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24화
수여식은 스페인 왕궁의 굉장히 화려한 홀에서 엄중한 분위기로 치러졌다.
사람들은 제복을 입은 채 입장하는 진호를 보며 탄성을 터트렸고, 진호의 눈동자도 휙휙 돌아갔다.
'와, 스페인 총리도 왔네? 왜?'
국왕을 비롯한 왕가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파티쉐로 초대하기 위해 요원까지 동원해 미행을 한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를 생각하면 말이다.
'……아, 왕실 주관 행사라서 온건가? 그렇다면……. 어우야.'
입맛을 다신 진호는 이쪽을 보며 눈을 빛내는 50대 중년인에게, 이 곳에 들어오기 전 배운 예법대로 인사를 했다.
눈앞의 중년인은 스페인의 현 국왕.
스페인 모든 권력의 정점이었다.
"일어나게."
"감사합니다, 폐하."
"내 일찍부터 만나고 싶었던 현자를 이제야 만나게 됐군."
'현자?'
"본국의 슬픈 일 중 하나였던 일을 해결해 주어 고맙네."
뭔가 이상했지만, 진호는 태연히 읊조렸다.
"저도 이 스페인도 그저 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폐하."
"하핫. 그런가?"
웃음을 터트린 국왕은 식을 진행시켰고, 진호는 양손으로 공손히 표창장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오늘 초대를 받은 기자들은 악수를 하는 진호와 국왕의 모습을 찍었다.
-오! 뮤즈! 자넨 정말 최고야! 프랑스 국경을 넘으면 꼭 연락해줘! 빨리 연락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선물을 할지 몰라! 하하하!
전화를 끊은 진호는 턱을 긁었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태그호이어 사장이었다.
방금 전 수여식을 할 때 평소에 차고 다니던 태그호이어 시계를 차고 입장했기 때문이다.
"떠들썩해지겠네."
그렇지 않아도 모델과 배우로서 프랑스에서 꽤 인지도가 있는 진호다. LVMH가 이런 호재를 놓칠리 없었다.
"아마 프랑스 기업인 LVMH에 유리하도록 홍보하겠지."
이를테면 '스페인 왕실, LVMH를 정중히 초대하다.' 나, '스페인, 드디어 정복' 같은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이 나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스페인은 스페인 나름대로 프랑스를 까며 양국 언론에 불이 붙을 수 있다.
'그렇지만 양국 다 선을 넘을 수 없는 상황이니 내 입장으로서는 무조건 호재.'
프랑스는 정계의 거인 아르노 베르베우고, 스페인은 왕실이다.
그 어떤 언론이라도 선을 지킬수밖에 없었다.
적대적인 언론이 태클을 건다 해도 화제는 커질 테니 그마저도 나쁘지 않았다.
"…… 좋네."
씩 웃은 진호는 디올 옴므의 슈트를 다시 매만지고는 화장실을 둘러봤다. 온통 황금과 대리석의 조합. 벽에는 명화까지 걸려 있었다.
'왕궁은 화장실도 화려 하네.'
국왕은 수여식뿐만 아니라 만찬까지 열었다. 진호를 정말 귀빈으로 여긴다는 뜻이었다.
'뭐, 진짜 속내는 이 수여식을 명분 삼아 높은 사람들끼리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 테지만…….'
"그래도 화끈하네."
스페인에서 인지도가 올라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쟤는 뭔데 국왕이 만찬까지 열어주냐는 스페인 국민들의 어리둥절하고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도 함께 말이다.
'좋다, 좋아.'
제아무리 노이즈 마케팅이 될 지라도 그간의 결과로 인정받을 자신이 있는 진호는 가슴을 펴며 화장실을 나섰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서버의 안내를 받아 다시 연회홀로 돌아온 진호는 역시나 자신의 생각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마다 어떤 목적을 가진 채 무리를 이뤄 한 잔의 와인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모습들. 그리고 다른 무리를 경계하는 모습들.
그러면서도 이쪽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들.
