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2화
프랑스 하면 빵이다.
그중 바게트는 프랑스 국민들의 식탁에서 결코 빠지지 않아서 거의 주식처럼 취급된다. 아니, 프랑스를 대표하는 빵이다.
몇몇 나라에서는 바게트를 프랑스빵이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
이 정도로 프랑스 국민들은 바게 트에 대해 굉장히 까다로울 수밖에 없고, 다른 빵을 잘 만들어도 바게트를 못 만든다면 결코 가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파삭!
'아……'
페스츄리처럼 바삭하게 부서진 담백하고 고소한 껍질이 잇몸에 달라붙으려는 순간, 갓 구운 카스텔라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속살이 제 몸을 파고드는 치아를 달콤하고 짭짤하게 반긴다.
본능적으로 '아, 이건 맛있지만 바게트로는 실패작이다.'라고 생각하려는 그때, 연어의 기름진 향을 머금은 탄탄한 식감이 치아의 전진에 저항한다.
화들짝 놀라 턱에 더 힘을 주니 저항은 금세 무너지며 연어의 상쾌한 기름 냄새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식감과 함께 달려들고, 상큼하면서도 크리미한 치즈와 마늘 냄새도 함께 달려든다.
그때부터 입안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결코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한 입 한 입 똑같은 저항을 하고 똑같이 무너지며 전투를 벌인다.
"아."
"어때요? 괜찮아요?"
여성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연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싱긋 웃은 진호는 채에 한 번 걸러 약불로 뭉근하게 끓인 스프를 종이컵에 담아 넘겨주었다.
"이것도 드세요. 뜨거우니까 후후 불어서요."
"……후. 후. 후룩."
여성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거칠고 진흙탕 싸움이 벌어졌던 입안이 평화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더니 어느새 빵과 연어의 맛은 모두 사라져 버린 채 그 자리를 진한 당근 향과 희미한 감자 향의 풍미가 차지해 버렸다.
"이, 이게 고작 2유로라고요? 이게? 이 세트 메뉴가?"
진호는 화까지 내는 그녀의 모습에 옅게 웃으며 저 뒤에서 이쪽을 찍는 카메라 사진기를 든 이를 가리켰다.
"맛있으면 많이 홍보해 주세요."
"당연하죠!"
진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샌드위치 5개와 스프 5개요!"
"주문이 밀려서 10분 정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어요?"
"10분 지각하면 돼요!"
"이렇게 부드러운 바게트 샌드위치라니! 울랄라!"
"바게트의 정석을 그대로 지키면서도 입에서 녹고 있어! 어째서?"
"너무 맛있어. 아…… 오늘 그냥 출근하지 말까?"
"어째서 내가 여태껏 먹은 연어들이 똥처럼 느껴지는 거지?"
진호의 푸드 트럭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가격에 한 번, 맛에 한 번, 그리고 이진호에 한 번 빠진 손님들이 자발적으로 SNS에 홍보를 하였기 때문이다.
땅땅!
"재료 모두 소진됐습니다! 마지막 주문 10개 받습니다!"
"……저요! 샌드위치 2개! 억?"
"어디서 새치기예요? 제 차례예요!"
"하나, 둘, 셋……. 휴, 나까진 먹겠다."
"샌드위치 5개! 스프 5개!"
"안돼-!"
* * *
파리에서 체류하는 동안 한국에서 넘어온 직원들까지 모두 함께 생활하기 위해 얻은 주택의 부엌.
쏴아아아아!
연어 조각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던 스테인리스 통이 새하얀 거품과 함께 씻겨 나가고 있다.
진호는 웃음을 흘렸다.
"역시 매진이 제일 기분 좋다니까."
그것도 그냥 매진도 아니고, 오픈한 지 단 3시간 만에 매진이다.
'어디까지 먹힐까'에서 겪은 경험과 요리에 대한 자신감, 요리에 들인 정성을 생각해 넉넉하게 200인분을 준비했는데도 단 3시간 만에 끝났다.
'4차 해금도 했고.'
리셋라이프 속 주인공은 정말 어렵게 했던 4차 해금을 단 하루 만에 끝내서 더 기분이 좋았다.
'아차.'
"피곤하실 텐데 이제 그만 퇴근하시는 게 어떠세요?"
홍보용으로 쓸 영상을 찍기 위해 옆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공무원 두 명이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 씩 웃으며 캠코더를 꼈다.
"오늘 수고 많았습니다, 무슈리."
