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302화 (302/424)

13권 2화

'악마의 초콜릿'으로 인해 촬영스태프 전원 몸무게 3킬로 증가라는, 입은 행복했지만 끔찍한 해프닝을 만들며 촬영을 무사히 끝내고 귀국한 진호는 바로 다미앙 지사로 향했다.

"드라마라고요?"

아마존이라는 초대형 글로벌 그룹이 아니라 드라마라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려 있는 진호의 모습에 다미앙은 흐뭇이 웃으며 프린트를 한 오디션 제의서와 그가 연기해야 할 캐릭터의 대사가 적힌 대본을 내밀었다.

"예. 여기 있습니다."

"호?"

월 스트리트의 어느 증권사가 배경이다.

순간 월 스트리트에서 얻을 수 있는 스킬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인턴이라……"

진호는 대본을 주욱 훑어보았다.

"귀엽네요. 뭐랄까……. 미국다운 캐릭터에요."

진호가 오디션에 응할 배역은 거침없고 당당하지만, 사회 초년생답게 이런 저런 실수를 하고 또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허당 끼를 보이는 인물이다.

월 스트리트의 증권사에 입사할만큼 머리가 좋은 걸 스스로 알고 있기에 자칫하다간 굉장히 얄미운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승진과 성공을 위해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이는 극중 상황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감초 같은 역할이었다.

'재밌는데?'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얄미운 캐릭터가 될 수도, 씬스틸러가 될 수도 있는 새하얀 도화지 같은 캐릭터다.

"얘, 재밌네요. 꾸며 나갈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도 밑바닥에서부터, 단역도 맡지 못하면 엑스트라에서부터 출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진호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나타났는데, 조연이라고 거부할 리가 없었다.

"그럼?"

"네, 응시하죠. 응시하게 해 주세요."

진호는 흔쾌히 말했지만, 다미앙은 약간 망설였다.

"하지만 감독의 인지도가…… 거기다 굉장히 괴팍해서 이번 주연들의 오디션에서도 말이 많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순발력이나 부동심을 보기 위해 강아지 떼와 좀비떼를 풀었다는……"

진호는 웃음을 터트렸다.

'감독님까지 재밌네.'

"혹여 드라마가 망해도 저, 그리고 여기 인턴 존 리는 기억되도록 연기할게요."

'흡?'

진호의 다부진 미소에 다미앙은 순간 숨이 멎을 듯한 감동을 느꼈다.

'정말 돌아왔군요.'

두 눈이 뜨거워지며 왈칵 눈물이 돌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전력으로 서포트하겠습니다."

"정말요?"

진호의 눈이 순간 번쩍 빛났다.

미국에 진출하면 꼭 사고 싶었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로망이자 버킷리스트였고, 이런 진호의 마음을 모르는 다미앙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연합니다."

"아싸!"

다미앙은 방방 뛰는 진호를 보며 흐뭇이 웃었고, 이내 진정한 진호는 다시 오디션 응시 서류를 보았다.

'그나저나 오디션이 열리는 날짜와 장소가…… 잉?'

"해변?"

"예, LA의 해변이더군요. 건물같은 곳이 아니라."

"왜요?"

"글쎄요……"

미국 최고의 도시 중 하나인 뉴욕의 월스트리트와 해변. 너무 상반되는 풍경에 둘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물어봤지만, 답변을 하지 않더군요. 아무래도 감독이 괴짜라서 그런 건 아닐지……"

"흐음."

'뭐지?'

왜인지 나연석이 뒤통수를 치기 직전과 같은 찝찝함이 저 발끝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설마 입수를 시키려는 건가?'

* * *

1년 365일 쾌적한 날씨를 자랑하는 LA로 향하는 비행기 안,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으로 좁은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며 대본을 읽고 또읽던 진호는 순간 멈칫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LA는 처음이네."

'LA에서 얻을 수 있는 스킬도 있는데……'

"그래?"

진호는 정 실장의 맞장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모델로서, 가수로서, 배우로서 수 많은 나라를 오가며 화보를 찍었지만 LA는 처음이었다.

샌프란 시스코는가 보았어도 말이다.

"LA가 뭐가 맛있더라……"

"해산물이 좋아. 진짜 폴륭해."

"어? LA에 가 보셨어요? 여자 친구랑?"

"아니, 가족이랑……"

"아."

진호는 한심하다는 듯 정 실장을 보았다.

약 1년 동안 정 실장 없이 유럽횡단을 했다. 정 실장이 아무리 매니저 파트의 수장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그러게 그냥 이사로 진급하시지, 왜 쓸데없이 거부해서……"

"지 실장님을 비롯해 선배님들이 그렇게 가득 한데 무슨……"

"그분들은 기획부잖아요. 그리고 지 실장님은 이제 지부장님이 되셨고요."

다미앙 지사 중국 지부의 지부장은 지경철이 맡기로 했다.

"됐어. 이 나이에 한 파트의 수장이면 대단한 거야."

"……에휴."

예전부터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고집이 센 정 실장인지라 설득하기를 포기한 진호는 다시 대본에 시선을 두었다.

