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9화
총 리딩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것이 첫 번째 라면 더더욱 그렇다.
배우들이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 보는 자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실수를 해 분량이 줄어들고, 반대로 누군가는 감독의 눈에 들어 분량이 늘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분량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는 전쟁터.
그렇기에 사람들의 신경은 무척이나 예민할 수밖에 없고, 배역에 더 과하게 몰입하게 된다.
아주 가끔 씩이긴 하나, 심약한 신인이 울며 도망치는 해프닝이 괜히 벌어지는 게 아니다.
이것은 중견 배우 커프 서덜랜드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저도 모르게 한쪽을 향해 곁눈질하는 자신의 눈 때문에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완전히 몰입을 한 상태였는데도 눈이 주인의 의지를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흠."
같은 남자가 보아도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미모와 귓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한 미성.
왜 그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모델 1위'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 인지 단숨에 이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시선이 사로잡히는 건 아니다.
그를 보고 있자면 왜인지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이완되어 버린다.
칼끝을 가져다 대면 툭 끊겨 버릴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이 느슨해지고, 존 리의 유쾌한 말을 듣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나와 버리고 만다.
"존-!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예써! 보스! 무슨 일이십니까!"
"풋."
"하핫!"
"푸푸푸."
한껏 화가 난 진호의 보스, 마크 프리먼조차 웃음이 터져 버리는 걸 본, 차가운 지성을 연기해야 하는 에밀리아 클록도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본 커프 서덜랜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모두가 진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늪이었군.'
한 번 발이 빠진 존재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늪.
그런데 진호는 그 발조차 강제적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버린다.
'단순히 당당한 저 모습 때문일까?'
아니다.
"젝트를 테마주 삼아 자료를 뽑아 와 봐."
"와우! 드디어 보스가 내게 일다운 일을 시켜 줄 줄이야! 알겠습니다, 보스!"
"존 리. 본인의 자리로 향한다."
계속 허드렛일만 시키는 보스를 향한 작고 귀여운 반항을 한 진호의 목에서 목뼈가 뒤틀리는 작은 소리가 리딩장을 울리자 풀어졌던 공기가 삽시간에 서늘해진다.
마치 칼날이 목 앞에 드리워진 것처럼 섬뜩하기까지 하다.
커프 서덜랜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모두 갑작스럽게 변한 진호의 분위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젝트를 테마주로 삼는다라……. 일단 젝트보다는 젝트의 사업 아이템과 연관된 정치인부터 찾아야겠군."
타다다다다다!
테이블 위로 올린 진호의 열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커프 서덜랜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존 리가 저런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
극 중 무겁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풀어 헤쳐 버리는 분위기 메이커 존 리.
'실수일까?'
젝트의 사업 아이템과 연관된 정치인을 찾는다는 부분도 그렇다.
이는 대본에도 나와 있지 않은 진호만의 애드리브였다.
'음.'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감독인 레이몬드 재커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진호 리, 아니 존 리의 설정이 많이 바뀌겠군.'
흥미가 가득 담겨 있는 감독의 눈.
커프 서덜랜드는 이번엔 주연들을 살폈다.
그들도 감독의 반응을 살핀 것인지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호가 반전매력을 선보이면서 주연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주연에게 보장된 분량과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잘라먹어 버린 것이었다.
커프 서덜랜드는 입가를 비틀었다.
"이거…… 나도 각오해야겠군."
몰입을 한층 더 끌어 올린 그는 본인의 차례가 되자 리딩장을 잡아먹을 듯 말을 씹어 뱉어 냈다.
"후우. 수고하셨습니다."
레이몬드가 나지막하게 읊조리자, 리딩 후 주식 강의까지 들으며 잔뜩 지쳐 있던 배우들이 한숨을 내쉬며 박수를 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으!"
짝짝짝짝짝!
모두가 서로 수고 했다는 의미의 박수.
대본과 주식 자료들을 챙긴 그들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며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자료를 챙기고 있는 진호에게 힐끔 시선을 준, 진호가 배우인 줄 몰랐던 대부분의 배우들은 말없이 총 리딩장을 떠났다.
모델로만 생각했던 그가 이렇게까지 퀄리티 높은 연기를 펼칠 줄 몰라서 충격을 받은 탓이다.
