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4화
오디션이 모두 끝났다.
누군가는 웃으며, 누군가는 낙담을 하며 사무실로 꾸민 오디션장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모두 빠져나가자 감독인 레이몬드 재커는 방금까지 배우들을 테스트했던 스태프들을 모았다.
"와, 다들 연기력 좋던데?"
"그만한 투자를 해서 걸러 냈는데 당연히 좋아야지. 난 빌 케이머, 개 목소리 귀엽더라. 목소리를 딸 만한 맛이 있을 것 같아."
여태껏 연기를 하는 배우를 찍은 적은 많아도 배우가 돼서 연기를 한 적은 처음이었던 스태프들은 흥분해서 떠들었다.
피식 웃으며 커피를 입가에 가져가던 레이몬드 재커는 그런 그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한 명의 배우가 그들의 대화속에 등장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진호 리는?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군."
"……."
스태프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레이몬드는 살짝 당황했다.
"지노 리야, 뭐…"
스태프들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서 뭐해요. 존 리, 그 자체였는데."
"옷차림까지 캐릭터를 완전히 이해했죠."
"인턴 역할들 중 지노 리만 유일하게 고급스런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잖아요."
"응! 좋은 대학 졸업한 애들 다그런다고 했잖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경례하는 거 봤어? 와, 나 그때 웃음 터질 뻔했잖아. 정말 사랑스럽더라."
"응. 응. 주연들은 긴장해야겠더라! 그가 등장하는 신에서는 그 어떤 배우라도 잡아먹힐 테니까!"
레이몬드는 화산이 폭발하듯 떠드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과 생각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랬지. 진호 리만이 오직 캐릭터를 완벽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소화했지.'
솔직히 얼굴만 보지 않았다면, 월스트리트의 펀드매니저라고 오해할 정도로 작은 손짓 하나까지 일반인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러면 존 리는 정해진 거로군."
"네."
"정말 찍을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지노 리를 발탁하지 않는다면 파업할지도 몰라요?"
"으랏차! 존 리 확정-!"
"소문을 들어 보니 지노 리는 매번 촬영장에 직접 만든 간식을 가져와서 나눠 준대."
"오, 정말?"
다시 중구난방 떠드는 그들의 모습에 다시 실소를 터트린 레이몬드는 입을 열었다.
"그럼 한 명은 정해졌고……"
쏴아아아아!
"어? 비 온다!"
"……FUCK! 소품 빼야 하는데!"
"이런. 소나기이기만을 빌어야 하나?"
밖을 본 레이몬드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 *
만족스럽게 오디션을 마쳤지만, 진호는 바로 한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날 바로 합격 통지 문자가 날아와서 그런 게 아니었다.
-있긴 있지.
"그래요?"
진호의 얼굴이 순간 확 밝아졌다.
-당연하지. 한국대가 어떤 대학교인데, 월 스트리트에 경영학과를 졸업한 선배 한 분 안 계시겠냐.
"아싸!"
-갑자기 그건 왜? 그 선배님들에게 자문이라도 구하게? 그런데 너이미 네가 만든 시스템 트레이딩으로 어느 정도 수익을 내고 있다며.
"아뇨? 월 스트리트에 입사할 추전장 좀 받을 수 있을까 하고요. 한 달짜리 단기 계약직이라도 상관없으니까!"
구영재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 뭐?
"월 스트리트에 입사하고 싶다고요. 단기 계약직, 아니 청소부라도 좋으니까!"
'스킬을 얻기 위해!'
그랬다. 진호가 한국에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이번에 얻고자 하는 스킬을 해금하기 위해서는 월 스트리트의 투자사에 '입사'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만약 오디션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구태여 이 스킬에 연연하지 않고, 차라리 오직 LA에서만 얻을 수 있는 스킬을 얻기 위해 움직였을 터였다.
그러나 오디션에 합격한 이상, 진호는 월 스트리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스킬을 얻기로 했다. 이 스킬이 이번에 연기하게 된 배역을 소화하는데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한 것이다.
'어떻게든 입사만 하면 돼. 시간은 충분하니까 느긋하게 움직여도 괜찮아.'
보통 배우가 모두 섭외되고 크랭크 인을 하는 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3개월 정도다.
첫 리딩도 약 한 달 정도 걸린다.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돌았냐?
"멀쩡한데요?"
-대가리가 멀쩡한 놈이 그런 생각…… 아니, 넌 원래 그런 놈이었지. 하아.
"흐흐흐. 이번에 맡은 배역의 디테일을 위해섭니다. 협조해 주세요."
-미친 놈.
진호는 다시 웃음을 흘렸다.
디테일도 디테일이지만, 이 스킬은 경영이나 기획 분야에 굉장한 도움을 준다. 팀 다미앙이 다미앙지사로 승격되면서 진호 본인도 해야 될 일이 많아졌기에 지금은 꼭 필요한 스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배역이라……. 회사와는 이야기 된 거야?
