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13화
4. 헤니히스도르프로 향하는 발걸음
어느덧 독일에도 봄이 찾아 오는 듯 날이 따뜻해져 갔다. 그에 사람들도 비교적 얇은 옷을 찾아 입으며 가족끼리, 연인들끼리, 누군가는 홀로 겨우내 얼어붙었던 공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건 막스 파스칼이란 이름을 가진 30대 후반의 남성도 마찬가지였다.
"한가롭네……"
잔뜩 머리가 아파서 잠시 직장을 벗어난 그는 그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얼굴이 일그러진 그는 옆에 놓은 녹색의 캔을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 꿀꺽!
"크흐-!"
고개를 흔들며 캔을 내려놓은 그는 핸드폰 속 SNS를 살펴보며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후, 뭐 좀 걸렸으면 좋겠는데.'
"기자가 근무 시간에 맥주 마셔…… 뭐야, 그건. 맥주가 아니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그는 단발머리를 한 금발의 30대 여성을 보곤 풀썩 웃었다.
"왔어?"
나른하면서도 선한 목소리가 울리자 금발의 여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무슨 일이야? 너 또 내부 소문 달라고 하면 정말 절교한다."
10년 전, 막 시청에 들어왔을 때 이런 그의 툭 던지는 말에 함부로 내부에서 떠도는 소문을 뱉었다가 큰 낭패를 당할 뻔한 경험이 있는 그녀는 주먹마저 부르르 떨었다.
'정말 30년 지기 친구만 아니었어도!'
막스는 그런 여성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자기도 나를 많이 이용해 놓고는 무슨. 너 기억 안나? 너 예전에 남자친구와 여행갈 때…… 읍?"
"그건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했지?"
뿌드득!
거친 소리를 내며 쥐어지는 작은 주먹에 하얗게 질린 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옆자리에 앉은 그녀는 막스의 핸드폰을, 정확히는 해시태그로 달린 헤니히스도르프를 보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우리 고향인 헤니히스도르프? 거긴 강아지의 목줄을 놓친 꼬마의 깜짝 놀라는 모습조차도 신문의 뉴스거리가 되는 한적한 도시잖아. 아, 너 특집 기사 써?"
……끄덕.
막스는 어깨를 늘어트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딱히 주제는 정하지 않았지만."
여성은 그런 막스를 보며 의아해했다.
"네가 웬일이야? 그냥 아무나 찍어서 쓰면 되지 않아?"
"아니, 이번엔 좀 잔잔하면서도 따뜻한 기사를 써 볼까 해서."
"……그래서 네가 골치 아파 하는구나."
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런데 편집장은 내 마음도 모르고 쪼고 있지. 그렇게 놀거면 차라리 몇 달째 행적이 묘연한 지노 리나 찾아 보라고. 아니, 내가 연예 파트 기자냐고. 물론 이제 지노 리는 일반적인 연예인의 범주를 넘어섰지만."
그는 정치인과 기업 간의 커넥션을 파고드는 정치사회 파트의 기자였다. 그것도 독일 내에서 굉장히 인정을 받는 기자였다.
여성은 투덜거리는 친구를 보며 웃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어서 박수를 쳤다.
"아, 헤니히스도르프 하니까 요새 SNS에서 핫하게 떠오르는게 있는데."
막스의 눈이 번뜩였다.
"뭔데?"
"줘 봐."
여성은 막스의 핸드폰을 가져와 몇 가지 해시태그를 추가해 보여주었다.
"음?"
막스는 흑백의 사진을 빤히 살폈다.
긴 곱슬 머리칼을 가진 누군가가 하얀 피아노를 격정적으로 연주하는 모습.
'컨셉 샷인가?'
하얀색 스웨터를 입은 채 하얀 피아노를 치는 그 모습은 기이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지만, 그럼에도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마치 거장의 그것과 같은…… 그런데 뭐지?'
왜 이렇게 이질적인지 모르겠다.
"대체 뭐지?"
"아하핫. 그거 조각이야. 너도 속았지?"
"……뭐?"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가 이내 눈을 부릅뜬 그는 다시 핸드폰을 뺏어 와 사진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경악했다.
'이게 천이 아니라…… 대리석이라고?'
"미친!"
