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25화
스무 번째 손님도 웃으며 떠나자 진호와 우해진은 손바닥을 부딪쳤다.
"저 친구들도 참 대단해. 이 먼거리를 어떻게 걸을까. 그것도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누군가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 누군가는 정리를 하기 위해, 또 누군가는 아무 생각 없이.
저마다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8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게.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나누니, 세상이 내 생각보다 더 힘들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부디 이 길 끝에서 원하는 걸 얻어야 할 텐데……"
우해진의 말을 김순재가 받아치자 하숙집은 잠시 숙연해졌다.
"그런데 진호 넌 손님들에게 대체 뭘 준 거야?"
진호는 손님들이 떠나기 전 그들의 손에 힘내라는 말과 함께 무언가를 하나씩 쥐여 주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는 건 또 뭐고?"
"아, 이거요?"
진호가 손을 펼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조각상이네?"
얼굴까지 정교하게 조각된, 배낭을 멘 사람 모양의 작은 조각품.
크기는 손가락 두 마디만 했다.
"그냥……"
진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첫 번째 손님을 떠 올렸다.
"이걸 보고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해서요. 열심히 사는 분들이니까."
그리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 살면서 힘들 때 이걸 보고 오늘을 떠올리며 힘을 냈으면 했다.
그런 마음으로 만들게 된 것이었다.
'이걸 만들며 나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이런 진호의 설명에 사람들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그중 김순재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흐뭇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어? 선생님, 어디 가세요? 스무번째 손님 기념으로 커피 한잔 드셔야죠?"
우해진의 말에 김순재는 고개를 저었다.
"손님이 가셨으니 뒷정리해야지. 커피는 나중에 마실게."
"아, 그렇다면 저도……"
황급히 나서려던 진호는 김순재의 만류에 몸을 멈춰야했다.
"내가 할 일이고, 내가 해야 될 일이야."
"아……"
"그럼 이따가 맛난 커피 부탁할게, 주방장."
찡긋 윙크를 한 김순재는 위층으로 올라갔고, 진호는 그런 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렇게 열심히 하지 않으셔도 될 텐데……'
왜인지 반성을 하게 되는 모습이다.
누구보다 일찍 촬영장에 도착하고, 누구보다 늦게 촬영장을 나선다는 김순재 선생님.
진호는 언제나 배움에 목말라하는 김순재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대단하신 분도 굳은 일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난……'
진호는 미국 진출 플랜을 떠올렸다.
모델로서의 명성을 이용하여 미국 유명 토크쇼에 출연해 얼굴과 가창력을 알리고,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거나 유명 가수들과 같이 작업하는 것으로서 더 큰 유명세를 얻는다.
슈퍼스타 지니어스 이후 미국 프로모션 업체들이 제안하고, 다미앙 지사에서도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계획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여태껏 재미가 없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드라마나 영화는 동양인이 보편적으로 맡는 매력적이지 못한 악역 조연이었고, 가수 쪽은 이미 네드 시런, 안나 마리와 작업을 했기에 크게 당기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진호는 깨닫게 되었다.
'……나 어느새 오만해졌구나.'
슈퍼스타 지니어스 때문이 아니다.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마음속에서 독이 자라고 있었다.
리셋라이프를 얻으면서 그토록 경계했던 독이 말이다.
너무 화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짜아악!
깜짝 놀란 사람들이 진호를 보았다.
양쪽 볼에서 손을 내린 진호는 싱긋 웃었다.
"하하. 전 잠깐 밖에 있을게요. 주방에만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하네요."
그렇게 밖으로 나간 진호는 우해진이 만든 간의 의자에 앉으며 하늘을 보았다.
"감사합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면서 행동으로 질책해 준 김순재 선생님이 고마웠고,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한 스무 명의 손님들이 고마웠다.
그 스무 명의 손님들이 아니었다면, 왜 저렇게 이를 악물고 걸어왔나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오늘 김순재의 뒷 모습을 보고 깨닫는 점이 없었을 터였다.
"……전용기는 개뿔."
진호는 '밑바닥부터 시작해도 좋으니, 동양에서 온 스타가 아니라 모든 미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할 빌보드 가수, 할리우드 배우가 되게 해 주세요.'라는 문자를 보낸 후 핸드폰을 꼈다.
"그래, 이거지. 이래야지. 내가 언제부터 성공을 따졌다고."
재미면 충분했다.
성취감은 그다음의 문제였다.
"아, 그냥 미친 척 타임스퀘어에서 길거리 공연을 해 버려?"
'아님 더 미친 척 감독관련 스킬을 얻을까?'
