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6화
저택을 한 번 안내해줬는데도 나연석은 부족하다는 듯 저택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프랑스재벌의 별장을 탐방할 기회가 쉽게 오는 게 아니다 보니 그는 눈을 붉히며 구석구석 찍었다.
타닥 타닥!
"와……. 벽난로."
"벽난로가 이런 거구나. 그런데 생각만큼 따뜻하지 않네?"
"나 지금 귀족 저택의 벽난로 앞에서 빈티지 와인 마시고 있는 거 맞지? 그렇지?"
'그냥 빈티지가 아니죠. 샤토 디켐 빈티지랑 로마네 콩 티예요.'
그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이 전축을 통해 틀어지고 있다.
오랜 로망의 실현에 여성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연석을 비롯한 남자들도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렇게 감동한 와중에도 촬영을 멈추지 않다니……'
천생 PD였다.
끼이익! 드르르르륵!
갑자기 열린 문을 바라본 사람들은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카트들을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급히 리옹에게 다가갔다.
"이것들은 다 뭐예요, 리옹 씨?"
"주인님께서 보내시는 작은 선물입니다. 덕분에 이분들의 도움을 좀 받아야 했습니다."
"아르노 씨가요?"
싱긋 웃은 리옹은 카트에 싣고 온 요리들을 벽 쪽에 놓인 테이블 위에 올렸다.
"헉! 캐비어다!"
"그, 금?"
"어머머!"
그냥 캐비어도 아닌 화이트 캐비어를 비롯해 화이트 트러플, 푸아그라, 최고급 치즈, 새우 등 최고급 식재료들이 와인과 함께 간단히 곁들일 수 있는 핑거 푸드로 만들어져 접시 위에 가득 놓여 있었다.
진호는 리옹과 그가 부른 듯한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부족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리옹과 사람들은 흐뭇이 웃으며 돌아섰고, 진호는 아르노에게 고맙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돌아선 진호는 피식 웃었다.
나연석과 김세연을 비롯한 사람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하세요. 얼른 드세요."
"……우와아아앗!"
"캐비어를 향해 돌격!"
"스토옵-! 사진 찍어야 해!"
"그렇지! 모두 핸드폰 꺼내! 카메라-!"
달려들다 말고 핸드폰을 꺼내는 그들의 모습에 진호도 아차하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부어라 마셔라 뜨거운 밤을 보내기 시작했다.
"후우우."
한국에서 부르고뉴까지 오는 대장정에, 촬영까지 한 상태에서 술을 마시다 보니 사람들은 금세 취해 버렸다.
그렇게 파장을 하는 분위기가 되자 뒷정리까지 마친 진호는 앙트완과 델핀이 보낸 선물들을 모아놓은 방으로 향했다.
부우욱! 트드득!
"…… 역시라고 해야 할까."
눈이 가는 상자를 하나 뜯은 진호는 실소를 터트렸다.
굉장히 희귀한, 지금은 고인이 된 레전드 엘비스 프레슬리의 친필 사인이 적혀 있는 깁슨 어쿠스틱기타였다.
다른 상자를 뜯은 진호는 다시 실소를 터트렸다.
이번엔 칼이었다. 그것도 명인이 직접 망치를 두드려 만든 것 같은 중식도.
손에 달라붙는 감촉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하나같이 그의 취향을 저격하는 것들이었다. 조사를 제대로 했단 의미였다.
"흠……"
상자들을 모두 개봉한 진호는 입술을 비뚜를 비틀었다.
화구, 이젤, 카메라, 시계, 장신구등 버려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초대장들.
"독이네."
똑똑!
"음? 네, 들어오세요."
진호는 월터나 리옹이겠거니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끼익!
"진호야, 여기 있…… 헛?"
고개를 빼꼼 내밀었던 세연은 방안에 펼쳐져 있는 광경에 깜짝 놀랐고, 그건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 무슨 일이야?"
"아니, 술이나 한잔 더 하자고 물으러 왔는데……. 그것들은 다 뭐야? ……아까 로비에 있던 것들맞지?"
잠시 고민한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한테 온 선물들이지."
"……나도 봐도 돼?"
"마음대로."