그런 그들의 마음이 모두 전해져왔지만, 진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욕심이 좀 많아요. 미리 미안하다고 사과할게요.'
배우들 간의 조화도 조화지만, 시청자들에게 오직 진호 본인만이 각인됐으면 하는 욕망.
조용히 입술을 비틀던 진호는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을 발견하곤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푸핫! 한 방 맞았습니다, 리. 앞으로 잘 해 보죠."
"네, 잘 해 봐요. 서로 부서는 다르지만!"
"와우, 리. 연기자였어요? 우리 잘 해 봐요."
마크 프리먼과 커프 서덜랜드, 에밀리아 콜록의 진심 어린 칭찬에 진호는 환하게 웃었다.
"옙!"
'인정받았다-!'
그렇게 그들과 악수를 나눈 후 돌아선 진호는 고개를 털었다.
"푸후우."
"왜? 무슨 일 있었어? 배우들이 나오면서 너 욕하는 것 같던데?"
리딩장을 나서자 급히 다가온 정실장의 걱정에 그랬냐는 듯 피식 웃은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저…… 좀 빡셌어요."
"그래?"
정 실장은 꽤나 놀랐다. 진호가 리딩에서 앓는 소리를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할리우드랄까……"
'내가 그들의 영역을 침범한 걸 바로 눈치했어.'
그리고 바로 대응해 왔다. 마치 본 촬영을 하듯 완전히 몰입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 때문에 촬영장의 분위기는 더욱 치열하고 날카로워졌고, 어린 조연들은 갑자기 변해 버린 분위기에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나도 꽤 난처해져 버리고 말았지.'
너무도 뜨거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감이 폭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걸 다스리며 연기를 해야 했기에 아주 죽을 맛이었다.
"재밌네요. 할리우드."
"야, 그냥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너 욕하는 애들 완전히 칼을 갈 것 같더라."
진호는 다시 실소를 터트렸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나도 전력의 70퍼센트 정도만 내보였을 뿐이니까."
"뭐?"
진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후."
어두운 방. 스탠드 불빛만이 켜진 책상에 앉은 레이몬드가 눈가를 매만졌다.
오늘의 리딩은 그에게 제법 충격을 주었다.
정확히는 진호가 그랬다.
할리우드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동양인 배우를 쓰는 건 굉장한 모험이다. 미국에서 자라 배우가 된 동양인이 아니라, 동양에서 불러온 동양인 배우는 언제나 연기가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발음, 발성 그 모든 게 할리우드가 요구하는 것과 맞지 않는다.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연기력을 인정받은 동양 배우가 있긴 하지만, 그 수는 결코 많지 않았다.
'타국어로 하는 연기는 한계가 명확하지. 모국어로 연기를 할 때와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진호는 그들과 달랐다. 마치 진짜 월 스트리트의 증권맨인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마트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연들 중 오직 진호만이 정말 배역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테마주를 정치인과 연관하여 조사한다고 했을 때를 비롯하여 그가 본인 나름의 애드리브를 끼워넣을 때의 모습은, 이 드라마의 자문인 잭 월슨이 화들짝 놀라며 감탄할 만큼 완벽한 증권맨이었다.
진호와 주연들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그곳이 총 리딩장인지, 월 스트리트의 증권회사 사무실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그래서 더 골치가 아팠다.
"개리 씨가 정말 귀찮은 놈을 던져 주었어……"
'영어 발음이라도 우스웠다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텐데……'
피식!
"내가 방금 무슨 헛소리를 한 거지?"
연기력이 좋은 배우는 감독에게 있어 축복이나 다름없다.
그 축복을 어떻게 이용할지는 감독의 역량에 달려 있지만, 솔직히 이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있었다.
"유쾌한 사회 초년생 존 리……. 유쾌한 괴물 존 리……"
한쪽은 레이몬드 그 자신이 극의 환기를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고, 다른 쪽은 진호가 만들어 버린 캐릭터였다.
그런데 문제는 진호가 만든 캐릭터가 무척이나 욕심이 난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주연들 간의 뻔한 경쟁을 어디로 튈지 모르게 만들어버리는 장치.
