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8화
중국 시상식은 드라마 출연자가 관객과 시청자들을 위해 준비한 공연을 펼치고, 각 부문마다 수상자를 뽑아 상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에서도 있었던 방식의 시상식이었다.
'연예대상 쪽은 지금도 이런 공연을 준비하지만……'
"무슨 생각을 그리 하니?"
장칭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어느 배우의 공연을 보고 있는 진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음. 다음에 갈 나라요?"
'독일을 거쳐 벨기에 와 네덜란드를 들를 지, 아님 두 나라는 제외하고 바로 체코나 폴란드로 빠질지.'
그래도 독일은 무조건 거쳐야 한다.
월터와의 약속 때문만은 아니다.
독일에서만 얻을 수 있는 스킬 때문이다.
'이렇게 안식년을 가지지 않으면 시간상 얻을 수 없는 스킬.'
"……녀석. 놀랐잖니. 늙은이의 심장을 떨리게 해서는 못 써."
"흐흐흐. 그래도 여기 쉔수쉐이 감독님만큼 떨리진 않으실걸요?"
움찔!
배우의 공연을 집중하지 못한 채 엉덩이를 들썩이던 쉔수쉐이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고, 곧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든 이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이윽고 공연이 끝나며 그들이 기다렸던 부문의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진호와 쉔수쉐이, 류시시는 사회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건 같은 테이블에 앉은 장칭과 소윤발도 마찬가지였다.
결과상 오늘 있을 시상식에서 모든 상을 휩쓸 것이 분명함에도 그들은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와, 수상이 확실시되긴 했지만……'
한국으로 치면 드라마 부문 최고 작품상과 라이징 스타상, 인기상, OST상, 조연상, 주연상을 싹쓸이했다.
이 대상은 당연히 예정된 결과였다.
그런데 막상 트로피를 받으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내가 중국에서 대상을 받는 첫번째 한류 스타도 아닌데……'
그동안 한류가 전파된 이후 많은 연예인들이 중국에서 이런 큰 상을 받았다.
'그런데도 왜 이리 떨리는지……'
그는 답을 알고 있다.
한 해에 쏟아지는 수 많은 작품들과 배우들. 그중 최고라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중국에서 처음으로 도전한 작품에서 말이다.
이 짜릿한 성취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그렇기에 '이번에도'라는 것 역시도 없었다.
노력에 대해 보답을 받는 것이기에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행복했다.
'내가 이래서 연예계를 못 떠나지.'
활짝 웃은 진호는 언제나 처럼 따뜻한 미소를 짓는 다미앙과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눈시울을 붉힌 미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수상 소감이 시상식장을 촉촉이 적셨다.
* * *
이진호, 중국 연기대상에서 대상수상!
올해 최고의 프로듀서상! 20대의 나이에 최고의 프로듀서!
중국에서 다시 부는 한류!
이진호! 말만 안식년!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 한국은 이진호 같은 미남들의 나라!
진호가 중국에서 수상한 상들 때문에 한국이 약간 시끄럽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중국에서 연기 쪽으로 주연상과 대상을 수상 한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고, 그 나이 또한 역대 최고로 어리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치면 최고의 프로듀서 상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은 이르면 30대, 늦으면 50대에 수상하는 걸 진호는 20대에 수상했다.
외계인이라는 가설이 다시금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창밖으로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헤어 숍.
연말이라 직원들 대부분에게 휴가를 준 진호는 숍의 디자이너들에게 헤어와 메이크업을 맡긴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어허, 그날은 일이 있었대도.
"안다니까요. 충분히 이해한다니까요?"
-목소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잖아!
"이해하는 것과 삐진 것은 별개입니다."
-정말 이럴 게냐?
"네, 이럴 거예요."
연기 대상에 초대했는데도 오지 않은 웨이양에게 서운함을 토해내는 진호.
'웨이양 할아버지만 안 왔으면 이렇게 서운하지 않지!'
저우지엔도 저우리펑도, 양양도 모두 오지 않았다. 연기 대상뿐만 아니라 음악 관련 연말 시상식 모두.