총총 걸어온 그녀는 가까이서 살피게 된 선물들을 보며 혀를 내둘렸다.
"엄청 나네. 남자 배우는 이런 선물을 받는가 보구나……. 와, 파텍필립? 처음 보는 디자인인데? 한정판인가?"
진호는 생각만큼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약간 의아해했다가 이내 깨달았다.
'하긴 얘도 톱스타지.'
톱 배우라는 말은 팬들의 선물도 톱급이라는 소리다.
세연도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선물들을 받아 봤을 터였다.
"여기 있는 것들 어떻게 할 거야? 다 가져갈 거야?"
"나도 그게 고민이긴 해."
'이 중 하나라도 챙기면 어떻게 될까. 피에트로가 어떻게 반응할까.'
자칫하면 박쥐로 비춰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독인 거다.
작은 조각이라도 삼켰다가는,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 LVMH에서 이룬 것들을 모두 잃고 마는 독,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진호의 표정은 다시 한번 변화했다.
더욱 서늘하게 말이다.
'이 사람들 재밌네.'
앙트완과 델핀은 지금 간을 보고 있는 거다.
이미 진호의 가치와 현재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챘을 텐데도 자신들 나름으로 시험을 하는 거다.
그리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독을 보냈는지 알고 싶으면 찾아오라는 거지? 지금? 누가 아르노씨 피가 아니랄까봐……'
"하긴 고민이긴 하겠다. 이것들을 어떻게 차에 다 실어?"
"아닌데. 그냥 다 태워 버릴까 고민하는 건데."
독은 태워서 묻어 버리는 게 최고였다.
"뭐? 미쳤어! 얘가 미쳤어!"
찰싹! 찰싹!
"악! 악! 농담이야, 농담!"
"……진짜지? 너 변한 거면 진짜 혼나!"
"야, 내가 변했으면 벌써 지중해에 요트 띄웠어. 내가 한 해에 버는 돈이 얼만데. 아오, 손 매워."
"그래. 팬들 성의 무시한 사람치고 끝이 좋은 사람 못 봤어. 넌 진짜 그러지 마."
"당연하지."
진호는 이런 말을 해 주는 세연이 고마웠고, 진호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세연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진호는 히죽 웃었다.
버리지 말라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니 아주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성의를 봐서 딱 하나씩만 챙기고 나머진 여기다 전시해 둬야지. 아주 럭셔리하게."
"응? 전시?"
"보여 줘야 할 사람들이 있거든."
'아르노 씨와 피에트로라는.'
"응? 보여 줘야 할 사람들?"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엿에는 엿이지.'
길들이기 따위는 사양이었다.
* * *
"으하하하핫!"
늦은 저녁, 부르고뉴에서 전해져온 소식을 전달받은 아르노는 웃음을 터트렸다.
평생 카메라 앞이 아니라면 웃지 않았던 그가 크게 웃고 있었지만, 집사장 까미유는 놀라지 않았다.
그만큼 그도 웃겼기 때문이다.
"어떻게 전시를 했다고?"
"무슈 리께선 고급 원목으로 만든 진열장을 사서 직접 진열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앙트완 도련님이 선물하신 기타와 델핀 아가씨가 선물한 칼을 들고 부르고뉴를 떠나셨답니다."
"……푸흐!"
이번엔 웃음을 참으려다 실패한 아르노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앙트완과 델핀이 한 방 먹었군."
"……."
"바보 같은 것들. 차라리 나나 캘러에게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찾아갔어야지."
차라리 그랬다면, 그리고 단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진호의 진정한 가치를 파악하고 나왔다면 혼을 냈을지라도 그 적극적인 모습을 기꺼워했을 거다.
아르노는 너무도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린, 크게 돌아가는 길을 택한 앙트완과 델핀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첫인상이 중요하다 그렇게 가르쳤거늘!'
이제 진호는 색안경을 끼고서 앙트완과 델핀을 대하게 될 거다.
"둘의 반응은?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
앙트완과 델핀이라면 지금 쯤 어이없어하다가 본인들의 실수를 깨닫고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을 게 분명 했다.
"피에트로는?"
"여전히 침묵 중이십니다."
"……하긴. 지금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긴 하겠어."