여태껏 많이 해 본 연예인 일 말고 할리우드 감독 데뷔.
왜인지 재밌을 것 같았다. 아니, 갑자기 굉장히 끌렸다.
'여주로 제니퍼를 부르는…… 아냐, 그랬다간 서형 씨한테 죽을 거야. 안돼.'
"길거리 공연? 왜? 회사 뒤집어버리게?"
어느새 다가온 우해진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진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제가 사고 친게 한두 번인가요."
"……푸하하하핫! 네가 그 말을 하면 안 되지."
"흐흐흐. 아무튼 이런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래,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파이팅이다, 진호야."
"옙! 삼촌도 파이팅이에요."
둘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아, 맞아. 삼촌, 저희 수익이 얼마나 돼요? 쓸 수 있는 예산은요?"
도착한 첫날에는 제작진이 예산을 무제한 지원해줬지만, 영업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오직 매출 수익에 따라 예산을 써야 했다.
"수익? 어디 보자……"
머릿속으로 곰곰이 생각한 우해진이 고개를 끄떡였다.
"한 320유로 정도 쓸 수 있겠는데? 왜? 줘?"
"네. 그중 200유로만 주세요. 그리고 우케아의 힘도요."
"우케아? 나?"
"네. 용접하실 줄 아시죠?"
"……응?"
진호는 눈을 껌뻑이는 우해진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손님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오게 만드는 거지.'
진호는 이제 기다리기보다는 찾아 가기로 했다.
미국도 말이다.
* * *
"밑바닥. 밑바닥이라……"
톡톡톡.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던 다미앙이 피식 웃었다.
"이거 나의 동반자께서 다시 무서워져 버렸군."
언제나 새로운 도전을 해 온 진호지만, 왕좌에 앉은 이후부터는 그 빛이 바래 버렸다. 본인의 도전보다는 남을 위한, 회사를 위한 일을 우선시해 왔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처음 만났을 때, 다미앙 본인이 미치도록 가지고 싶어 했던 그때 처럼 다시 도전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래서 아쉬웠다.
지금쯤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진호를 보지 못해서 말이다.
'아니, 봤으면 심장이 견디지 못했겠군.'
"하하핫! 나 피디의 예능이 전화위복이 되어 버린 건가……"
선물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다미앙은 전화기를 들었다.
"네, 장 이사. 진호 씨를 위한 모든 플랜을 중단시키십시오."
-……예?
"진호 씨의 의지입니다. 진호 씨께서 다시 밑바닥부터 도전을 시작하겠다는군요. 미국마저도 자신의 색채로 물들이려나 봅니다."
오싹!
장경아는 순간 전화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그녀가 팀 다미앙에 입사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업계 평균보다 많은 연봉 때문이 아니라 찬란하게 빛나는 진호 때문이었다. 미모는 재능의 일부분일뿐이라며 도전하고 또 도전하며 빛나던 진호에게 홀려 입사했었다.
그런 진호가 다시 도전을 한다고 한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미국에 파견할 직원들을 고르겠습니다.
"저 할리우드, 빌보드, 라디오, 방송가, 브로드웨이 등 밑바닥부터 훑으면서 찾으십시오. 진호 씨를 찬란하게 빛낼 첫 번째 먹잇감을."
-예!
전화가 끊기자 다미앙은 차갑게 식은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앞으로의 이 수고가 부디 무산되지 않기를……"
그런데 왜인지 무산될 것 같아서 약간 불안해졌다.
* * *
나연석은 갑자기 철판을 용접하며 커다란 무언가를 만드는 우해진의 모습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예감을 팍팍받기 시작했다.
우케아의 능력을 보여라 용접기를 가져다 놓기는 했지만, 이렇게 큰일을 벌이라고 놔둔 건 아니었다.
'이거 진호다! 진호 때문이야!'
벌써 3번 넘게 진호와 작업을 했기에 알 수 있다.
이 이상한 일의 주범은 진호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급히 진호를 찾아 움직였고, 주방에서 긴 꼬챙이에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쑤셔 넣는 진호를 발견하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진호야, 뭐하니?"
"바비큐…… 아니, 슈하스코 만들고 있어요."
"슈하스코? 잠깐, 그거……"
다양한 고기를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는 바비큐.
"다다익선이죠. 손님을 부르는 데 최고일 것 같지 않아요?"
"아니, 우리 예능은……"
어디까지나 우연한 만남을 통해 힐링을 얻는 프로그램이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이야기도 나누고 그래야 고민도 좀 풀리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어울려야 여행도 여행답죠."
"……아."
