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5화
2. 인생은 파도다.
12층의 사무실 앞. 직원을 나타내는 ID카드가 아니면 결코 열리지 않는 전자 유리문 앞에 이 빌딩 내 모든 청소부들을 관리하는 매니저와 진호가 서 있다.
"월 스트리트에는 거리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라도 함부로 치우면 안 된다는 말이 있어, 지노."
매니저의 진지한 말에 진호의 낯빛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오늘은 진호가 드디어 사무실의 쓰레기를 치우게 된 날이기 때문이다.
청소부들 가운데서도 연차가 오래된 고참 청소부만 들락거릴 수 있는 월 스트리트의 증권 사무실.
알렉스 최의 배려로 인해 들어가게 된 만큼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아, 들어본 것 같아요."
"다행이네. 아무튼 모든 종이는 직원들이 집적 파쇄하고, 쓰레기도 몇 번의 확인 끝에 쓰레기통에 버려. 우리 청소부는 일정 시간마다 그 쓰레기를 치우기만 하면 돼. 우리는 딱 그것만 들고 나오는 거야. 알았지?"
"그 외의 것을 건드리게 되면요?"
"스파이로 몰릴 수 있어. 그러니까 절대 다른 건 건드리면 안 되고, 정해진 시간 외에 이 문 안을 들어가서도 안돼."
"으아……."
너무 빡빡하다며 몸을 떤 진호는 이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 이거 꿀이네요?"
"꿀?"
진호는 꿀이 담고 있는 뜻을 말해 주었고, 매니저는 순간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푸핫! 흡! 큼큼큼. 그렇지. 꿀이지."
결국 참지 못하고 윙크를 한 매니저는 다시 낯빛을 굳혔다.
"아무튼 절대 안에 들어가서는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해. 그렇게만 하면 정말 꿀일 거야. 할 수 있지?"
진호는 대답 대신 목에 걸어 놓은 헤드셋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매니저는 ID카드를 내밀었다.
"자, 다녀와."
"다녀오겠습니다."
띠이! 스르릉!
보안 기기의 표시등이 녹색으로 바뀌며 유리문이 열리자, 헤드셋을 쓴 진호는 쓰레기 수거함을 밀며 안으로 진입했다.
"거기 인턴! 빌커먼 시멘트 자료 좀 찾아 와!"
"아니, 또 왜 유가가 이렇게 빠지는 거야!"
"아, 그래요? 정보 감사합니다! 과장님! 한국의……"
"과장님, 결재 부탁드립니다!"
"고객님? 고객님! 하아. 씨발."
"뭐야, 무슨 일인데?"
'와우.'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영화에서 본 뉴욕 증권 거래소처럼 모두가 전화기를 든 채 목이 터져라 외치고, 컴퓨터 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신들린 듯 키보드와 마우스를 두드리고 있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서는 10대의 TV가 각기 다른 뉴스를 토해 내고 있었다.
'이게 진짜 펀드 매니저들의 모습…….'
너무 열정적이라서 단번에 반해버릴 것 같다.
감성이 폭발하며 작곡, 예술 관련 스킬들이 저마다의 영감을 쏟아냈다.
진호는 그 휘몰아치는 전율에 주먹을 꽉 쥐며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후우. 서형 씨도 이렇게 일하려나?'
확실히 알렉스 최가 경계하는 이유가 있었다.
가만히 20초만 듣고 있었는데, 온갖 정보들이 난무하고 있다.
개미들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또 안다고 해도 몇 박자는 늦을 양질의 정보들.
'이러니 개미는 언제나 손해를 보는 거지.'
개미가 알고 달려들 때쯤이면, 이들은 이미 재미를 듬뿍 보는 중이거나 손을 털고 나간 뒤일 테니 말이다.
혀를 내두른 진호는 고개를 숙이며 쓰레기 수거함을 밀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덕분에 더 디테일해졌어요.'
존 리를, 나아가 사무실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가 명확하게 그려지고 있다.
타오를 듯 뜨겁게, 누군가는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을 손에 움켜쥐고 흔들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 힘에 취해서는 결코 안돼.'
아무리 똑똑 하다고 해도 사회 초년생이다.
범람하는 양질의 정보에 내가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게 될 테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다른 인턴들은 그래도 난 절대 그러면 안돼. 그게 임팩트를 주는 길이야. 약간 4차원적으로 표현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직장에서는 어이없을 만큼 당당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부담감에 짓눌리거나 미친 듯 공부하는 그런 모습도 괜찮을 것 같다. 존리가 마냥 철없는 애송이가 아니라는 걸 표현하는 데에는 말이다.
