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 12권 16화
6. 복귀
사이가 어긋난 사람이, 그것도 모욕을 준 사람이 더 이상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이 그걸 알고 있으면?
그런데 그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답은 하나다.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친분을 다져야 한다.
앙트완과 델핀은 그런 마음으로 찾아 왔다.
'와-. 아무리 비즈니스라지만……'
속으로 어이없다는 듯 웃은 진호는 이들을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보력에서 뒤처진, 아니 조금 안일해진 피에트로에게는 작게 실망을 했다.
'……멋진 사람들이네. 나라면 절대 못 왔을 텐데.'
차라리 이진호라는 인물을 누를 수 있는 인재를 발굴했을 것이다. 진호는 그동안 그들에게 가졌던 편견을 약간 수정하였다.
이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진호는 옅게 웃으며 델핀을 살짝 안으며 그의 양 볼에 입을 맞췄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오셨어요."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로.'
움찔!
갑작스런 한 방에 몸을 굳혔던 델핀은 이내 속으로는 어이없다는 듯, 겉으로는 환하게 웃으며 마찬가지로 진호의 양 볼에 입술을, 프랑스식 인사를 하며 친애를 표현 했다.
그에 피에트로와 앙트완의 낯빛이 굳었다.
지금 진호의 행동은 꽤나 여러 뜻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피에트로와 앙트완 모두 진호와 프랑스식의 인사를 나눴고, 델핀과 앙트완은 겨우 이것만으로도 누군가가 숨기고 있었던 진호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전에 선물 사건이 있었기에 깨달을 수 있게 된 숨겨진, 진짜 가치.
방금의 인사는 단순히 레이디 퍼스트가 아니었다.
진호의 눈빛을 보면 안다.
이건 경고이자, 의지였다.
난 당신들 중 그 누구라도 택할 수 있다는 경고이자, 의지를 인사라는 행위를 통해 보인 것이다. 평범한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고도의 심리가 깔린 행위.
그들은 도끼눈을 뜨며 피에트로를 노려봤고, 피에트로는 아 뜨거라 양팔을 살짝 들었다.
'뮤즈가 이런 사람인 걸 꽁꽁 감추고 있었다니!'
둘은 아르노와 캘러에게도 원망을 보냈다.
"장 이사님, 잠시 부탁드릴게요."
"예. 걱정 마십시오, 진호씨."
"고마워요. 이쪽으로. 회사를 안내해 드릴게요."
"음……. 그 전에 뮤즈의 작품부터 감상해도 될까요? 사진으로만 본 뮤즈의 작품을 직접 보고 싶어요."
"와. 그래 주시면 영광이죠."
진호는 표정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낭패한 기색이 된 피에트로와 앙트완에게서 시선을 떼며 한껏 기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델핀을 보았다.
'섬세하시네. ……그리고 어쩜 이리도 아르노 씨를 꼭 닮았는지.'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지금 연기 중인 그녀를 보고 있자니 곧 바로 아르노가 떠올랐다.
속내를 의뭉스럽게, 그리고 감쪽 같이 감춘 채 상대를 흘리려는 그가 말이다.
"하나하나 소개해 드릴게요. 이쪽부터 가시죠."
그들에게 핑거푸드와 음료를 하나씩 들려 준 진호는 작품의 제목 과 의도를 설명해 주었고, 혹여 그럴 리는 없지만 아무리 개똥 같은 작품이라도 칭찬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델핀과 앙트완은 이곳이 어딘지도 잠시 잊은 채 감정의 바다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그건 피에트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젠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니……'
크리스챤 디올의 CEO로서, 이전에는 다른 회사의 CEO로서 수 많은 예술 작품을 보아 온 그는 진호를 경이롭다는 듯 보았다.
그건 델핀과 앙트완도 마찬가지였다.
팀은 약간 다른 의미로 놀랐다. 그는 진호의 작품을 본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훌륭합니다. 어떻게 이런 심상을 이렇게 많이, 또 이렇게 빨리 표현 해 낼 수가 있는 겁니까, 뮤즈?"
"맞아요. 앙트완의 말처럼 너무 훌륭해요. 뮤즈가 작품을 파는 예술가였다면 돈이 얼마만큼 들어도 무조건 샀을 만큼. 후, 그래서 더 아쉽네요."
이곳이 조용히 그림을 감상하는 갤러리가 아닌 것에 말이다. 진호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자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더 그랬다.
이런 둘의 설명에 진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그렇게 너무 칭찬만 해 주시면 저 쥐구멍에 숨을지도 몰라요. 자, 이제 작품은 다 보셨으니까 올라가시죠."
작품에 푹 빠져 몸을 흔들어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팀 존스를 내버려 둔 채 안내된 다미앙 지사의 내부에 셋은 연신 감탄을 토해 냈다.
꽤나 현대적이면서도 심플하고 창작적인 내부 인테리어때문이다.
"실리콘 벨리의 회사들을 매칭했나 보군요."
진호는 앙트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그 어느 곳보다 자유와 창작이 필요한 곳이니까요."
"……아."
