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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280화 (280/424)

12권 5화

"……진호야-!"

놀랐던 나연석은 금세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와락 안겼다.

진호는 그의 과한 애정 표현과 이쪽을 찍는 카메라를 보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어이구, 진짜……'

"진호 네가 여기 왜 있어? 설마 나 보러 온 거니?"

"피디님은요? 예능 찍으세요?"

"그렇지! 바로 아는구나?"

"카메라 배치나 종류만 보면 알죠. 와인에 대해 찍는 거예요?"

"응. 포도를 수확하고, 와인을 만들고, 또 그 와인을 팔고. 두 달 정도 됐어."

"오? 그러면 거의 다 찍있겠네요?"

"여름까지 찍을 예정이야."

진호는 깜짝 놀랐다가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2주에 한 번 씩 찍는 거군요?"

"정확히는 3주마다 이동 시간 빼고 2박 3일씩! 방영은 내년 봄쯤에나 시작할 거야!"

"장기 프로젝트네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였다.

진호는 고생한다는 듯 세연과 나연석 사단을 보았고, 세연과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며 씁쓸히 웃었다.

'잘도 위에서 허락했네.'

국내도 아니고, 무려 프랑스다.

그것도 초장기 프로젝트다.

위에서 허락한 게 용했다.

'세연이 말고 톱스타가 없는 저 멤버인데도 말이야……. 아, 그래서인가?'

국내 여배우 중에서도 톱으로 인정받는 세연이다.

달라붙는 협찬사들의 질과 액수가 다를 게 분명 했다.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그쪽 소속사에서 어떤 식으로라도 딜을 넣있겠지.'

일단 출연하기만 하면 인지도 상승은 보장되는 나연석 예능이다.

'그런데 신기하네.'

나연석은 인기만 있다고 출연자를 섭외하는 그런 피디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인의 추천과 인성까지 모두 확인한 다음에 뽑는 그런 피디다.

'대체 분량이 얼마나 미치도록 뽑히고 있는 거지?'

나연석과 스태프들의 얼굴이 밝은 걸 보니 좋은 영상들이 나오고 있는 게 분명 했다.

"그런데 넌 여기 왜 있는 거야?"

"아."

진호는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했고, 나연석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다른 사람들도 동요를 보였다.

"아는 분의 저택? 어, 그 저택이라는 게 커다란 그거 맞지? 귀족들이 사는?"

"에이, 언제 적 이야기를 하세요. 지금은 돈만 있으면 살수 있는……아, 그분도 귀족이라고 할 수 있나?"

프랑스의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 중에서도 최고 높은 등급인 그랑 크루아를 수여받은 아르노다.

그 명예와 대우는 분명 귀족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헉!"

"억?"

깜짝 놀란 사람들의 반응에 피식 웃은 진호는 갑자기 눈빛이 초롱초롱해진 나연석의 모습에 다시 실소를 터트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네, 아르노 씨."

진호는 사정을 설명했다.

-그렇게 해. 머무는 동안 그 저택은 뮤즈의 것이니까. 아니, 차라리 명의를 이전해 주지. 이번 일로 꽤 귀찮아질 테니까. 쯧, 아내 때문에 미안하군.

진호는 하얗게 질렸다.

"아, 아뇨! 그럴 필요까진 없으세요! 그리고 마담과의 데이트는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고요!"

-흠. 그래도…….

"허,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빨리 전화를 끊은 진호는 철렁 내려앉았던 심장을 달랬다.

'아오, 내가 뭔 말을 못해!'

진짜 부자의 스케일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진호는 앞으로 얼마 동안은 사소한 것이라도 절대 부탁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갑자기 낯빛이 어두워진 나연석을 보았다.

"허락받았어요."

"진짜? 하지만 너 방금 전에……"

"약간 살벌한 농담을 하셔서 당황한 것뿐이에요. 어떡하실래요? 바로 이동하실래요?"

"……잠깐만-! 딱 2시간만 기다려 줘! 진짜 후딱 찍을 테니까!"

"음. 뭐, 그러세요."

"그래! 땡큐! 자, 촬영 시작합시다-!"

진호는 세연에게 잘 하라고 손을 흔들어 줬고, 선후배 연예인들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렇게 촬영이 시작됐다.

"……아차."

까먹은 게 생각난 진호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어 장경아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실장님. 저 진호인데요……"

출연에 대한 허락을 받아야 했다.

나연석의 성격상 절대 카메라를 끄지 않을 테니 말이다.

"와……"

"우와!"

"헉!"

언덕 위의 커다란 하얀 저택.

그것은 분명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광경이었다.

