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11화
찰칵!
"오! 좋은데요? 한번 봐 보세요."
유명 극작가 쉴러의 동상 앞에서 포즈를 잡았던 아르노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다가와 진호의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역시 사진을 많이 찍혀 본 태가 나는데요?"
"허흠. 그런가?"
이렇게 사적인 사진은 거의 찍어본 적이 없는, 어떤 이의 사진 요청도 일종의 비즈니스였던 아르노는 LVMH의 브랜드가 아닌 등산복을 입은 채 동상 앞에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썩 낯설게 느껴졌다.
"저도 찍어 주세요!"
"음? 아냐, 아냐. 난 사진 찍는 재주가 없어."
"에이, 못 찍으면 어때요. 이런 곳에 왔다는 흔적만 남기면 되는거지. 부탁드릴게요!"
핸드폰을 아르노에게 맡긴 진호는 재빨리 쉴러 동상 앞에 서서 브이를 그렸고, 찍힌 적은 많아도 순수한 의도로 남을 찍어 본 적이 없는 아르노는 어색함에 안절부절못했다.
"저 팔 아픈데요!"
"아, 음. 크흠!"
몇 발 뒤로 물러난 아르노는 핸드폰을 들었다.
"그, 그럼 찍겠네! 자…… 하나, 둘!"
찰칵!
진호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나자 재빨리 다가와 핸드폰을 보았다.
"이건……"
"우와!"
이목구비가 하나도 나오지 않고, 구도도 어설픈 사진.
아니, 쓰레기였다.
수 많은 잡지, 화보 사진들을 보아온 아르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상하게 찍혔군. 지우도록 하지!"
사진을 못 찍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렇게 못 찍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아르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진을 지우려고 했지만, 진호는 재빨리 핸드폰을 뺏었다.
"뭘 지워요. 잘 나왔는데! 자, 그럼 이번엔 저쪽으로 가요!"
"아니, 그래도……"
"자, 자. 자, 자."
힘을 이기지 못해 떠밀리듯 이동하게 된 아르노는 이내 곧 당황을 수습하곤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왜인지 몰라도……'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그리고 즐거웠다.
'이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여행인 건가?'
아르노는 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고, 진호는 힘이 빠지는 아르노의 몸에 싱긋 웃었다.
'이런 게 여행이고, 힐링이지.'
예쁜 건물이나 조형물,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맛있어 보이는 것을 입에 넣는 여행.
하지만 아르노와 같은 이들은 같이 돌아다니는 수행원들 때문에 체면상 하기 힘든 여행이다.
그걸 경험하게 해 주고 싶었던 진호는 그렇게 아르노를 끌고 타누우스 공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 다가 더 이상 함께 찍을 조각상이 없자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으로 향했다.
'1차 해금 완료.'
1차 해금 조건은 '타누우스 공원의 모든 동상 및 조각상 둘러보기'였다.
그렇다. 이번에 진호가 얻을 스킬은 조각 관련 스킬이었다.
"아……"
경건함이라는 게 이런 걸까.
강제적으로 침묵을 요구하는 듯 한 대성당의 내부에 들어선 진호는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뮤즈?"
아르노는 그대로 멈춰선 진호를 불렀지만, 진호는 답을 하지 못했다.
스킬이 2차 해금되는 그 충격 때문인지 온갖 예술 관련 스킬들이 대성당의 아름다움에 취해 영감을 폭발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만요. 정말 죄송해요."
"음? ……아."
모자를 벗어 가슴에 가져갔던 아르노는 푸근히 웃으며 다녀오라고 손을 저었고, 진호는 재빨리 근처의 팬시점으로 달려가 드로잉북을 사 왔다.
그리고 폭발한 영감이 재가 되어 사라질까 양손으로 미친 듯 그림을 그리고, 악상을 써 내려갔다.
진호가 작업하는 모습을 처음 본아르노는 빠르게 완성되어 가는 그림과 악상에 눈을 부릅떴다.
'허어……'
드로잉북을 가로로 기울인 채 바닥에 주저앉아 왼손으로 음표를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음악과 미술. 표현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예술을 한꺼번에 토해 내는 모습은 경이 그 자체였다.
