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22화
"반갑습니다, 진호 리. 모타운에서 온 믹 재거입니다."
진호는 눈을 빛냈다.
첫 만남에서 진호 본인의 이름을 완벽하게 발음하는 사람은 꽤나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진호입니다."
모타운 레코드에서 찾아온 거구의 50대 흑인 중년인과 악수로 인사를 나눈 진호는 의자를 권했다.
믹 재거는 그런 진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이 정도의 아우라를 가진 사람이었을 줄이야.'
마주하는 순간 홀려 버릴 듯, 아니 홀려 버리고 말았다.
'동양인의 이미지를 산산조각 내버리겠군.'
눈이 작고, 찢어졌으며 쌍꺼풀이 없다는 이미지로 고정된 동양인.
그러나 눈앞의 진호는 다르다.
'쇼나 잡지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백인 미남 배우들보다 아름답다. 앞으로 동양인 이미지의 기준점이 될 거야.'
게다가 양 팔뚝이 근육으로 역동하고 있다. 할리우드의 마초 배우들과 비교하면 한없이 얇지만, 동양 출신 무술 스타들보다는 더 강인해 보인다.
그런데 진호에겐 이런 외형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다.
마케팅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혼란 할 만큼 수 많은 재능을, 그것도 세계에서 인정받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
믹 재거는 전율했다.
'빌보드와 할리우드를 제대로 휘젓겠군! 이거 많은 스타들이 긴장해야겠는 걸?'
백인 흑인 라틴, 아니 그냥 잘 생겼다고 평가받는 스타들은 죄다 긴장해야 할 듯싶었다. 빌보드와 할리우드 모두 말이다.
이는 결코 진호의 아우라에 홀려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냉정하게 평가를 해도 그랬다.
'UMG에서 움직이지 않은 게 이렇게 다행으로 느껴질 줄이야!'
유니버설을 비롯해 빌보드를 지배하고 할리우드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초대형 음반사들, 아니 그룹.
그들이 왔다면 이렇게, 이런 진호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찰나 동안의 평가를 마친 믹 재거는 흥분을 감추고자 방송실 내부를 둘러보다가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신기하군요."
"어떤 점이 그런지 물어도 될까요?"
믹 재거는 연륜과 총기로 가득한 눈동자로 진호를 응시했다.
"이 공간 어디에도 사치가 없습니다. 유명한 셀럽이자 뮤즈라 불리는 당신이 말입니다."
"아……"
풀썩 웃은 진호는 양팔을 활짝 벌렸다.
"사치가 없긴요. 이 공간, 이 건물, 이 안에서 머물고 있는 제 팬들 전원을 위해 쓴 그 돈은 사치가 아닌 겁니까?"
이번엔 믹 재거가 차갑게 웃었다.
"우린 그걸 보고 투자라고 합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진호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야. 이 아저씨 봐라?'
단번에 맥을 짚었다.
미국에서 여기까지 날아오는 시간이 길었기에 충분히 생각하고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일 테지만, 진호는 왜인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이게 미국의 스타일인가?'
"그래서 더 욕심이 납니다. 진호 리가 우리 모타운에 온다면, 모타운도 예전의 영광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스캔들 안 일으키는 좋은 캐시카우가 필요하신 거겠죠."
"하하핫! 당연히 그런 생각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힘들겠군요. 진호 리, 당신과 다미앙 토마소의 관계를 깨는 건."
"10억 달러를 계약금으로 주신다면 생각해 볼게요."
"으하하하핫!"
믹 재거는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역시 이 슈퍼스타는 돈에 욕심이나 성취감은 있어도 집착이 없어. 그리고 굉장히 똑똑 해.'
그래서 더 욕심이 타올랐지만, 믹 재거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 10억 달러를 준다고 해도 끌어올 수 없는 인물이다.'
"이런. 저희 모타운이 최대로 대출을 받는다고 해도 그럴 만한 자금을 만들 수 없는 작은 회사입니다. 대신 진호 리의 곡은 살 수 있습니다."
믹 재거는 눈을 강렬하게 빛냈다.
"푸핫!"
진호는 마치 방금까지 한 말은 인사치레였다는 듯 태세와 화제를 전환해 버린 믹 재거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진짜 엄청나네.'
"어쩌면 서로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될 수도 있을 듯하네요.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오우, 감사합니다. 모타운에 돌아가서 할 말이 생겼군요!"
"할 말이 더 생기도록 해 드릴까요?"
"설마?"
믹 재거는 순간 부정했지만, 진호의 얼굴을 보곤 허탈히 웃어 버렸다.
"허.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진호는 그 본인이 발견한 모든 원석을 오픈하고, 또 접촉해서 설득할 기회를 준다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정말 자신감이 넘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물론 그들이 승낙을 하는 게 먼저지만,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요."