VIP초대장을 직접 전하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내가 어? 안식년 도중임에도 어? 중국으로 간 이유가 어?'
상도 상이지만, 이들에게 당신들의 손자와 조카가 이렇게 자랑스럽다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책임감과 성취감은 별개의 문제였다.
"미워요. 다 입습니다. 확 그냥 내년엔 중국에 가지 말까 보다."
-……끄으응.
본인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웨이양은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다.
그런 그의 답답함을 알아차린 진호는 그냥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정치 쪽으로 모임이 있었나 보지.'
때도 한 해를 마무리해 가는 연말이니 중국 정부에서도 모임이 있었을 거다.
대충 그렇게 이해한 진호는 화제를 돌리기로 하며 실실 웃었다.
"설마 아르노 씨랑만 여행 가서 화나신 건 아니죠?"
-…….
'엥?'
"서, 설마 진짜 예요?"
-내가 그러겠느냐! 너무 어이가 없어서 대답을 못한 것뿐이야-!
'악!'
다급히 블루투스 이어폰을 뻤다가 다시 낀 진호는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아니면 아니지,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이놈이 그래도! 이제 곧 서른인 놈이 말조심도 안 하느냐!
"서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할아버지."
-……끄응. 약은 놈. 순진한 판다같은 놈이 성격은 뱀이 따로 없어!
"헐? 이렇게 예쁜 손자한테 뱀이라뇨?"
-시끄럽다.
"흐흐흐."
-……쯧. 그보다 오늘 청와대 초청 파티에 참석한다고?
"네. 코리안 쉐프 때문인 것 같은데, 대충 얼굴만 비추고 오려고요."
'어차피 상대해 주지도 않을 테니까.'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김에 여기서 새해를 보내고 다시 유럽을 돌아다닐 생각이에요."
-흠. 그게 마음처럼 될까?
"넹?"
진호는 의아했다. 웨이양의 말투가 무척이나 의미심장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럼 끊는다.
"아, 잠깐? 할아버지? 할아버지!"
진호는 이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자리에 앉았다.
'뭐지?'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웨이양의 말투는 사람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제 지인께서 장난 좀 치신 것 같아서요."
"호호, 그래? 지인 분께서 장난기가 많나 보네."
"말해 뭐해요. 그보다 다 된 거예요?"
"응! 어때?"
거울을 본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던하고 깔끔한 포마드 스타일과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런 화장.
오늘 입을 디올 슈트에 딱 어울릴 스타일이었다.
"선생님께서 예약이 왜 그렇게 꽉 차 있는 지 알 것 같은데요? 감사합니다."
"어머머!"
퍽!
분명 마른 체구의 중년 여성이 때린 건데 온몸이 울렸다.
'억!'
"호호. 내가 다 감사하지. 내가 죽기 전에 우리 진호 씨를 만져보았으니까!"
"그래요?"
"그럼-. 만날 전속 팀에게만 맡기고 말이야. 이런데 좀 다녀!"
"이왕이면 선생님 숍으로요?"
"당연하지! 이런 호강은 나만 해야지!"
"하하하."
그렇게 계산을 마친 진호는 옷까지 갈아입은 후 차로 향했다.
"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정 실장이 감탄을 터트렸다.
그는 오늘을 위해 휴가를 반납했다.
"이 선생님 실력은 여전하시네."
"아직 현역이시잖아요. 그래서 팀에 데려오고 싶지만……"
"선생님 연봉을 감당 못하지."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선생님 같은 실력자는 기본 연봉만 가볍게 억대다. 인센티브까지 합하면 십억을 훌쩍 넘긴다.
'정확히 말하자면 얼마든지 감당가능한 액수지만, 그럴 바에는 기존 직원들 연봉을 올려 주는 게 낫지.'
실제로 팀 이진호의 직원들은 업계 평균보다 최대 3배에 달하는 연봉을 받고 있었다.
"그보다 정말 청와대는 왜 이렇게 땡깡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에헤이, 땡깡이라뇨. 이 나라의 대표가 계신 곳인데요."
"그럼 이게 땡깡이지, 아니냐? 코리안 쉐프 막 내릴 때 표창장 줬으면 됐잖아."
