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1화
1. 프랑스
까미유의 안내를 받아라 파르 뒤에 도착한 진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라 파르 뒤는 아르노 베르베우가 단골로 삼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작았다. 테이블이 고작 3개밖에 없었다.
앤티크하고 모던한 분위기의 인테리어는 여느 레스토랑과 다를게 없었다.
그런데 그 앤티크한 물품들이 범상치 않았다.
'다 명품이네.'
의자와 테이블, 하물며 식기까지 각 분야의 거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모두 최소 백 년은 된 것들이야. 저 그림들도 모두 명화들이고.'
안내된 자리에 앉은 진호는 아르노 베르베우의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처럼 절도와 예의가 몸에 밴 서버가 물을 따라 준 투명한 와인잔을 살짝 들었다가 다시 헛웃음을 흘렸다.
'크리스털이네. 물도…… 평범한 물이 아니야.'
새콤하면서도 달달하게 입안을 씻는 물이 위장을 자극했다.
재밌는 점은 이 물엔 레몬즙 외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중엔 결코 풀리지 않는 최상급의 레몬이라는 소리였다.
물도 맛이 깔끔한 게 시중에서 파는 물이 아니었다. 묵직하면서도 깊은 맛이 느껴졌다.
"이거 어디 가면 얻을 수 있는 걸까? 배합 비율은?"
한 명의 요리사로서 무척이나 욕심이 났다.
"이런 사치에 놀라는 게 아니라 요리할 생각부터 하는 건가."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진호는 옅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그가 다가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사치는 저도 하고 있으니까요."
집에서 쓰는, 그리고 회사에서 쓰이는 식재료들은 결코 평범한 마트에서 사는 게 아니다. 최고급 식당이나 백화점, 5성급 호텔에 납품되는 식재료들을 소량으로 구매하고 있다.
"아르노 씨의 저택에서 음식을 맛본 이후부터요. 오랜만이에요, 아르노 씨."
"오랜만이군, 뮤즈."
옅게 웃은 아르노는 손짓을 했고, 둘은 자리에 앉았다.
"아, 먼저 감사합니다. 저를 LVMH의 상징으로 삼아 주셔서."
"역시 눈치했나?"
주름진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진호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모르는 게 이상한 거죠. 그런데 염색하셨네요?"
"……며칠 후에 공식 행사가 있어서 말이야. 괜찮나?"
"그 며칠 후가 되면 아주 자연스러워질 것 같아요. 그런데 눈썹 정리는 안 하세요?"
"이 나이에 눈썹을 함부로 깎았다가는 자라지 않아서. 그보다 스페인에서 러브콜이 오고 있다며?"
'아, 이것 때문이었네.'
오늘 아르노가 식사를 초대한 이유가 말이다.
"저를 모델로 세우면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게 아주 약간, 왕가가 딱 저를 생각하는 마음 정도라도 그들 기업들로서는 욕심이 날 수밖에 없죠. 국왕님의 초대 덕분에 스페인 내에서의 인지도도 많이 올라갔고요."
"왕비가 직접 찾아와 들을 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 사진 한 장으로 인생 역전한 포토그래퍼."
"이왕이면 그냥 훌륭한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 좋은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라고 해 주세요. 만날 돈만 생각하셔."
"……푸흐. 들지."
"아, 넵!"
시작은 스프와 빵이었다.
"……와."
분명 간이 심심한 당근 스프다.
감자와 양파, 약간의 밀가루와 소금만 들어간 당근 스프.
그러나 그 맛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했다.
"뭉텅이로 썰어 넣은 식재료가 물러 터지다 못해 물이 될 때까지 끓이다니……"
그리고 채에 걸러 한 번 더 끓였다.
'뭐 이런 정성이 다 있어?'
"호오? 그게 느껴지나? 미각이 더 예민해진 것 같군."
'한식 스킬을 얻으면서 더 예민해졌죠.'
"식재료를 갈아서 끓이면 절대 이 정도 깊이의 맛을 못 내거든요."
"확실히 그렇지. 빵도 함께 먹어봐."
"음?"
눈을 동그랗게 뜬 진호는 재빨리 빵을 가져와 뜯어 입에 넣었다가 피식 웃었다. 극한으로 절제된 짭짤하면서도 기름진 버터 맛이 혀를 피해 입안 이곳저곳을 도망 다니며 혀를 농락한다.
"이건 찍어 먹는 거네요."
"그렇지. 먹어 봐."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빵을 스프에 푹 찍어 입에 넣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뒤 어깨를 늘어트리며 탄식을 토해 냈다.
"아르노 씨가 이곳을 왜 단골로 삼았는지 알 것 같네요."
'왜 이곳의 음식을 먹지 않고서 프랑스 요리를 논하지 말라고 했는지도.'
오직 텍스처로만 봐야 했던 리셋라이프 속 라 파르 뒤의 맛.
이건 전율이었고, 앞으로 추구할맛의 지표였다.
'정성이 운암정과 동레벨이야.'
"그렇지. 이 맛을 한 번 보면 절대 다른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먹기 힘들지. 그래서 스페인에 갈 건가?"