'이래서 외계인이라 불리는 건가……'
숨 소리마저 죽인 아르노는 이 기이한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고, 그에 신부가 난처한 얼굴로 다가오자 조용히 드로잉북을 가리키며 침묵의 제스처를 취했다.
드로잉북을 본 신부는 눈을 부릅 떴다가 이내 옅게 웃으며 조용히 물러났고, 사람들은 계속 그림을 그리고 악보만 써 내려가는 모습에 금세 질려 대성당 구경을 마저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갔다.
사각, 사각! 파락파락!
미친 듯 그림을 그리고, 미친 듯 악상을 써 내려가던 진호는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길 수 없게 되자 그제야 영감의 불길에서 벗어날수가 있었다.
"아."
잔뜩 아쉬워하던 진호는 주위를 둘러보곤 하얗게 질렸다. 창문 밖이 어둡고, 주변이 인조등으로 환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옆에서 조용히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아르노를 보곤 재빨리 일어났다.
"죄, 죄송……"
우두둑!
"윽!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보여 줄 수 있겠나?"
"예, 여기!"
진호가 넘긴 드로잉북을 받아 들어 내용물을 살핀 아르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숨이 막힌다는 게 이런 걸까.
완성된 곡의 음표들이, 채색만 앞둔 그림이 거대한 무언가가 되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 내가 압도 될 정도라니!'
성모 마리아의 조각상을 스케치한 듯한, 아니 이곳에 없는 순수창작으로 만든 성모 마리아의 그림조차도 가슴을 묵직하게 울린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런 대작들을 겨우 5시간 만에……"
"죄송해요……"
진호는 정말 미안해서 고개를 들수가 없었다.
'아나, 이 씨! 이건 모두 2차 해금 때문이야!'
'프랑크푸르트 대성당 둘러보기'라는 2차 조건을 해금하며 예술적인 감각이 한층 더 진보했다.
그 작은 충격이 영감의 폭풍 속에서도 중심을 지킬 줄 알던 진호의 부동심을, 온갖 스킬과 경험으로 만들어지고 단련된 자제력을 쓰러트려 버렸다.
울고 싶어진 진호는 드로잉북의 페이지를 느릿하게 넘기는 아르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탁! 움찔!
"천재의 작업을 직접 곁에서 보게 되어 영광이었지만……"
아르노는 흐뭇이 웃었다.
"이 중 한 개를 완성시켜 보내준다면 모든 걸 용서하도록 하지. 난 여기 첫 번째 연탄곡이 가장 마음에 드는군. 아, 너무 과한가?"
심장이 쫄깃쫄깃해졌던 진호는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당연하죠! 유럽횡단이 끝나면 바로 보내 드릴게요. 그리고 거듭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린 진호는 드로잉북을 챙기다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신부를 보곤 아차 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형제님을 방해할 수는 없죠. 그보다 하나님의 축복은 온전히 수습하셨습니까."
"아……. 네!"
온전히라고는 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수습했다. 뼈대는 완벽하게 세워 뒀기에 나중에 이어 작업할 수 있었다.
환하게 웃은 진호는 다시 아차했다.
"혹시 오선지를 빌릴 수 있을까요?"
"오선지요?"
"네."
진호는 불이 환하게 켜진 대성당을 둘러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얻은 것들이니 어느 정도는 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마음 같아선 이 성모상이나 예수상을 조각해 드리고 싶지만……"
그래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또한 아직 스킬을 온전히 얻지 못해서 졸작이 나올 수도 있다. 조각이란 작은 실수조차 결코 다시 되돌릴 수가 없는 까다로운 예술이니 말이다.
"예?"
"죄송하지만……"
아르노는 이쪽을 보는 진호의 모습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신부에게 다가간 진호는 드로잉북을 펼쳐 깨알처럼 작게 음표를 그린 곡들을 보여 주었다.
"이, 이건?"
신부로서 수 많은 성가의 악보를 봐 온 그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성가로군요."
그것도 너무 훌륭한 성가였다.
악보만 보아도 그 웅장함과 경건함이 심장을 휘감고 있었다.
"네. 따로 오선지를 빌려주시면 가사까지 적어 드릴게요."
"가사도 있단 말입니까?"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오늘은 악보만 적어 드리고, 보름 뒤에 곡을 작업해 보내드릴게요."