그 밑에는 3일 만에 완성이라는 다른 해시태그도 붙어 있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
헤니히스도르프 출신의 조각가 중, 아니 그가 아는 독일 출신의 조각가 중 이렇게 옷의 질감마저 표현할 만큼 정교하면서도 시선을 휘어잡는 조각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거장의 열정을 표현할 수 있는 조각가는, 그것도 기자인 막스 본인의 눈마저 속일 조각가는 더 더욱.
그는 급히 이 SNS 계정 주인의 다른 사진을 살폈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
너무도 고귀하고 성스러운 예수의 탄생 장면.
왜일까.
봄이 찾아 오기에 마음이 흔들려서일까.
아님 오늘도 압박을 주던 편집장때문일까.
성모 마리아의 따뜻하면서도 애잔하고, 푸근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 아기 예수님을 향해 손을 뻗는 동방의 박사들이 너무 야속하게 느껴질 만큼 말이다.
자신만 그렇게 느낄까 댓글을 살핀 그는 안도했다.
"말도 안 되지? 조각이 이 정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게?"
막스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이나 영화가 아닌 데 이런 감동을 주다니! 그리고 이런 조각가가 헤니히스도르프에 숨어 있다니!'
그는 벌떡 일어섰다. 지금 점심따위를 먹을 때가 아니었다.
"어디가!"
"너도 지금 생각하는 거! 나간다!"
다급히 달려가는 그를 빤히 바라보던 여성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헤니히스도르프도 이제 좀 떠들썩해지려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근교에 있음에도 낙수 효과를 전혀 누리지 못해, 그 때문에 조용하다 못해 죽어 가는 고향 헤니히스도르프.
친가가 있는 그곳을 떠올리며 여성은 미소를 지었다.
* * *
삭삭삭삭삭!
"으흐음."
현재 누가 찾아 오는지도 모른 채 얼마 전 야외에서 열린 결혼식을 그대로 재현한 거대한 조각상에 사포질을 하던 진호는 잠시 손을 멈추고 몇 발 물러서 잠시 작품을 감상했다.
가로 8미터, 세로 15미터, 높이
2.2미터의 거대한 조각품.
창고가 거의 꽉 찰 만큼 거대한 조각품 안에는 키스를 하기 위해 신부의 면사포를 드는 신랑과 신부 말고도 결혼식에 참가한 이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오직 하나의 암석만을 이용해 만든 경이로운 명작이건만 진호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다시 조각품을 주욱 훑은 그는 헛구역질을 했다.
"……어우 씨, 토 나와."
'이래서 사람은 술 먹고 약속 같은 걸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있구나!'
"이 씨……"
튀어나오려는 욕을 겨우 누른 진호는 10일 전에 열린 결혼식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뱉었다.
"그래, 내 잘못이지. 그놈의 빌어먹을 놈의 술이 웬수지. 난생 처음가 보는 지인 결혼식이라고 어? 완전 취해서 어? 완전 흥분해서 어? 스킬 습득까지 이제 한 작품만 남겨 둔 상황이라고 어? 내가 좋은 선물 줄게 어? 기대해 어? 야, 이씨-!"
술김에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거다.
"……아오오! 조각용 암석을 보내주는 업체에 전화만 안 했어도-!"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을 구른 진호는 이내 다시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창고에 겨우겨우 집어넣은 이 암석이 도착한 이후 만날 하는 자책이라서 이젠 금방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래도 이제 광택 작업만 마치면 깔끔해지겠네."
진짜 천으로 만든 면사포처럼 신부의 얼굴이 투영되는 것 같은 모습이나 흥겨운 분위기에 줄줄이 놓인 벤치 뒤를 뛰노는 동네 꼬마아이들, 벌써 음식에 손을 댔다가 황급히 박수 칠 준비를 하는 철없는 형들 등 이제 광택 작업만 마치면 스킬 습득이다.
"그나저나……"
진호는 따로 세워 둘 곳이 없어서 이 창고의 공터에 세워 둔, 공터를 꽉 채운 9점의 조각상들을 떠올리며 볼을 긁적였다.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던데……'
[스킬: 껍질 벗기기]는 지금까지 얻은 스킬들 중 몇몇 스킬처럼 스킬을 온전히 습득하지 않아도 그 스킬의 능력을 온전히 얻는 스킬이다.