'그리고 결국 정상이라는 이상향에 다가가야지. 나 역시 최고가 되고 싶어서 입사한 거니까.'
그렇게 한 차례 캐릭터를 재정립한 진호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텅텅! 쑤욱! 풀썩!
대용량 까만 봉지에 가득 담긴 파쇄용지를 집어넣고, 구겨진 햄버거 포장지나 일회용 커피 컵 등일반 쓰레기를 수거한 진호는 어떤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가 재빨리 원상태로 복구시켰다.
찰리 스미스, 그녀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당황과 혼란의 잔재가 남아 있는 그녀의 눈동자.
'비밀을 지켜 준다 해 놓고! 너무 티 나잖아!'
찰리 스미스 차장은 같이 찍은 사진 한 장과 사인에 비밀을 지켜 준다고 맹세했다.
"차장님?"
"아, 응. 무슨 일이지?"
'휴-.'
그녀의 관심이 돌려지자 진호는 더 속도를 높여 움직여 탕비실의 쓰레기까지 수거한 뒤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푸후우."
"어디 봐? 개인용 쓰레기통은 수거하지 않았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그레이트! 수고 했어! 자, 그럼 다음 층으로 가자고!"
"옙!"
그렇게 매니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른 진호는 방금 전 찰리 스미스를 떠올리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데 차장급 펀드 매니저가 그렇게 영향력이 있는 건가?'
그녀가 입은 옷은 분명 프라다의 한정판이었다.
프라다의 수석 디자이너가 딱 10벌만 만들어 VVIP에게만 선보인 특별한정판.
가격도 가격이지만, 사회적으로 웬만한 영향력이 없는 이상 결코 구매할 수 없는 성질의 상품이었다.
시계는 아 랑게 운트 죄네. 가격이 인계를 벗어나 신계에서 노는 시계 브랜드 중 하나다.
'흐음……? 뭐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진호의 머릿속에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너무 미심쩍지만,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 * *
달칵.
우울함의 스위치가 켜지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2차 해금했네.'
"……어흑!"
눈물이 앞을 가렸다.
3차 해금을 하기 전까지 수익이 있으면 안 되기에 주식에 투자한 모든 자본을 수거한 진호는 홀쭉해져 버린 잔액을 보며 마른세수를 하였다.
각오에 각오를 다졌지만, 막상 결과물을 보니 부정맥이 온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에휴. 또 손해 봤어?"
진호가 주식을 한다는 걸, 그것도 매일 손해를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청소팀의 직원들이 진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제 안 할 거예요."
'3차 해금을 할 때까지!'
"그래, 잘 생각했어. 주식은 확실한 정보가 있다고 해도 하는 거 아냐."
"안전한 부동산…… 아니, 요새는 부동산도 언제 꺼질지 모르는 거품이 껴 있지."
"빌어먹을, 대공황. 안전하게 자산을 늘릴 방법이 없어."
"리먼 브라더스 새끼들은 정말 죽어야 해. 부모님이 그것 때문에 퇴직 연금을 넣지 않는 거잖아!"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을는다는 말처럼, 일개 청소부들마저도 경제를 바라보는 눈이 매섭다.
'헐. 이건 또 새로운데? 건의해 봐야겠다.'
막간의 재미 혹은 개그 포인트가 되어 줄 수 있을 듯싶었다.
"그래서 내일부터 이틀 동안 휴일인데, 지노 너는 뭐 할 거야?"
증시가 휴장하는 게 아니라 주말이라서 청소 팀이 쉬는 것뿐이다.
복지가 꽤나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화보를 찍으려나?"
"아뇨? 낚시 갈 거예요."
'3차 해금과 4차 해금을 위해.'
"낚시? 이 겨울에?"
"아, 이분들이 겨울 낚시의 참맛을 모르네."
얼어붙을 듯 추운 날씨에 낚싯대를 잡고 있다가 월척을 낚아서 만든 얼큰한 매운탕 국물 한 입 호로록.
뜨끈하다 못해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배를 데우는 그 짜릿함은 겪어 본 사람만 아는 일이다.
'나도 정문 족장님 때문에 알게 된 거지만!'
거제도 앞바다에서 한 겨울 낚시는 평생 잊을 수 없을 터였다.
"응? 겨울 낚시가 재밌다고?"
진호는 의아해하는 그들을, 무지 몽매한 중생을 바라보는 부처님처럼 바라보았다.
"혹시 20만 원, 아니 200달러짜리 라면이라고 들어는 보셨어요?"
진호의 입가에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 * *
200달러 라면은 아주 달콤한 악마의 유혹이었지만, 고작 라면을 위해 이 추운 날 겨울 바다에 나갈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쳇. 인생 최고의 라면을 끓여 줄수 있는데."