[스킬: 셜록의 후예]와 [스킬: 괴도 루팡]은 그들의 심리를 모두 읽어 내고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연주가 울리는데……'
연회 홀 한쪽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10인의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진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국왕에게 다가갔다.
"오! 왔나?"
"죄송합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서 그런 지 긴장이 됐습니다."
진호의 사과 인사가 무척이나 정중하면서도 깔끔해서 그런 지 국왕은 눈을 빛냈다.
"하하핫! 모든 것을 다 할 줄 아는 현자도 모르는게 있었나 보군!"
'아, 그래서……'
국왕이 왜 현자라 불렀는지 깨달은 진호는 웃었다.
"아, 이쪽은 내 아내이자 스페인의 왕비인 레시티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네."
"레시티아예요."
"이진호입니다, 왕비님."
그녀의 손을 잡은 진호는 살짝 무릎을 굽히며 그녀의 손가락에 껴 있는 반지에 입을 맞췄다.
그에 왕비도 국왕처럼 눈을 빛냈다.
"세뇨르 리는 예법에 대해 알고 계시나 보네요."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들은 것도 있고, 예전에 에드워드 왕자님의 초대를 받아 웨식스가에 방문한 적도 있어서 말입니다. 제 예법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부디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 웨식스!"
국왕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의외라는 듯 진호를 보았다.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 거란 여왕의 못 박음에 권력에서 멀어지게 된 에드워드 왕자지만, 현재는 여러 성과를 올리면서 왕실 내에서 주가를 상승시키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드워드 왕자가 추진한 문화적인 일들에는 무조건이 사내가 껴 있었다!'
깜짝 놀란 그들은 진호를 다시 보았다.
진호는 그런 그들의 반응을 못본 척하며 왕비의 옷자락을 잡은 채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두 소녀를 보았다.
'귀여워!'
회사 사무실에 데려다 놓으면 모든 직원들이 뭔가 해 주지 못해안달이 날 것만 같은 귀여운 외모를 지닌 소녀들은 묻고 싶은 게 무척이나 많은 듯 흥분으로 가득 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여기 이 아리따운 레이디들을 소개시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폐하?"
"하핫. 현자는 무척이나 눈이 높군! 내 딸들인 레오노르와 소피아네."
"오, 누굴 닮아 이렇게 예쁜 분들인가 했더니 과연 폐하와 왕비님을 쏙 닮았군요."
사회생활에서 적당한 아부는 필수였다.
진호는 한쪽 무릎을 아예 꿇으며 소녀들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진호입니다, 공주님들."
"레오노르예요! 웨식스에서 만든 치즈 오중주 스콘은 원래부터 연구했던 레시피였나요?"
막내 공주마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두 공주 모두, 아니 레오노르에게 무례하다며 질책하면서도 귀를 기울이는 왕비까지 모두 디저트를 좋아 하는 듯했다.
'제대로 먹혔나 보네.'
"그럴 리가요. 웨식스가의 뛰어난 치즈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완성시키지 못할 레시피였습니다. 뭐랄까, 운명? 웨식스의 주방에서 만난 치즈들은 제게 그런 것이었죠."
한창 꿈을 꿀 나이인 공주들을 위한 동화 같은 작은 거짓말.
"와……"
이것도 먹힌 듯 공주들은 더욱 흥분했다.
"그, 그럼 세뇨르 솔을 어둠 속에서 구원해 주었던 것도 그런 운명이었나요?"
'귀여워라-.'
이 부분에서는 국왕과 왕비, 그리고 주위 사람들마저 집중했다.
그에 진호는 해솔이 진짜 인정을 받는 것 같아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뿌듯해졌다.
"네, 운명이었죠. 그러나 전 그 아이의 가능성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일찍 발견한 것뿐입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세상을 보다 더 크고 자세하게 그리게 된 건 오롯이 그 아이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와-."
진호의 이야기에 레오노르의 눈엔 존경심마저 생겨났다.
