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10화
새해의 아침을 부모님과 보낸 진호는 친가와 외가의 조부모님들과 춘자 할머니 등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모시고 온천 여행을 다녀온 후 다시 유럽횡단 여행길에 올랐다.
아쉽게도 서형은 같이 떠나지 못했다.
"오우……"
스위스 관광청소속 고위 공무원은 진호가 보여준 사진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따스한 햇살아래 산속 작은 마을을 향해 둘레길을 걷는 배낭객들과 눈 덮인 산속 잿빛 바위에 올라 뒤를 돌아보는 귀여운 붉은 여우 한 마리, 모닥불 옆에 모여 기타를 든 진호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시라소니와 늑대, 붉은 사슴, 토끼, 가면 올빼미 등.
영화 속 CG로 만든 장면이 이럴까.
아님 동화 속 나라가 이럴까.
한 장 한 장이 스위스에 여행을 오고 싶어 미치게 만드는 사진들이었다.
"정말 이런 작품들을 무상으로 저희 스위스에 기증하신다는 겁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값을 치루셨죠. 무리한 부탁이었음에도 흔쾌히 허락해 주신 덕분에 스위스와 알프스의 이곳저곳을 살필 수 있었으니까요……. 음?"
잠시만이라며 양해를 구한 진호는 카메라 가방을 뒤져 사진 몇장을 꺼내었다.
"이, 이건?"
"스위스하면 시계와 은행이잖아요. 시계를 만드는 장인의 모습이나 은행사진들도 몇 장 찍어 봤는데, 깜빡 했네요."
깜짝 놀랐던 공무원은 신을 찾았다.
어두운 공방에서 시계를 만드는 장인의 모습과 거리에 서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은행들.
바쁘게 시계를 판매하는 편집숍의 모습도 있었다.
"훌륭합니다. 정말 훌륭합니다."
공무원은 진호의 손을 꽉 붙잡으며 흥분했다.
'아뇨. 덕분에 훗날 스킬을 얻을 때 필요한 인맥을 쌓아 두었으니까요.'
이곳 스위스에서도 얻을 수 있는 스킬이 있다.
바로 시계 제작 관련 스킬이다.
아르바이트생으로 시계 공방에 취직했다가 결국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시계 브랜드를 창립하는 스토리의 스킬.
다만 와인 제작 관련 스킬만큼이나 스킬을 얻기가 무척이나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뒤로 미뤄 둘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곧 아르노와 만나야 하니 말이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니, 벌써 가시려고요!"
"독일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이 있어서요."
"아, 그런……."
"다음에 또 들를게요. 그땐 꽤 오래 있을 겁니다."
여지를 주지 않는 진호의 모습에 공무원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진호에게 이별의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저희 스위스는 언제나 미스터 리의 방문을 환영할 것입니다."
"좋은 것들을 보고 갑니다."
진호는 옅게 웃으며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공무원은 아차하며 진호가 준 메모리칩과 사진들을 챙겨 청장실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이날 이후, 스위스 관광청 홈페이지와 관광 팸플릿 속 사진들이 바뀌었다.
한편 관광청을 나온 진호는 차에 오르며 기지개를 폈다.
"아쉽지 않아? 셈을 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사진들이잖아."
진호가 스위스 관관청에 넘긴 사진들에는 오직 진호만이 찍을 수 있는 사진이 꽤 있었다.
특히 야생의 초식 동물과 육식동물, 그리고 인간까지 함께 어울려 노는 사진은 진호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희귀해, 세계 유명 잡지사들이 저들끼리경매를 하여 사 갈 정도였다.
월터가 인상을 찌푸린 채 묻자 진호는 피식 웃었다.
"아쉽긴요. 쓸데없이 이진호가 머문 숲, 이진호가 걸은 올레길 등 괴상한 관광 상품이 개발되어 나 믿고 찾아 온 사람들로 하여금 후회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낫죠. 거기다 앞으로 다른 나라에서 무슨 일을 할 때 허락받기도 쉬울테고요."
허락. 이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스위스 관광청에서 내 사진을 쓰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지만……. 그럴 확률은 적지?'
그만큼 고위 공무원의 반응이 좋았다.
거기다 공짜에다가 스위스가 베풀어 준 은혜를 갚는다는 스토리텔링까지 있다.
쓰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렇군. 그런 게 있었어. 허, 유명한 기자들이 왜 어디든 프리패스인지 이제야 알겠어."
진호는 하나의 일을 진행할 때 몇 가지의 노림수를 집어넣는 진호를 경이롭다는 듯 보았고, 진호는 히죽 웃으며 데시보드를 탕탕쳤다.
"자, 이제 독일로 출발합시다! 부인과 따님을 만나러 가야죠!"
독일에서 만나기로 한 일행은 예전에 월터와 약속한 그의 부인과 딸이었다. 그리고 아르노도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밟지."
부아앙!
급히 도로를 향해 튀어 나가는 차에 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베른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다.