"당연히 됐죠."
'난리가 좀 났지만.'
진호의 오디션 통과에 축배를 들었던 다미앙 지사의 모든 직원은 뒤집어져 버렸다.
-흠. 알았어. 한번 알아볼게. 하지만 된다는 보장은 없다.
'괜찮아요. 형 말고도 여러 사람에게 부탁했으니까요.'
디올 차이나의 지사장으로 있는 미영 이모에게도 부탁을 해 놓은 상태였다.
"사랑합니다!"
-시끄러. 꺼져.
전화가 신경질적으로 끊기자 실실 웃던 진호는 할 말이 무척이나 많은 듯 엉덩이와 입술을 들썩이는 정 실장을 보며 씩 웃었다.
"웃지 마, 인마!"
"사랑합니다, 실장님."
"……아오-!"
다시 한번 웃은 진호는 이번에 얻으려는 스킬에 대해 생각했다.
'솔직히 일을 하는 건 문제가 안되지만, 잃어야 하는 돈이……음.'
현 자산의 30퍼센트다. 이 스킬의 주인공은 단 3일 만에 본인의 자산뿐만이 아니라 고객들의 자산도 30퍼센트씩 날려 버리면서 회사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래서 1차 해금 조건이 월 스트리트의 투자회사에 입사하기고, 2차 해금 조건이 본인 자산 30퍼센트 손해 보기지. 솔직히 작전주만 잘 고른다면 30퍼센트야 하루만에 날려 버릴 수 있지만……'
'모델, 뉴욕에 도전하다'를 촬영할 당시, 주식과 뮤지컬 스킬을 놓고 어느 것부터 얻을까 고민했을 때와는 단위가 좀 많이 달랐다.
'다행이라면 현재 자산 현황이 대부분 현금이라는 건데……'
통장관리도 진호 본인이 하고 있어서 부모님께 들킬 위험도 없다.
'뭐, 스킬만 얻는다면 30퍼센트야 금방 복구하니까.'
주식 관련 스킬이 아니더라도 시스템 트레이딩 프로그램을 최대 수익으로 설정하면 1년 안에 복구할 수 있었다.
'그럼 얻어 볼까?'
진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 * *
뉴욕 월 스트리트 사원들의 아침은 굉장히 이르게 시작된다.
뉴욕 증시의 개장 시간은 9시 30분이지만, 그 전에 확인해야 될 정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월 스트리트에 산재한 투자회사중 한 곳의 펀드 매니저인 찰리 스미스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30대의 백인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룰루."
어제 장 마무리를 좋게 끝내고 밤사이 나쁜 정보가 들어오지 않아서일까.
한 손에 뜨거운 커피를 든 채 콧노래를 부르며 로비로 들어온 찰리는 동료 직원들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이야, 찰리."
"와우. 찰리, 옷 샀어요?"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찰리는 프런트 여직원들의 말에 발길을 멈춰야 했다.
그녀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어울려? 이번에 펜디에서 신상이 나왔기에 하나 산 거야."
"펜디에서 신상이 나왔어요?"
"진호 리가 메이크오버를 한 건데, 딱 본 순간 어머 이건 내 거야라는 생각이 든 거 있……"
그으으으응!
프런트에서 피어나려던 이야기꽃을 단숨에 시들게 만들어 버리는 소음.
고개를 돌린 그들은 점프슈트를 입은 채 바닥청소기계를 밀고 있는 청소부를 발견하곤 이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깊게 눌러 쓴 스냅백에 마스크, 커다란 헤드셋과 목에 둘러진 타월. 누가 봐도 청소부였지만, 그들은 의아해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러게."
투자회사의 특성상 보안 때문에 청소부조차도 면접을 통해, 그것도 날짜를 따로 정해서 뽑기에 그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 사람인가 보다. 그왜 한국에서 온 알렉스 최 매니징파트너님이 추천한."
"아아! 한 달 동안만 일한다는?"
찰리는 살짝 놀랐다.
알렉스 최는 자신이 있는 파트의 최고 관리자이기 때문이다.
'매니징 파트너님이?'
의문을 접은 그들은 그제야 청소부를 세심하게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몸이……"
"응. 핏이 살아 있네. 모델인가?"
매니징 파트너라는 엄청난 직급을 가진 사람이 추천한 인물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분명 진짜 직업을 얻기 전 사회생활을 경험해 보기 위해 청소부 일을 하는 것일 터였다.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채울 때, 청소부는 기계를 돌려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그에 프런트 직원들은 아쉬워했지만, 찰리의 반응은 좀 달랐다.
그녀는 멀어지는 청소부의 등을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니겠지. 그가 여기 있을리 없지."
"네?"
"아니야. 난 이만 올라갈게. 수고들 해."
"네. 찰리도 수고하세요."
"오늘도 고객님들 많이 벌게 해주세요-."
까르르 웃음꽃이 터졌다.