"놀랍군요. 경직된 기업 문화가 팽배한 한국에서 이런 인테리어를 볼 줄은 몰랐습니다."
단순히 칭찬이 아니었다. 제법 많은 뜻을 내포한 말이었다.
"한국은 그 경직된 기업 문화 속에서도 인재를 꽃피울 방법을 알고 있는 곳이죠."
"……한강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군요."
"네. 그것을 통해 한국은 수 많은 노하우를 쌓았습니다."
"다만 아직까진 예체능 관련 사업은 그리 빛을 발하지 못하는 상태지만……"
"세계적인 인물을 다수 보유한 한국이라면 잠재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다고 할 수 있죠. 흐음."
진호는 고개를 주억이며 생각에 빠지는 앙트완을 보며 속으로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날카롭네. 식견도 넓고, 바로바로 받아들여.'
이 역시도 아르노를 보는 듯했다.
'그래, 이 정도가 아니면 나도 좀 곤란하지.'
진호는 조용히 웃고만 있는 피에트로를 일견하며 다시 회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 * *
"휘유."
"휴우."
그들의 입장에선 겨우 12층밖에 되지 않는 건물이지만, 내부 구성이 너무 알차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기분이다.
마지막으로 안내된 진호의 연습실 한구석에 있는 소파에 둘만 남게 된 델핀과 앙트완은 진호가 화장실을 가기 전 놓고 간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씁쓸히 웃었다.
"이미 느낀 부분이지만, 정말…… 어렵게 됐군."
"동감이야, 앙트완. 아빠 말고 이런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보다 대하기가 더 어렵지."
세상에서 다루기가 가장 까다로운 부류다.
본신의 능력이 너무도 대단한데, 그 인맥까지 엄청난.
혹여 적으로 돌아선다고 해도 치워 버리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정말 실수했네. 그렇게 선물을 보낼 게 아니라 차라리 직접 찾아 가야 했어. 그랬다면……"
오늘 친절하고 살갑게 대해 주었지만, 너무도 뚜렷한 벽을 세워 둔 채 이쪽을 무심히 관찰하던 진호. 그 외에는 다른 감정이 없는 그 삭막한 눈빛은 마치 아버지 아르 노를 보는 듯 섬뜩하고 아찔했다. 그렇기에 무얼 실수했는지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그렇지. 뮤즈가 그토록 틈을 보였는데 말이야……"
다른 나라는 집어치우더라도 진호가 헤니히스도르프에서 머문 기간이 약 5개월이다. 즉, 자신들은 진호가 아버지 아르노의 부르고뉴 별장에 머문 후에도 계속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선물 사건 이후 크게 데이면서 진호에게 다가갈 명분을 기다린다는 게 결국 너무도 절망스런 악수가 되었다.
"그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욕지거리가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까득!
"여태껏 너무 아버지와 어머니를 무서워, 아니 두려워했어."
"맞아. 너무 눈치를 보았지."
앙트완과 델핀은 이를 갈았다.
아르노와 캘러 가 보았다면 어이 없어하는 대신 크게 웃었을 모습, 아니 변화.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 겠군."
"그렇지. 뮤즈가 허락한 선이 여기까지니까."
피식 웃은 델핀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눈을 빛냈다.
"정말 멋진 아이야. 소유하고 싶어."
그 재능, 그 두뇌, 그 담력을 모두 활용해 이쪽을 돕는다.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델핀은 이제 LVMH의 상징성이 아니라도 진호를 가지고 싶어졌다.
"진심으로!"
서늘하면서도 들뜬 음성이 울리 자 앙트완도 피식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델핀."
찻잔을 입에 가져간 앙트완도 눈을 빛냈다.
"아버지, 아니 LVMH의 황제 아르노 베르베우를 함락시킨 인재를 욕심내지 않는다면 후계자 자격을 내려놔야지. 하하. 정말 엄하잖아."
진호가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까마득히 숨긴 채 이 쪽의 반응을 관찰했던 아버지 아르노.
그가 왜 진호에게 함락이 됐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다.
그래서 더 가지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문제는……"
"그 피에트로의 손에서 어떻게 뮤즈를 빼오냐는 거지."
"앙트완, 모르겠어? 아까 뮤즈가 내게 한 행동 봤잖아. 피에트로도 꽤나 점수가 깎였어. 그래서 뮤즈의 뒤를 쫒아간 거잖아. 강아지처럼."
지금 이 자리에 없는 피에트로는 진호의 뒤를 쫓아갔다.
성급한 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둘은 웃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관계는 예전처럼 회복하게 될 거야, 델핀. 너나 난 그걸 아는데도 막지 않은 거고."
델핀은 심각하게 말하는 앙트완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오늘 뮤즈에게 우리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아냐?"
……씨익.
"그렇지. 오늘은 그걸로 충분하지. 피에트로 그자는 무슨 생각인 지 모르겠지만."
상상해선 안 될 생각이지만, 혹여 아버지 아르노 베르베우가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한다고 해도 어머니 캘러 메시어가 있다.
아직 둘에겐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했다.
LVMH의 주인 자리에 도전해도 될 자격이 있다는 걸 보였으니 말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각자의 장점만을 크게 드러냈다.