* * *
프랑크푸르트의 공항.
게이트를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월터는 열리는 문을 통해 빠져나오는 두 여성을 보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야, 여기! 에밀리! 안나!"
"아빠-!"
"월터!"
젊었을 적 꽤나 인기가 있었을 법한 외모와 통통한 몸매를 지닌 40대의 여성과 그런 그녀와 월터를 빼다 박은 귀여운 외모의 여성.
후다닥 달려간 월터는 몸을 날리는 딸을 온몸으로 받았고, 한손으로는 부인을 끌어안아 품에 가뒀다.
그렇게 몇 년 만에 만난 세 가족은 그동안의 이별 아닌 이별에 서운했던 마음이 가실 때까지 서로를 끌어안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월터, 당신의 고용주는 어디 있나요?"
"응, 응! 내 학비를 주신 그분은? 지노는?"
"……네 학비는 내가 준 거다, 에밀리."
"그런 의미가 아닌 걸 알잖아요, 월터."
"끙."
혀를 찬 월터는 한쪽을 가리켰다.
"다른 터미널에 있어."
지이잉!
진호는 열리는 게이트를 통해 평범한 옷차림으로 걸어 나오는 아르노를 발견하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옷차림을 발견하곤 입을 떡벌렸다.
"아, 아르노 씨?"
"어때, 어울리나? 한국에선 이렇게 입는다고 해서 입어 봤는데."
진호는 등산 바지와 구스다운, 거기다 등산모까지 쓴 아르노의 윙크에 빵 터져 버리고 말았다.
"푸하하하하핫! 한국인이라고 해도 믿겠네요!"
"이 나이엔 조금만 찬바람을 맞아도 뼈가 시려. 저번에 입고 보니 한국인들이 왜 평소에도 등산복을 입고 다니는지 알겠어."
"잘 생각하셨어요."
"흠. 그런데 자네 경호원은 안 보이는군."
"다른 터미널에서 가족들을 만나고 있어요. 먼저 숙소로 갈 거예요."
"호. 그럼 난 뮤즈가 운전하는 차를 처음 타는게 되는 건가? 이건 캘러나 피에트로보다 내가 먼저 해 보는 것이겠지?"
"……푸핫!"
진호는 배꼽을 잡고 쓰러졌다.
아르노는 그런 진호를 보다 피식 웃었고, 한참 동안 몸을 들썩이며 웃던 진호는 겨우 진정하고 일어섰다.
"하아아, 가요. 짐 풀고 식사하셔야죠. 배고프시죠?"
"메뉴는?"
"독일에 왔으니 소시지와 학센에 수제 맥주 한잔이죠."
"……훌륭하군. 그런데 나 혼자 술을 마셔야 하는 건가?"
"가이드, 아니 HU 에이전시에서 드라이빙 매니저를 파견해줬어요. 예약한 식당으로 올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아르노는 발을 성큼 내딛었다.
"차는 어느 쪽에 주차했지? 주차장?"
진호는 다시 한번 몸을 들썩였다.
아르노의 목소리가 너무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급하세요. 천천히 가요, 천천히. 시간 많아요."
"……어흠."
속으로 웃음을 삼킨 진호는 차가 있는 방향을 향해 발을 뗐다.
"이쪽이에요."
고개를 끄덕인 아르노는 가슴 쪽을 툭 치고 손목의 소매를 끌러내리며 진호를 따랐다.
'수행원 없는 여행이라 긴장하셨나 보네.'
"스위스."
"음?"
"스위스 관광청에 걸린 사진들, 훌륭하더군."
"……아, 그게 벌써 업데이트됐어요?"
"업데이트만 됐다 뿐일까."
홈페이지가 아예 뜯어고쳐졌다.
그것도 진호의 사진 풍에 맞게 말이다.
관공서의 홈페이지 디자인은 웬만해선 바뀌지 않는 걸 봤을 때,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들어오는 정보에 의하면 관광 팸플릿과 가이드북 역시 새롭게, 이전과 다른 스토리를 가진 채 제작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아르노의 설명에 진호는 잠시 멍해졌다.
프랑크푸르트까지 올라오는 2주동안 엄청난 일이 생겨 버렸다.
"그렇구나……"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군."
"관광 가이드북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관광 가이드북은 정말 대형 프로젝트다. 그렇게까지 일을 진행할거라고는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
"……확실히 스위스가 몸이 달긴 했지. 시계 관광객과 탈세자들이 계속 감소하고 있는 추세니까."
"그렇기는 하죠. 시계도 시계지만, 사람들은 몇 번이나 계좌를 공개한 스위스보다는 다른 3국을 이용하게 됐죠."
"그렇지. 그래서 덕분에 나도 좀 귀찮아졌어."
진호는 의아해했다.
"프랑스 정부 관계자, 정확히는 프랑스 관광청이 자넬 원하더군. 스위스 관광청 홈페이지가 바뀐후로 스위스 관광 예약이 5퍼센트나 증가했으니까. 지금도 계속 증가하는 추세고."
