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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287화 (287/424)

12권 12화

부우웅! 까득! 까득!

달리는 허머 안, 주먹만 한 크기의 석고가 낡고 허름한 조각도에 의해 깎여나간다.

그걸 지켜보는 월터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 있지만, 진호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으흐흠!"

'역시 진품이 맞네.'

베를린 외각의 어느 작은 자선경매에서 얻은 오귀스트 로댕의 낡고 작은 조각도.

너무 작은 자선 경매에다가 경매에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 일반인이고 출품한 사람도 일반인이라 모두 반신반의했지만, 조각도를 손에 쥐자마자 3차 해금 조건을 해금한 진호는 알 수 있었다.

어떠한 표식이 없어서 진품임을 강력히 주장할 수는 없다 하여도 이것이 진품임을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3차 해금 조건을 해금할 수가 없고, 이 달리는 차 안에서 석고라고 해도 이렇게 손쉽게 조각을 할 수가 없었다.

[스킬: 위대한 언어]처럼 플라시보 효과이되 플라시보 효과가 아니다. 원래부터 재능을 가지고 있던 [스킬: 껍질 벗기기]의 주인공은 유명 조각가의 유품을 손에 넣음으로써 그 재능의 유무를 깨닫게 된다.

1차 해금 조건과 2차 해금 조건이 조각에 빠지는 단계라면, 3차해금 조건은 본인에게도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닫는 단계.

'문제는 조각품 300개 조각하기인 4차 해금인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푹나오고 마는 조건이었다. 그나마 조각품의 크기가 손톱보다 작아도 상관없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삭삭!

"오케이. 하나 완성."

사포질로 마무리한 석고 토끼 조각상을 훅 분 진호는 그 모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도착했습니다.

끼긱!

느릿하게 차를 세운 월터는 그제야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음?"

"지노, 너 정말……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그제야 아차 싶은 진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절단방지 장갑을 끼고 있어서 괜찮다고 말하면 더 혼나겠지?'

"죄송해요. 많이 걱정했죠?"

조각도를 얻게 되면서 흥이 너무 올랐던 것 같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발끈했던 월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후, 됐다. 내려. 다 왔어."

"죄송합니다……"

입맛을 다시며 내린 진호는 제법 커다란 창고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여기가……"

HU 에이전시 독일 지사에서 마련해 준 작업장이었다.

'외관은 제법 깔끔한데?'

창고 옆의 커다란 공터엔 제법 잔돌들과 잡초들이 있었지만, 깔끔히 치우면 꽤 괜찮을 것 같았다.

진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큰 건물이 없네요."

작은 2차선 길을 따라서 있는 주택들.

도시의 풍광이라고 생각하기 엔너무 한적했다.

"큰 건물은 아까 지나쳤어."

"그래요?"

"그래.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뭐, 인구가 겨우 2만 6천 명 정도인 작은 도시에 큰 건물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냐마는 말이지."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월터의 말처럼 인구가 고작 2만 6천여 명에 불과한 헤니히 스도르프라는 작은 도시다.

하펠 강이라는 커다란 강의 지류에 있는 작은 도시.

마치 해가 질 무렵시골의 정경처럼 한적한 길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왜인지 강의 물비린내가 풍겨 오는 것 같았다.

월터는 조용히 눈을 감는 진호를 보며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지노. 정말 여기서 3개월이상 체류할 생각이야?"

"최소 그 정도는 체류할 생각이에요."

'스킬을 완전히 얻고, 중국에서 지어지고 있는 내 박물관에 보낼 작품을 만들 때까지.'

"음, 그러고 보니 월터는 좀 지루하겠네요. 괜찮으시겠어요? 잠시 미국에 다녀오실래요?"

"그럴 리가."

월터는 히죽 웃었다.

"공으로 월급을 받는 건데 나야 무조건 찬성이지. 얼마 전에 가족들을 만났으니 미국엔 가지 않아도 되고. ……한곳에 있는 거니까 맥주를 쌓아 두고 마셔도 되지?"

"푸하핫!"

"어머, 안녕하세요. 여행 오셨나봐요."

고개를 돌린 진호와 월터는 이제 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의 손을 잡은 채 호기심과 경계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30대의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호는 최대한 온화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이 창고에서 얼마간 생활하게 된 한국에서 온 이진호입니다. 이쪽은 제지인인 월터고요."

여성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저 의류 창고에서요?"

'아, 의류 창고였나 보구나.'

"정확히는 저기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할 예정이지만요."

진호는 창고 옆 허름한 컨테이너 사무실을 가리켰고, 여성은 눈이 대번에 의심과 짙은 경계심을 머금었다. 그걸 모른 척한 진호는 재빨리 아이 앞에 쪼그려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하세요!"

'오?'

또래의 아이답지 않게 굉장히 붙임성이 있었다.

"우리 예쁜 꼬마 아가씨는 몇 살이야?"

"6살! 요한나입니다."