둘은 서로를 의미심장하게, 눈 속 깊숙이 칼을 품은 채 바라보며 차 맛을 음미했다.
'베르베우가의 모든 것은 내 거야. 그러기 위해선……'
'아버지가 이룩한 모든 것을 가지려는 게임.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벗어던졌으니 플랜을 다시 점검해 봐야 할 것 같군. 뭐 어차피……'
서로를 향한 그들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피를 나눈 남매라고 하여도 서로는 적이었다.
쏴아아!
"미안했습니다, 진."
세면대에서 손을 닦던 진호는 멈칫했다가 이내 입술을 삐죽였다.
"알긴 아시네요."
"예. 제가 소심했습니다."
진호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가늘 게 떴다.
"그렇게 포장하시는 건가요……"
"이렇게 말하는 게 진에게 용서 받기 편할 테니까요. 허락은 어렵지만, 용서는 편하다. 아주 훌륭한 유부남 언어죠."
능글맞게 웃고 있지만, 절치부심으로 타오르는 피에트로의 두 눈을 본 진호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핫!"
'그래, 이게 피에트로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은 진호는 입을 열었다.
"힘드시겠어요. 굉장한 분들이더라고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질 생각은 없습니다."
"어려워질 거예요."
순수한 인연으로서, 또 비즈니스 관계로서 진호와 깊은 관계를 맺은 피에트로. 그러나 이 점 때문에 피에트로는 앞으로 어려워질 것이다.
피에트로는 더 이상 진호에게 줄 것이 없지만, 델핀과 앙트완을 상대적으로 줄 수 있는 게 많을 테니 말이다.
이런 진호의 냉정한 말에 피에트로는 살짝 감동했다. 이 정도까지 성장한 진호의 모습에 말이다. 그러나 그는 곧 코웃음을 쳤다.
"그들이 진에게 줄 수 있는 게 있긴 합니까?"
……씨익.
진호가 악동처럼 웃었다.
"아, 이걸 안 넘어오시네요."
피에트로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진이 아르노 씨입니까?"
"푸흐흐흐흐."
"그런 못된 건 배우지 마십시오. 좋지 않습니다."
"그건 생각해 볼게요."
"……쯧."
다시 웃음을 흘린 진호는 휴지로 손을 닦았고, 피에트로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감동했다.
'그 어렸던 진이 여기까지 성장하다니……'
상상 이상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 약간은 치기 어렸던 진호가 그때의 예상처럼 끔찍한 괴물로 자랐다.
피에트로는 그게 얼마나 기꺼운 지 몰랐다.
그는 헤어를 다듬는 진호는 보며 눈을 빛냈다.
'어차피 오늘 일은 전초전일 뿐,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기대하십시오, 진. 당신이 영원토록 날 지지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렇게 다짐한 피에트로는 조용히 손을 닦을 휴지를 찾았고, 진호는 그런 그를 보며 속으로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정말 대단하네……'
오늘 피에트로는 델핀과 앙트완의 존재감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그들이 가능성을 드러낼 기회 조차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침묵을 했다.
그동안 진호 본인에게 미안해서,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는 델핀과 앙트완을 보고 평가 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피에트로 본인의 경쟁자로서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보통 대범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
그리고 델핀과 앙트완은 그걸 알아차리고 그 기회를 확실히 이용 했다.
'전에도 대범하다 느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진호는 그간 피에트로에게 섭섭 했던 점을 모두 잊기로 했다. 섭섭 했던 마음을 가져서는 이 상황을 제대로 직시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야, 아르노 씨도 정말 행복하시겠네.'
후계자 셋의 그릇이 이 정도로 크니 아마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지 않을까 싶었다.
"가시죠. 델핀 씨와 앙트완 씨가 기다리시겠어요."
"솔직히 이젠 할 것도 다 했으니 내쫒아 버리고 싶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나갈 사람들이 아니니 어쩔 수가 없군요."
"푸흐흐. 가요."
"예."
우우웅!
"응?"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의 발신자를 확인한 진호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네, 장 이사님. 어떤 분이 오셨……"
-진호 씨, 죄송하지만 내려와 주실 수 있습니까? 팀 존스 디자이너가 지금 사고를 치고 계십니다.
"……넹? 누가요?"
-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디자인을 하고 계십니다. 아, 지금은 샤토 디켐의 라벨 디자인도 그리고 계시는군요. 일단 직원들을 불러 바리게이트를 쳤습니다만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드린 겁니다.
"어……"
잠시 상황을 이해 못했던 진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패션 디자이너인 팀 존스가 와인의 라벨 디자인을 왜 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대형 사고가 터졌다.
'설마 내 작품들 때문에? 로비에 전시할 거라 힘을 빡 준 것들이긴 하지만! 아까 반응이 심상치 않기는 했지만-!'
"거기 딱 계세요. 지금 내려갈 테니까!"
진호는 급히 몸을 날렸다.
"피에트로, 델핀 씨와 앙트완 씨도 부르세요! 팀이 지금 사고 치고 있어요!"
"예? 아,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