뒷목이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등이 축축해져 갔다.
"……다미앙 씨한테서 연락 안왔는데요."
"바빠서 연락을 못하는 거겠지. 지금 쯤 각국에서, 관광객이 예년보다 감소하는 곳들에서 연락하고 있는 중 일 테니까. 얼마나 좋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예인이 돈조차 받지 않고 사진을 찍어 주는데……. 나라도 섭외하고 싶을 거야."
진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산 넘어 산이라니……"
'하. 내 운빨 진짜. 아니면 전국수석 스킬이 맛이 간 건가? 셜록의 후예와의 시너지라면 충분히 추론 가능한…… 아니지. 변명이지.'
포르투에서의 일을 깔끔하게 잊어버린 정신머리가 문제였던 것이다. 갑자기 우울해진 진호는 고개를 푹 숙였고, 아르노는 그런 진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정말 하늘의 운이 따르는 건가.'
청와대 연말 초청 파티는 아르노조차 기사를 접하자마자 웃음을 터트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주석으로 향하는 엘리트코스라는 중앙서기처 제1서기, 영국과 스페인 왕실.
이뿐만이 아니다.
포르투갈에서는 와인 회사들이, 패션계에서는 샤넬을 비롯한 기업들이 욕심을 냈으며, 이젠 각국의 관광청마저 욕심을 내고 있다.
이젠 죽이는 것 말고는 진호를 어찌 할 방법이 없어졌다.
그런데 그조차 여의치가 않다.
'한국에 이런 속담이 있다던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딱 앙트완과 델핀의 상황이었다.
자식들에게는 썩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르노는 이제 진호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기로 했다.
* * *
숙소에서 월터의 가족들과 만나 인사를 나눈 진호는 그들과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월터의 가족들은 결사반대를 외쳤지만, 진호가 억지로 밀어붙였다.
'가족 여행은 가족끼리 다녀야 하는 거지.'
몇 년 만에 만난 이들이다. 그들만의 시간을 가지게 둬야 했다.
"프랑크푸르트에 이런 가게가 있었군."
"괜찮죠? 이곳 출신 모델 친구가 알려 준 곳인데, 그 애 말로는 이곳이 프랑크푸르트 최고 맛집이래요."
독일의 전통 족발요리인 슈바인학센을 썰어 입에 집어넣은 아르노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어찌 보면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할 수 있는 오후 3시임에도 제법 큰 가게 안이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모두 한 손엔 샛노란 맥주가 담긴 컵을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엔 소시지나 슈바인 학센이 꽂힌 포크를 들고 있다.
'대체 얼마 만에 이런 곳에 오는거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고등학생 시절, 인생 최고의 일탈을 해보자며 갔던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나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썩 낯설고 당황스럽지만, 옛 기억이 아련히 떠올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크아-!"
"크-! 예거! 여기 맥주 한 잔 더!"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에 절로 목이 말라져 맥주를 들이켠 아르노도 '크-!'감탄사를 토해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진호는 그런 그를 보며 흐뭇이 웃었다.
"괜찮으세요?"
"……괜찮군."
진호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는 소시지를 크게 썰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우둑우둑 탄력적으로 씹히는 육질이 폭발하듯 뿜어내는 짭짤한 육즙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육즙을 황급히 닦아 내며 겨우겨우 소시지를 씹어 삼키자 손이 저절로 맥주잔을 잡아 갔다.
진호는 그걸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맥주를 들이켰다.
꿀꺽꿀꺽! 탕!
"크아아-! 죽이네! 여기 같은 걸로 한 잔 더요!"
"……푸하하하핫!"
"그렇지! 맥주와 소시지는 그렇게 먹어야지!"
"동양인이 독일을 즐길 줄 아는군!"
"독일에 온 걸 환영하네, 젊은이!"
순간 조용해졌다가 터져 나온 주위의 환호성에 아르노는 당황했지만, 이런 경험이 적지 않은 진호는 손까지 흔들며 호응을 했다.
이내 정신을 수습한 아르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 이목을 끄는 외모와 포스야."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르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보다 이걸 다 먹고 나면 어디로 갈 거지?"
"아……"
진호는 옆에 둔 옆에 둔 핸드폰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일단 타누우스 공원에 가서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거예요."
"사진?"
"그리고 황제의 대성당에 갈 거예요."
일반적인 여행객들이 가는 그런 코스와 행동.
하지만 아르노에겐 낯설 경험.
진호는 아르노가 이번 여행을 통해 힐링을 했으면 싶었다.
'겸사겸사 1차 조건과 2차 조건도 해금하고.'
타누우스 공원과 프랑크푸르트 대성당, 일명 황제의 대성당.
그곳은 독일에서 얻으려 한 스킬의 해금에 필요한 장소였다.
진호는 의아해하는 아르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