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279화 (279/424)

12권 4화

2. 와인

화악! 화악!

푸른 수영장을 거칠게 가르던 한명의 중년 여성이 수경과 수영모를 벗으며 수영장을 걸어 나왔다.

중년의 나이라 생각지 않게 탄탄하고 매끈하게 빠진 몸.

비치 체어에 앉으며 수건으로 머리를 턴 그녀는 레몬이 섞인 물을 들이켜곤 눈을 가늘게 떴다.

아드득!

얼음이 그녀의 입안에서 부셔져내렸다.

"엄마가 아빠가 가지고 노는 인형과 만났다고? 그것도 하루 종일 데이트를 했다?"

"예, 아가씨."

"…… 역시 경고잖아."

그런데 수영을 하며 다시 생각해봐도 뭔가 이상하다.

캘러 메시어는 베르베우의 안주인이다.

'하루의 시간을 투자했다면, 그 인형에게 더 이상 나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도 아냐. 대체 뭐지? ……설마?'

"아, 진짜! 별거까지 할 만큼 성격 더러운 인간을 왜 도와주는 거야!"

캘러 메시어는 지금 정에 눈길을 줄 만큼 살짝 약해진 아버지 아르노 베르베우를 돕는 거였다.

그리고 자신들은 모르는 가치가 진호에게 있는 게 분명 했다.

그렇지 않다면 베르베우의 안주인이 무려 하루라는 시간을 투자 할 리가 없었다.

'대체 어떤 가치가 있는 거지?'

막대한 구매력이란 가치 말고 또 다른 가치.

진호에겐 그게 있는 거다.

델핀은 속이 답답해졌다.

"아가씨."

"시끄러! 생각 중이잖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부인."

터벅터벅.

수영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미중년의 모습에 델핀의 얼굴이 환해졌다.

알렉산더 간치아, 이태리 와인 명가 간치아의 상속자로서 그녀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남편이었다.

둘은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어쩐 일이에요? 업무 시간이잖아요."

"부인께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해서 부리나케 와 봤는데……. 조금은 늦게 올 걸 그랬습니다."

"아뇨, 고마워요. 덕분에 화가 많이 가라앉았어요."

"그렇습니까?"

"그러니 어서 돌아가 보세요."

"헛. 저 방금 왔습니다만……"

"오시면서 많이 쉬었잖아요. 제 핑계는 그만 대시고 얼른 돌아가세요."

"……티 났습니까?"

"네. 무척이나."

입맛을 다신 알렉산더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곤 돌아섰고, 델핀은 그런 그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면 준비한 것들은 어떻게 할까요, 아가씨."

"…… 원래대로 뮤즈에게 보내."

"네?"

"그냥 뮤즈에게 보내라고. 원래 뮤즈를 위해 준비한 것들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비서가 왜 인형 따위를 뮤즈라 부르냐는 듯 말끝을 흐리자, 델핀은 눈빛을 싸늘히 굳혔다.

"원래부터 그의 가치는 컸어."

'그걸 엄마가 확인시켜 줬지.'

캘러 메시어의 행동에는 그런 의도도 숨겨져 있었다.

진호를 인형 따위로 생각하지 말라는 그런 의도.

'이 나이에 이런 보살핌을 받다니……'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웠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이용하는 그 피에트로가 침묵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 아르노 베르베우라는 인간이 그를 LVMH의 상징으로 삼았을 때 눈치됐어야 했는데……"

피에트로와 아르노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이진호란 인물이 가진 또 다른 가치, 아니 진짜 가치를 말이다.

'그렇다면 걔는 함정이었네.'

그것도 현재의 입지를 흔들어 버릴 끔찍한 함정이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이걸 알아차렸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어설프게 움직이지 않은 과거의 날 보고 잘 했다고 해야 할지, 아님…….'

"하!"

델핀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아르노 베르베우가 직접 섭외할만큼 대단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

그녀의 눈에 욕심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곧 그건 사라져야했다.

'이젠 접근조차 할 수가 없어.'

세심히 다루어 내 것으로 삼으면 라이벌들을 날려 버릴 무기인데, 캘러 메시어가 나선 이상 진호에게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마이너스 평가를 받게 될 터였다.

혹여 훗날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하더라도 진호에게 해를 끼쳤다가는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마저도 모두 사라질 수 있었다.

캘러 메시어와 아르노 베르베우는 지금 그렇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도 엄한 분들……'

그녀의 눈이 아련하게 빛났다.

"후, 정말 아깝네. 피에트로 그 너구리보다 내가 먼저 발견했다면……"

지금처럼 시험을 받는 게 아니라 벌써 완전한 후계로서 인정받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르노 베르베우의 머릿속에 '피에트로 베타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게 이번 일로써 밝혀졌으니 말이다.

