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23화
8. 표창장
성체로 보이는 열 마리의 시라소니의 경계가 풀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르릉."
그들은 마치 개냥이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와 진호의 발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고, 진호는 쪼그려앉아 그런 그들의 목을 쓰다듬었다.
"크릉."
"아, 여기 아니야? 여기?"
"그르릉."
진호는 기분이 좋은지 엎드려 꼬리를 살랑 살랑 흔드는 시라소니들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거기 아니고 여길 만져라라……'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역시 고양이답다고 할 수 있었다.
진호는 아예 엉덩이를 대고 앉아 조용히 카메라를 들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마, 말도 안돼!"
"음?"
고개를 돌린 진호는 의아해했다. 파블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세요?"
"세, 세 집단이라니! 그것도 함께 몰려 있다니-!"
"응?"
진호는 그가 왜 놀라는지 몰라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가 이내 그뜻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며 시라소니들을 보았다.
"야, 그러고 보니까 너희 단독생활하잖아."
새끼를 낳고는 약 1년 동안 함께 살지만 말이다.
"그리고 저 사람들 눈은 또 어떻게 피했고?"
캠프도 난리가 났다.
"오, 신이시여!"
"마, 말도 안돼!"
"이, 이봐.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환각이 아닌 거지? 그렇지?"
"어서 정부에 연락해!"
"공원 관리자들은 뭐 한 거야!"
그들은 경악을 하면서도 축제를 열었다.
한 집단, 이제 스페인에 즉 딱 3마리만 남았다고 생각한 이베리아 시라소니다.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쫒다가 일이 잘못되어 죽어버리기라도하면 그런 낭패도 없기에 손가락만 쪽쪽 빨고 지켜봐야 했던 마지막 3마리.
그래서 혹여 잘못될까 추적기도 달기 힘들었던 마지막 3마리.
그런데 그 3마리 말고도 무려 7마리가 더 생존해 있었다.
그들로서는 축배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잘 됐다는 듯 웃은 진호는 약간 경계하는 이베리아 시라소니들을 다독여 사람들에게 넘긴 다음 바닥을 통통 뛰어다니는 독수리들을 불러 모아 부리들을 탁탁 쳤다.
"끄룩?"
"너희들 혼날래? 마릿수가 다르다면 다르다, 나는 쟤가 본 것과 다른 애들이었다 그렇게 말을 했어야지! 그리고 니들 맘대로 몰이 한 것도!"
"끄루룩!"
"끼아악!"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진호는 독수리들의 부리를 다시 때렸고, 독수리들은 억울함에 날개까지 퍼덕이며 항변을 했다.
그들의 항변을 끝까지 들은 진호는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그랬어? 모든 게 우연이었던 거네?"
이른 아침 도나냐 국립공원 전체로 퍼졌던 독수리들.
시라소니 무리들을 발견한 그들은 진호가 찾기 편하게 진호에게 몰이를 했던 거다.
그렇다 보니 패닉에 빠진 세 무리는 필연처럼 함께 모이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독수리 냄새를 잔뜩 묻히고 접근하는 진호에게 결사항전을 하기 위해 매복을 했던 것이다.
모두 독수리들이 저마다 진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하다보니 생긴 해프닝이었다.
"끄루루!"
"그래. 미안, 미안. 내가 다 듣지도 않고 혼냈네. 소고기 먹을래? 엉덩이살."
"……끄루루!"
"끼악!"
"그래. 목살과 내장 추가. 가자."
진호는 독수리들을 이끌고 주방용 천막으로 향했고,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며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저거 정말 대화가 통하는 거아냐?"
"외계인이 아니라 드루이드였던건가."
"그럴지도……"
그들은 부러움에 몸을 떨었다.
* * *
원했던 이베리아 시라소니도 마음껏 찍고, 도나냐의 이곳저곳을 탐방한 진호는 이곳 국립공원에 도착한 지 10일째 되는 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은 무척이나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별을 받아들였다.