"이런, 이런. 진호 리, 빌보드는 돈과 꿈이 만든 거대한 판입니다. 돈에 관해선 당신보다 저희가 더 자신 있습니다."
서늘하게 가라앉는 믹 재거의 눈빛에 진호는 히죽 웃었다.
"부디 성공하셨으면, 아니 성공들 하셨으면 좋겠네요."
눈을 동그랗게 뜬 믹 재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호는 지금 이곳으로 날아오는 모든 캐스팅 디렉터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다른 의도도 숨어 있었다.
"설마 진호 리…… 당신은?"
"쉿."
믹 재거는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이래서 나만 부른 거였나!'
그는 UMG를 비롯한 빌보드와 할리우드의 괴물 기획사들이 찾아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방금 전 자신의 머리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진호 리, 당신은 제 예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이었군요."
"저에겐 다미앙 씨와 직원들이 먼저니까요."
"……그 비즈니스 파트너, 진지하게 고민해 보셨으면 좋겠군요. 저희도 진지하게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그를 위한 뇌물로 저 밖의 파리들을 모두 치워 드리죠."
'네가 의도한 것처럼!'
"그들에게도 비즈니스 파트너에 대해 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그래 주십사 하는 뇌물로 그 누구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선점 교섭권을 주셨으니 얼마든지."
"후에 미국에서 뵙겠습니다."
"그러죠. 후에 미국에서."
진호와 뜨거운 악수를 나눈 믹 재거는 굳은 얼굴로 돌아섰고, 진호는 방금까지 짓고 있던 미소를 지우며 핸드폰을 들었다.
-예, 진호 씨.
"죄송하지만, 연습생 프로젝트를 잠시 스톱해 주세요. 어쩌면 리셋할 수도 있어요."
-……완벽히 거르시려는 거군요.
그것을 위한 거름망이 아주 많이 생겼으니 말입니다.
"네, 셀링 클럽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다미앙 지사는 이진호 지사이기도 한걸요.
둘 사이에 훈훈한 분위기가 흘렀다.
* * *
팬과의 여행도 어느덧 마지막 날인 10일 차 밤에 젖어들었다.
쿵쿵쿵쿵쿵!
마지막 날이라 대운동장이 아니라 축구경기장을 빌려 무대를 설치한 진호는 리허설이 한창인 무대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우승 상품이 뭐야?"
회장의 말에 진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 거 없는데요?"
"응?"
회장뿐만 아니라 진호의 주위에 몰려 있던 지사장들, 그리고 카메라맨까지 모두 눈을 껌뻑였다.
진호는 그런 그들을 어이없다는 듯 보았다.
"말이 슈퍼스타지, 이게 정말로 1등을 가리는 오디션 프로그램이에요? 어디까지나 팬들끼리 서로 화합하고 즐기자는 기획일 뿐이에요. 그래, 우승 상품이라면 좋은 추억이겠네요."
"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너 정말 이 축제에 물을 끼얹을……"
"흐흐. 농담이에요."
진호는 이쪽을 찍는 카메라를 가리켰다.
"잘 들어, 잘 들어요.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 있던 우승 상품은 내가 직접 그린 그림과 조각상이에요."
진호가 들고 있는 핸드폰 속 채팅창에도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내가 우승팀 전원에게 우승팀 전원을 그린 그림과 조각상을 각자 두 점씩 보내 드리겠다는 거죠. 그리고 그 나라 총괄 지부에도. 그리고 그 국가 소속 팬 전원에게 프랑스식 풀코스 대접합니다. 내가 직접 만들어서. 오케이?"
침묵은 더 깊어졌다.
"아, 그게 싫으면 돈으로 드릴까?"
……우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자리에 앉아 진호의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예인이 팬을 위해 직접, 그것도 손수 그림과 조각상을 만들어 보내 주다 못해 음식까지 만들어 준다고 한다.
팬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진호는 2등부터 꼴등, 3천 명 전원에게까지 모두 선물을 준비했다.
등수별로 차등을 주었을 뿐, 3천명 전원이 기쁠 수 있도록 말이다.
그중 의류 교환권은 해외에서 힘겹게 날아온 팬들의 입장에선 가장 흥미 없는 선물이었다.
"아! 그리고 훌륭한 끼를 보인 몇 명에겐 저희 다미앙 지사의 연습생이 되어 달라고 제의할 거예요."
으아아아아악!
그들은 이제 미쳐 버렸다.
히죽 웃은 진호는 다시 카메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리허설도 끝났으니 이제 모두 준비가 된 것 같네요! 그럼 팬과의 여행 마지막 이벤트! 슈퍼스타지니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
* * *
총 시청자 수 약 2115만 명.
인터넷 방송 플랫폼으로 하여금 엄청난 서버 증설을 하게 만들었던 팬과의 여행이 마무리되자 굉장한 후폭풍이 불었다.