"여, 여기가……"

"네. 이곳이 제 지인의 별장이에요."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리며 진호를 보았다.

"우리 진호는 진짜 노는 물이 다르구나……"

"에이, 그분께서 절 예쁘게 봐주신 것뿐이에요. 들어오세요."

"어, 응……. 어, 근데 저분은?"

리옹이 저택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 이 저택을 관리해 주시는 관리인이세요."

진호는 가까워진 리옹을 향해 입을 열었다.

"리옹 씨, 이쪽 분들이 방금 전에 전화로 말씀드린 그분들이세요."

"아. 리옹입니다. 무슈 리의 지인들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호는 너무 공손한 그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으며 재빨리 통역해주었다.

"리옹 씨도 만나서 반갑대요……. 나 피디님?"

리옹을 보는 나연석의 눈빛이 멍하다.

'아, 뭔가 이상한 상상을 하나 보네.'

커다란 저택에 말끔한 슈트를 입은 노인. 분명 소설이나 영화 속에 서나 보던 귀족가의 노집사를 연상하고 있을 게 뻔했다.

"어, 으응!"

고개를 끄덕인 나연석은 어설픈 프랑스어로 자신을 소개했고, 다른 이들도 통성명을 했다.

진호는 왜인지 당황하고 있는 리옹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 인원이 너무 많나?'

"죄송해요. 사람들이 너무 많죠? 그래도 식사는 저희끼리 알아서 먹고, 뒷정리도 깔끔하게 해 놓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그게 아닙니다. 청소야 인부를 부르면 됩니다. 그보다……"

"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고개를 모로 기울인 진호는 리옹을 따라 저택 로비에 들어섰다가 살짝 놀랐다.

"오-. 이게 다 뭐예요?"

로비에는 커다란 박스들이 쌓여있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택배 박스가 아니라 세심히 포장된 고급스런 박스들이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박스들로 만든 동산이 두 개나 있었다.

"이 저택에서 쓸 물건들을 한꺼번에 주문하신 거예요? 아님 리옹씨에게 필요한 물건들? 도와 드리면 되죠?"

"아뇨."

리옹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것들은 무슈 리 앞으로 온 선물들입니다."

"네? 제 앞으로요? ……에이, 그럴 리가요."

보낼 사람이 없었다.

혹여행적을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이렇게 많은 선물을 보낼 사람도 없었다.

리옹은 손을 저으며 부정하는 진호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발신자가 도련님과 아가씨입니다."

"……네? 누구요?"

"이 선물을 보내신 분들은 앙트완 베르베우 님과 델핀 베르베우님이십니다."

잠시 멍해졌던 진호는 이내 입을 떡 벌리며 다시 선물들을 보았다.

앙트완과 델핀.

그들은 분명 아르노와 캘러의 자식들이자, 피에트로의 강력한 경쟁자들이었다.

'……헐? 이 사람들도 스케일이 미쳤는데?'

* * *

"윽! 내가 그걸 찍었어야 했는데……"

저택 탐방을 마친 후, 지하 창고에 잠들어 있던 와인과 함께 그동안 진호가 어떻게 여행했는지를 들은 나연석은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 했다.

그건 나연석 사단의 스태프들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을 걸쳐 프랑스로 오는 대여정.

그것도 각 나라마다 테마가 달랐고, 기본 베이스는 사진 촬영이었다.

여기에 진호까지 있으니 영상이 미친 듯 나올게 뻔했다.

"정말? 정말 국립공원에서 여러 동물들과 함께 지냈어?"

"엉. 잠깐만."

세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노트북을 가져와 넘겨주었고, 사람들은 그녀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와!"

"우와!"

"뭔데? 나도 좀 보자!"

제일 먼저 세연에게 달려갔던 나연석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오, 진짜! 이걸 내가 찍었어야 했는데! 진호야! 다시 처음부터 가자! 아니, 지금부터라도 그냥 따라가게만 해 주라! 나 진짜 숨만 쉬면서 있을게!"

"응! 우리도!"

"밥이랑 숙소도 우리가 알아서 할게! 넌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다해!"

진호는 어이없다는 듯 그들을 보았다.

"지금 찍고 있는 건 어쩌고요?"

"3주에 3박 4일씩만 다녀오면 돼!"

'에라이.'

고개를 저은 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어디가? 설마 지금 떠나려는건 아니겠지! 진호 너 그러는 거 아니다!"

"여러분 드릴 음식 만들러 갑니다! 저녁 안 먹을 거예요?"

"……성철아! 진호 따라붙어!"

"옙!"

"……에휴."

한 번 더 고개를 저은 진호는 주방으로 향했고, 스태프들이 급히 따라붙었다.