부우웅! 철썩철썩!
파도가 치는 뉴욕 앞바다를 빠져나가는 요트 위, 진호가 오지 않는 동료들을 떠올리며 아쉬워하고 있다.
'그래도 3차 해금은 했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가 3차 해금 조건이다.
"떠그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져서 이 한겨울의 뉴욕 바다에, 그것도 이렇게 험한 날씨의 바다에 온 거냐……"
온몸을 구스다운으로 무장한 채 바들바들 떨며 심란하게 중얼거리는 정 실장.
진호는 그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20만원, 아니 30만 원짜리 라면을 위해?"
진호는 옆에 놓인 아이스박스를 툭쳤다.
전복, 굴, 킹크랩, 새우, 랍스터등 온갖 해물이 들어가 있는 아이스박스.
"그리고 바다가 그렇게 험한 게 아니구만, 엄살은……"
"뭐가 험하지 않아! 오늘 파도가 몇 미터인지 알아? 2미터야! 이런 신선놀음도 파도가 잔잔해야……웩!"
슬그미니 옆으로 피한 진호는 파도가 크게 치는 바다를 고요히 바라보고 있는 월터를 보며 눈을 빛냈다.
"월터는 괜찮아요?"
"이 정도야 뭐. 알래스카에서 알몸으로 훈련받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군을 제대하고 나서 다인코프에 들어가기 전엔 알레스카 대게잡이 어선도 타 봤지."
"와……"
인간인가 하는 의문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쳇. 철원도 더럽게 추운데."
'아, 정 실장님은 철원에서 군 생활을 하셨다고 했지?'
진호는 살포시 웃었다.
정 실장은 술만 마시면 그 이야기를 하며 자랑스러워 하는데, 드디어 임자를 만난 것 같았다.
'철원이나 알래스카나 평범한 인간은 버틸 수 없는 환경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알래스카가 스케일이 크지.'
"그런데 정말 방송할 거야?"
"네? 예, 뭐. 팬들과 소통한 지 오래됐기도 하고요. 오늘은 저기 뉴욕을 비춘다고 해도 괜찮아요.
잠깐 놀러 온 걸로 말할 거니까!"
"아, 그래? 그럼 걱정 없이 찍어도 되겠네! 나만 믿어!"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요트를 운전하고 있는 선장에게 다가갔다.
"선장님, 뉴욕 앞바다에선 뭐가 많이 잡혀요?"
"이 겨울에는 고등어와 오징어가 잘 올라옵니다, 지노."
진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고등어! 오징어! 그것들 바로 회쳐 먹으면 맛있는데!"
"숙성시키는 게 아니라요? 아, 흠.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잡은 즉시 회를 떠서 먹는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군요."
"숙성 회도 맛있는데, 활어 회는 그냥 죽이죠. 팔딱팔딱 뛰는 걸 그대로 회 쳐서 초장에 푹 찍어 폭탄주 한 잔과 크-! 거기에 뜨끈한 국물로 입가심을 하면 크아아-!"
"……꿀꺽. 내가 뱃 사람들만 아는 포인트로 데려가죠!"
"어이쿠, 선장님도 초장 맛을 아시는구나! 사랑합니다!"
머리위로 하트를 그리고 돌아선 진호는 높이 치는 파도를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운이 좋았어.'
높이 2미터의 파도. 조금 큰 게 아닌가 싶지만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았다. 파도가 치는 바다가 아닌 이상4차 해금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포인트에 가서 낚싯대만 담그면 되려나?'
4차 해금 조건은 파도치는 바다위에서 3시간 동안 낚시하기.
이 해금 조건이 풀린 순간, 주인공은 주가의 파도를 보게 되는 예지에 가까운 직감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화려하게 월 스트리트로 복귀한다.
"다 왔습니다!"
"넵!"
빠르게 채비를 끝낸 진호는 정실장을 바라봤고, 정 실장은 재빨리 인터넷 방송 장비를 들었다.
핸드폰을 본 진호는 방송이 켜지자마자 들어오는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하-!"
지니어스 하이. 방송 시작 및 4차 해금 조건의 해금 시작이었다.
[스킬: 블랙 펄의 선장]
[인생의 파도의 연속이고, 그 파도 속을 헤쳐 나가는 삶이란 배의 키를 잡은 건 너 자신이다. 태풍을 두려워하지 마라. 표류하는 걸 두려워 마라. 약탈당하는 걸 두려워마라. 키에서 손을 놓지 않으면 결국 목적지에 도달한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