이걸 알아차린 것만 해도 엄청 난성과였다.

앞서 나간다 생각했던 이가 알고 보니 옆에서 달리고 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앙트완과 피에트로도 이 사실을 알아차렸겠지.'

그렇다면 이제 답은 하나다.

접근을 할 수 없다면, 진호가 찾아오게 만들어야 한다.

'델핀 베르베우라는 존재가 여기 있다며 애원하듯이.'

"재밌어. 아주, 아주 흥미로워."

'넌 대체 누구니?'

그녀의 눈에 짙은 흥미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후에 있을 만남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 * *

짹짹짹!

이름 모를 새가 울며 새벽을 알리자 눈을 뜬 진호는 창문으로 걸어가 커튼을 확 젖혔다.

촤락!

"크-."

어스름이 밝아져 가는 하늘 아래, 넓게 펼쳐진 포도밭과 녹색의 작은 동산들.

진호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가 서늘히 부딪쳐 오는 겨울의 냉기가 정신을 차리게 하자 코웃음을 쳤다.

"작은 농장은 무슨."

눈에 밟히는 모든 땅이 아르노 베르베우의 소유였다.

지금 진호가 있는 커다란 저택 역시도 말이다.

거짓말도 이런 거짓말이 없었다.

"끄으-!"

기지개를 펴며 방을 나선 진호는 가운 자락을 휘날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문을 열자 훈훈한 열기가 강렬한 냄새와 함께 온몸을 습격했다. 진호는 재빨리 불 위에 올려둔 커다란 냄비를 향해 다가가 뚜껑을 열었다.

자글자글자글

"음-. 냄새는 합격."

마치 한국의 갈비찜 같은 비주얼.

그러나 냄새가 완전히 달랐다.

프랑스의 찜 요리 중 하나인 뵈프 부르기뇽이었다.

어젯밤 저녁에 만들기 시작해, 잠을 자는 중간중간 내려와 확인할만큼 정성을 다한 뵈프 부르기뇽.

그러나 한번 뒤적여 간을 본 진호의 얼굴이 썩 좋지 못했다.

"흠. 단맛이 미세하게 부족한데……. 아!"

불을 더 미세하게 줄인 진호는 재빨리 저택지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치 옛 중세 시대의 그것을 보는 듯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니 와인들이 수없이 전시되어 있는 와인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노가 다 먹어도 된다고 한 그의 개인 와인 창고였다.

진호는 그중 백포도주 한 병을 꺼내어 다시 주방으로 올라갔다.

콸콸콸.

백포도주를 쏟아 부은 후 다시 뒤적여 간을 본 진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거지."

찌릿하듯 온몸을 울리는 맛.

[스킬:오! 프랑스]의 주인공이 전성기에 만든 특제 뵈프 부르기뇽이다.

아니, 직감상 그보다 더 상위 레벨에 맛임이 분명 했다.

그는 불을 중불로 돌린 후 남은 백포도주를 마시며 조리 테이블에 올려 둔 수첩에 방금 전 쏟아부은 백포도주의 양을 기록했다.

후에 아르노가 이 저택에 들를 때를 위해 고용인들에게 남기는 레시피. 이런 좋은 곳에서 묵게 해 준 아르노를 위한 작은 보답이었다.

끼익!

"역시 여기 계셨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무슈 리."

"좋은 아침이에요, 리옹 씨."

문을 열고 들어온 백발의 70대 노인은 이 저택의 관리인이었다.

슈트를 입은 그는 강렬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커다란 냄비를 보며 눈을 빛냈다.

"냄새가 무척이나 좋군요."

마치 지금은 사별하고 없는 부인이 해 주던 그 뵈프 부르기뇽을 떠올리게 할 만큼 추억으로 가득한 냄새였다.

"정말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오늘 아침 메뉴는 뵈프 부르기뇽에 마늘버터 바게트니까요."

"……이런 오늘도 무슈 리께서 도착한 어제처럼 저녁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겠군요."

"그러게 적당히 드시라니까요."

"무슈 리의 음식을 남기는 건 죄악입니다."

"아니, 죄악까지야……"

그래도 기분이 좋아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저은 진호는 식재료 창고로 걸어가 바게트를 만들 재료를 고르기 시작했다.

배불리 아침 식사를 마친 진호는 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저택을 나섰다.

"음-."

얼굴에 조심스럽게 다가와 부딪치는 서늘한 바람에 미소를 지은 그는 몸에 힘을 빼며 조용히 포도 밭을 걸었다.

어느새 다가와 버린 겨울에 입을 떨구며 긴 잠에 빠져든 허리께도 오지 않는 작은 포도나무들.

