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1화
1. 미국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운영되는 업체들은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특별 할인을 해 주곤 했는데, 그에 진호도 숙박과 저녁 및 슈하스코, 그리고 아침 식대까지 포함하여 16유로로 요금을 책정했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저렴하다고 할 수 있는 금액.
그런데 진호가 거기에 맥주 한 병까지 추가로 제공한다고 하자 스태프들은 우려를 표했지만, 진호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치익! 치이익!
"으흐응."
기름이 뜨거운 숯에 뚝뚝 떨어지며 내는 하모니와 냄새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어휴, 뭐가 이렇게 맛있게 익어가?"
슬렁슬렁 다가온 나연석이 익어가는 고기들을 보며 군침을 삼키자 진호는 눈을 빛냈다.
"슈하스코 한 끼에 50유로!"
"……너무하다! 그러기냐!"
"네. 그럴 거예요. 그보다 몇 명 왔어요?"
"7명! 한국인 2명!"
"오오!"
하루 평균 하숙집에 체크인 하는 사람이 대략 2명에서 3명이고, 한 국인은 이틀 꼴로 2명에서 3명 정도다.
비율로만 따지면 두 배 이상 손님이 늘어난 것이다.
"아직 오후 3시밖에 안 됐으니까 더 늘어날…… 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린 진호는 대문 밖에서 이쪽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한 40대 여성을 발견하곤 환하게 웃었다.
그리곤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쪽에 있는 숙소 사장님이시죠?"
흠칫!
"……흠."
"마침 잘 오셨어요. 와서 맛 좀 봐 주세요. 오늘 저녁에 근처 분들을 모셔서 슈하스코 파티를 할 생각이거든요. 참가비는 아무 고기나 상관없으니까 무조건 한 덩이! 술을 가져오시면 샐러드바까지 공짜예요!"
여성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눈을 빛낸 진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어? 어?"
"자, 여기요. 맛 좀 봐 주세요."
숙 잘라 내밀어진 고기와 초롱초롱 빛나는 진호의 눈을 본 그녀는 이 동네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이들에게 한마디 하러 왔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걸 느끼며 피식 웃어버렸다.
그녀는 입을 벌려진호가 내민 고기를 먹었다.
"흡?"
"어때요? 괜찮나요?"
"……이게 무슨 고기예요?"
"양이에요, 양."
"양? 맙소사. 말도 안돼."
"칭찬으로 알아들으면 되는 거죠?"
……퍼억!
대답 대신 손바닥이 등을 후려쳤다.
"억?"
"호호호! 나도 꼬시고 싶은 미남이 알고 보니 셰프였네! 나도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입장이라 저녁에 자리 비우기는 좀 그렇고, 고기랑 술을 넉넉하게 줄 테니까 이 고기 좀 나눠 줄 수 있어요?"
알베르게는 쉽게 숙박업소, 모텔로 생각하면 된다.
"그럼요! 당연하죠! 아, 대신 교환하는 양은 좀 비슷하게……"
퍽퍽퍽!
"억억억?"
"호호호! 젊은 사람이 우리 동네 인심을 무시하네!"
"어흐흐. 그렇죠? 제가 이러네요. 혹시 뼈를 우린 국물 좋아하세요? 그게 스태미나에 아주 그냥 어? 남자한테 아주 그냥! 어? 어어? 자라나는 아이들 성장에도 어?"
순간 크게 떠진 여성의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호호호! 내가 아주 돼지 한 마리 잡아다가 드릴게!"
고기와 술을 가져올 테니까 잘 익은 부위로 빼달라는 말을 남긴 여성은 빠르게 사라졌고, 나연석과 스태프는 진호를 멍하니 바라봤다.
"붕대 같은 것들도 있으면 좀 나눠 주세요-! ……휴, 민원해결. 이제 고기가 떨어질 일은 없겠네."
"잠까안-!"
"응? 왜요, 피디님? 설마 물물교환을 한 걸 가져가려는 건 아니죠, 피디님? 하숙집 시리즈에서도 그런 나쁜 행동을 하시려는 거 아니죠, 피디님? 그렇죠, 피디님?"
"……아니지."
"그럼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흐흐. 그럼 슈하스코 한 끼에 60유로!"
"비싸졌잖아, 인마!"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번에 여기 와서 많은 걸 깨달았기 때문에 줄 생각을 하고 있던 진호는 숙소 현관 근처에서 이쪽을 보다 몸을 돌리는 노인을 발견하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분명 날아는 사람이었는데……. 그것도 이쪽 업계에 계시는……'
게다가 그가 쓴 영어는 미국 서부식 발음이었다.
'뭐지?'
의아해하던 진호는 이내 신경을 끄며 잘 익어 가는 고기들을 바라봤다.
'물물 교환이 약속된 이상 고기가 잘 익어야…… 응?'
무려 다섯 명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저…… 여기가 이 어플에 나온 곳입니까?"
'어플? 리뷰가 달렸구나!'