부우웅.
세비야가 아니라 발렌시아로 향하는 차 안.
"그 꼬마는 잘 하려나 모르겠군."
운전대를 잡은 월터가 말한 인물은 마테오였다.
진호는 피식 웃었다.
"이미 잘 했어요."
"음?"
"저희 배웅할 때, 둘이 손잡고 있더라고요. 깍지 끼고."
"……호오?"
"미아가 눈치가 빠르더라고요."
"……푸핫! 그렇게 된 거였나?"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깜찍하게도 미아는 마테오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른 척을 했던 건 마테오의 소심한 모습이 본인 스타일의 남성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도나냐 국립공원에서 함께 지내며, 마테오가 진호를 본받아 약간 적극적이 되자 결국 마음을 받아 주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당연히 파블로는 총까지 찾으며 결사반대를 했지만 말이다.
"아, 그런데 그 시라소니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동물원 같은 곳에서 보호받는 건가?"
"아뇨. 저희가 있던 캠프 근처에서 살게 될 거예요."
"……아, 쉽게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인가."
"기생충이나 몸에 걸린 병들도 모두 치료했으니 자신들이 아플때 여기 인간들이 도와줄 수 있다는 걸 학습한 것도 있죠."
'정확히는 나랑 약속한 거지만.'
더 정확히는 진호가 [스킬: 페로페로몬]으로 키워드를 입력해놓은 것이다. 너희가 이 캠프 주위에서 살며 개체 수가 백 마리로 늘어나게 되면 다시 만나러 올 거라고 말이다.
학자들도 아침이 되면 사라졌다가 저녁이 되면 캠프 주위로 나타나는, 진호가 아니라 자신들이 먹이를 주고 또 만져도 거부하지 않는 시라소니들을 위해 캠프를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도도한 시라소니가 길고양이처럼 됐군."
"멸종하는 것 보다는 낫잖아요."
"그건 그렇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니까."
진호는 눈동자가 아픔으로 번들거리는 월터를 멍하니 바라봤다가 특수부대원과 용병이었던 월터의 과거를 상기했다.
진호는 모르는 척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가을 타요?"
"……하핫! 그런 가 봐. 이제 곧 겨울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아내와 딸이 보고 싶어!"
"그럼 저희가 독일 갈 때 즈음에 불러요. 그때쯤이면 방학도 했을 테니까."
"……어? 정말?"
"네. 돈 많은 고용주의 명령이에요."
"푸하하하핫!"
피식 웃은 진호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 순간.
지이잉!
"응? 파블로 씨네?"
진호는 급히 뒷좌석에 쌓인 짐들을 보며 놓고 온게 있는 지 생각해 봤다.
'……없는 것 같은데? 흐음.'
진호는 일단 전화를 받기로 했다.
"네, 여보세요."
-지노! 지금 어디야?
"아까 말했듯 발렌시아로 가는 중이죠."
-차 돌려! 마드리드로! 아니, 세비야로!
"음?"
-스페인 정부가 네게 표창장을 주기로 했다고-!
순간 멍해진 진호는 눈을 껌뻑이며 핸드폰을 보았다.
"어……"
'표창장? 정부에서?'
지자체도 아닌 정부.
'왜?'
진호의 머릿속이 엉켜 버렸다.
* * *
-단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가면 안 되는 겁니까?
"그, 그러게요."
발렌시아에 도착하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마드리드로 넘어온 진호는 다미앙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포르투갈에서는 갑자기 포르투와인 판매량을 폭등시키더니, 스페인에서는 뜬금없이 멸종위기동물을 보호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에 대한 공로상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진호가 마지막엘 클라시코를 응원하던 게 중계방송에 잡히는 바람에 잠시 떠들썩했었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요리 대회라도 나가실 생각입니까? 아님 진호 씨만의 패션브랜드를 런칭하실 생각인 겁니까?
뜨끔!