"푸후!"
'들킬 뻔했다!'
청소부들이 쓰는 대기실로 돌아와 스냅백과 마스크를 벗은 진호는 혀를 내둘렀다.
한국대를 졸업하고 스탠퍼드에서 MBA 과정을 이수한 후 월스트리트에 입사한 대선배님이 절대 기자가 찾아 올 단서를 주지 만들지 말라고 했기에 얼마나 식겁했는지 몰랐다.
"아."
진호는 허리춤에 찬 무전기에 대고 입을 열었다.
치익!
"매니저님, 로비 청소 끝났습니다."
-치익! 또 벌써?
"네. 청소는 기계가 다 하는 걸요,뭘."
- 역시 젊은 사람이라서 그런지 빠르네. 수고 했고, 쉬고 있어!
"넵! 다른 분들도 얼른 돌아오세요. 제가 애써 만들어온 빵이 식습니다! 오늘 제가 가져온 빵 아시죠? 특제 딸기빵!"
-오우, 그러면 안 되지! 오케이, 얼른 갈게!
-난 10층 화장실 쓰레기통만 남았어!
뜨거운 반응에 피식 웃으며 무전기를 내려놓은 진호는 대기실 안에 만들어진 탈의실의 라커에서 노트북을 꺼내와 홈 트레이딩 서비스프로그램을 켰다.
"역시……"
진호의 낯빛이 급격히 흐려졌다.
서형에게 정보를 얻은 작전주들.
작전주로 의심되니 절대 이 종목들에는 투자하지 말라는 엄포를 들었던 기업들 중 두 곳의 주가가 하루가 다르게 죽죽 떨어지고 있다.
직접 제작한 시스템 트레이딩 프로그램으로 마이너스 수익을 내려고 했지만 목표치까지 도달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에 택한 작전주지만, 정말 한숨만 나왔다.
진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건 뭐 추락하는 데에는 날개가 없다고 아니고……"
2차 개미 털기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지만, 막상 끝을 모르고 추락하는 주가를 보니 속이 쓰리다 못해 위장에 구멍이 뚫린 듯 아팠다.
"……나도 이제 털어야겠지. 보통 이 정도 털었으면 오른다고 했으니까."
이대로 계속 손에 쥐고 있다가 주가가 상승한 후 돌려지던 폭탄이 터지기라도 하면 자칫 금융감독원에서 조사를 받을 수 있었다.
손이 벌벌 떨렸지만, 이를 악물며 주식들을 던진 진호는 노트북을 거칠게 닫았다.
"빌어먹을.……후우. 이제 17퍼센트 손해 본 건가?"
아직 13퍼센트나 남았다.
혹여 막대한 자금의 유입에 작전세력이 손을 털면 안 되기 때문에 여러 종목에 분산을 시켜 놓았지만, 순간 눈물이 핑 돈 진호는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다스렸다.
지이잉!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을 본 진호는 깜짝 놀라며 얼른 전화를 받았다.
"예, 선배님! 까마득한 후배 18학번 이진호 전화 받았습니다."
-허허헛. 그럴 필요까지는 없대도. 아침 청소 끝났으면 올라와요, 차라도 한잔하게.
"옙! 지금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 * *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50대의 중년인, 알렉스 최는 눈앞에서 차를 홀짝이는 진호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성실해서 탈이라고 했던가?'
"일은 할 만해요?"
"예. 선배님의 배려와 직원들께서 모두 잘 대해 주셔서 편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여러모로 배우고 있습니다."
"로비나 화장실 청소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더 디테일하게 알게 됐습니다."
"……아아, 펀드 매니저들의 일상을 배우게 됐다는 거군요."
"하하, 예."
"혹시……"
알렉스 최의 눈빛이 서늘해지자 진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여기서 얻은 정보로는 절대 투자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정보에 휘둘려 손해만 보고 있죠."
"……믿도록 하죠."
'쩝. 이것 때문이었나?'
속으로 입맛을 다신 진호는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 순간.
띠리링!
"잠시만요."
알렉스 최는 앞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찰리 스미스 차장이 찾아 왔습니다.
"……아, 이런.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알렉스 최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호를 보았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진호는 마스크와 모자를 쓰며 몸을 일으켰다.
"차 잘 마셨습니다."
"수고해요."
진호는 끌고 온 청소 카트를 밀며 열리는 문으로 향했고, 문을 열고 들어오던 찰리 스미스는 진호를 보곤 흠칫 놀라며 비켜섰다.
'이 사람은 아까 로비에서……. 아, 역시 매니징 파트너님과……. 음?'
그녀는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진호의 옆 얼굴을 보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만지면 베일 듯한 날카로운 턱선과 우수에 젖은 눈동자.
분명 낯익은, 그것도 굉장히 자주 봐 온 얼굴이었다.
"설마…… 진호 리?"
흠칫!
진호의 몸이 덜컥 굳자 찰리 스미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왓 더……"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