도르륵!

캐리어를 끄는 진호와 함께 걷는 월터와 정 실장의 낯빛이 굳었다.

마치 칼이 등 뒤를 겨눈 것처럼 날카로워진 진호 때문이었다.

진호는 그걸 알아차렸지만 무시했다.

'미안해요. 오디션 끝나면 맛있는 거 먹어요. ……음?'

그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이쪽을 주시하는 듯한 시선들을 느꼈기 때문이다.

진호는 반사적으로 CCTV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아니야. 위치가 달라.'

[스킬: 괴도 루팡]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어디지? 아. 저기, 저기……'

"읏챠!"

"앗?"

진호는 아이스크림을 든 채 달려오던 흑인 소년을 피했고, 깜짝 놀라 멈춰선 소년은 진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호는 쪼그려 앉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심해야지."

"네, 죄송합……"

"지미-!"

기겁하며 달려온 흑인 여성이 소년을 안아 들며 연신 사과를 했고, 진호는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럼 수고하세요."

왜인지 잠시 망설였던 진호는 다시 웃으며 그녀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낯빛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희한하네. 왜 미국 공항 내 치안이 개판이죠?"

정 실장은 잘못 들었나 눈을 깜빡였지만, 월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 모자는 소매치기였나? 간이 크군."

"……에엑? 소, 소매치기?"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눈빛은 굉장히 서글펐다.

"둘 다 연기를 하더라고요. 만약 제가 거기서 예민하게 반응해서 소란을 피웠으면, 행동 조가 움직였을 거예요."

두 흑인 모자를 현명하게 대하면서 마무리를 짓자 이쪽을 주시하던 시선들이 거둬졌다.

"진짜 어떻게 저렇게 어린 아이를 이용할 수 있을까요……"

"후. 미국인을 대표해 사과하지."

"월터가 사과할 이유는 없어요."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

"행동 조가 다섯이었어요."

"알아. 위치 파악했어."

"밖에 있을게요."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걸음을 옮겼고, 월터는 가까이 있는 공항 경찰에게로 향했다.

자주 보이는 얼굴이라면 분명 공항 경찰도 눈여겨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정말 소매치기였어?"

"그것 말고는 저에게 의식적으로 다가올 이유가 없잖아요. 아마 다들 꾼일 거예요."

거의 2미터 가까운 거구인 월터가 함께 있는데도 접근했다. 얼치기가 아니라 전문적으로 소매치기를 하는 집단이라는 소리였다.

'그것도 인종이 다양하게 섞인 큰규모의 그룹이야.'

그나마 그들에게서 화약 냄새가 맡아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미국이 무섭다 무섭다 하더니 정말 무서운 동네였네. 이건 뭐 눈뜨고 코 베이는 것도 아니고."

진호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정 실장은 여권이나 지갑이 든 재킷 안주머니를 확인했다.

"공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그룹 같아. 경찰이 모르더라고. 그래서 그냥 찍어 주고 물러섰어."

왜인지 일찍 쫒아온 월터의 말에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하셨어요. 괜히 심각하게 얽힐 이유는 없죠. 가요."

그들은 택시를 타고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향했다.

* * *

호텔에서 하루 동안 푹 쉬면서 컨디션을 조절한 진호는 시간이 되자 택시를 타고 움직였다.

정 실장은 그런 진호의 옷차림을 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이래도 되나 모르겠다. 존 리는 사회 초년생인데……"

진호는 무척이나 비싼 디올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정 실장은 모르지만, 진호는 혹시 몰라서 속옷 대신 삼각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아무리 아이비리그라도 학자금 대출은 있을 거 아냐. 그리고 사회초년생 하면 어? 약간 큰 정장을 어?"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정 실장님, 한국대에, 특히 이쪽 경영이나 경제처럼 한국대에서도 들어오기가 빡센 학과에 입학한 애들이 가장 먼저 찾아 보는 게 뭔지 알아요?"

"그, 글쎄? 동아리? 족보?"

"과외 알바 자리예요."

"…….엥?"

"정말이에요. 그럼 그렇게 번 돈을 어디다 쓰겠어요? 학자금 대출갚고, 맛있는 거 먹고, 브랜드 옷을 사 입어요. 여태껏 받은 학업 스트레스를 그렇게 푼다고요. 혹여 패션에 쥐뿔만큼 관심이 없어도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애들을 오다가다 본다는 말이에요. 이게 미국이라고 다를 것 같아요? 미국이라고 사교육이 없을까요?"

그렇기에 알게 되고, 배우게 된다.

첫인상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다.

"즉, 아무리 성격이 여리거나 이상해도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스마트한 두뇌가 있단 말이에요. 가끔은 그걸 너무 과신해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면접에서 잘 보이려고 성형까지 하는 세상인데 큰 사이즈는 무슨……"

"……한국대 수석이 말하는 거라서 뭐라 말할 수가 없네."

미국이라고 해도 어차피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정 실장은 그걸 진호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깨우쳤다.

