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3화
"봐, 바로 추려 내게 되잖아."
50대의 백인 남성의 익살스러운 말에 40대의 흑인 여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습니까? 예산이 무척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했던 말을 대체 뭘로 알아들은 거야? 인종 차별 문제나 배우가 물의를 일으켜서 흔들린 작품이 한두 개야?"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라도 그런 문제를 터트려 버리면 작품까지 흔들려 버린다.
"난 연기만 잘 하는 배우가 아니라, 연기까지 잘 하는 착한 배우가 필요한 거라고."
"……가난하거나 허약한 배우들도 많습니다. 이런 식의 테스트는 형평성이 맞지 않습니다."
"그것까지 감안했기에 승낙한 게 아니었나?"
준비한 건 홈리스뿐만이 아니었다. 허리를 다친 노약자, 언덕 위를 올라야 하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 등 오디션을 볼 배우들의 숙소까지 조사하면서 정말 철두철미하게 테스트를 준비했다.
"됐고, 2차 통과까지 한 배우들은 누구누구 있어?"
"……지노 리, 빌 케이머 외 스무명입니다."
여성은 2차 통과자 명단을 넘겨주었다.
"지노 리? 호오……"
오늘은 총 5개의 조연급 배역을 동시에 오디션 본다.
'역시 개리 씨의 추천을 받을 만한 건가.'
"그리고 그 지노 리가……"
"음?"
"외국에서 오는 배우들을 테스트하기 위해 배치했던 1차 테스터팀을 공항 경찰에게 소매치기로 신고 했습니다."
"뭐? ……푸핫! 그 찰나에 연기란 것을 간파했다는 건가!"
"문제는…… 상황을 주시하던 팀까지 소매치기 일당으로 신고 했습니다."
백인 남성의 낯빛이 굳었다.
"……주의력과 통찰력이 어마어마하군. 그런데도 1차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그의 보디가드가 어린아이가 뭘 알겠냐고 말했다는군요."
"……으흐음. 그런 거였군. 그럼 지금쯤 다 들켰으려나?"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2차 테스트는 해변 근처에서만 한 게 아니니까요."
"그렇겠군. 알았어. 이동시켜."
"예."
그녀가 나가자 백인 남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 재밌군.'
* * *
"재밌네."
해변에 꽂힌 깃발 앞에 모인 사람들 중 낯익은 얼굴들이 꽤 보인다.
"저 사람은 중국의…… 어, 저 사람은 일본 배우잖아?"
정 실장의 낯빛이 살짝 굳었다.
하나같이 각국에서 젊은 나이임에도 연기를 잘 한다고 소문난, 미남이면서도 연기파 배우인 이들이었다. 심지어 할리우드에서 조연으로 얼굴을 자주 비추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이 오버 핏의 슈트를 입은 채 해변에 모여 있었다.
장관이라면 장관이었다.
"역시 아마존이라서 이런 건가……"
전자상거래 분야에선 명실상부 세계 1위라 할 수 있는 대기업이 설립한 스튜디오가 제작하는 드라마다. 설사 단역이라고 해도 배우개인이나 소속사에게 엄청난 홍보효과를 누리게 될 터였다.
"흥. 뭐 그래도 어차피 존 리는 진호 네 거일 테지만."
"하핫. 그래요?"
"당연하지. 저 중에 너보다 연기 잘 하는 놈이 어디 있다고. 봐 봐. 다 널 경계하잖아."
정실장의 말처럼 동양계 배우들 모두 진호를 경계하고 있었다.
낙담을 하거나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이들도 있었고, 누군가는 진호의 옷차림을 보곤 비웃기도 했다.
"거기다……"
"음?"
정 실장이 진호의 귓가로 입을 가져 갔다.
"쟤들 대부분, 소문이 좋지 못하더라."
"……에휴. 연기력하고 인성이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어……. 그건 그렇지."
입맛을 다시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은 진호는 쏴아아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바다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 진짜 역시 입수일까?'
괴팍하다는 감독의 성향을 떠올리니 해변=입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입수를 시킬 때 머뭇거리는 이들에게 마이너스 점수를 줄 수 있었다.
'아니면 모래나 파도를 이용한 임기응변을 볼 수도 있고, 어쩌면 단순히 오디션 룸을 빌리는 데에 돈을 쓰기 싫어서일 수도 있고.'
이 역시도 괴팍하다고 하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미간을 좁히던 진호는 이쪽을 발견하곤 손을 크게 흔들며 다가오는 백인 남성, 방금 전 같이 홈리스를 도왔던 빌 케이머를 향해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와우, LVMH의 뮤즈가 이런 조연 역할에 응시할 줄이야! 이거 반칙 아니에요? 반가워요, 난 빌케이머에요!"
"이진호입니다. 혹시 제 직속 상사 역할에 응시하시려고 왔나 봐요?"
"아뇨! 전 2팀 인턴이에요!"
"아, 그럼 동기네. 반가워."