진호는 그런 나무 끝을 매만지며 입맛을 다셨다.

"부르고뉴에 왔으니 와인 관련스킬을 얻어야 하는 게 맞지만……"

해금 조건이 무척이나 고약하다.

일단 1차 해금 조건이 '포도 농사'를 짓는 거다.

손수 나무를 심고, 1년간 농사를 지어 그 결실을 맺게 만드는 것.

이게 겨우 1차 해금 조건이다.

"거기다 2차는 와인 만들기."

와인을 숙성시켜 완성시키는 단계까지가 2차 해금 조건이고, 3차는 그 와인을 파는 것이다.

1차부터 3차 해금까지 모두 합하면 3년은 가볍게 날아간다고 봐야했다. 1차 해금 조건이 나무를 옮겨 심어도 되는 게 아니라 묘목부터 심는 거였다면 기본으로 10년이다.

"그래서 정말 얼마나 마음 조리며 스토리를 진행했는지……"

현실 시간으로 20일 동안 피가 마르는 줄 알았다.

"이 스킬을 습득하면 소믈리에의 재능도 얻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뒤로 미뤄 둬야 할 것 같았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휘이잉!

다시 불어온 겨울바람에 다시 미소를 짓던 진호는 방금 전 리옹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한국에서 방송국이 찾아왔다라……"

리옹은 아르노 소유의 농장이 아니라 다른 농장이라고 했다.

"다큐멘터리인가? ……그렇겠지?"

와인은 드라마, 예능, 영화 등의 소재로 썩 훌륭한 게 아니니 말이다. 독립 영화라면 또 몰라도 말이다.

"그래도 궁금하니까 멀리서 살짝 보기만 해야겠다."

그래도 한국인이라고 하니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걷던 진호는 저 멀리서 움직이는 검은색 허머를 보며 의아해했다.

"지노-! 본 로마네 가야지-!"

"……아!"

유명한 와인 중 하나인 로마네 콩 티.

산지, 그것도 오크통에서 막 나온 로마네 콩 티를 먹기로 했던 약속을 떠올린 진호는 황급히 월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알았어요! 갑니다!"

* * *

본 로마네의 포도밭도 앙상한 포도나무들로 가득했다.

아니, 아르노의 포도나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짧아져 있었다.

"장입니다."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40대의 중년인은 영화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큼 미남이었다.

"이진호입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슈 리께서 방문해 주셨는데, 오히려 영광이죠."

진호는 장의 눈에 서린 작은 욕심을 모른 척하며 고맙다는 듯 웃었다.

'역시 여기도 포르투에서의 일을 들었구나.'

"아, 이건 빈손으로 올 수가 없어서 손수 구워 본 빵입니다."

"오. 이게 소문으로 무성한 무슈 리의 빵입니까? 오늘 시음에 아주 좋은 안주가 되겠군요."

과찬이라는 듯 머리를 긁은 진호는 눈빛이 더욱 따뜻해진 장의 안내를 받아 와인 창고로 향했다.

"……흐흐흐."

"그렇게 좋으세요?"

진호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작은 나무박스를 든 월터는 정색했다.

"넌 안 좋아?"

"당연히…… 좋죠."

완벽히 숙성되어 출하만 기다리고 있던 로마네 콩 티는 왜 최고의 와인 중 하나로 꼽히는지 알수 있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장은 그걸 선물이라며 무려 10병이나 주었다.

살짝 부담이 되었지만, 진호는 모른 척 그걸 받았다.

'거부하기엔 너무 맛있었어.'

만약 운전을 해야 될 게 아니었다면,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셨을 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독립을 하려는 건가?'

로마네 콩 티는 한해에 5300병밖에 안 파는 와인이다.

모델이 딱히 필요 없는 최고급 브랜드라는 뜻이다.

그런 와인 명가의 아들인 장이 이런 뇌물을 줬다는 건 독립을 하려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조건만 맞는다면 약간의 홍보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만……. 그 조건을 맞춰 줄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 조건에는 맛 또한 포함이 되어 있었다.

다행이 LVMH 주류 파트도 타브랜드의 작은 홍보 정도는 눈감아 주기로 했다. 그것이 진호를 위하는 길이라며 말이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며 고개를 저은 진호는 아주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실려 안전벨트까지 채워지는 나무상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귓가를 울리는 한국어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놀랐다.

"어?"

"자, 여기가 로마네 콩 티의 생산지…… 어?"

편안한 옷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걸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

진호는 그들 중 선두에 선 두 명을 보곤 넋을 놓았다.

알다 못해 너무도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나, 나 피디님? 세연이?"

"……진호?"

마찬가지로 넋을 놓는 사람들을 보며 진호는 입을 떡 벌렸다.

'당신들이 여기 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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