즉, 4차 해금 조건을 해금했을 때 이미 스킬을 얻은 것이라고 봐야 했는데, [스킬: 껍질 벗기기]에다가 여러 예술 관련 스킬들이 시너지 효과를 내자 만든 본인조차 눈을 뗄 수 없는 대작들이 나왔다.
그렇다 보니 이미 그 조각상들은 이 동네의 명물처럼 되어 버렸다.
"아, 거기다가 9작품만 더 얹어서 중국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말이야……"
중국인이 좋아하는 8. 그 숫자에 맞춰 보낼까 생각 중이었다.
"박물관 규모 때문에 그 정도가 아니면 좀 곤란하고. ……끙, 이거 골치 아픈데."
팬들만 생각하자니 지난 시간 동안 밥이나 반찬도 모자라 옷도 가져다주고 서로 웃고 즐기며 정을 나눈 이웃들이 눈에 밟혔다.
이렇게 결혼식에 초대되어 더욱 그랬다.
낯선 이방인들을 정으로 대해 준 이웃들.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그들.
그리고 이쪽이 연예인임을 알아차렸는데도 너무 편하게 대해 주고, 소문이 나는 걸 막아 준 그들이 너무 고마워서 눈에 밟힐 수밖에 없었다.
"……에휴. 그냥 한 달 더 체류할까? 날씨도 아직 추운데?"
어차피 안식년은 9월 패션위크까지다.
폴란드에 갔다가 체코를 거쳐 오스트리아에서 다시 빈 소년합창단 아이들을 만나고, 다른 나라들을 구경하여도 시간은 넉넉했다.
"쯧. 이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네."
이렇게 말해도 진호는 이미 더 체류하며 작품을 더 만드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상태였다.
'만들고 싶은 작품들은 이미 구상을 마쳐 놓은 상태니까.'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서 영감을 받아 구상한 조각상들이나 리셋라이프를 할 당시 이 스킬을 얻으면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작품들.
그 숫자는 거의 50여 개에 달했다.
머리를 벅벅 긁은 진호는 광택작업을 위한 도구를 들었다.
삭삭!
'아.'
마른 천으로 마지막 물기를 닦은 진호는 갑작스런 몸의 변화에 손을 멈추고선 몸을 돌렸다.
후다닥! 드르르르르륵!
창고의 문이 활짝 열리며 뛰쳐나온 그는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끄아아아아! 끝났다-!"
'습득--!'
짹짹짹짹짹!
이제 봄이 다가오는 것을 알리는 듯 전깃줄에 앉은 이름 모를 새들이 뭔지도 모른 채 울며 축하해주자 풀썩 웃고만 진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 아직 해가 안 졌네?"
시계를 확인한 진호는 다시 웃었다.
이제 겨우 오후 3시였다.
꼬르륵!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점심을 안먹었구나……"
순간 눈이 멍하게 풀린 진호는 갑자기 아플 듯 주린 배를 부여잡은 채 간이 부엌을 만들어 놓은 컨테이너 사무실로 향했다.
저벅저벅. 멈칫!
"……확실히 잘 만들기는 잘 만들었단 말이지."
모든 예술 관련 스킬들의 시너지는 만든 본인마저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아, 니들 저기다 똥 싸면 진짜 혼난다."
"째액!"
"짹짹짹!"
"안 싸기는! 어제도 식겁해서 닦았구만! 니들이 싸질러 놓은 거 닦으려면 얼마나 귀찮은지 알아?"
"…….짹!"
"야! 왜 다들 외면해! 나 봐!"
그러나 새들의 고개는 다시 돌려지지 않았다.
한참을 노려보던 진호는 이내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소리를 쳐서 그런 지배가 더 고파진 것 같았다.
'아주 진짜 한 번만 더 그래 봐라. 잡아다가 지들이 싼 거 마빡으로 닦아 버릴……"
"뭐야, 여기 있잖아. 지노 리."
"응?"
'네가 왜 여기 있어?'라는 듯한 말투에 고개를 돌린 진호는 목에 카메라를 걸고 있는 30대 남성, 막스를 발견하곤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귀찮아지겠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