"……으하핫! 그래, 같은 인턴끼리 잘 해 보자고!"
진호는 자신감이 넘치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런데 너 정말 반칙 아냐?"
"음? 아."
미약한 질시조차 들어 있지 않는 눈에 진호는 살포시 웃었다.
"그렇겠지."
진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본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셀럽이라는 건 팩트이니 말이다.
"워우. 동양인은 겸손하다는데, 넌 아닌 것 같네?"
"맞는 걸 맞다고 말하는 건데, 겸손은 무슨. 이 동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잖아?"
자기 밥그릇을 찾지 못한 순간 도태되는 곳이 사회라는 곳이다.
마냥 착하기만 해서는 결코 성공을 할 수가 없다.
"하하핫! 그건 그렇지! 할리우드에 온 걸 환영해, 친구!"
"그 말은 오디션에 합격한 후에 다시 들을게."
"……푸하하하핫!"
피식 웃은 진호는 시간을 확인해봤다.
"흠. 좀 늦네."
오디션이라는 글자가 적힌 깃발을 제외하면 번호표를 나눠 줘야 할 스태프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미 약속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말이다.
"원래 이러니까 신경 쓰지 마. 오디션 10분 전에 안 와도 된다고 문자 오는 건 오히려 신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니까. 문자를 안 줘서 오디션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돌아갈 때도 많아."
"그 정도야?"
"말해 뭐해. 톱스타라고 해도 제작자의 눈에 벗어나면 끝인 곳이 바로 여기야. 말이 세계 최고지, 시스템은……"
씁쓸히 웃는 그의 모습을 보니 진호는 좀 불안해졌다.
"흠. 그건 좀 곤란한데 말이지."
존 리에 꽂혀 버린 이상 이런 식으로 오디션조차 보지 못한 채 돌아가는 건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음?"
한쪽을 본 진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왔네."
까치집 머리칼에 늘어진 티셔츠, 결코 배우로 보이지 않는 백인 사내가 선글라스를 낀 채 이쪽을 향해 흐느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빌 케이머도 그를 보고 심상치않음을 느낀 건지 낯빛을 굳혔고, 사람들도 재빨리 길을 비켜 줬다.
그렇게 깃발 앞에 선 사내는 사람들을 주욱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현 시간부로 2차 테스트가 종료됐음을 알려 드립니다."
'2차 테스트라니, 무슨……?'
진호는 눈을 부릅떴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2차 테스트라니?"
"그게 무슨?"
혼란이라는 폭탄이 떨어졌지만, 사내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심드렁하니 핸드폰을 들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부터 호명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인턴 2번, 아담 스미스 역할에 빌 케이머……"
"이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2차 테스트라니!"
"맞아! 난 그딴 걸 응한 적이 없어! 해명해!"
잠시 넋을 놨던 사람들은 크게 반발했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살기등등한 분위기.
사내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한 사람을 가리켰다.
"거기 화이트. 어제 동양계 홈리스가 구걸했는데, 더럽다고 욕했죠? 그리고 오늘은 눈앞에서 흑인노인이 쓰러졌는데, 똥을 본 것처럼 피했죠?"
"그, 그걸 어떻게! ……서, 설마!"
진호도 눈을 부릅떴다.
'공항과 홈리스가 테스트였다고? 와……'
"미친. 돌았네. 또라이들인가?"
그렇다. 정 실장의 말처럼 돌았다. 이건 돌은 거다.
'진짜 미쳤네.'
진호는 조사가 미흡했던 점을 반성했다.
할리우드는 세계 최고의 자본이 모이는 곳답게 오디션 스케일도 남달랐다.
물론, 이번 오디션이 유독 스케일이 큰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직접 감독님께 연락 넣으세요. 난 전달자일뿐이니까. 알겠습니까? 그럼 다시 호명하겠습니다. 빌 케이머……"
"……예스!"
"그렇지!"
희비가 갈렸다.
아니, 이미 희비는 갈려 있었다.
"그리고 인턴 1, 존 리 역할에는 제임스 챙, 대니얼, 기타…… 카와? 쯧, 이건 뭐라고 발음해야 되는 거야? 아무튼 일본의 기타카와, 그리고 진…… 호 리. 응? 지노 리?"
깜짝 놀란 사내가 진호를 보았다.
그리고 잠시 넋을 놓았다.
"……와우. 당신이 여기 왜 있어?"
"하하."
"이따가 사진 좀 같이 찍어 줄수 있죠?"
진호는 자신을 향해 모여드는 질시가 가득한 시선 사이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사내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방금 전보다 더 또렷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총 22명을 제외한 나머지 분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호명된 분들은 절 따라오세요."
"……돌아갈 수 있을까 보냐! 내가 누군지 알아!"
"그래! 이게 어떻게 오디션이야!"
배우들, 특히 동양에서 온 배우들이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사내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감독님한테 말하라고요. 참고로 지금부터 날 협박하거나 위협하면 고소할겁니다."
