유럽횡단을 떠난 것 자체부터 넌 아웃이야."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정말? 그럴래?"
"둘의 나이가 아마 동갑……"
"닥치라고 했지?"
"조용히 해요."
"……예. 제가 죄인입니다. 죄인이 맞습니다."
둘이 좋은 모습을 보이자 작은 장난을 쳤던 진호는 둘의 합공에 그대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크흠. 그보다 어쩐 일이야?"
진호는 제니퍼 로제를 보며 물었다.
요새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집을 찾아 갈 땐 미리 연락을 하고 간다.
며칠 전에 연락을 할지, 아니면 집앞에서 연락을 할지는 찾아 가는 사람 마음이지만 말이다.
제니퍼 로제의 눈이 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미국에서 눌러앉았는데도 연락이 없기에 화가 나서 찾아 왔는데,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것 같네. 바쁜 널 위한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찾아온 저분과 좋은 시간 보내고, 여유가 되면 연락해. 하지만 그땐 알지?"
제니퍼 로제는 각오하라는 듯 주먹을 들어 올려 흔들었고, 서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가지 마세요. 힘들게 찾아 오셨는데, 같이 놀아요."
"……미안해. 스케줄 도중에 잠깐시간을 내고 온 거라서 말이야."
싱긋 웃은 제니퍼 로제는 나오지 말라고 말하며 쿨하게 몸을 돌렸고, 서형은 진호의 옆구리를 쿡 찔렸다.
진호는 순간 갈등이 일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든 스킬들이 만들어 낸 짐승보다 더 짐승 같은 본능이 강렬하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제니퍼를 따라갔다간 지옥이 펼쳐진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매니저와 함께 왔을 테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안타까워하면서도 꿈틀거리는 그녀의 입술.
"정말 괜찮아요. 그보다 정말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
"……서프라이즈라고 하면 혼낼 거예요?"
"그럼요. 여러 가지로 혼내 줄 거예요."
진호는 슬그미니 서형의 가슴을 쓸어내렸고, 그녀는 눈을 샐쭉 떴다.
"암튼 응큼해!"
"하핫, 가요. 제 가족 같은 스태프들을 소개시켜 줄게요."
"정말요?"
진호는 해맑게 웃는 그녀를 안으로 이끌었다.
한편 저택의 대문을 빠져나온 제니퍼 로제는 저택이 있는 방향을 보며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제니퍼?"
그녀를 내려 주고 떠났다가 갑작스럽게 날아온 문자에 차를 유턴시켜 돌아온 매니저의 부름에 고개를 든 제니퍼 로제는 차에 올랐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무슨 생각인지 무심했다.
"출발해."
매니저는 저택과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얼떨떨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올랐다.
그렇게 그녀는 떠나갔다.
* * *
번쩍.
햇살이 방안을 침범하자마자 눈을 뜬 진호는 재빨리 옆을 살폈다.
마치 눈을 연상시키듯 새하얀 피부를 모두 드러낸 그녀가 진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새근새근 잠자고 있었다.
"그런데 내 건 왜 잡고 있는 건지……"
진호 본인의 소중이를 잡고 있는 보드라운 손.
때문에 소중이가 더욱 성을 내고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진호는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좋았으면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지 여태까지 보다 더 깊게 파고들었던 그녀.
더 세심하고 끈적이게 혀와 입술을 놀리던 그녀는 곰과 씨름을 하는 진호 본인의 체력이 다할 때까지 달려들고 달려들었다.
'…… 역시 들킨 거 맞지?'
그렇지 않고서는 어젯밤 잠자리에서 너무도 격렬하고 끈적했던 그녀의 모습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제니퍼 로제와 서형이 나눴던 짧은 대화도 말이다.
'서형 씨는 결코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제니퍼는 서형 씨를 내 여자친구라고 지칭하지 않았지.'
정확히는 서로를 밀어내고 찍어내려 애썼다.
여자들의 언어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사람의 신체와 표정이 보내는 신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녀들은 표정을 감췄어도 몸의 신호는 감추지 않았다.
'……아, 진짜 돌겠네.'
잔뜩 성이 났던 소중이가 단숨에 고개를 숙일 만큼 심장 떨리는 상황이었다. 한참 동안 이리저리 생각하던 진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침대를 빠져나왔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나도 제니퍼에게 선을 그었으니까.'
