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24화
공항 안으로 들어온 진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아직 도착 안 하셨구나.'
그는 이쪽을 찍는 카메라 감독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봬요, 삼촌. 그동안 잘 계셨죠?"
카메라 감독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차. 아직 간식 안 드셨죠? 이것 좀 드세요."
진호는 들고 온 커다란 에코백에서 빵 하나를 꺼내 넘겨주었고, 카메라 감독은 입을 뻥긋거리며 '잘 먹을게'라고 말했다.
싱긋 웃은 진호는 안쪽으로 향해 다른 스태프들에게도 빵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나연석 피디만 빼고.
"어? 나는?"
"……여기요."
주기 싫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떤 심술을 부릴지 모르기에 줄 수밖에 없었다.
"땡큐. 오, 맛있다. 난 오렌지 카스테라인가?"
카스테라 중간에 발라진 오렌지 잼이 상큼하게 입안을 적셨다.
마이크를 차던 진호는 입을 열었다.
"선생님과 해진 삼촌은요? 오셨어요?"
"해진 씨는 화장실 갔고, 선생님은 곧 도착하신다고……아, 저기 오시네."
'흡?'
아흔이 가까운 연세임에도 힘찬 걸음으로 다가오는 김순재를 발견한 진호는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선생님!"
"허허. 그렇게 예의 갖추지 않아도 된데도. 그동안 잘 있었지?"
"넵! 선생님도 잘 계셨죠? 아, 여기 간식 좀 드세요."
김순재는 스태프들이 들고 있는 카스테라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현장에서 스태프와 출연자의 간식과 음식을 책임진다는 진호의 소문은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여우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녹차 카스테라?"
"보성 녹차로 만들어 봤는데, 팥을 앙금으로 넣어서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아, 여기 음료수도 있어요."
"……어이구. 이거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입이 호강하네. 여태껏 나 피디와 갔던 여행과는 딴판이야."
"아니, 선생님. 제가 뭘……"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
사람들은 웃음을 참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그렇지! 내가 언젠가 이렇게 당할 줄 알았지! 선생님, 존경합니다!'
이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넵!"
진호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고, 김순재는 옅게 웃었다.
연기도 잘하고, 소문도 좋은 젊은 청년이 이렇게 착하기까지 한데 기껍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물론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할 테지만 말이다.
"아이고, 선생님!"
이윽고 우해진이 화장실을 다녀오며 다시 떠들썩해졌다.
"자, 그럼 이제부터 저희가 갈 곳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나연석을 바라봤다.
그동안 무슨 이유에서인지 출연자들에게도 비밀로 했던 목적지.
사람들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나연석은 그런 그들을 보며, 정확히는 진호를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진짜 난리도 아니었지.'
언제나 부탁할 때마다 힘들던 촬영 협조에 심드렁했던 정부 관계자들이 진호가 출연한다는 소리에 바로 승낙을 했다. 아니, 어떤 조건이든 들어줄 테니까 제발 오기만 해 달라고 매달릴 정도였다.
게다가 소문이 어디서 어떻게 퍼진 건지 그 이후로 유럽 각국에서 제발 우리 나라로 와 달라는 부탁 전화가 쏟아졌다.
그가 해외를 촬영장소로 하는 예능을 제작하게 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언제나 을이었던 그들이 갑이 되어 버린 상황.
제시되는 조건들이 너무 좋아서 오히려 더 고르기가 힘들어진 상황에 연출진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장소였다.
"저희가 이제부터 갈 곳은 바로 바로……"
나연석은 귀를 더 쫑긋 세우는 그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스페인입니다!"
"……잉?"
"엥?"
스페인. 하숙집 시리즈의 시즌1을 찍은 나라였다.
* * *
이륙 준비를 위해 부산스러운 스페인 국영 비행사인 이베리아 항공의 비행기 안.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은 진호에게 김순재가 옆에 앉으며 건넸다.
"1년 동안 쉬었다며?"
'억?'
진호는 김순재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괜스레 뿌듯해졌다.
"네, 제가 욕심쟁이라서 그런 지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거든요. 활동 중에는 할 수 없는 일들이라서 재충전 시간도 가질 겸 쉬기로 했었어요. 저희 팀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고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중국에서도 대세가 됐잖아."
"그래서 망설임 없이 떠난 거예요. 흐름이 너무 좋았거든요."
"……호오."
김순재는 놀랍다는 듯 진호를 보았다.
중국 내에서도 대기업 광고를 싹쓸이하면서 소위 갑 중 갑이 된 진호다. 좋은 작품을 떠나서 바짝돈을 벌 때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칫 한 발 잘못 내딛으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상황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연예인들은 이때 교만해지고, 오만해져 실수를 하게 된다.