"……FUCK!"
어깨를 으쓱인 사내는 깃발을 뽑아 들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어이없어하던 진호는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는 느긋이 그의 뒤를 따탔다.
그런 그의 등에 죽일 듯 노려보는 시선들이 꽂혔고, 진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회사에 연락해서 언론 방어를 할 준비하라고 하세요."
"……아, 저놈들이 돌아가서 헛소리할 수 있겠네. 오케이. 알았어."
"혹시나 비밀 엄수 협의서를 쓸 수 있으니까 오디션 내용은 밝혀지지 않도록 하고요."
고개를 끄덕인 정 실장은 얼른 핸드폰을 들었고, 진호는 스태프로 보이는 사내의 등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미국인가? 진짜 재밌네, 할리우드.'
진호는 괜히 수영복을 입고 왔다고 자책했다.
* * *
3차 테스트, 진짜 오디션 장소는 해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사무실이었다.
15평이나 될까 싶은 아주 좁은 사무실.
띠리링!
"네. 여보세요!"
"여기 복사 좀!"
사람들이 치열하게 움직이며 일하는 사무실.
"여기서 대기하고 계세요."
"예?"
2차 테스트 통과자들은 오디션장소를 빌릴 돈도 없나 하며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다른 이들은 당황해 어쩔줄 몰라 했지만, 진호는 아니었다.
그는 들어온 순간 알 수 있었다.
이곳의 진짜 정체를 말이다.
"후우, 편성을 받을 수는 있을 까……. 아니, 감독이 그 사람인데 이렇게 돈이 없을 수가……. 설마 그 1, 2차 테스트로 돈을 다 쓴거야?"
빌 케이머의 말에 진호는 피식 웃었다.
"이런 미친 짓을 태연히, 그것도 이렇게 디테일하게 해 버리는 감독이니까 편성은 당연히 받을 거야."
"응? 무슨……."
.
진호는 빌 케이머에게 자신이 알아차린 점을 말해 주었다.
"여기 진짜 사무실 아냐. 그렇게 꾸민 것뿐이지."
너무 깨끗하다. 이 사무실에는 세월의 흐름이 만든 생활 흠집들이 전혀 없다.
[스킬: 셜록의 후예]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뭣?"
진호는 이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저 사람과 저 사람이 하는 업무가 완전 달라. 꽂혀 있는 책도 다르지. 한쪽은 영업 관련, 한쪽은 회계 관련. 그런데 정작 사용하는 건 가상용 시스템 트레이닝 프로그램. 저쪽은 보안 프로그램을 엉터리로 코딩 중이고."
진호는 코웃음을 쳤다.
"혹여 저게 맞다고 쳐도 파트가 다른 직원들을 저렇게 모아 놓고 일을 시킨다? 아무리 이렇게 코딱지만큼 작은 사무실이라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보안 문제 때문이다. 최소한 파티션을 쳐 놔야 했다.
'CCTV가 모두 이쪽을 비추고 있는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행동들이 모두 어설퍼. 배우가 아니라 스태프겠지.'
그중 가장 거슬리는 건 빈 의자 다섯 개다.
오늘 오디션을 봐야 하는 역할도 다섯 개.
다섯 명의 배우들이 동시에 연기력을 평가받는 오디션이라는 소리였다.
'정말 미친 양반이네. 단역이 될 지 모르는 조연들에게도 이런 투자를 하며 테스트 하다니……'
"왓 더……. 진짜야?"
진호는 대답 대신 여기까지 안내해 준 사내가 향한 곳인 안쪽의 문을 가리켰다.
벌컥!
문이 열리며 감독으로 보이는 이가 나왔다.
그러자 방금까지 열심히 일을 했던 사람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에 2차 테스트 통과자들은 당황했고, 빌 케이머는 질겁하며 진호를 보았다.
그러나 진호는 이쪽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백인 중년인, 감독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피식 웃은 감독이 성큼성큼 걸어와 입을 열었다.
"3차 테스트에 온 걸 환영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3차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호명하는 사람부터 나와서 빈자리에 앉아 연기하면 됩니다. 먼저 존 리 역할의 진호 리. 아담 스미스의 롭커스……"
진호는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문과 가까이 있는 빈자리에 앉아 감독을 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변하였다.
날카롭고도 당당하게. 그러나 한쪽은 어딘가 주눅 든 것처럼.
그리고 컴퓨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감독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빨리? 아니, 여기가 가짜인 건지 어떻게 눈치 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스탠바이를 한 상태였군.'
그러나 바로 시작할 수가 없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빈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손을 들자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 넘버 87-3. 사고를 친 존 리."
그가 나지막하게 말한 순간, 한 중년 남성이 커다랗게 소리 질렀다.
"존-!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그 순간 진호의 눈빛이 다시 변하였다.
"예써! 보스!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흑인 남성에게 후다닥 달려가 익살맞게 거수경례를 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