그런데 여기서 더 문제는 그렇게 되면 안 그래도 그 규격 외의 외모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 잡을 진호가 더 두드러지게 된다는 점이었다.
그는 갈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톡-. 톡-. 톡-!
"역시 어쩔 수 없나?"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달칵!
-네, 감독님. 지금 음향 감독을 졸라 OST를 재촉하고 있고, 공모도 하고…….
"그게 아니야."
-그럼?
"존 리의 캐릭터 설정을 바꿔야 하니까 작가들을 모두 불러 모아. 오늘부터 철야다."
-……예?
해명도 없이 전화를 끊은 레이몬드는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부디 내 이 선택이 올바르기를."
레이몬드는 조용히 신께 빌었다.
* * *
둥, 퍽, 타다닷! 퉁, 퍽, 타다닷!
"에이 씨, 진짜!"
6평이나 될 법한 작은 방. 창문으로 쏟아지는 LA의 햇볕을 피해 잠을 자려고 노력했던 정 실장은 결국 벌떡 일어나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는 좁은 거실 소파에 앉아 공을 던지는 진호와 그걸 쫒는 까망이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잠 좀 자자, 잠 좀 자! 지금 몇신데…… 어? 10시네?"
아침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 매니저로서 실격이었다.
눈을 데굴 굴렸던 정 실장은 이내 가슴을 폈다. 어제도 새벽 4시까지 화보 촬영을 하다 늦은 시각에 잠든 탓이다.
벌써 며칠째 인지 모를 강행군이었다.
진호는 그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수정된 대본이 날아와서요."
"……뭐? 대본이 수정됐다고?"
순간 총 리딩 때 진호를 욕하던 이들을 떠올리며 나쁜 생각을 한 정 실장은 하얗게 질려 날 듯 진호에게 다가갔다.
진호는 그런 그에게 수정된 대본을 보여 주었다.
"……어라?"
한참을 읽던 정 실장이 의아해하자, 진호는 이보다 밝을 수 없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짜잔! 제가 이제 서브급, 아니이 드라마의 키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원하는 그대로였다.
유쾌한 괴물 존 리.
처음에는 주연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중반이 넘어갈수록 진호의 비중이 높아진다.
"우왁! 이게 뭐야! 거기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인마-!"
거친 말을 내뱉으면서도 정 실장은 진호를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컁! 컁컁!"
까망이도 폴짝폴짝 뛰며 같이 어울렸다.
"이,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회사에 전화를!"
"제가 했어요."
"……에구, 미안하다. 내가 너무 게을렀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실장님이 저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지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저도 아는데요. 어제도 2시간 동안 영어랑 주식 공부하셨죠?"
"어……. 들켰냐?"
그랬다. 정 실장은 오직 진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진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는 그를 보며 흐뭇이 웃었다.
"아하하."
더 머쓱해진 정 실장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래, 맞아! 네 배역도 이렇게 중요하게 됐으니까 집을 옮기는게 어떠냐? 이런 작은 아파트 말고 대저택으로!"
"잉?"
"솔직히 네 레벨에 이런 작은 아파트가 말이 되냐? 그것도 1층이잖아! 저택이 싫다면 뉴욕에서 살았던 펜트하우스 같은 곳으로 가자!"
"흠……"
곰곰이 생각하던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 작은 아파트를 구했던 것도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 굶주려 보기 위해서였다.
"뭐, 그렇게 하죠. 어차피 활동을 시작하면 이렇게 보안이 취약한 곳에선 머물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 너 이제부터 미국에서 활동해야 하는데 음악이나 미술작업을 하려면 아무래도 그런 대저택이 좋지. 까망이 산책도 시킬수 있고. 리트리버 종의 개들 활동량이 엄청 나잖아."
"좋은 지적임돠. 그건 회사를 통해 최대한 빨리 알아봐 주시고……"
"응?"
"우선 이것 좀 들어 봐 주실래요?"
진호는 노트북에서 파일을 열었다.
"이건 뭐냐?"
"제 드라마가 OST 공모를 열었더라고요."
"엉? ……잠깐, 너 설마?"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제는 끌어모을 수 있을 때 끌어 모아야죠."
'그리고 모든 이슈를 내 걸로 빨아들여야지. 한 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늪처럼!'
진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