푹 우린 사골 육수를 베이스로 해서 음식을 만든 보람이 확 느껴졌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힘드셨죠? 아, 저기 카메라요? 원하지 않으시면 찍어도 삭제할 거예요. 대신 출연해 주시면 3유로 깎아 드리는데, 어떠세요?"
"3유로요?"
"거기다 오늘 슈하스코 파티를 할 생각인데, 오셔서 같이 즐겨 주세요."
"어, 음……"
"슈하스코가 고기 무제한인 건 아시죠? 슈하스코는 물론이고, 맥주에다가 숙박, 내일 아침 식사까지 총 16유로! 딜?"
"……딜!"
"그런 조건이면 무조건 여기에 머물겠습니다!"
"어셥셔! 해진 삼촌-! 손님 다섯분 들어갑니다-!"
나연석은 피식 웃었다.
적극적으로 변한 진호는 이렇게 사람을 끌어당겼다.
* * *
챙챙!
병맥주의 목이 서로 부딪치고, 왁자지껄한 웃음이 테이블들을 흔든다.
고민이 있어 답을 얻으려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짐을 나눠 지며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시름을 날려 보낸다.
"그래, 이거지."
외국인들 사이에 껴서 어색하게 웃던 한국인들이 어느새 같이 웃고 떠들며 자연스럽게 고민이 흘러나오자 나연석은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 그를 축하하듯 진호가 선창하고, 어느새 떼창이 된 엘 콘도르파사가 하숙집 앞 간이식당을 울렸다.
진호는 아낌없이 재능을 풀어헤쳤다.
-I'd rather be a hammer than a nail.
나는 못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망치가 되고 싶다.
-Yes, I would.
꼭 그럴 거야.
너무도 의미가 깊은 가사.
가만히 그 노래를 감상하던 나연석은 문득 김순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한 스태프를 불렀다.
"승용아, 선생님 지금 뭐하고 계시는지 알아보고 와."
"하긴 화장실에 가신지 좀 오래되셨죠. 예!"
승용이라 불린 20대 중반의 스태프는 얼른 숙소 안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프런트를 지날 때였다.
"Excuse me."
"아, 예!"
'이분 성함이…… 개리 제이머였던가?'
한국인을 제외하면, 오늘 하숙집에 머물기로 한 사람 중 진호를 알아본 유일한 외국인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승용은 의아해하며 영어로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지금 촬영하는 게 정확히 무슨 프로그램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 승용은 환하게 웃으며 하숙집 시리즈에 대해 설명했다.
"호오. 그럼 세 명의 출연자들은 그를 위해 연기를 하는 겁니까?"
"아뇨, 아뇨! 모두 천성이 좋은 분들이세요. 정말 진심을 다해 저분들의 고민을 걱정하고, 또 덜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아,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너무 보기 좋은 모습이라서 대본이 아닌가 생각해 버렸습니다."
"……아, 확실히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저희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대본이 없어요. 모두 출연자들의 재량과 PD님의 길잡이로 촬영이 되고 있습니다."
"오, 그렇군요. 그럼 지노 리도 정말 저렇게 다재다능하면서 성격마저도 좋은 겁니까?"
승용은 눈을 빛냈다.
"당연하죠! 연기면 연기, 노래면 노래, 미술이면 미술! 그러면서 천사 같은 성격까지! 나이는 비슷하지만, 제가 가장 닮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렇군요……"
"더 질문이 없다면 전 볼일을 봐도 될까요? 좀 급해서요."
"아,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아니에요! 그럼!"
꾸벅 인사한 승용은 다시 김순재를 찾아 움직였고, 노인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며 핸드폰을 들었다.
"어, 나야.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내가 사람 한 명을 추천하고 싶은데……"
한편, 승용은 얼마 걷지 못하고 다시 멈춰 서야 했다.
"선생님!"
"응. 그래, 승용아. 무슨 일 생겼어?"
"아뇨. 피디님이 선생님께서 혹여 아프신 건 아닌가 걱정하셔서 선생님을 찾아 다녔어요. 오늘 오랫동안 서 계셨잖아요."
"허헛, 녀석. 그랬어?"
"넵!"
"허허허. 이거 고맙구나. 그런데 저 사람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눈거야?"
"아, 별일은 아니었어요. 아마 한 국인이 이 먼 스페인까지 와서 촬영을 하니 궁금했나 봐요."
"그래?"
정말 이냐는 듯 승용을 보던 김순재는 고개를 슬그미니 돌리는 승용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저 사람이 우리 방송에 관심을 가졌다라……'
김순재는 밖에서 구운 고기를 나르고 있는 진호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 거였구만.'
"허허허허헛."
"선생님?"
"아니다, 가자. 다시 서빙 해야지."
"그냥 이 기회에 푹 쉬셔도 되는데……."
"그러면 안 되지."
"같이 가요, 선생님!"
* * *
뚝 전화를 끊은 50대의 백인 남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쯤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어야 할 분이 갑작스럽게 사람을 추천해 준다라……. 그것도 내가 필요한 동양인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많은 아이디어를 창조했기에, 작품이 끝날 때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는 개리 제이머.
이쪽 바닥에선 그 누구도 무시못하는 초대형 제작자인 그의 추천이다.