그동안 진호의 염장질에도 참고 참았던 타 연예인들, 아이돌 팬들이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누구는 세계 각지에서 3천 명의 팬을 초대해 이런 초대형 이벤트를 꾸미는데, 너희는 우릴 빨아먹을 궁리만 하냐……. 어후."
어느 팬의 기고를 본 양진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결국 곪고 곪았던 게 터져 버렸네."
팬은 바보가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은 바보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이제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중견급 이상, 혹은 평소에 팬 관리를 잘 했던 이들을 제외한 모든 연예인의 팬들이 무더기로 이탈하고 있다고요? 연습생도?
"예. 팬 사이트 폐쇄는 예삿일일 정도로 난리가 난 상태이고, 연습생도 무더기로 이탈하고 있습니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여태껏 회사가 연습생을 자른 적은 있어도 연습생이 스스로 나간 적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럼 발등에 불 떨어진 기획사들은 그 연습생들을 협박하고 다독이는 중이겠군요."
어느 쪽이든 JH에는 좋은 상황이다.
"우리 쪽은 피해는요?"
"다행히 이진호 카피 프로젝트 덕분에 경미합니다. 그러나……"
PJY와 SY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진호 몰래 준비했던 팬과의 여행을 급히 발표했지만, 고육직책이라며 욕만 얻어먹었다.
이런 임직원의 설명에 양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자들의 사정 따윈 신경 쓸 필요 없지.'
어떻게 하면 PJY와 SY 소속 아티스트와 알토란 같은 베테랑 들을 끌어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드는 양진혁이었다.
"진호가 이번 팬과의 여행에 쓴 경비가 총 얼마라고요?"
"다미앙 지사도 정확히 정산을 끝낸 건 아니지만, 대략 70억 정도로 추산됩니다."
양진혁뿐만 아니라 회의실에 모인 고위 임원, 임직원들 모두 혀를 내둘렀다.
"진짜 이놈의 자식은 선을 몰라요."
"제 생각으론 이것도 선을 지킨것 같습니다만……"
맞다. 진호라면 아예 호텔 몇 개를 전세 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험험. 그로 인해 생길 반사 이익은요?"
"……최대 70억의 열 배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 이진호 씨의 굿즈 전 품목, 앨범, 화보집 등은 모두 매진 및 예약 러시에 들어갔고, 영화와 드라마 등 다시보기 조회수가 수직 상승하고 있습니다."
"헉! 음."
웅성웅성.
사람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양진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중 가장 큰 수익은……"
"당연히 까타레나와 응우옌 티앙, 리토를 비롯한 10인입니다."
후에 회사에 얼마를 벌어다 줄지 예상조차 안 되는 3천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원석들.
"하지만…… 음."
직원은 그들이 과연을까라는 말을 줄였고, 회의실에 앉은 사람들의 두 눈에 욕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양진혁은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다들 꿈 깨세요. 죽었다 깨어나도 그 원석들이 JH에 오진 않을 테니까. 그건 다른, 세계 여타 엔터테인먼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진혁은 더 불신하는 그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왜인지 아십니까? 진호 그놈은 꼭 저 같은 사람만 뽑기 때문입니다. 재능이 미쳐 날뛰는데 두뇌가 좋은 것도 모자라, 상황 파악까지 무척이나 빠른 예비 괴물들만."
사람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건국 공신 취급을 받을 수 있는데, 그것도 자신들의 우상인 진호가 자신들을 정상에 올려놓기 위해 모든 역량을 동원할 걸 아는데 다른 회사에 간다? 여러분이라면 가겠습니까?"
아니다. 안 간다.
"터무니없는 욕심들은 접으시고, 어떻게 하면 다미앙 지사와 연계할 수 있을지, 그 원석들과 어떻게 하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만 생각하세요. 알겠습니까?"
"예!"
"그럼 2시간 뒤에 우리 쪽 팬들 다독일 대형 기획들을 마무리 지어서 다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양진혁은 푸흐흐 웃어 버렸다.
"이 또라이 같은 놈. 이건 뭐 질투심도 느끼지 못할 정도니."
남들은 하지 못할 일을 태연히 해 버리는 걸 보니 이젠 존경심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에휴. 이놈은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기이이이잉!
다시 찾은 인천공항.
모자를 눌러쓴 진호는 활짝 열리는 입국 게이트를 통해 나오는 까타레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치명적인 유혹들을 뿌리치고 온 그녀이기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서 와."
"히잉. 제가 제일 늦었네요?"
그녀가 끄는 묵직한 캐리어는 아예 한국에 눌러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고, 진호와 그의 주위에 있던 9명의 원석들은 그런 까타레나를 박수로 맞이해 주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네.'
진호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