"이름도 예쁘네. 자, 이건 씩씩하게 대답해 준 것에 대한 이 아저씨의 선물."

아이의 눈이 반사적으로 엄마를 찾자 진호도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방금 조각을 끝마친 토끼 조각품을 내밀었다.

"제 소개가 좀 완벽하지 않았네요. 한국에서 온 예술가 이진호라고 합니다."

"……어머나!"

눈과 코가 하얗지만 않았더라도 정말 토끼라고 믿을 정도로 정교한 주먹만 한 크기의 하얀 토끼조각품.

그녀의 눈에 서린 의심과 경계가 사르르 녹아 버렸다.

"예술가요?"

"네, 한적한 곳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작품 활동을 좀 해볼까 싶어서요."

"아아, 그러시구나.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진호의 얼굴을 본 그녀는 이해할수밖에 없었다.

'아마 한국이라는 곳에서 엄청 유명한 조각가겠지.'

원래 잘 생긴 사람은 뭘 해도 유명해지는 법이니 말이다.

여성은 자신의 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요한나는 활짝 웃으며 양팔을 뻗었다.

그에 진호도 웃으며 그 고사리같은 손 위에 토끼 조각품을 올려놓았다.

"석고라서 잘 깨지니까 조심히 가지고 놀아야 한다."

"네! 감사합니다!"

"예쁜 아가씨가 인사도 잘 하네."

진호는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요한나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 그림 같은 모습에 여성은 푸근히 웃었다.

그녀는 더 이상 진호를 경계하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 두 명만 사는 건가요?"

"네."

"그래요?"

진호는 눈을 빛내는 그녀의 모습에 의아해했고, 그 기색을 알아차린 여성은 호호호 웃었다.

"저기 저 대각선에 있는 집이 제가 사는 곳이니까 이 동네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러 오세요."

"아…… 감사합니다."

'이게 시골 인심인가?'

진호는 살짝 감동했고, 여성은 웃으며 돌아섰다.

몸을 돌려 손을 흔드는 요한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월터는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이런 도시에도 이웃의 정이라는 게 있나 보군."

"그러게요……. 그럼 우리도 이만 움직이죠. 안을 확인해 봐야 청소를 할지, 뭐가 필요할지 생각할 수 있으니까."

"끙. 빌어먹을 청소……"

진호는 실실 웃으며 컨테이너 사무실을 향해 걸었고, 월터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뒤따랐다.

* * *

키이이이잉!

베를린 근교 작은 도시의 커다란 창고 같은 공간, 그라인더가 맹렬하게 돌아가며 높이 2.5미터, 너비3미터의 돌을 깎아 낸다.

어느 옛 양식의 옷을 입고 무릎을 꿇은 사내의 깡마른 발목.

노동자의 거친 발이 이럴까.

아님, 오랜 여정에 지치고 지친 발이 이럴까.

피로와 풍파를 가득 담은 그 발은 왜인지 경이를 담아 조심스럽게 바닥에 닿아 있고, 그 모습을 세심히 조각해 가는 진호의 두 눈은 쓰고 있는 고글에 돌가루가 튀어도 작은 흔들림 없이 고요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코끝을 스치는 희미한 바비큐 냄새에 진호의 몰입은 깨져 버리고 말았다.

'아, 배고파.'

키이잉!

"……후-."

몰입이 깨지자 뒤로 물러서며 고글과 마스크를 벗은 진호는 목에 걸린 작은 조각도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창고의 문이 열리며 월터와 몇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헤이, 지노. 밥 먹…… 왓더……"

"지노, 우리 왔……"

크게 외치던 월터는 그대로 넋을 놓았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벽에 힘겹게 등을 기댄 여성이 거친 포대에 싸진 아이를 힘겹게 바라보는 모습이 형상화된 조각상.

하지만 그 입가에 걸린 미소와 퉁퉁 부은 눈에 담긴 애정과 아이를 조심스럽게 받치고 있는 그 팔이 너무도 성스럽고 아름답다.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동방박사들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그녀의 모습은 존귀하고 또 고귀했다.

마치 세상 모든 어머니처럼 말이다.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그들은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양손을 모았다.

진호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3차 해금과 4차 해금을 해서 다행이었다.

정확히는 4차 해금을 하면서 손의 감각이 더 예민해지고, '결'을 느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이 정도의 완성도를 보이는 조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노!"

"음?"

"나 이거 찍어도 돼?"

20대의 한 사내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묻자 다른 이들도 눈을 빛냈다.

진호는 손을 저었다.

"에이, 아직 완성되려면 멀었어. 완성되면 찍어!"

"당연히 완성될 때도 찍어야지!"

"그럼! 아니, 이런 명작은 아예 영상으로 남겨야 해! 디터, 네 캠코더 가져와!"

동감이라는 듯 다른 사람들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진호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억지로 다시 손을 저었다.

작은 겸손이 스며 있지만, 정말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품이라 좀 부끄러웠다.