"또 그 병이 도진 건가?"
오디션에서 보이는 모습보다는 물망에 오른 이들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고 판단하는 걸 즐기는 괴짜이지만, 언제나 그의 눈은 정확하다.
백인 남성은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나야. 지금 진호 리의 모든 필모그래피를 긁어서 가져와 봐."
전화를 끊은 그는 눈을 빛냈다.
"진호 리……"
* * *
어젯밤, 숙소 침대의 50퍼센트 이상이 차는 기록을 세웠지만, 모두가 무리했기 때문인지 뒤풀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잠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호는 손님들의 아침 준비를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야 했다.
보글보글.
벌써 8일째 끓고 있는 사골 국물의 맛을 보곤 고개를 끄덕인 그는 창밖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비가 올 것 같은데 "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 먼 새벽이라 밖이 잘 보이지 않지만, [스킬: 나는야 자연의 왕자]가 경고하고 있다.
"열량 높은 걸 만들어야겠네."
어젯밤 일로 고민을 어느 정도 덜어 내며 더 나아갈 힘을 얻은 사람들인데, 이까짓 비 따위가 방해하게 둘 순 없었다.
그는 [스킬: 태양 여왕의 황금손]의 레시피 중 '악마의 초콜릿'이라 부르는 초콜릿을 만들 준비를 했다.
어제 주위 사람들에게 고기를 나눠주면서 얻은 누텔라 잼까지 꺼낸 그는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한 피스에 1637킬로칼로리인 악마의 초콜릿!'
끼익!
"음? 벌써 일어났어?"
"어? 선생님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늙으면 중간중간 깨. 그런데 뭘 만드는 거야?"
"아, 초콜릿이요. 오늘 비가 올것 같아서요. 물 좀 드릴까요?"
"그래, 부탁할게."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미지근한 생수를 컵에 따라 테이블에 앉은 김순재 앞에 내려놓았다.
김순재가 물을 마시며 잠시 그들 사이에 기분 좋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물을 한 컵 다 비운 그는 입을 열었다
"이게 복귀 방송이지?"
"그렇죠."
"복귀 작품은 생각해 놓은 거 있고?"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재밌는 역할들은 모두 다른 분들이 차지하셨더라고요."
"그거 아쉽겠구만."
"그러게요. 흐흐."
이제 언제 재밌는 역할이 올지 예측할 수 없었다.
영화든 드라마든 말이다.
그 때문인지 더 미련이 없어져버렸다.
"그래서 미국에 넘어갈 생각이에요."
"미국?"
깜짝 놀란 김순재의 얼굴을 본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도전해 보려고요. 될 때까지."
"들어온 작품이 있어?"
"아뇨. 밑바닥부터 훑으면서 그쪽 바닥의 기본부터 배울 생각이에요."
"허어.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전 젊잖아요. 서른도 한참 멀었는데, 부딪쳐 봐야죠."
"허허헛. 그래?"
'음?'
진호는 흐뭇해하면서도 마치 '이런 우연이?'라는 듯 놀라는 그의 미소에 의아해했다.
"왜 그러세요?"
"…… 아니야. 그래도 좀 아쉽구만. 같이 작업할 수 있나 싶었는데."
"네에?"
진호는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 아뇨. 제가 어떻게……. 무, 물론 그런다면 저야 영광이지만……"
"허허헛. 그렇게 말해 주면 고맙지. 그래, 응원할게. 진호 너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뭉클한 가슴에서 자신감이 훅 차올랐다.
김순재는 진호의 손등을 툭툭 두드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난 이만 올라 가볼게. 조금 더 자야겠어."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김순재가 나가자 진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이거 갑자기 미련이 생기게 하시네."
솔직히 그 누구라도 갈등이 생기게 만드는 제의였다.
하지만 진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미국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할리우드에 집을 얻어야 할까, 아니면 뉴욕에 집을 얻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둘다?"
거점이 될 장소. 이제 끓기 시작한 물 앞에 선 진호는 미국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거점이 이제 곧 타의로 인해 정해지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 * *
진호가 미국 진출을 위한 모든 플랜을 중단시키면서 뒤집어져 버린 다미앙 지사.
새벽부터 출근한 기획부의 차 대리는 밤새 어떤 메일이 왔나 확인을 하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영어? 뭐지, 스팸인가?"
그런데 아니었다.
진호의 이름이 메일 제목에 적혀 있었다.
의아해하며 메일을 클릭한 차 대리는 이내 벌떡 일어났다.
찢어질 듯 벌어진 그의 입과 눈은 그가 얼마나 경악하고 있는 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아, 아니 여기가 왜? 아니, 그보다 여기 영화 만드는 곳 아니었어?"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제발…… 빨리……"
-여보세요……
"과, 과장님! 지, 지금 미국에서 메일이! 그, 그것도 아마존 스튜디오에서억-!"
아마존 스튜디오. 아니, 세계 최고 그룹 중 하나인 아마존.
그곳에서 날아온 드라마 오디션제의 메일에 다미앙 지사가 새벽부터 깨어나기 시작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