"제 작품들이 스페인에 풀린 후에? LVMH와 겹치지 않는 곳들을 알아보고 있어요."
"…… 재밌는 생각을 하고 있군."
"아르노 씨가 나머지 것들도 제게 줄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거죠. 정말 LVMH의 상징이 되기 위해서."
진호의 도전적인 눈빛을 빤히 바라본 아르노는 옅게 웃으며 빵을 뜯어 입에 가져갔다.
그러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여차하면 와인 파트는 잠시 포기하려고요."
피에트로를 밀겠다는 뜻인가?"
"이미 그렇게 생각되고 있지 않나요? 따님분께서 절 좀 싫어하실텐데."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지."
아르노 베르베우의 딸은 이탈리아 와인 명가의 CEO와 결혼을 할 정도로 LVMH 내에서 와인을 꽉 쥐고 있다.
피에트로의 강력한 경쟁자 중 한 명이라는 소리다.
"아마 회유하려 들 거야."
"어떤 걸로요?"
"……그렇군."
아르노는 진호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돈, 명예, 여자. 남자를 움직이는 세 가지를 진호는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진호는 광고나 패션쇼만 바라보고 사는 일반적인 모델이 아니다.
그 재능은 끝이 없고, 그 재능에 연관된 관계자들이 러브콜을 날릴 정도로 재능의 질도 최상이다.
즉, 언제든 LVMH라는 강력한 패를 버려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뜻이다.
막말로 진호가 샤넬이나 타 패션브랜드를 비롯해 주류, 유통 등 LVMH의 라이벌 회사로 넘어가 버리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괜한 짓을 한 건가?"
"타이밍이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하게 된 일이죠."
안식년을 가진 진호, 그런 진호를 와인 파트의 모델로 기용하라는 아르노의 명령, 피에트로에게 승리를 거둬야 하는 아르노의 딸의 조급함.
이 3박자가 맞아떨어졌기에 그런 광고비와 후원금이 책정된 것이다.
팀 이진호의 직원들 역시도 이런 속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광고비와 후원금을 받아 낼 수 있도록 조율을 한 것이다.
"치워 버리는 것도 나와 피에트로 때문에 힘들 테고."
"아르노 씨부터 그걸 용납하지 않으실 거잖아요."
"흥. 당연하지. 수 많은 길이 있는데 피부터 본다는 건 내 회사를 이끌 자격이 없단 소리니까. 그딴건 정상에 앉았을 때 해도 충분해.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뮤즈가 나보다 더 부자가 되는 거 아닌가?"
"제가요? 와, 이런 농담도 하실줄 아셨어요?"
"그래도 저기 할리우드 톱스타보다 많이 벌게 됐잖아."
눈앞의 아르노 때문에 그렇게 벌게 됐다.
"벌려 놓은 일이 그렇게 많은데 그건 당연한 거고요. 각 분야별로 생각하면 아직 한참 멀었죠."
"욕심이 많아."
"그러니까 아르노 씨도 저를 이렇게 예뻐…… 와, 이건 또 뭐지?"
애피타이저로 나온 연어 테린이 그냥 미쳤다.
연어 특유의 비린내는 온데간데 없고, 연어 특유의 기름진 맛만 상큼하게 올라와 있다.
"이 시기 연어는 진짜 맛이 없을 텐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지금은 연어의 산란 철이 끝났을때다.
"마지막 연어지."
"……아, 이게 그 지각생들이에요?"
산란철이 되면 대이동을 하는 연어들 중에서 종종 강에 늦게 도착하는 연어들이 있다. 늦어진 만큼 더 기름지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느라 더 육질이 탱탱해진 연어들.
"와. 와"
진호는 연신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고, 아르노는 음식을 진심으로 즐기는 진호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러니 좋아 할 수밖에.'
거기다 자신이 방금 전 던진 시험도 멋지게 통과했다.
진호는 단순히 광고만 찍을 줄아는 모델이 아니라, 그룹의 사정과 제 처지를 저울질해 서로에게 더 나은 방향을 찾는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그것도 은혜를 아는 비즈니스 파트너.
'아니, 파트너 그 이상의 관계이지.'
진호가 가족이었으면 하는 욕심이 그의 마음속에서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오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 말이다.
'내 자식들 편을 들어 주지 않는게 좀 아쉽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마음조차 돌리지 못한다면 LVMH라는 거대한 성을 가질 자격은 없었다.
이런 아르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호는 연어 테린에 감탄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엄청난 걸 메인이 아니라 애피타이저로 내놓다니……"
진호라면 할 수 없는 행위다. 식재료가 너무 아까워서 말이다.
'이게 개안을 한다는 건가.'
뭐랄까, 요리에 대한 대담성이 커지는 기분이었다. 스킬을 얻지 않았는데도 요리관이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아르노씨도 얼른 드셔 보세요. 정말 미쳤어요."
"그 정도였나?"
적당히 잘라 입안에 집어넣은 아르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소에 먹던 라 파르 뒤의 맛이군."
"아, 그런 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하핫!"
진호는 장난이라는 듯 싱긋 웃었고, 아르노도 피식 웃으며 나이프를 들었다.