"그럼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못해도 3일은 장사해 달라는 조건을 붙이며 푸드트럭 장사를 허락했고, 진호는 그걸 받아들였다.
몸이 좀 피곤해질지라도 스킬을 얻고,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라서 응할 수밖에 없었다.
"네, 두 분도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내일은 에펠탑 근처에서 뵐게요."
그렇게 둘이 떠나고 설거지를 마무리한 진호는 기지개를 쭉 폈다.
옆에서 같이 설거지를 했던 정 실장과 월터도 마찬가지였다.
"어그그그그!"
"끄어!"
"끝났다-!"
우두둑!
등에서 괴상한 소리를 낸 셋은 동시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어우, 정신없어 죽는 줄 알았네."
정 실장의 말에 월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가전을 할 때보다 훨씬 더 정신없었던 3시간이었다.
그는 이제부터 음식을 파는 모든 이들을 존경하기로 마음먹었고, 진호는 그런 그들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그렇게 말하시는 것들치곤 잘 따라오시던데요? 내일, 모레도 잘 부탁드려요."
"……그냥 한국으로 튈까?"
"에헤이. 퍼스트 안타려고요?"
"이코노미를 타는 것과 내일, 모레 뺑이 치는 것 중 어느 게 더 피곤할까?"
"사랑합니다!"
"……어후. 이게 내 연예인만 아니었으면 진짜……"
씩 웃은 진호는 다시 기지개를 펴며 내일 팔 음식의 레시피를 다시 점검했다.
"그런데 진호야."
"네?"
"너 진짜 내일 떡갈비 팔 거야?"
정확히는 영화 코리안 셰프에서 선보인 요리 중 하나인 떡갈비 치아바타를 팔 생각이다. 그리고 라파르 뒤에서 디저트로 나온 포도 아이스크림에 쓰인 포도 요거트 스무디를 만들 생각이었다.
"네. 그럴 건데요?"
"흠. 한국에서 먹은 그 맛이 날까?"
"……아."
진호는 슬며시 웃었다.
같이 돌아다니고, 또 진호가 만든 음식을 많이 먹다 보니 어느새 정실장의 입맛도 까다로워진 것이다.
"하긴 정 실장님이 저랑 패션위크 다니면서 먹어 본 송아지 스테이크만 스무 개가 넘죠?"
"그렇지."
사과만 먹여 키웠다는 둥, 맥주만 먹여 키웠다는 둥 여러 송아지를 맛봤다.
"그때마다 들던 생각인데, 역시 소는 한우가 최고더라고. 그런데 네 떡갈비에는 그 한우가 핵심이잖아. 괜찮겠어?"
"걱정 마세요. 이번 건 좀 다르니까."
"다르다고? 어떻게?"
"최고급 제철 과일과 야채, 와인찌꺼기만 먹고 자란 송아지예요. 맛의 레벨이 아예 다르더라고요."
오직 라 파르 뒤 전용으로만 키워지는 송아지들을 드라이 에이징 방식으로 숙성시켜 그 맛을 극한으로 응축시켜 둔 소고기.
"여기에 이베리코 흑돼지를 6.5:3.5 비율로 섞을 거고요."
……꿀꺽!
프랑스 소는 몰라도 이베리코 흑돼지는 돼지고기 중 최고로 쳐주는 정 실장은 군침을 삼키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개당 얼마에 팔려고?"
"3유로?"
"……포도 주스까지 포함해서?"
"그럼요. 당연하죠. 그 정도는 받아야 저희 인건비가 나오죠."
"때려치워, 인마! 그건 인건비만 나오는 거잖아! 재료비가 포함 안된! 차라리 자선 행사를 읍! 읍읍!"
"쓸 덴 확실히! 제 스타일 알면서. 하하핫! 자, 그럼 우리도 늦은 점심 먹으러 갑시다-. 오늘 번 돈 팍팍 써 보자고요!"
5차 해금 조건이자, 스킬 습득조건인 '길거리에서 음식 판 돈으로 다양한 프랑스 가정식 요리 먹기'.
정 실장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입을 막은 진호는 뒤뚱뒤뚱 걸음을 옮겼다.
"읍-! 읍읍?"
놓으라고 발버둥 치는 정 실장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진호의 손을 풀리지 않았다.
* * *
-난 오늘 오데앙의 거리에서 천국의 맛과 천사를 보았다.
┗동감이다. 내 인생 최고의 빵이었고, 연어 테린이었으며, 스프였다.