'흠. 그런데 해솔이를 이 정도로 높이 평가한다는 건 이 공주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데…'
클래식이라는 건 이 또래의 아이가 받아들이기 굉장히 힘든 난이도의 음악이다. 어쩌면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열정적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에 반한 것일 수도 있었다.
"저……. 그……"
진호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망설이는 두 공주를 보며 잠시 고민을 하다가 국왕을 보았다.
'이렇게 환대해줬으니 나도 체면 정도는 세워 드려야겠지.'
"두 공주님들을 위해 작은 음악선물을 드리려고 하는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두 공주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아, 진짜 납치하고 싶다. 디저트로 꼬시면 될 것 같은데……'
"이거 실례가 아닐지 조심스러워지는군."
"미안해요, 세뇨르 리. 아이들이 아직 철이 없어요."
진호는 국왕과 왕비의 말에 웃었다. 꼼지락거리는 공주들을 눈으로 응원하던 둘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이런 미녀들에게 사랑 받는 해솔이가 좀 질투 나서요."
진호가 윙크를 하자 국왕과 왕비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무릇 사내라면 미인을 쟁취해야지. 그런 의미라면 같은 사내로서 허락하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인사한 진호는 연회홀 한쪽으로 걸어가 마침 연주를 끝낸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에게 양해를 구한 후 피아노를 차지했다.
딩딩-!
오케스트라 연주가 멈추고, 음을 확인하는 소리가 울리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 됐다.
'명품이네.'
소리가 묵직하면서도 깊고, 넓게 울린다.
귀가 예민한 사람조차도 들을 수 없는 미세한 잡음까지 다 잡아낸 장인의 고뇌와 고집마저 느껴질 정도로 마음에 쏙 드는 소리였다.
건반도 진짜 상아였다.
'흠, 그 곡으로 할까?'
이곳 스페인에서 보고 듣고 겪은 것을 토대로 완성시킨 곡.
정열과 열정.
'거기에……'
진호는 이쪽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레오노르와 소피아같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입히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음표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진호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웅성웅성.
사람들은 피아노 앞에 앉았으면서도 연주할 생각을 안 하는 진호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콧방귀를 뀌며 외면하고, 누군가는 실망하며 울상을 지었으며, 또 누군가는 현명함을 발휘해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며 실망한 누군가를 다독였다.
그렇게 시선들이 모두 떠나가고 단 네 명의 청중의 시선만 남게 됐을 때 진호의 손이 건반 위에 올려졌다.
두둥!
연회홀을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며 진호를 바라보았고, 진호의 손이 건반 위를 누비기 시작했다.
강제적으로 귀를 잡아끈다는 게 이런 의미일까.
아님 영혼마저 붙들어 놓는 거장의 연주라는 게 이런 것일까.
수 많은 생각이 떠오름에도 왜 몸이 의지를 배신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큼은 알 수 있었다.
곡의 의미를 설명하는 팸플릿을 들고 있지 않음에도 연주가 말하고자 하는 게 모두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더러운 뒷골목을 집 앞마당처럼 누비며 공을 차던 어릴 적의 추억.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무작정 사회에 발을 내딛게 했던 뜨거웠던 가슴.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근거없던 믿음.
그리고 그 모든 걸 감싼 묵묵히 지켜봐 주고 도와주었던 부모의 따스한 사랑.
그것은 젊은 날의 그들이었다.
잊고 있었던, 또 현재 살아가고 있는 젊음이었다.
"아."
"음."
두둥!
끝을 고하는 소리가 울렸음에도 그 누구 한 명 움직이지 못했다.
오직 탄성만 허락했던 폭력적인 연주가 너무도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짜악! 짝짝짝짝짝!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이 기분 좋은 여운을 깨는 존재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가 세상 흥분한 모습으로 박수를 치는 레오노르를 발견하곤 지금 이 자리가 어디인지 상기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경의를 두 눈에 담으며 양손을 들었다.
짝짝짝짝짝짝!
"브라보!"
"휘이익!"
쏟아지는 박수에 감고 있던 눈을 뜬 진호는 청중이 되어 버린 사람들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고, 박수 소리는 더욱 커졌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