한국에서도 천만을 넘기며 청룡영화상에서 상을 쓸어담은 작품인 코리안 쉐프는 한중 양국에서 표창장을 받았다.
"쉬기도 바쁜 내 연예인을 데려다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만날 연말에 파티를 열었으면 또 몰라."
맞는 말이다. 진호는 여태껏 청와대에서 연말 파티를 한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한 해에도 몇 번이고 파도를 타는 게 나랏일이라 비밀리에 한 거라면 모를 수도 있지만……'
이번 파티는 대통령이 대대적으로 올 한 해 대한민국을 빛낸 이들을 초청한 자리다.
'정말 중국에서 내가 벌인 일들 때문인가?'
한국 입장에서 보면 중국을 평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정말 그 이유만 있다면 팀 이진호의 정보라인에 걸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매년 많은 한국 스타들이 중국에 가서 많은 일들을 해냈기에 이번만 이렇게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아, 돌겠네.'
"……뭐, 가 보면 알겠죠."
괜히 벌써부터 골치 아파 하는 것보다는 일단 당하고 나서 돌파구를 찾는 게 나았다.
"쯧. 그러면 늦잖아. 뭘 알아야 대비를 하고 갈 텐데……. 구정경사장님은 아무 말 없어? 재벌이면 정치 쪽과도 연관 있잖아."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구정경에게 혹시 아는 것이 있는 지 물어보았지만, 그도 의아해했다. 그리고 자신도 파티에 참석하니 그때 보자는 말을 남겼다.
"에휴. 출발한다."
"넵. 눈 오니까 안전운전 부탁드려요."
"오냐."
* * *
청와대의 행사에 초청을 받은 연예인, 아니 예체능인이 과연 지금껏 몇 명이나 있었을까.
그 해에 가장 훌륭한 성과를 거둔 이들만, 그리고 전설이라 불리는 사람들만 겨우 참석이 가능할터였다.
그것이 연말 파티라는 한 해의 마지막 행사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내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삼엄한 검문검색을 막 지나온 길이라서 그런지 진호의 등은 긴장으로 꼿꼿이 섰다.
그렇게 요원 내지 경호원으로 보이는 이의 안내를 받아 제법 큰홀에 도착을 한 진호는 주위를 주욱 둘러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익숙한 얼굴인 연예인 선후배들과 경제인들 때문이 아니었다.
곳곳에 한국인이 아닌 이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 일본?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도 있네?'
순간 진호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에이, 아니겠지. 그리고 정상회담도 아닐 테고. 그랬다면 분명 뉴스로 떴을 테니까.'
"아, 각국 대사관 사람들인가 보네."
그렇다면 대충 이해가 되었다.
이번 파티의 목적은 올 한 해 대한민국을 빛낸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이지만, 그 이름은 연말 귀빈 초청 파티이니 말이다.
'그런데 왜 나를 저렇게 쳐다보는거지?'
대놓고 보는 게 아니라 힐끔힐끔 보는 것도 모자라 두 눈에 호감이 서려 있어서, 방금 전 생각했다가 지운 그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괜히 불안해졌다.
진호는 급히 아는 사람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겠어.'
"그래, 망상일 거야. 그럼 우리 해진 삼촌은 도착하셨을까나…… 응?'
일이 있어 조금 늦는다고 했던 우해진.
그래서 따로을 수밖에 없었기에 일단 그부터 찾았던 진호는 구영재와 구정경 사장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가, 그들 근처에서 웃고 있는 한 여성을 보고는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어?"
진호는 눈을 비볐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다른 누군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진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서, 서형 씨?"
여자 친구인 이서형. 그녀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멍해진 진호는 그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발을 뗐다.
그 순간이었다.
"진호 조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진호는 이번에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삼촌?"
중국에서 열린 연말 시상식에도 찾아오지 않았던 나쁜 삼촌, 양양.
그가 이쪽을 향해 양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진호는 입을 떡 벌렸다.
'삼촌은 또 왜 여기에 있는 건데요!'
아무래도 애써 외면했던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진호는 그냥 돌아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