┗그럴 수밖에 없지. 거기에 쓰인 재료들 모두 시중에서 안 팔다못해, 최고급 레스토랑 에서나 볼법한 것들이니까.
┗뭐? 진짜?
-그 거지 같은 당근 스프가 이렇게 감미로울 줄이야……
┗하아…… 내일도 팔아 주려나?
-내일 그곳에서 안 팔면 회사 안간다.
"반응이 좋습니다."
비서 오드리 끌레르의 말에 디올의 CEO 피에트로 베타리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럴 수밖에. 여태껏 프랑스에서 돈을 번 타국 연예인 중 소외 계층이 아닌 일반인들을 위해 이런 일을 한 사람은 뮤즈가 처음이니까. 절대 다수이자 구매층인 그들을 위해 이런 일을 한 존재는."
프랑스에서 나고 자라 활동을 하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홍보 창구는 오직 프랑스 관광청뿐이니 더더욱 기껍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
"노래 앨범이나 드라마, 영화 홍보를 위한 것도 아니니까요."
프랑스 관광청의 개입도 푸드 트럭 장사를 위한 거래라는 게 이미 밝혀진 후다.
"그렇지. 안식년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지."
진호가 이번에 찍은 LVMH 주류 파트의 광고는 내년 1분기부터 송출될 것이다.
즉, 지금 진호는 그 어떤 목적도 없이 자신을 사랑해 준 프랑스 시민들을 위해 막대한 돈을 써 가며 음식을 손수 만들어 대접한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받는 돈은 고작해야 2유로에서 3유로.
"프랑스 시민들 입장으로서는 정말 순수한 목적으로 재능 기부를 하는 걸로 받아들일 테지. 물론, 실제로도 뮤즈에게 무슨 목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무슈 리의 요리 실력에 대한 소문은 들었어도 직접 본 적은 없는 무슈 리의 팬들이나 프랑스 시민들로서는 기꺼워할 수밖에 없죠."
고개를 끄덕인 피에트로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래서 주가는?"
"현재 저희 디올만 해도 2.3퍼센트 상승했습니다."
"이미지 메이킹이 제대로 됐다는 소리로군. 본사 쪽은?"
"LVMH의 주가 역시 0.2퍼센트 상승했다고 합니다."
"평소와 비슷하군."
"등락 없이 상승세만 지속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움직이려나?"
아르노 베르베우의 딸과 아들.
피에트로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경쟁자들이자,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나 엉덩이가 극도로 무거운 이들이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피에트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그들이 여느 졸부들처럼 남을 배려 할 줄 모르고 이기적이고 철이 없다면 애초부터 경쟁자라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아르노의 피를 진하게 타고난 기업가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뮤즈를 찾아가 그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한다?'
그건 피에트로 본인 스스로가 악수를 두는 것이다.
진호를 믿지 못한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니 말이다.
믿음이란 쌍방향으로 주고받는 거지, 일방적으로 주는 게 아니었다.
"어쩌시겠습니까? 무슈 리와 약속을 잡을까요? 아니면 저가라인 할인행사를 할까요."
저가라인 할인행사라는 말에 순간 혹 했던 피에트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디올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CEO……"
"그래야 이번 일을 기획한 뮤즈의 의도가 티끌만큼이라도 퇴색되지 않으니까."
"……아, 그 어떤 빌미도 주지 말라는 말이군요."
"그렇지. LVMH에 적대적인 언론들이 뮤즈의 이번 재능 기부가 결국 디올의 프로모션을 위한 연극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쓸 수도 있으니까."
진호를 이용하지 않아도 할인행사를 한다면 사람들로 미어터질 디올이지만, 적대 언론들에게 그딴것은 상관없었다.
"다른 브랜드 CEO들에게도 그렇게 전해. 난 이번에 결코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그렇다면 그들도 알아들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겠……"
우우웅!
"……확인해 봐."
"죄송합니다."
몸을 돌려 핸드폰을 확인한 오드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피에트로를 보았다.
그에 피에트로는 의아해했다가 이내 곧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캐, 캘러 메, 메시어 마담께서 무슈 리와 접촉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일반인이 SNS에 올렸다고 합니다."
"뭣?"
캘러 메시어. LNMH의 주인이자 황제인 아르노 베르베우의 하나뿐인 부인.
'그, 그분이 왜?'
여태까지의 후계 경쟁에서도 아르노처럼 침묵을 고수했던 그녀의 등장에 피에트로의 눈동자가 풍랑을 맞은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