입맛을 다신 정 실장은 앞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가? 앞에 사고라도 난 건가? 아, 미치겠네."

정 실장은 진호의 눈치를 보며 택시 기사를 약간 다그쳤고, 손목시계를 본 진호는 혀를 찼다.

오디션 시간까지 40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냥 내리죠. 어차피 코앞이니까."

약 500미터만 걸어가면 오디션 장소였다. 정말 코앞이었다.

"끙. 미안하다. 내가 알아보지도 않고."

"아니에요. 이게 정 실장님 잘못도 아니고."

택시를 길가에 대고 내린 진호와 정 실장, 월터는 오디션 장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오디션 장소에 거의 도착할 때쯤이었다.

'흠?'

……피식.

"왜 그래?"

진호의 신경이 날카로워 눈치를 보고 있던 정 실장은 진호의 실소에 곧바로 반응했고, 진호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니까.'

오버 사이즈 슈트가, 그것도 올드한 디자인의 슈트가 유행이 아닐진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벌써 5명 넘게 오버 사이즈 정장을 입은 사람들을 발견했다. 모두 A4용지나 핸드폰을 든 채 입술을 달싹이며 한 방향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교통사고는 아니고, 하수도 공사를 하나 보세요."

"어, 그러네. 저래서 차가 밀렸나보다."

교차로 중앙에 안전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정 실장은 점점 가까워지는 오디션 장소에 굳어지기 시작한 진호의 얼굴을 보곤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좀 서늘하지 않아? 여기가 한국인지 LA인지……. 어후. 따뜻한 코코아라도 마시면서 갈까? 너 긴장도 좀 풀 겸?"

진호는 다시 피식 웃었다.

걱정하는 정 실장의 마음이 절절이 느껴져서다.

"하긴 이상 기온으로 LA 날씨도 미쳐 날뛴다고 하니까요. 3시간 뒤쯤에는 비도 올 것 같고."

"진짜? 아 씨, 그럼 우산도 사야겠네. 어디 보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정 실장은 이내 재빨리 진호 앞을 가로막았다. 반팔, 반바지라고도 말할 수 없는 거적 같은 옷을 걸치고 있는 홈리스들, 부자지간으로 보이는 이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불쌍한 사람들이 눈앞에 있으면 결코 지나치지 못하는 진호다.

정 실장은 혹여 진호에게 불쾌한 냄새가 밸까 진호의 등을 떠밀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중요한 오디션을 가는 길이었다.

"야, 안돼. 가자."

"잠시만요."

"야!"

정 실장의 외침을 무시하며 홈리스들에게 먼저 다가간 진호는 곧바로 슈트 상의를 벗어 아이에게 덮어 주고는 아버지로 보이는 이에게 지갑에 있는 현금 전액을 주었다.

화들짝 놀란 둘이 이쪽을 쳐다보자 진호는 옅게 웃었다.

"역시 아직 눈이 살아 계시네요. 이 돈으로 일단 허름한 모텔이라도 잡고, 일자리 구하세요. 아이를 위해서요."

"거기에 이 돈도 보태 줘요."

흠칫!

사람들은 갑자기 끼어든 백인 남성을 보곤 놀랐지만, 진호는 그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살짝 물러났다.

백인 남성은 약간 갈등하다 한 발 나서며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도 아버지를 너무 원망하지 말고. 곧 자랑스런 아버지로 돌아오실 거야. 그러실 수 있죠?"

"……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홈리스 아빠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서로를 본 진호와 백인 남성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서로 돌아섰다.

"미쳤어! 너 그거 오디션에 쓸 옷이잖아!"

"회사에 들어와 재킷을 벗은 컨셉으로 가면 되죠, 뭐. 가요."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못산다, 못살아."

"흐흐. 사랑해요."

"시끄러, 인마! 아오, 셔츠만 입은 이 모습이 예술만 아니었어도-!"

씩 웃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던 진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데 왜 저들을 CCTV 다섯대가 주목하고 있던 거지? 그들이 구걸하던 곳이 쥬얼리숍 옆이라서 그런가?'

쥬얼리숍 건물 끄트머리에 앉아서 구걸 펫말을 놓고 있던 그들이 일어서서 다가오자 CCTV도 함께 움직였다.

'에휴. 각박하다, 각박해.'

미국의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이 좀 무거웠다.

진호는 시계를 매만지며 해변으로 향했다.

그렇게 진호가 사라지고 1시간 뒤, 쥬얼리숍 옆에서 구걸하던 홈리스 부자가 몸을 일으켰다.

"어으으-! 아, 수고 했다. 연기 잘 하던 걸?"

"정말요? 히히."

이건 무슨 말일까.

사내는 깔고 앉은 박스 밑에 숨겨 두었던 무전기를 꺼냈다.

치익!

"여긴 A조 2차 담당자. 통과자 지노 리, 빌 케이머. 둘입니다."

-치익. 알았습니다.

무전을 끈 홈리스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기가 무슨 개리 제이머야, 뭐야? 인성을 따지게."

혀를 찬 그는 소년과 함께 가까이 있는 차로 향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