보글보글보글

구수하면서도 매콤한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우자, 진호를 따라온 스태프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지난 이틀 동안, 아니 비행기에서 먹은 기내식까지 3일 동안 양식만 먹어야 했던 그들이 그토록 먹고 싶어 했던 한식이었다.

끼익!

"어? 헉! 된 장찌개다!"

문을 열고 들어온 김세연이 급히 다가왔다.

그녀는 오랜만에 본 된 장찌개에 환한 미소를 짓다가 이내 의아해했다.

"된장은 어디서 구한 거야?"

"한국에서 보내 달라고 했지."

그것도 운암정표 된 장이다. [스킬: 엄마 손맛]의 레시피대로 만든 된 장은 아직 완전히 숙성되기까지 시간이 남았다.

"이 두부도?"

"……오다가 상할 거란 생각은 안 하는 거냐? 파리에 있을 때 만들어 놓은 거야."

"……두부를?"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부는 만들기 까다로운 탓에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파리의 시장을 돌아다니다 너무 좋은 대두를 발견한 나머지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적인 두부를 비롯해 순두부, 건두부 등 많은 종류의 두부를 만들었고, 이를 오래 먹기 위해 허머에 냉장고까지 설치했다.

'맷돌만 있었어도 더 맛있게 만들었을 텐데……. 음?'

진호는 고개를 푹 숙인 세연을 보며 의아해했다.

그 순간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 결정했어!"

"뭐, 뭘?"

"너한테 시집갈게! 아니, 나한테 장가…… 깍!"

콰아악!

진호는 이를 악물며 그녀의 머리통을 강하게 쥐었다.

"어이, 김세연 씨. 여기 카메라 안 보이시나? 네가 돌았지?"

"아악! 아아악! 아파! 아파파파파! 살려 주세요-!"

손아귀에 힘을 푼 진호는 스태프들을 보며 싱긋 웃었다.

"다 자를 거 아니면, 다 내보내주세요. 애매하게 끊으면 저 여자 친구한테 혼나요."

"……그럼 당연하지. 피디님이 그걸 모를까. 걱정 마, 진호야."

"음. 그 피디님을 못 믿어서요."

"……그건 그렇지."

"아오, 그 신용불량 사기꾼. 우리가 미안하다. 대신 사과할게."

'형님들도 똑같은데요……'

괜히 사단이 아니다. 남을 속이는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연기를 하는 게 나연석 사단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진호는 세연을 보았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또 왜?"

"너 여자 친구랑 잘 지내?"

"……뭔가 표정이 꺼림칙하다?"

"네가 이렇게 해외를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이 멍충아."

"아, 확실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당연한 의문이었다.

"괜찮아. 서형 씨도 지금 여러 문제 때문에 많이 바빠서 서로 만날 틈이 없거든."

승진 문제에다가 이번에 세계 증시가 요동을 치면서 눈코 뜰 새없이 바쁘다고 했다.

"그래서 서로 영상통화로 아쉬움만 달래는 중이지."

'안 그랬으면 같이 여행 다녔을텐데.'

"흐음. 그렇구나."

"왜?"

"아니, 우리 쪽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일반인과 연애하면 다 결말이 좀 그렇잖아. 그런데 잘 만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이 누나가 기분이 좋아 지네?"

"아주 악담을 해라."

"이게 악담이냐?"

"그럼 악담이 아니냐? 뇌에서 필터링 안 하지?"

"……쏘리!"

양손을 모으는 그녀의 모습에 진호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된 장찌개를 보았고, 스태프들은 그런 둘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진호만 나왔다 하면!'

'저 김세연을 저렇게 다루는 또래가 또 있을까!'

그들은 서로를 보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피디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슬그미니 입을 열었다.

"저, 진호야. 아까 그 로비에 있던 선물 상자들 말이야."

"아, 네."

"그거 혹시 여기 저택의 주인께서 쓰려는 물건들이야?"

귀족이 쓰는 물건. 당연히 호기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찍을 수만 있다면 약간의 재미포인트가 될 수 있었다.

"그분, 곧 오시는 거 맞지? 그렇지?"

진호는 갑자기 눈이 빛나기 시작하는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네. 아마 그럴 거예요."

'아니에요. 그건 제게 온 초대장이에요.'

그랬다. 그것들은 초대장이었다.

아르노가 귀찮아질 거라고 말한 것처럼 본인이 서 있는 위치와 경쟁자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면서 몸이 더욱 달아오른 그들이 보낸 초대장.

'그리고 이건 첫 번째 초대장이지. 내가 침묵할수록 이런 초대장은 계속 날아올 테니까. 독을 품었을까, 아님……'

진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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