그것은 훗날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데, 진호는 그걸 경계하고자 깔끔히 물러선 것이었다.
'아직 30대도 되지 않은 젊은이의 속이 이리도 깊다니. 허헛.'
이야기를 나눌수록 더 마음에 든다고 할 수 있었다.
그때, 그들에게 승무원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세뇨르 리. 스페인의 은인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스페인 국영 항공사인 이베리아 항공의 부기장 마르코입니다."
진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아, 네. 반갑습니다. 이진호입니다."
'무슨 일이지?'
진호는 의아해했다.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저희 스페인의 은인에게 좌석을 업그레이드해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총 스무 분에게 말입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아."
부기장의 뒤에서 이쪽을 향해 간절한 표정을 짓는 승무원들의 얼굴을 본 진호는 난처해졌다. 그는 양해를 구하며 나연석을 찾았다.
"나 피디님."
"어, 응? 왜?"
이쪽을 지켜보던 나연석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여기 항공사 측에서 저희 쪽 스무 명에게 좌석 업그레이드를 해주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진호는 그러며 왜 이런 제의가 들어왔는지 대충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뭣?"
사람들이 경악하며 진호를 보았다. 그리고 눈빛이 변한 몇몇 이들이 나연석을 간절히 바라봤다.
"흐음."
나연석은 잠시 생각에 잠긴 척허리 아래로 손을 내려 흔들었고, 진호는 그 신호를 알아차렸다.
'오호? 그렇게 하자는 거지?'
"역시 거부하는 게 낫겠죠? 촬영팀까지 모두 업그레이드되는 것도 아니고."
나연석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그래도 그냥 거부하지는 말고 선생님을 비롯해 몸이 좀 불편하시거나 그런 분들에게 양보하는 게 어떨까?"
"아, 그게 좋겠네요. 선생님, 괜찮으시죠?"
상황을 모두 지켜본 김순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다들 같이 고생하는데 혼자 가서 뭐해. 몸은 편해도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서 싫어."
"끙."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부기장을 향해 모인 결론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부기장과 승무원들의 입가에 아쉬움과 만족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쩔 수 없군요. 세뇨르 리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런 세뇨르 리께서 저희 조국의 은인이라서 참 감사할 뿐입니다. 편안한 여행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부기장은 돌아섰고, 나연석은 초장부터 그림이 예쁘게 빠졌다며 어깨춤을 췄다.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 진호에게 김순재가 입을 열었다.
"스페인에서 유학을 한 거야?"
"아, 그게……."
"스페인에서 유학한 게 아니라 독학 한거예요, 선생님. 진호 쟤가 할 줄 아는 외국어 모두 독학한 걸걸요? 거기다 진호가 할 줄 아는 언어가…… 몇 개였지? 진호야, 몇 개 국어 할 줄 알아?"
우해진의 말에 진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갔다.
"어, 음……"
'영어, 중국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9개? 10개? 그 나라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언어는 그 정도 될 걸요?"
김순재는 다시 한번 놀랐고, 우해진은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은 듯 뿌듯하게 웃었다.
"역시 한국대 출신은 뭐가 달라도 다르죠, 선생님? ……아, 그러고 보니 선생님도 한국대셨죠?"
"아니, 한국대였어?"
"예. 뭐……. 지금은 자퇴 처리를 했지만요."
"그랬다고 하더라도 한국대 전체수석 입학은 어디 가는 게 아니지."
"허어."
우해진의 너스레와 김순재의 감탄에 진호는 쥐구멍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눈치가 빠른 이유가 있었구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던가.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운 나연석과 우해진이 진호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게 된 그는 가만히 있어도 날아와 귓가를 흔든 헛소문들을 모두 잊기로 했다.
'작품을 같이하고 싶은 사람이 새로 생긴 건 얼마 만이더라……'
진호는 이쪽을 보는 눈빛이 변한 김순재의 모습에 의아할 뿐이었다.
길고 긴 이동을 하여 드디어 도착한 목적지.
"와."
"오!"
깔끔한 외관에 감탄을 하며 주방에 도착한 진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전기레인지를 비롯해 중식용 화로에 베이커리에서나 쓸 법한 5단오븐, 그 외에도 여러 조리 도구가 가득한 깔끔하고 현대적인 주방은 음식을 바로 내어 갈 수 있도록 식당과도 붙어 있는 오픈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어때, 좋지?"
"네."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일까.
가슴 속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푸흐흐. 그래. 내가 이걸 꾸민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그래요? 와……"
"응? 반응이 좀 싱겁다? 내가 널 위해 얼마나……"
"그런데 이거 지금 저보고 일하다 죽으라는 거 맞죠? 그렇죠?"
"……."
움찔!
나연석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주방을 이렇게까지 꾸민 데에는 정말 그런 의도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거구나. 홍보를 작정하고 하려는 거구나……. 하하하."