비슷한 처지. 나연석과 작가진은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벌컥!
"진호야! 다 만들었어!"
"그래요?"
눈을 동그랗게 뜬 진호는 재빨리 뛰쳐나갔고, 남겨진 나연석은 꼬챙이에 껴진 고기들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방금 진호가 한 그 말……"
"하숙집 시리즈가 가 장담고 싶었던 장면이자, 궁극적인 목표죠. 아니, 목표였죠. 손님이 너무 안와서 포기해 버렸지만."
그랬다. 원래 하숙집 시리즈는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출연자들이 조언을 해 주는 게 아니라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끼리 함께 어울리며 술 한 잔과 함께 고민을 공유하고 나아갈 힘을 얻는 그런 장면을 담고 싶었다.
이 각박한 세상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그런 장면을 말이다.
나연석은 그 본인도, 시청자들도 아쉬워하던 그 장면을 기필코 담기위해 하숙집 시리즈를 계속 만들어 왔던 것이다.
"난……. 뭘 한 걸까? 이런 것도 생각 못하고."
"아니에요. 이건 진호니까 가능한 일이잖아요."
맞다. 연예인은 연예인이지, 셰프가 아니다.
그래서 음식을 만드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또 그래서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렸어도 실행에 옮길수가 없었다.
"허어……"
'나도 어느새 안주해 버린 건가? 이 정도만 하면 된다고?'
나연석은 치미는 짜증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반성해야겠네."
진호가 들었다면 기겁을 했을 법한 말을, 아니 실제로 주방에 모인 스태프 전원을 경악하게 만든 말을 한 나연석은 눈을 빛내며 진호가 나간 문을 응시했다.
"그런데 피디님. 진호 쟤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뭐랄까……"
"처음 봤을 때처럼 적극적이게 됐지. 왜 이것도 가능해? 너 왜 그런 것도 해? 라고 우리를 놀라게 만들었을 때처럼."
"네, 그거요."
런던 외곽의 마을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했을 때를 떠올린 그들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나연석은 씨익 웃었다.
"출연자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려는데, 우리라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어? 움직여!"
"……예!"
부르르!
"뭐지?"
"응? 뭐가?"
"아뇨……. 아니에요."
닭살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리며 어색하게 웃은 진호는 우해진이 만든 커다란 3단 바비큐 그릴을 보곤 엄지를 치켜들었다.
"푸흐흐흐흐. 이 정도면 됐어?"
"말을 해서 뭐해요. 완전 퍼펙트죠! 역시 우케아!"
이는 진심이었다. 폐드럼통을 펴고 용접해 만든 3단 바비큐 그릴은 정말 최고였다.
"그런데 이걸로 올까? 대문과 현관이 이렇게 먼데……아."
"흐흐. 그렇죠. 대문 옆에서 구워야죠. 그래야 어? 피로에 지친 손님들이 어? 고기 냄새에 어?"
그렇게 홀려 들어와 가격까지 들으면 뒤로 쓰러질게 분명 했다.
"푸하하하하하! 그래, 얼른 옮기자!"
"넵! 자, 하나 둘!"
"읏차!"
진호와 우해진은 3단 바비큐 그릴을 대문 옆으로 옮겼다.
* * *
"후우. 겨우 도착했군."
시간을 확인한 노년의 백인 남성은 '이번엔 1시간 단축했군.'이라고 중얼거리며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얼른 씻고, 시원한 맥주 한잔을…… 음?"
노인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코끝을 희미하게 스치는 환장할 냄새. 최고의 맥주 안주 냄새가 풍겨져 왔기 때문이다.
"……이 마을 에선 바비큐를 안팔 텐데? 레스토랑이 새로 생겼나?"
그렇다면 일단 체크해 놔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곧 씁쓸해했다.
이 조용한 마을의 최고 볼거리는 조용한 거리였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너무 유명해진 건가……. 여기 외엔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곳도 없는데……"
그가 사는 곳인 미국은 더더욱 그랬다.
'이젠 어딜 걸으며 재충전을 해야 하나……'
혀를 찬 그는 냄새를 쫒아 움직였다.
'바비큐 냄새?'
하며 뒤따라오는 여행객들의 모습에 그는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순간.
"어? 모텔?"
대문 옆에서 지글지글 익어 가는 고기들과 등을 돌린 채고기를 굽고 있는 동양인 사내.
노인은 가정집인가 확인해 보았지만, 숙박업소가 맞았다.
"저……"
"아, 어서 오세요!"
노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당신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이쪽에선 제법 유명한 얼굴.
그는 이 우연한 만남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