"명작은 무슨……. 아무튼 헤니히스도르프의 사람들은 너무 표현이 과하다니까."

진호가 이곳 헤니히스도르프에 잠시 자리를 잡으며 친분을 맺게 된 이웃 남성들이 펄쩍 뛰었다.

"과하다니!"

"맞아! 이 작품을 보고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놈이 미친 놈이야!"

"돌아 버리겠네! 동양인은 왜 이렇게 겸손이 심한 거야!"

덩치 큰 사내들이 방방 뛰자 진호는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자, 갑시다. 나 배고파요."

"지금 배고픈 게 문제야?"

"네, 저한테는 문제입니다. 오늘 메뉴는 뭐예요?"

"소시지와 바비큐에 맥주…… 아니, 이게 아니라!"

"오, 맛있겠네요. 자, 갑시다-."

진호는 그들을 끌고 창고를 나섰고, 사람들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뒤따랐다.

그래도 너무 아쉬워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그걸 알아차렸지만, 슬그미니 모른 척한 진호는 창고 옆 공터로 향했다.

그것이 어떤 상황을 불러일으킬줄도 모른 채 말이다.

그렇게 몸에 묻은 돌가루를 퍽퍽 털며 창고 옆으로 향한 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와아아!"

"까르르!"

깨끗하게 치워진 공터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과 그런 그들에게 '뛰지 마라, 다친다.'라고 외치면서도 흐뭇한 미소로 고기를 뒤집는 남성들과 수다를 떨며 테이블 위에 접시를 올리는 여성들.

모두 이곳 작은 거리의 따뜻한 이웃들이었다.

"지노, 왔어? 어서 와서 앉아! 다 구워졌어!"

"지노-!"

손을 흔드는 그들을 향해 활짝 웃어 준 진호는 그릴과 가까운 자리에 앉으며 차가운 병맥주를 땄지만, 진호에게 끌려온 사내들은 아니었다.

"지금 한가롭게 고기를 구울 때가 아냐! 어서 창고 안에 들어가봐! 지노가 엄청난 걸 조각하고 있어!"

'억?'

"자, 잠깐……!"

"뭐? 지노가?"

"그래? 아침부터 시끄럽더니 드디어 진짜 작업을 시작하는 건가?"

진호는 창고 안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그들이 조금 빨랐다.

"…….오오오!"

"오, 하느님!"

"와아! 예쁘다!"

"엄마, 나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아!"

'……끄응.'

갑자기 쥐구멍에 숨고 싶어진 진호는 모른 척 맥주를 입에 가져갔고, 짧은 감상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은 그런 진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처음엔 우리 동네에 웬 영화배우가 휴양을 온 줄 알았는데…… 이 정도의 조각가였다니……"

"난 그 조각품들로 환심을 사서 이 조그만 동네에 숨으려는 사기꾼인 줄 알았잖아요. 평범한 집도 아닌 여기 창고에 살고."

"그랬지. 그래서 난 우리 한나에게 그런 조각품을 주며 웃기에 저놈을 몽둥이로 패 버릴까 싶었지."

"맞아. 한나가 올해 15살이지?"

'쿨럭!'

뛰어난 청력으로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은 진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그래서 처음에 그렇게 경계한 건가? ……하긴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있겠네.'

4차 해금 조건인 '조각품 300개 만들기'.

최대한 빨리 해금해 버리기 위해 주먹만 한 크기의 조각에 열중했는데, 한 보름쯤 지나자 더 이상 창고 안에 둘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버렸다.

그래서 주위 이웃들과 친해지고자 작은 조각품들을 나눠 주었다.

5차 해금 조건 때문에 시끄러워질 게 뻔했기에 일종의 뇌물을 준 것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저기 디터 조카 때문에 지노가 엄청 유명한 사람인 걸 알게 돼서 얼마나 놀랐는지……"

"어? 난 그럴 거라고 대충 생각했는데……. 지노 외모가 어디 보통 외모야?"

그에 경계를 모두 푼 사람들은 그동안 냉정하게 대한 부분이 미안해져 이곳을 들락날락거렸고, 그결과 어느새 이곳 창고의 공터는 이 동네 주민의 사랑방처럼 변해버리게 되었다.

'끄으응.'

더 이상 듣다가는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아진 진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밥 안 먹어요? 배고파요!"

"……푸하하하핫!"

"그래, 우리 지노가 밥을 먹자는데 먹어야지!"

"자! 다들 앉읍시다! 지노의 배가 등에 달라붙기 전에!"

"하하하하핫!"

자리에 앉은 그들은 이내 곧 고기와 맥주를 즐기며 왁자지껄해졌고,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진호도 맥주를 입 안으로 기울였다.

'5차 해금 조건임과 동시에 스킬완전 습득 조건인 중형 이상 조각상 10개 만들기……. 이틀에 한 개씩 20일 안에 해치운다.'

진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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