어떤 액션을 취해도 애매하다.
그럴 바에는 소식을 듣지 못한 척 가만히 있는 게 나았다.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말했을 수도 있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손익을 따지는 순간, 그 전에 어떤 관계였던 간에 단절을 해 버리고 비즈니스를 하는 존재가 진호다.
피에트로가 진심을 보이지 않고 계속 침묵을 하는 이상, 진호는 피에트로를 점점 비즈니스 파트너로 생각하게 될 거다.
'그 피에트로가 이 점을 모를 리 없지. 아니, 잠깐. 알고 있음에도 연락을 하지 않는 건가?'
진호가 앙트완과 델핀의 선물을 하나씩 챙겼다.
이는 침묵하는 피에트로에게 서운함을 표시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더 못마땅했다.
"쯧. 판을 깔아 줬는데도 그 누구 한 명 한 발자국 내딛는 놈이 없다는 건가."
"……."
"이러니까 뮤즈가 이렇게 나에게까지 심술을 부린 거지."
"주인님에게까지 말입니까?"
"정확히는 이 게임에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심술을 부리는 거네. 그는 내가 이 저택에 혼자 사는 걸 알고 있고, 그 별장도 내 개인의 소유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 주인님으로 서는 원하지 않는 선물이었군요."
나이가 나이인지라 올드하고 클래식하며 깔끔한 걸 좋아하는 아르노다. 그런 그의 별장에 앙트완과 델핀이 보낸 요란한 선물들을 전시해 놓은 건, 결국 귀여운 심술로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주인님께 이런 선물을 준 적 있냐고, 주인님부터 챙기라고 앙트완 도련님과 델핀 아가씨를 질책하는 것이기도 하군요."
"그렇지."
지금 아르노가 있는 이 저택도 구석구석 살펴보지 않은 곳이 없는 진호이기에 이미 눈치 채고 있을 거다. 이 저택에는 어린아이 특유의 감성이 섞인 무언가가 단 하나도 없다는 걸 말이다.
"허헛! 아,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아니네. 나도 자네와 비슷한 심정이야."
아르노는 눈을 감았다.
'이러니 미워할 수가 없지.'
진호는 사람들은 모두 다 가졌다고 말하는 아르노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거기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최선의 수를 두었다.
그것도 모두가 정신을 차릴 만한 최선의 수였다.
'그래서 더 아쉬워.'
'차라리 진호가 경영에 욕심을 냈다면……'하는 생각이 아르노의 머릿속을 잠식해 갔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였다.
'이 판을 흔들 수는 없지.'
진호가 한 명의 경영인으로 인정받기 전에 종결이 날 게임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뮤즈는 어디로 향했다고 하나?"
"디종으로 향하셨다고 합니다."
"스위스로 넘어가려는 건가? 아니면 이탈리아? 그래, 스위스겠군."
진호가 좋아하는 건 새로운 경험이다. 대략적으로 둘러본 이탈리아는 가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스위스 쪽을 주시하도록 해. 뮤즈가 어느 곳에서 숙박을 한다면 바로 갈 수 있도록."
까미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직접 가시려는 겁니까?"
"삐졌으니 달래 줘야지. 알프스에서 머물 준비도 해 놓고. 뮤즈라면 분명 알프스를 오를 테니까."
까미유는 풀썩 웃었다.
"무슈 리 핑계를 대시고 휴가를 가지시려는 거군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머리가 아플 땐 푹 쉬시는게 좋지요."
"……큼."
"그 어떤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시도록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르노는 손을 저었고, 몸을 돌린 까미유는 진호를 떠올리며 속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여태껏 일만 생각하시던 주인님이 자발적으로 휴식을 취하시게 만들다니……'
너무도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까미유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쿵!
까미유가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던 아르노는 눈을 빛냈다.
"확실히 몇 년 만에 가는 휴가이기는 하군."
이렇게 자발적으로 간 적은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스위스에서는 무슨 경험을 하게 될지……"
가는 곳마다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진호다.
"이 늙은 몸이 버틸 수 있는 그런 경험이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는 벌써부터 흥미진진하게 뛰는 심장에 난처하지만 기대가 가득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