"에이, 내가 설마 정말 그러려고! 하숙집은 어디까지나 우연한 만남속에서 만들어지는 힐링이 모토인데 말이야! 하하하하하하!"
"그럼요! 전 나 피디님을 콱 믿었어요! 하하하하하!"
둘의 웃음 소리가 주방과 식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순간 나연석이 하얗게 질리며 크게 외쳤다.
"절대 카메라 끄지 마-!"
싹뚝!
쌓이고 쌓인 진호는 결국 인내의 끈을 직접 자르며 나연석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이 악마야!"
"끄아악!"
그렇게 한바탕 난리가 난 후 진호와 우해진, 김순재는 각자의 포지션에 맞게 움직였다.
"정말 스페인과 어떤 커넥션이 있는 게 분명 하다니까."
이 작은 마을의 유일한 마트를 양손 무겁게 나서는 진호가 투덜거리자, 그를 따라온 촬영 스태프들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래서 내일부터 주방은 어떤 식으로 운영할 거야? 주방장 마음?"
오늘은 준비하는 시간이고, 본격적인 영업은 내일부터다.
"그럴 리가요."
"그럼?"
스태프들의 눈이 기대감으로 강렬하게 빛나자 진호는 피식 웃었다. 그는 정육점 안으로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
"여기 소 등뼈랑 다리뼈 파나요?"
진호는 수백 킬로미터를 걸으며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이 한 발더 나아가기 위한, 앞으로 조금만 더 수고하면 다 잘 될 거라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을 담은 작은 다독임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내가 유럽여행을 할 때 아주 간절했던 그것들을.'
* * *
터벅터벅.
"……후우."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한 29세의 김형식은 무거운 발걸음에 올라오는 희뿌연 흙먼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겁다 못해 감각이 사라진 것 같은 다리.
최대한 무게를 줄인 배낭이 천근만근 무겁게 어깨를 짓눌러 오자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왜 여길걷고 있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여길 왜 걷고 있었더라.'
그는 너무 힘들다 보니 잠시 머릿속에서 날아간 목표를 떠올렸다.
"아, 취업과 진로 때문이었지."
취직 준비만 3년이다.
서류 탈락만 125번이고, 심사관면접에서 탈락한 게 31번이다.
다음엔 잘 될 거라는 엄마의 위로 조차도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 짜증이 났기에, '어디 가니'
라는 말도 무시하며 달랑 배낭 하나만 멘 체 이곳 순례길에 올랐다.
"진짜 어디서 들은 건 있어 가지고……."
수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걸으며 깨달음을 얻고, 결국 다시 도전할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에 무작정올랐던 산티아고 순례길.
그 힘, 너무도 추상적인 의미인 그 힘을 얻기 위해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젠 그 힘이라는 게 정말 있긴 한 건가 의심이 들었다.
"돌아갈까……"
무심코 내뱉은 그 말이 산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커져 마음을 헤집다 못해 눈물이 되어 흐르자, 형식은 결국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 씨발."
"Are you all right? (괜찮아요?)"
형식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푸석푸석하고 흙먼지로 가득한 얼굴에 걱정이 잔뜩 서려 있는 백인남성.
"……괜찮아요. 정말로."
"지도를 보니까 마을까지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우리 조금만 힘내요."
환하게 웃은 그는 형식의 팔을 잡고 일으켰고, 형식은 멀어지는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힘내야죠. 고마워요."
'일단 마을까지만 가자. 그리고 거기서 결정하자.'
형식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발을 옮겼고, 결국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쉬자.'
그는 발길이 닫는 곳으로 향했다.
"후우. 따뜻한 물이 나오면 좋을 텐데……"
문 앞에 서서 한숨을 푹 내쉰 그는 고개를 들며 안으로 들어갔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
형식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너무도 눈부신 미모의 사내, 한국 사람이면 모를 리가 없는 한류스타 이진호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옆으로 우해진과 김순재도 있었다.
"어서 와요. 많이 힘들었죠?"
"어어?"
"많이 들어요."
진호는 음식을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
머리칼에 물기가 가득한 형식은 보글보글 끓는 빨간 국물을 멍하니 바라봤다.
"김치찌개네……"
한국에 돌아가기 전엔 먹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김치찌개.
그는 재빨리 숟가락을 들었다.
후룩!
"……맛있다."
그런데 왜일까.
갑자기 눈물이 왈칵 차오르고 있었다.
"너무 맛있어."
김치찌개의 따뜻한 맛이 온몸으로 스며들고 있다.
힘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마치 엄마처럼……'
그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크흑."
한편, 문 밖에 선 진호는 귓가를 울리는 소리에 조용히 중얼거렸다.
"힘내요."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