그렇게 둘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진행해 갔다.
'아, 해금했다.'
코스 요리의 마지막인 디저트까지 먹으니 혀가 더 예민하게 변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제는 어디로 넘어갈 예정이지? 와인을 좋아하면 부르고뉴에 들러 봐. 그곳에 내 소유의 작은 농장이 있어."
"아뇨. 제안은 감사 하지만, 당분간은 파리에서 체류할 생각이에요."
"……프랑스의 맛을 알아보러 다니기 위해서?"
"그런 것도 있고……"
"흠?"
순간 눈을 빛낸 진호가 짓궂게 웃었다.
"거리에서 요리를 팔아 볼 생각이거든요."
"……뭐?"
'4차 해금 조건이 파리의 거리에서 요리 팔기라서요.'
라 파르 뒤에서 먹은 코스 요리에 들어간 식재료 확보하기라는 2차 해금 조건을 지나, 식재료 다듬기라는 3차 해금 조건을 해금하면 열리는 4차 해금 조건.
이후 5차 해금까지 하면 프랑스 요리 관련 스킬을 습득하게 된다.
멍해진 아르노를 보는 진호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 * *
2차 해금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라 파르 뒤의 주방에 문의하니 바로 연결해 주었다.
진호의 뒤에 아르노가 있어서 기회를 얻었을 뿐, 결국 진호 본인이 그에 합당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식재료를 다룰 만한 실력을 갖췄다는 자격 증명.
진호의 실력에 감탄하고, 이 식재료를 가지고 거리에서 음식을 판다는 소리에 웃음을 크게 터트린라 파르 뒤의 셰프는 손수 업자들과 연결시켜 주었다.
파리의 거리에서 타국인인 진호가 음식을 파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해결되었다.
"파리에서 데뷔해 세계 톱이 된 모델이 자신을 사랑해 준 파리 시민들을 위해 요리를 대접한다……. 이걸 기획한 너도 미쳤고, 이걸 양팔 들며 허락한 프랑스 정부도 미쳤어."
"하하하하하."
질색하는 정 실장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푸드 트럭, 프랑스 정부가 고맙게도 허락해 주어 구비할수 있게 된 푸드 트럭의 구석구석에 설치된 작은 카메라를 향해 브이를 보여준 진호는 다시 스프가 끓고 있는 커다란 냄비를 국자로 저었다.
약한 불로 7시간째 끓이고 있는 냄비를 말이다.
"거기다 그 어떤 푸드 트럭이 팔면 팔수록 적자를 보는 음식을 파냐고! 너 여기 알아서 떠먹으라고 놔둔 이 물통 속에 들어간 레몬즙이, 아니 레몬이 개당 얼만지 기억하고는 있냐!"
모를 리가 없다.
고급 식재료에 익숙해진 진호조차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고가였던 식재료들. 그걸 푸드 트럭에서 파는 평균적인 음식 가격만 받고 팔려는 거다.
"이거면 되는 거야?"
"네, 그 뜰채에 저기에 둔 천을 펼쳐 두세요. 좀 이따가 이 스프를 한 번 걸러야 하니까요."
"오케이."
"아니, 월터 형님도 그렇게 도우면 안 되죠! 이게 무슨 돈 낭비입니까!"
"좋은 뜻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무슨 돈 낭비야? 거기다 냄새도 좋잖아."
"그, 그건 맞지만……."
그냥 좋은 게 아니다.
분명 아침을 먹고 나왔는데도 코가 벌름거리고 입에 군침이 돌 만큼 고소한 향기가 퍼져 가고 있다.
더 미치겠는 건 진호의 등 뒤에 있는 오븐에서 익어 가는 빵의 향기다.
"아오, 정말 미쳐 버리겠네!"
머리를 벅벅 긁던 정 실장은 이쪽을 향해 다가온 세련된 차림의 여성을 보곤 재빨리 신색을 바로 했다.
상황은 이미 벌어졌기 때문이다.
"저기……"
"네, 마드모아젤."
진호 따라 파리 패션위크에 많이 들른 정 실장의 프랑스어는 꽤 매끄러웠다.
"혹시 지금 음식을 파는 건가요?"
정 실장은 진호를 보았고, 진호는 고개를 들며 옅게 웃었다.
그러자 그 여성은 눈을 크게 떴다.
"어? 지, 지노 리? 디올의 지노 리 맞죠!"
"네, 안녕하세요."
"헉!"
놀란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찾아 고개를 돌렸고, 진호는 이번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울라라…… 그, 그럼 뭘 파는 거예요? 냄새대로 스프와 빵?"
"네."
띵!
"아, 다 됐다."
등 뒤에서 오븐이 모두 돌아간 소리가 진호는 옆에 놓인 커다란 스테인리스 통을 열었다.
그 속엔 분홍색 연어들이 상큼한 기름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혹시 연어 테린 좋아 하세요? 바게트는요?"
지각생 연어로 만든 바게트 샌드위치와 당근 스프, 둘이 합쳐서 단돈 2유로였다.
[스킬:오! 프랑스]
[요리는 이야기를 먹는 것이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