다시 고개를 저은 진호는 샤워룸으로 향했다.
격렬했던 어젯밤의 흔적은 서형의 몸뿐만 아니라 진호의 몸에도 가득 남아 있었다.
씻고 나온 그는 다시 침대로 올라와 그녀의 손을 소중이에 올려놓고, 본인의 손은 그녀의 가슴을 그러쥐었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인다.
진호는 그 모습을 보며 꽤나 놀라야 했다.
"LA에 안 와 봤어요?"
"남자친구랑 온 적은 처음이에요."
어쩜 이렇게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지, 진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생겨났다.
"나도 처음이에요."
진호는 기습적으로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맞췄다.
쪽!
화들짝 놀란 그녀가 주위를 둘러봤다.
"누, 누가 봐요."
"연인끼리 애정을 표현하는 건데 보면 어때요."
"그건 그렇지만……"
찰칵찰칵찰칵!
순간 하얗게 질린 그녀가 급히 카메라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진호는 차 뒤에 완벽하게 숨어 있는 아서를 향해 손을 까딱였고, 아서는 재빨리 튀어나왔다.
"힉?"
"아직 개조된 카메라를 받지 못한 거예요, 아서 씨?"
"미국의 배달원들은 무척이나 느립니다, 지노.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가씨. 지노의 전속 파파라치 아서 첸들러입니다."
"저, 전속이요?"
진호는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의 사랑 가득한 모습을 온대중에게 보여 줄 분이에요."
퍽!
그녀의 팔꿈치가 진호의 갈비뼈를 때렸다.
"억?"
"내가 그런 이상하고 느끼한 말하지 말랬죠?"
"그, 그렇다고 갈비뼈 끝을……"
"하하하하핫! 정말 보기 좋은 한 쌍이군요!"
"……휴. 이 못난 사람 따라다니느라 고생하시네요. 이서형이에요."
"소효온 리……"
입안에서 억지로 발음을 굴리던 아서 챈들러가 눈을 빛냈다.
"더 로드 오브 월 스트리트의 스폰서 중 한 곳의 딸이 당신이었군요! 한국의 로열 가문!"
"네?"
서형은 경악했다.
"더 로드 오브 월 스트리트의 메인 스폰서요? 저희 그룹이?"
그녀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녀는 급히 진호를 보았고, 진호는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형의 본가인 한국 재계 서열1위 SJ그룹뿐만이 아니다. 구영재와 구정경의 구성 그룹, LVMH 그룹, 중국 자본 등 진호와 연관이 있는 모든 곳에서 당첨이 확실한 복권을 샀다.
덕분에 제작비가 넘쳐 돌아가다 못해 돈다발을 쌓아 세트를 만들어도 충분할 정도였다.
"어째서?"
'절 사위로 맞이하고 싶다는 뜻이겠죠.'
SJ그룹 관계자가 투자를 한 이후 진호에게 티타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보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말과 행동을 보였다.
'예비 오너 일가를 향한 두려움과 욕심.'
그러나 이건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형의 성격이라면, 이 말을 듣는 즉시 진호 본인과 인연을 끊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릴 터였다.
이서형은 그만큼 프라이드가 강한 여성이었다.
"빚을 갚는다고 하더라고요."
"빚이요?"
미간을 좁히던 그녀는 순간 진호의 중국 삼촌인 중국 중앙서기처1서기 양양을 떠올리고는 하얗게 질렸다.
청와대에서의 만남 후 SJ그룹에 중국발 호재가 제법 있었다.
"서, 설마?"
"뭐가 설마 예요? 별 당신이요. 별에서 찾아온 당신."
"……아! 아아!"
진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별에서 찾아온 당신 때, 구정경의 구성건설뿐만 아니라 그의 지인들회사까지 스폰서로 붙었다.
그중 SJ그룹도 있었다.
이후 코리안 셰프 때에도 와가 투자를 했는데, 메인 투자자인 구성건설보다는 못해도 중국에서 제법 재미를 보았다.
즉, 이서형과 경영권에서 멀리 떨어진 호텔이나 백화점 등의 계열사를 맡고 있는 그녀의 가족을 제외하면 SJ그룹은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스킬: 코딩의 신]과 [스킬: 블랙펄의 선장]의 조합에 10년이라는 시간이 보태진다면 SJ그룹, 아니시가 총액 세계 1위의 기업이라도 집어삼킬 수 있기에 별 감흥이 없었다.