"허어……"
진호의 맑고 깊은 눈동자를 보며 감탄을 터트린 신부는 대성당 정면 예수상을 보며 마음을 정리했다.
"……신부로서 욕심을 내면 안되지만, 이건 욕심을 낼 수밖에 없군요."
"신부님의 말처럼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해 주세요."
"……그렇군요. 하나님의 축복."
왜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진호가 무척이나 커 보였다.
'그래. 이 형제분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물이구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조용히 성호를 그은 신부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빈 오선지를 가져왔고, 진호는 그 위에다가 음표와 가사를 적었다.
"끝. 여기 있습니다."
"……."
"신부님?"
"……형제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네? 아뇨, 괜찮아요. 이건 하나님의 선물이잖아요.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단호하면서도 간절한 신부의 모습에 난처한 듯 볼을 긁적이던 진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진호. 한국에서 온 이진호입니다."
* * *
"아쉽군."
베를린의 국제공항에 선 아르노는 조용히 지난 10일간의 여정을 떠 올렸다.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서 목격한 경이로운 모습.
마치 정말 하나님이 축복과 같았던 그 경이를 목격한 이후의 여행은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원가를 절감하거나 기업을 싸게 살 줄 알았던 그가 거리의 좌판에서 흥정을 해 보고, 기억을 잃을 때까지 취하기도 하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독일 3부 리그 팀을, 낯선 사람들과 낯선 장소에서 응원해 보기도 했다.
새롭거나 새롭지 않은 장소에서 찍어 남긴 사진이란 흔적들이나 진호와 함께 먹은 음식들은 또 어떤가.
'분명 저급한 식재료로 만든 것들인데, 왜 그렇게 맛이 있던지……'
뭐랄까. 지난 10일 동안 꿈속을 여행한 것 같았다.
"언제 또 이럴 수 있을까."
"뭘 또 언제예요. 시간만 만드시면 언제든지 할 수 있죠. 캘러 씨와도 다녀 보세요."
"……허헛. 그렇군. 이 재미가 다시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번과는 또 다른 재미를 느끼실 거예요. 캘러 씨와 아르노씨는 부부잖아요."
"허헛. 그런가?"
진호는 그럴 거라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고, 잠시 미래의 어느 날 캘러와 단둘이 떠날 소박하지만 따뜻한 여행을 떠올린 아르노는 슬그미니 모자를 끌어 내리며 호선을 그리는 입가를 숨겼다.
"크흠.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조심히 들어가세요. 9월 패션위크 때 될 게요."
"……그건 아쉽군."
진호는 3월과 6월의 패션위크에 불참하기로 했다.
한숨을 푹 내쉰 아르노는 전보다 훨씬 밝아진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강제적으로라도 패션위크에 참가시키지 않을 보람을 느낄만큼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으면 좋겠군."
"……왜인지 마음껏 사고를 치라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들렸다면 그게 맞겠지. 아니, 그것도 좋겠군. 뮤즈가 이슈가 되면 자연스레 내 회사들도 부각될 테니까."
정색했던 아르노는 이내 장난이었다는 듯 피식 웃었고, 그건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악수를 하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저벅저벅!
"지노."
"아, 배웅은 잘 했어요?"
"…… 고마워."
최고급 호텔에 최고의 음식들.
최고, 최고, 오직 최고만을 위해 짜여졌던 코스들.
아르노와의 여행이 소박하지만 행복한 여행이었다면, 월터와 그의 가족들은 부자들이나 할 법한 최고급 럭셔리 여행이었다.
그걸 진호가 모두 결제했다.
그리고 두 팀은 첫날 저녁 함께 술잔을 기울인 이후 여행하는 내내 결코 만나지 않았다.
"정말…… 고마워."
"뭘요. 이제부터 많이 힘들어질 텐데요. 짜증내지 말라고 드리는 뇌물이었어요."
"걱정 마! 내가 뭐부터 하면 되지?"
"일단…… 베를린에 있는 경매장부터 뒤져 보죠."
"경매장?"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얻을 스킬의 3차 해금 조건은 '유명 조각가의 유품 획득'이었다.
[스킬: 껍질 벗기기]
[조각은 마음의 형상을 깎는 게 아니다. 재료 속에 숨어 있는 상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뿐이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