정곡을 찔린 진호는 입을 다물었다. 다미앙의 말처럼 프랑스에선 프랑스 요리 스킬을 얻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어, 음. 잘못했습니다?"
-아닙니다. 진호 씨가 잘못한건 없습니다. 절대로요.
그건 맞는 말이지만, 말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진호도 이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있었다.
'나라고 정부가 멸종위기동물을 이렇게까지 신경 쓸 줄 알았나! 그것도 스페인 국왕이 직접 신경 쓸 정도로!'
진호는 부른 건 무려 국왕이었다.
그래서 다미앙도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아니, 설령 국왕이 이베리아 시라소니를 정말, 정말 정말 좋아한다고 해도 이렇게 직접 표창장을 준다는 게 말이 돼?
'……아, 말이 되려나? 국왕이니까?'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진호도 혼란 스러웠다.
"음. 일단 표창장만 받으면 발렌시아로 넘어가서 여러모로 즐긴 다음에 바르셀로나를 거쳐 프랑스로 넘어갈 테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만약 사고 치면 바로바로 연락드릴게요."
-……사고를 안 치겠다는 말은 안 하는군요.
"사고라는 게 의도치 않게 생기는 거라서?"
-……하아. 알겠습니다. 그보다 제가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설마 무슨 일……. 음."
-생기겠죠. 진호 씨라면.
"그러니까요. 어쩌죠?"
진호와 다미앙 모두 잠시 말을 잃었다.
"와우."
"퍼펙트."
'그러게요.'
거울 앞에 선 진호는 자신의 스타일을 보곤 어색하게 웃었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칼은 문제가 아니었다. 제복을 입고 칼을 찼다는 게 중요했다.
'이거 귀빈 대접인 거 맞지? 그렇지?'
진호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스페인 왕실 전속 스타일리스트들이었다.
즉, 스페인 국왕은 왕족만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빌려준 것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 거야?'
진호는 눈을 굴리며 사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저기……"
"네, 세뇨르 리."
진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왜 이분들 눈에도 호감이 있을까? 왜?'
좋은 모델을 만난 예술가의 그것도 있지만, 다른 종류의 호감도 있다.
'이 사람들 뭔가 알고 있다!'
"제가 이렇게까지 대우를 받아도 되는지가 궁금해서요."
"……아."
그들은 머뭇거리며 한쪽 옆에서 있는 50대 남성을 쳐다봤다.
깐깐한 인상의 그는 안경을 추켜세우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혼란 해하실 만도 하군요."
"네."
"죄송합니다. 모실 때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폐하께서 이렇게 세뇨르 리를 정중히 초대하신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당연히 이베리아 시라소니의 종족 보존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세뇨르 리가 발명하시고 영국 왕실에 레시피를 증정한 치즈 오중주 스콘 등 여러 디저트를 폐하와 여러 왕족들께서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셨다는 것."
"자, 잠깐만요! 치즈 오중주 스콘이요?"
진호는 입을 떡 벌렸다.
'그게 여기서 왜 나와?'
"예. 공적인 일로 영국 왕실과의 만남 때 영국 왕실 측에서 치즈 오중주 스콘 등 세뇨르 리가 창작하신 여러 디저트를 내왔습니다. 이후 영국 왕실은 감사하게도 레시피들을 흔쾌히 증정해주셨고, 덕분에 본 왕실에서도 세뇨르 리의 작품들을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진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더 있다고?'
"본 스페인 왕실에서 주관한 국제 음악회에서 우승을 하신 세뇨르 솔, 한국 명으로 이해솔 피아니스트의 스승이자 당시 연주곡의 작곡가가 세뇨르 리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모시게 된 겁니다."
"어…… 네? 해솔이요?"
"예. 당시 세뇨르 솔의 연주를 들으신 폐하와 왕비께서는 무척이나 감동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요약을 하자면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한번 만나야겠다 맞지? 벼르고 있다가 시라소니 일이 명분을 준 거고?'
진호는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됐다.
사고가 터졌다.
게임 폐인의 리셋 라이프