[스킬: 블랙 펄의 선장]은 파도를 예측하고 조종하는 능력이다.
파도를 뒤흔드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음? 그런데 제가 그곳 사람인지는……."
"풉!"
진호는 순간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고, 이서형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서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보았다.
"몰랐어요? 서형 씨의 비밀은 이미 밝혀졌어요. 지니어스 소속 네티즌 수사대가 이미 밝혀냈거든요."
"……에?"
순간 멍해진 그녀는 입을 떡 벌렸다.
"에에엑?"
진호는 새된 소리를 내뱉은 그녀를 보며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그녀가 혹여 부담스러워할까 언급을 자제한 것뿐이지.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그녀의 정체가 별 볼 일 없었다면 억지로 레벨을 끌어올려 진호 본인과 대등하게 만들려고도 했다.
중국의 큰손 팬들은 그만큼 새침데기 시누이들이었다.
지이잉!
"응?"
진호는 생각지 못한 발신자에 의아해하면서도 전화를 받았다.
"잠시만요. 예, 이모."
한인 회장 사모님이었다.
어제 호칭을 정리했다.
서형과 아서가 의아해하며 진호를 보았다.
-바쁜 거 아니지?
"당연히 바쁘죠. 한국에서 힘겹게 날아온 사랑스런 여자친구와 데이트 중이에요."
-어머머. 그러면 내가 눈치 없이 전화한 거네.
"네, 그렇죠. 다음에 뵐 때 제가 몇 초 동안 말이 없어도 이해해주셔야 해요?"
-호호호호호호!
"흐흐흐. 무슨 일이세요?"
-응, 아냐. 시간 되면 올 수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던 거야. 한인 청년회에서 한 달마다 학교 빌려서 운동회 비슷한 걸 열거든.
"억! 그런 거라면 미리 말해 주시죠. 그러면 어제 스케줄을 오늘로 잡았을 텐데!"
-어르신들은 한 번이라도 더 집밖에 나오시는 게 좋잖아.
"아……"
그녀의 마음씀씀이가 얼마나 큰지, 그녀가 왜 한인 회장 사모님인지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아닌 게 아니긴……'
아니라면서 다 말해 버린 그녀의 화술에 피식 웃은 진호는 '이모'란 단어에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서형을 보았다.
"LA 한인 청년회에서 운동회 같은 걸 여나 봐요. 구경하러 갈래요?"
"네! 갈래요!"
진호는 활짝 웃었다.
* * *
"달려! 패스!"
"막아!"
생각 외로 뜨거운 열기.
2세대 이민자들이 점점 하늘로 가면서 모임이 줄어들었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함성과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음 종목은 야구인지 한쪽에선 캐치볼과 몸 풀기가 한창이었고, 그 다음은 미식축구인지 장비를 챙겨 입은 이들이 보였다.
'운동회가 아니라 운동회 비슷한 거라고 말한 이유가 있네.'
운동회의 꽃인 이어달리기나 줄다리기에 쓸 물건들이 보이지 않았다. 조기 축구처럼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한 달에 한 번씩 대회를 여는 것이었다.
"와! 와아!"
"그렇게 신기해요?"
"신기한 게 아니라 재밌는 거예요! 이런 곳에 오면 원래 이렇게 즐거워지는 거잖아요! 아, 맥주랑 치킨 안 파나?"
"……푸하하하하핫!"
"호호호! 활발한 아가씨네요."
"그렇죠?"
어느새 다가온 한인 회장 사모님의 말에 이서형은 화들짝 놀랐고, 진호는 미소를 지었다.
"인사해요, 서형 씨. 이쪽은……"
그때였다.
'응?'
"악! 피해요!"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비명같은 외침.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정 이상의 속도를 벗어난 무언가가 빠르게 [스킬: 사상 최강의 제자]와 [스킬: 갓 오브 워]의 제공권을 파고 드는 게, 그것도 서형을 항하는 게 느껴지자 진호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뻑!
무언가 박살이 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솟구치는 타원형의 물체. 터질 듯한 손바닥의 아픔을 무시한 채 떨어지는 그 물체를 손을 뻗어 잡은 진호는 순간 멍해졌다.
타원형이면서 갈색인 공.
"잉?"
미식축구에 쓰이는 공이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